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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 12: 7-9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본문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계시에 따라 아브람에게 하나님을 섬기는 도리를 가르치시는 부분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친히 그를 훈련시키신 사실이 첨부되고 있습니다.
1. 본문 7절은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가라사대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지라 그가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를 위하여 그곳에 단을 쌓고” 입니다.
모세는 이제 아브람이 모든 것을 상실하고 혼자 외톨이로 남아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손을 뻗치시고 그를 도와 주시는 것을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이 어떤 도움으로 아브람이 당하고 있는 시험에서 구조하고 계신가를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에게 순전한 말씀을 제공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사실상 그런 방법으로 아브람이 자신은 어리석은 자라는 사실을 드러나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 땅을 그의 후손에게 주시겠다고 선언하고 계시지만 지금 그에게 자식이 어디 있는가? 그리고 그 자식을 가질 소망마저 끊어진 그가 아닌가? 그는 아직까지 자식 하나 두지 못하고 고령의 노인이 되었으며 그의 아내는 불임 여자로 늙었는데 과연 어떻게 자식을 낳아서 그 땅을 상속받는다는 말인가?
그러므로 이것이 육에 속한 사람들에게는 무의미한 위로가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은 다른 면을 맛보게 되는 것입니다. 경외함으로 말씀에 철저하게 매달리는 것이 경건한 자들의 모든 지각들을 붙잡는 데에 재산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단 하나의 약속으로도 충분한 재산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만 있으면 모든 것을 이길 수가 있는 충분한 원동력이 되는 것입니다.
비록 하나님이 그분의 종들이 참고 견디어 내는 악한 자들을 삭감하시고 완화시키지만 그렇게 하신 것은 육체의 소욕을 만족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편리한 범위 내에서 하신 것입니다. 이 사실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교훈을 배우고 있습니다. 즉 이 한가지 치료방법이 우리의 고통들을 위하여 너무도 충분하다는 사실과 하나님이 그분의 말씀으로 우리에게 그렇게 말씀하신 것은 그분이 호의를 베풀어 주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우리들이 깨닫게 하시려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육체가 치근덕거리는 귀찮은 욕망에 얽매이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이 이 구절에서 우리에게 주는 귀한 교훈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하시는 일에는 절대로 실수가 없으십니다. 우리가 비천한 곳에 던짐을 당할 때에도 그분의 사랑을 베풀어 우리를 끌어 올려주실 하나님이십니다.
2. 본문 7절 끝에
“그곳에 단을 쌓고”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1) 이 단은 감사하는 표였습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나타나신 즉시로 그는 단을 쌓았던 것입니다. 그러면 그 목적이 무엇인가? 그 자신이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기 위하여 그렇게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가 감사를 드리려고 마음 속에 품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제단은 하나님께로부터 사랑을 받은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쌓았던 사실을 보게 됩니다. 만약 누가 아브람이 제단이 없으면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수가 없는가 라고 질문한다면 우리는 이렇게 대답하겠습니다.
즉 사람들 앞에서 외적인 공언이 첨가되지 않고 마음 속에 있는 내적인 예배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종교는 사실상 그 특유한 자리를 마음 속에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근원에서 그 종교의 열매로 대중 앞에서 고백이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에게 우리의 몸과 마음을 모두 드리게 하려고 창조되었습니다. 가나안 사람들도 그들의 종교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제물을 드리는 제단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람은 그들의 미신들에 합류하지 않으려고 가정 제단을 쌓고 그 위에 제사를 드렸습니다. 아브람은 마치 그의 집안에서 가장 고귀한 왕적인 보화를 하나님께 드리기로 결심한 것처럼 비장한 생각으로 제단을 쌓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경배하고 예배하는 것은 영적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고 올바르지 않고 정당한 목적을 지니지 않은 모든 의식들은 그것 자체가 헛되고 무가치할 뿐만 아니라 그들의 위선적이고 현혹시키는 겉모양으로 하나님의 진정한 예배를 망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모세가 여기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기 위하여 제단이 쌓아졌다고 하는 말씀을 주의 깊게 관찰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제단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외적인 형식입니다.
그 당시에 하나님이 내신 예배모범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향하여 행하는 ‘기원’이 그 제단의 본질이며 진리입니다. 이 표는 순수한 예배자들과 위선자들을 쉽사리 분별해 주는 것입니다. 위선자들은 외부적인 화려함에 지나치게 치우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의 종교는 순전히 의식들에만 국한되기를 바라고 있는 자들입니다. 그 결과 그들의 모든 종교는 분명한 목적을 상실하고 모호하며 방황하는 아리숭한 것입니다
사실상 그들의 궁극적인 의도는 그들이 혼돈스럽게 말하고 있는 대로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렇지만 경건한 자만이 하나님에게 가까이 접근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경건한 자들은 외관적인 모양에 주력하지 않고 오직 종교가 지니고 있는 진리와 본질을 존중하는 것입니다. 전체적으로 요약하면 의식들이 영적으로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과 관계되지 않고 다른 방향으로 나간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는 절대로 받아주시지 않은 의식들이 될 뿐입니다.
2)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나 또는 그의 이름으로 간구 하는 것은 이중적인 주해를 암시하고 있는 내용인 것입니다.
이를테면 하나님에게 기도하는 것이거나 그분의 이름을 찬양으로 기리는 것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러나 기도와 감사를 드리는 것이 서로 연합되어 있는 일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기꺼이 이 두 가지를 함께 포함시킵니다. 제 4장에서 우리가 언급했듯이 하나님에 대한 전체적인 예배는 이런 특이한 표현인 대유법(代喩法)의 비유로 적절하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시편 1편, 23편과 51편 19절에서 선언하시고 있는 대로 그분의 이름을 부르는 것보다 경건한 자의 의무를 더 고귀하게 평가하신 것은 없습니다. 그리고 보다 즐겨 받으시는 제사가 없다고 여기고 계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분에 대한 전체의 예배가 대유법으로 잘 묘사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제단이라는 말이 언급되는 빈도만큼이나 제사라는 말도 우리 마음 속에 상기되어야 할 것입니다. 태초로부터 하나님은 인간들에게 접근할 사람이 한사람도 없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려주시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종교의 일반 원칙에서 아브람은 자기 자신을 위하여 제사로 말미암아 하늘나라의 성소를 개설하여 하나님을 곧바로 예배할 수 있게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이 짐승들의 피로는 절대로 그분의 노여움을 달래시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사실은 아브람의 신앙이 그리스도의 피로 향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3) 그러나 아브람 자신이 제단을 기꺼이 지었으며 비록 그가 제사장도 아니며 하나님께로부터 아무런 명령도 받지 않은 그였지만 그 일을 자진해서 했던 것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모호한 점이 있는 듯합니다.
그러나 모세는 문맥에서 이런 의심을 제거하고 있습니다. 아브람은 단순히 하나님에게 제단을 쌓아서 바친 것이 아니라 그에게 친히 나타나신 하나님에게 제단을 쌓아서 바친 것이라고 묘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제단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나타내 보이신 그 계시에 근거를 두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제단은 그것이 형성되고 부분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친히 계시하신 그분의 말씀에서 부속물이 되는 것에서 절대로 분리될 수가 없습니다. 미신들은 그 자체를 위하여 그것이 좋아하는 대로 신을 거짓으로 조작하여 그것에게 여러 가지 형식의 숭배를 적용하고 고안해 내고 있습니다.
그것은 마치 오늘날에도 카톨릭 신자들이 자기들의 어리석은 겉치례로 장난을 하며 가장 거드름을 떨면서 하나님을 예배하고 있다고 교만스럽게 자랑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아브람의 경건은 분명히 여기서 찬사를 받고 있습니다. 그것은 제단을 세우고 난 그가 자기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을 경배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비록 모세가 아브람이 거기서 하나님을 불렀다고 설명할 때에 아브람이 제단을 쌓았던 계획을 선포하고 있지만 동시에 그는 그런 제사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였다는 사실입니다. 이 말은 아브람이 올바로 하나님을 불렀다고 선언하고 계시는 성령의 인정을 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사실상 다른 사람들은 자기들이 하나님을 경배했다고 자랑하였습니다. 그러나 아브람에게 찬사를 하시면서 하나님은 이방인들의 모든 의식들을 그분의 이름을 더럽게 모독하는 것이라고 배척하고 계십니다.
3. 본문 8절 전반절은
“거기서 벧엘 동편 산으로 옮겨 장막을 치니 서는 벧엘이요 동은 아이라” 입니다.
아브람이 하나님께 제단을 쌓았던 곳을 산으로 옮겨왔다는 말씀은 그도 어떤 필요에 의하여 그렇게 했다는 사실입니다. 거기서 그는 몰인정스런 사람들이 살고 있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성막을 다른 곳에다 옮겼던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아브람이 그의 방랑길을 계속해서 끈질기게 감당했다면 우리의 까다롭고 핑계가 많은 자세는 도저히 변명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하나님이 우리에게 거할 수 있는 보금자리를 주시지 않으면 당장 그분에 대항하여 불평과 원망을 퍼붓고 있는 우리이기 때문입니다.
확실히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하늘을 열어 주시고 날마다 그분과 함께 거기서 거하면서 살자고 우리를 초대하고 계실 때 만약 그분이 우리가 이 세상에서 나그네가 될 수밖에 없도록 선택하신 것이라면 절대로 그 사실을 나쁘게 생각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이 구절 전체의 의미는 아브람은 거처할 곳 없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 명칭은 사도 바울에 의해 돌려지기도 합니다(고전4:11). 더욱이 벧엘이라는 말에서 명백한 예변법(豫辨法)이 있습니다. 모세가 그의 시대의 사람들에게 자기의 대화를 적응시키려고 이곳에다 이 이름을 붙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4. 본문 8절 하반절은
“그가 그곳에서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더니” 입니다.
지금 모세는 아브람의 지칠 줄 모르는 헌신적인 경건성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아브람이 방문하는 곳마다 거기서 하나님을 외적으로 경배하는 면에서 자신을 단련시키고 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그 자신이 말하고 살아야 하는 이방인들과 함께 어울려서 의식을 갖지 않으려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자기의 가족을 엄숙한 경건으로 유지시키려고 그렇게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원인에서 그는 적잖은 적개심을 받는 대상이 되었을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악인들을 화나게 만든 일은 다른 것이 아니라 자기들의 종교와는 다른 종교를 그가 따르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브람의 이런 이색적인 종교행위로 그들은 자기들이 멸시를 당하는 것을 깨닫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전적으로 자기들을 장님으로 정죄하고 있는 것을 그들은 감지하게 되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가나안 사람들이 잔인하고 교만하여 자기들을 모욕하는 자들은 언제라도 가리지 않고 보복하였던 자들이라는 사실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것은 아마 아브람이 자주 이사를 다녔던 이유였을 것입니다.
그의 이웃 사람들은 아브람이 쌓은 제단을 자기들을 비난하는 것으로 여겼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빈번하게 정착하지 못한 것은 하나님의 놀라운 호의로 간주해야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 거룩한 사람은 자기가 모시고 있는 하나님은 뛰어나신 분이심을 증거하도록 요구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거짓으로도 그 하나님을 절대로 부인할 수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그는 그렇기 때문에 그 자신의 생명보다는 하나님의 영광을 더 중요시하고 그것을 위하여 사는 것을 전혀 망설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5. 본문 9절은
“점점 남방으로 옮겨갔더라” 입니다.
아브람이 어떤 처소를 찾은 것으로 보인 후에 이것은 짧은 기간 내에 이 거룩한 사람의 세 번째의 이사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발 붙일 곳을 위하여 자진하여 여기저기로 쏘다니는 것이 아니라 흔히 경솔한 사람들이 곧잘 하는 것과 같이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께서 그를 몰고 다녔던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또 한편 그럴 필요성이 있었던 것이 확실합니다. 그것은 계속적인 습관으로 그가 나그네일 뿐만 아니라 그가 주인인 땅에서 비참한 방랑자라는 사실을 그에게 가르쳐주려고 하나님께서 그렇게 끌고 다니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많은 변화에서도 빚어진 결과는 일반적인 열매가 아니었습니다. 자기 안에 주어지고 있는 만큼 모든 역량을 다하여 그가 접근하는 곳에서 하나님에게 헌신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리고 그 헌신적인 생활을 그의 믿음의 향기로 그가 살고 있는 주변에 풍겼던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이사에 있어서 아브라함의 본을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정말로 하나님의 영광을 목표로 하고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맹모삼처”의 정신은 있으나 “참 경건을 위한 거처”의 정신은 거의 없는 시대이기 때문입니다.
육신의 삶의 질이나 돈벌이의 수단으로 거처를 정하기 일 수 이기 때문입니다. 누가 자기의 거처를 경건의 좌소로 생각하는 것입니까? 하나님을 알아 모시고 경건히 살려고 하는 자들 뿐 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