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997
10월1일[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 동정 학자 기념일/연중 제26주간 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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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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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uvehDi_hnPw
[예수회 김연수 스테파노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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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힘으로 밀어붙이고 싶은 유혹을 단호하게 뿌리칩시다!>
한류 열풍의 기세가 아직도 수그러들지 않고 계속되니,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특히 음악이나 영화 등 문화 예술 분야에서 전 세계 사람들의 이목을 지속적으로 끌고 있다는 것, 정말이지 자랑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진지한 성찰도 필요합니다. 전 세계 수많은 청소년들이나 어린이들이 열광하는 K-드라마나 영화, 가요인데, 그저 흥행만을 추구하며 지나치게 폭력적이거나 선정적으로 흘러가서는 안 될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영화나 드라마가 너무 지나치게 폭력적입니다. 우리 안에 내재되어 있는 폭력성을 드라마를 통해서라도 풀라는 의미인지, 여차하면 주먹을 휘두르고 총을 쏘고 칼을 휘두르니, 아이들이 보고 따라 하지 않을까 걱정입니다.
우리는 모두 냉철한 지성을 소유한 인격자인 인간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뜨거운 피가 돌고 있는 생명체이기에, 내면 깊숙한 곳에 강한 공격성이 분명 자리잡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구체적인 일상생활 안에서 절실히 느끼는 유혹 한 가지가 있습니다. 어떤 문제를 이성과 논리와 대화로 풀어나가기보다는 그냥 확 힘으로 밀어붙이고 싶은 유혹입니다.
책상이고 컴퓨터고 다 엎어버리고 뛰쳐나가고 유혹, 평소 꽉 참고 눌러왔던 하고 싶은 말들 속 시원히 해주고 싶은 유혹, 우월한 힘을 총동원해서 눈엣가시 같은 누군가를, 천하 밉상인 이웃 나라를 확 쓸어버리고 싶은 유혹...
그런데 놀라운 사실 한 가지가 있습니다. 예수님과 오랜 기간 동고동락하면서 특별 제자교육을 받은 제자들, 그중에서도 핵심 제자들, No2, No3 제자인 야고보와 요한 사도들도 그런 유혹을 느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목적지인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길에 사마리아 지역을 거쳐 가시게 되었는데, 제자들이 예수님을 모실 준비를 하려고 사마리아인들의 한 마을로 들어갔습니다.
유다인들과 사마리아인들 사이는 개와 고양이 이상이었습니다. 유다인들은 사마리아인들과 말도 안 섞고, 상종조차 하지 않았는데, 그것은 사마리아인들이 이런저런 연유로 이민족들과 혼혈하게 된 것을 용납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반면 사마리아인들은 별것도 아닌 것에 목숨을 거는 유다인들, 나름 전통 신앙과 관습을 고수한다고 잔뜩 폼을 잡지만, 실상 죄란 죄는 다 짓고 사는 유다인들, 뒤로 호박씨를 까는 유다인들을 또한 용납할 수가 없었습니다.
당연히 사마리아인들은 예수님 일행이 자기 마을에 머무르는 것을 거부한 것입니다. 노골적인 냉대를 받은 것에 대해 노발대발한 요한과 야고보 사도가 예수님께 다가와, 저것들 그냥 확 한번 엎어버릴까요, 라고 말씀드립니다.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불러 내려 저들을 불살라 버리기를 원하십니까?”(요한 9,54)
사실 당시 제자들은 예수님으로부터 여러 가지 능력을 부여받아, 사마리아 고을 하나 순식간에 날려버릴 힘을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그 순간 제가 예수님이었다면 이랬을 것입니다. “그래, 그게 낫겠네. 감히 우리를 배척하다니, 도저히 참을 수가 없군. 속 시원히 한번 봐버리게!”
그러나 생애 내내 비폭력 평화주의 노선을 한결같이 고수해오신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두 제자를 크게 꾸짖으십니다. 그리고 다른 마을로 발길을 돌리셨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힘을 사용한다면 그 힘은 사랑의 힘이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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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JczQzbyrxL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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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분노는 지옥으로 가는 길의 이정표>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은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분노를 일으킵니다. 사마리아 인들이 예수님은 자신들 편인 줄 알았으나 예루살렘으로 명절을 지내러 올라가시는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불러 내려 저들을 불살라 버리기를 원하십니까?”라고 분개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을 꾸짖으십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기 위해 다른 마을로 가십니다.
만약 누군가 자신에게 짖는 개와 싸우고 있다면 그 사람은 왜 개와 싸우는 것일까요? 첫 번째 이유는 한가해서 그렇습니다. 아기를 안고 병원으로 가는 길이었다면 개가 짖건 말건급해서 병원으로 갑니다. 두 번째는 행복으로 가는 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어차피 그 목적지로 가봐야 고통만이 있으니 여기서라도 자기를 무시하는 개를 두들겨 패는 기쁨을 느끼고 싶은 것입니다.
단편영화 ‘윌리 빙엄의 경우’(2015)는 형벌 제도가 바뀐 세상을 가상으로 만든 영화입니다. 한 여자아이를 살해한 범죄자는 피해자의 아버지와 가족들의 분노가 풀릴 때까지 몸의 일부가 잘려 나가야 합니다. 처음엔 팔 한쪽, 그다음엔 나머지 팔과 한쪽 다리, 그다음엔 신장과 허파 하나. 이런 식으로 조금씩 잘라가며 자신의 분을 풉니다. 코와 입술, 귀까지 잘린 범죄자는 더 이상 살아봐야 좋을 게 없어서 그냥 망연자실합니다.
처음엔 이 영화가 응당한 복수를 하는 사이다 같은 내용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가만히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아버지가 하는 지나친 복수에 아내도 떠나고 딸들도 아버지 곁을 떠납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가서는 아버지가 범죄자의 모습처럼 처참하게 변해있습니다. 복수하면서 자신도 고통을 받고 있음을 나타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로 나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십자가 뒤에는 부활의 영광이 있습니다. 부활의 영광을 위해 십자가는 감사한 도구일 뿐입니다. 내가 의사 애인을 사귀고 있는데 길을 가다 돌부리에 발이 긁혀 피가 난다면 어떨까요? 자신을 만나러 오다가 피가 나는 그 애인을 더 사랑하여 잘 치료해 줄 것입니다. 그러니까 돌부리가 감사한 것이 됩니다. 그러나 무서운 직장 상사를 만나러 가는 중이었다면 그 결말이 행복하지 않아 돌부리를 발로 차며 화풀이하게 됩니다.
따라서 지금 내가 화가 나고 분노가 치밀고 복수심이 생긴다면 내가 가는 방향은 천국일 수 없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이미 천국과 지옥을 정해놓고 가고 있습니다. 내가 어떤 사람이 용서되지 않는다면 조심하십시오. 지금 나에게 유일한 행복은 그 사람에게 분노를 터뜨리는 행복밖에는 남지 않은 것입니다.
알바니아 출신의 예수회 신부인 안톤 룰리 신부는 자국의 공산주의 정권 동안 극심한 박해를 겪으며 살았습니다. 1910년에 태어난 그는 종교 기관을 맹렬히 표적으로 삼은 알바니아의 무신론적 공산주의 정부가 등장하기 직전인 1942년에 사제 서품을 받았습니다.
그는 1947년 정부에 반대했다는 혐의로 체포되어 17년 동안 감옥에서 살았으며, 그곳에서 극심한 고문과 비인간적인 환경에 직면했습니다. 그는 1989년 석방된 이후 고문자 중 한 명을 용서하고 포옹하기까지 했습니다. 고통에도 불구하고 인내와 사랑에 대한 그의 이야기는 특히 1996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와의 알현에서 깊은 인상을 남겨 교황을 감동하게 했습니다.
그가 평생을 감옥에 있으면서 자신에게 고문을 가한 사람들을 용서하게 된 이유는 그들이 그가 천국을 느끼게 하는 과정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투옥 중 심한 고문을 당했던 특별한 크리스마스이브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발가벗겨진 채 냉동실에 묶인 그는 겨드랑이 아래에 밧줄로 매달려 있었고 간신히 발가락으로 서 있을 수 있었습니다. 추위가 그의 몸에 스며들자 그는 죽음이 임박했음을 느꼈습니다.
이 고통과 무력함으로 울부짖던 순간에 룰리 신부는 그가 묘사한 특별한 영적 만남을 경험했습니다. 그는 말씀이 사람이 되신 신비와 십자가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게 되었고, 그렇게나 자신을 사랑하시는 그리스도께서 자신과 함께 계심을 느꼈습니다.
지극한 고통에도 불구하고 그 행복은 그를 기쁨과 위로로 가득 채웠습니다. 이 행복이 없이 어떻게 그들을 용서할 마음을 가질 수 있었을까요?
부활 앞에선 십자가는 감사의 도구가 될 뿐이지만, 지옥 앞에서는 모든 게 분노의 대상이 됩니다. 이 이정표를 잘 보고 나아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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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자비로우려면 가죽신발을 신어라>
프란체스코와 그의 제자들은 산속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한 소년이 혼자 남아 집을 지키는데 악명 높은 산적 셋이 찾아왔습니다. 그들의 방문 목적에 대해서는 물어볼 필요가 없었습니다. 도적은 도적질하고자 하는 한 가지 목적을 가지고 활동하기 때문입니다.
이 소년은 마음속으로 기도하면서 용기를 다하여 큰소리로 호통을 쳤습니다. “남들은 땀 흘려 일하는데 너희들은 남의 것을 훔쳐 먹으려는 것이냐!”
도적들은 마음이 찔렸는지 그대로 돌아갔습니다. 스승이 돌아오시자 그 소년은 자랑스러운 듯이 있었던 일을 고했는데 프란체스코가 섭섭한 투로 말했습니다.
“그건 네가 실수했다. 지금 곧 도적들에게 가서 이 빵과 포도주를 주고 오너라.”
소년은 선생님의 말씀대로 그들을 바로 쫓아가 빵과 포도주를 든 선물을 전달했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그것을 먹지 않고 소년을 따라 수도원으로 되돌아왔으며, 회개하고 프란체스코의 제자들이 되었습니다.
저의 어머니는 누구와 싸우면 그 사람과 똑같은 사람이 된다고 가르치셨습니다. 처음엔 그것이 이해가 안 됐습니다. 그들보다 낫기 위해서는 그들의 생각을 뛰어넘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이 잘못했다면 당연히 그들이 벌을 받아야한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박수도 손이 서로 마주치기 때문에 소리가 나는 것처럼, 내가 상대와 같은 수준이니 싸움도 하게 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싸움은 서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같은 수준의 사람들이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품은 성인은 싸움하지 않고 사랑을 합니다. 프란체스코의 제자는 도둑들을 나무랐지만 프란체스코는 도둑들을 사랑하였습니다. 이것이 사랑이 있고 없고의 차이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은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분노를 일으킵니다.
사마리아인들이 예수님은 자신들 편인 줄 알았으나 예루살렘으로 명절을 지내러 올라가시는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불러 내려 저들을 불살라 버리기를 원하십니까?” 라고 분개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을 꾸짖으십니다. 방금 전에 예수님은 “누구든지 이 어린이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큰 사람은 그 큰 공간으로 모든 사람을 품을 줄 압니다.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마리아 사람이나 그들에게 분노를 터뜨리는 제자들이나 결국은 받아들이지 못하는 똑같이 작은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포용력이 좋은 사람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포용은 고슴도치를 가슴에 품는 것처럼 아픔을 동반합니다. 그 아픔을 참아낼 수 있느냐, 없느냐로 포용력이 결정됩니다.
신발이 없던 어떤 시절 어떤 사람은 자신의 발을 찌르는 돌들을 다 캐내겠다고 길을 파헤치며 다녔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동물의 가죽으로 자신의 발을 감싸서 걸어갔습니다.
누가 더 큰 사람일까요? 일일이 반응하는 사람은 작은 사람입니다. 진정으로 큰 사람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줄 아는 사람입니다. 받아들이기 위해 가죽옷을 발에 두를 줄 아는 사람입니다.
그 가죽옷은 무엇을 말할까요? 주님입니다. 주님이 계시면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믿음입니다.
하느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가죽옷을 입혀주셨습니다. 그러자 부끄러움이 사라졌습니다. 부끄러움이 사라지자 이젠 자신의 죄를 합리화하기 위해 이웃을 심판할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양식인 예수님의 살과 피는 이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게 만드는
완충작용을 해 줍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행복이 작은 아픔을 참아낼 수 있게 하는 에너지입니다. 가죽신발을 입읍시다. 가죽신발은 기쁜 감정입니다.
내가 기쁘면 다 용서가 됩니다. 가죽신발이란 주님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는 믿음에서 오는 행복한 감정입니다. 기쁨으로 사는 사람은 그 기쁨을 잃지 않기 위해 절대 안 좋은 감정을 품지 않습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것입니다.
반면 기분이 나쁜 사람은 그 기분 나쁜 이유를 이웃에게서 찾아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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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사면초가(四面楚歌)’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말로는 ‘엎친 데 덮친다.’라고도 합니다. 슬픔이 파도처럼 밀려오기도 하고, 고통의 수렁에 빠지는 것 같기도 합니다. 캐롤턴 반모임이 있었습니다. 그날 복음 나누기는 ‘듣지 못하고 말 못하는 사람’을 치유해 주시는 예수님의 이야기였습니다. 사람들이 듣지 못하고, 말 못하는 사람을 예수님께 데려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에파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열려라’라는 뜻입니다. 그러자 듣지 못하고, 말 못하는 사람이 듣게 되고, 말을 하게 되었습니다. 미국 온지 1년 된 자매님이 ‘열려라’를 묵상하면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낯선 곳에서 가장 힘든 것은 말이 통하지 않는 것입니다. 아이들도 말이 통하지 않으니 힘들어 했습니다.” 한국에 어머니가 있는 자매님도 ‘열려라’를 묵상하면서 아픈 어머니의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아픈 어머니에게 ‘열려라’라고 하셨으면 좋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눈물을 흘리니, 다른 분들도 눈물 흘렸습니다. 저는 30년 전에 ‘복음 나누기’를 배웠습니다. 교구 사목국에 있으면서 구역장, 반장들에게 복음 나누기를 알려드렸습니다. 그 복음 나누기가 30년이 지난 지금도 계속 되고 있음을 보았습니다. 복음 나누기의 영성은 말씀이 생활 속에서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날 주님의 말씀은 우리 안에 살아 있었습니다. 복음 나누기를 통해서 우리는 위로를 받았습니다.
저도 ‘에파타’를 묵상했습니다. 2000년 전, 예수님께서 사용하신 언어는 ‘아람어’였습니다. 복음서는 희랍어로 기록되었는데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중에 아람어를 그대로 기록한 곳이 있습니다. ‘에파타, 탈리타꿈, 엘리엘리라마사박다니’입니다. 성서의 저자는 이 말씀들이 구원의 역사에서 중요하다고 생각했기에 아람어를 그대로 사용했다고 생각합니다. 에파타는 ‘열려라’라는 뜻입니다. 탈리타꿈은 ‘일어나라’라는 뜻입니다. 엘리엘리라마사박다니는 ‘하느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라는 뜻입니다. 저는 닫힌 마음이 열리기를 원했습니다. 사람의 마음은 신기합니다. 사랑하는 마음으로 열려있으면 온 세상을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 넓어집니다. 미워하는 마음으로 닫혀있으면 바늘 하나 들어갈 틈이 없습니다. 요한 묵시록에서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목소리를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의 집에 들어가 그와 함께 먹고 그 사람도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 사리사욕과 당리당략으로 닫혀있는 정치인들의 마음이 국가와 국민을 위한 마음으로 열려 있으면 좋겠습니다. 절망 중에 있는 사람은 희망으로 일어나면 좋겠습니다. 어둠 속에 있는 사람은 빛으로 일어나면 좋겠습니다. 두려움 중에 있는 사람은 담대함으로 일어나면 좋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마음을 열어야 합니다.
오늘 독서에서 우리는 욥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욥은 사탄으로부터 많은 시련과 고통을 겪었습니다. 가지고 있던 재산을 모두 잃어버렸습니다. 배도 바다에서 침몰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기르던 양도 모두 죽었다고 들었습니다. 하인들도 죽었다고 들었습니다. 사랑하는 자녀들도 죽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좌절하고 절망하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욥은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알몸으로 어머니 배에서 나온 이 몸 알몸으로 돌아가리라. 주님께서 주셨다가 주님께서 가져가시니 주님의 이름은 찬미 받으소서.” 이냐시오 성인은 영신수련에서 겸손의 3단계를 이야기하였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건강보다 아픈 것을 택할 수도 있고, 부귀보다 가난함을 택할 수도 있고, 장수보다 일찍 죽는 것도 택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마음을 열어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받아들일 수 있다면, 우리는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삶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기도해야 합니다. 항상 기뻐해야 합니다. 언제나 감사해야 합니다. “주님, 제 구원의 하느님, 낮에도 당신께 부르짖고, 밤에도 당신 앞에서 외치나이다. 제 기도 당신 앞에 이르게 하소서. 제 울부짖음에 귀를 기울이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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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9,51-56: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내리게 하여...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에서의 죽음을 향한 길을 가시며, 제자들을 사마리아 마을로 보내신다. 예수님을 맞을 준비를 시키신다. 그러나 사마리아인들은 제자들을 배척하였다. 그것은 예루살렘에서 유다인들의 경멸과 조소를 견디어야 하고,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온갖 폭력과 고통을 받아들이셔야 할 몸이었다. 이러한 고통 앞에 이 사마리아인들의 냉대를 예행 연습의 도구로 삼으셨다. 야고보와 요한은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내려 저들을 불살라 버리기를 원하십니까?”하고 물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사도들을 위해 그들을 꾸짖으셨고, 그들을 벌주고 싶어 하는 제자들의 분한 마음을 풀어주셨다. 이것은 앞으로 제자들이 어떤 일을 당하더라도 참고 견디며 흔들리지 않는 마음을 기르도록 제자들을 단련시키신 것이다.
이것은 또한 제자들을 위하여서 하신 일이었다. 제자들은 이제 온 백성을 가르칠 사람들로서 방방곡곡을 다니며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하여야 한다. 그 사명을 행하는 과정에서 복음을 거부하고 예수님을 맞아들이지 않는 무리도 만나게 된다. 사마리아인들에 대해서 분개했던 제자들을 오히려 꾸중하신 것은 그들을 위해서였다. 복음의 전달자로서 앙갚음하려는 마음보다는 온유한 마음으로 임해야 한다는 것을 알려주신 것이다. 진노와 앙갚음으로 대처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오늘 복음의 제자들과 예수님의 모습이 다르게 나타나는 것을 보면서 많은 것을 생각할 수 있다. 주님께 받은 능력을 잘못 사용하려 했던 제자들을 꾸짖는 예수님의 모습에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능력을 주님의 뜻에 맞도록 사용하도록 힘써야 한다. 내가 다른 사람들보다 많은 것을 알고 있다고 해서 또 봉사를 많이 한다고 해서 다른 사람들을 나의 기준에 맞추려고 한다면 그것은 많은 경우에 하느님의 뜻과는 거리가 있는 행동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여야 한다. 우리의 선입견이나 부족한 판단으로 우리에게 오시는 주님을 우리가 거절하는 예도 많다. 그리고 또 내가 사랑을 베풀려고 하였을 때, 거절을 당하거나 무시당하는 때도 있다. 이 두 가지 상황을 통하여 내가 보였던 모습은 어떤 것이었을까를 생각하여야 한다. 이제 주님의 모범을 본받아 이웃에게 더욱 관용을 베풀며 잘 살아갈 수 있도록 주님의 은총과 도움을 청하여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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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성 도미니코선교수녀회 안소근 실비아 수녀님]
사마리아인들이 예수님을 맞아들이지 않았을 때 야고보와 요한은 그들을 없애 버리려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그들을 꾸짖으십니다. 아마도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맞아들이지 않는 이들은 언제 어디에나 있으리라고 아셨을 것입니다.
사마리아인들이 예수님을 거부한 것은 예수님의 말씀 때문이 아니라 다만 그분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도 그분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입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예언자들을 죽이고 자기에게 파견된 이들에게 돌을 던져 죽이기까지 하는 너!”(마태 23,37)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십니다. “예언자는 예루살렘이 아닌 다른 곳에서 죽을 수 없기 때문이다.”(루카 13,33)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려고 “마음을 굳히셨다”(9,51)는 것 또한, 그곳에서 사람들이 당신을 환영하지 않으리라는 생각을 전제합니다. 예언자의 삶은 늘 그러하였습니다. 사람들은 예언자들을 “쫓아내고 모욕하고 중상”(6,22)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마음을 굳히신 것은 그런 운명을 받아들이심을 뜻합니다. 예수님을 맞아들이지 않는 이들을 없애려고 하는 제자들은 오히려 예수님을 올바로 알지 못하였습니다.
하느님 말씀을 전할 때 모든 이가 기쁘게 받아들이리라는 생각은 큰 오산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저 그들을 떠나 다른 마을로 가셨습니다.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으려 하는 이들은 아마도 세상 끝 날까지 어디에나 있을 것입니다. 그들에게 복음을 받아들이도록 강요하거나 심지어 그들을 없애려고 할 것이 아니라, 그들이 복음에 따라 살기는 어렵지만 이를 받아들이고 이겨 낼 수 있도록 너그러운 마음을 주시기를 하느님께 청하여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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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신앙인은 축복하는 사람입니다. 저주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늘에 올라가실 때가 차자,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시려고 마음을 굳히셨다. 그래서 당신에 앞서 심부름꾼들을 보내셨다. 그들은 예수님을 모실 준비를 하려고 길을 떠나 사마리아인들의 한 마을로 들어갔다. 그러나 사마리아인들은 예수님을 맞아들이지 않았다. 그분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이었기 때문이다. 야고보와 요한 제자가 그것을 보고,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불러내려 저들을 불살라 버리기를 원하십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는 돌아서서 그들을 꾸짖으셨다. 그리하여 그들은 다른 마을로 갔다.”(루카 9,51-56)
1) 지금 이 이야기의 상황은, 복음을 전하는 일을 하다가 박해를 받는 상황이 아닙니다. ‘사마리아인들’이 ‘유대인들’을 적대적으로 대한 상황입니다. 갈릴래아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지름길은 사마리아를 통과하는 길이었고, 그 길로 가면 도보로 사흘이 걸렸습니다. 예수님께서 심부름꾼들을 당신에 앞서 보내신 것은, 복음을 전하라는 것이 아니고, 일행이 많았기 때문에 음식과 숙소를 미리 준비하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야고보와 요한 사도가 심부름꾼이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이었기 때문에 사마리아인들이 예수님을 맞아들이지 않았다는 말은, 당시 유대인들과 사마리아인들 사이의 갈등을 나타냅니다. 유대인들에게는 예루살렘 성전만이 유일한 성전이었지만, 사마리아인들은 자기들이 ‘그리짐 산’에 세운 성전에서 예배를 드렸고, 예루살렘 성전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 유대인들이 그것을 업신여기고 무시하면서 예루살렘으로만 가는 것에 대해 적대감을 품고 있었습니다. 특히 모든 유대인이 예루살렘 성전으로 순례를 가는 축제 기간 중에는 그 적대감과 반감이 더욱 깊어졌습니다. <그 당시에 전반적인 실제 상황은, 유대인들이 사마리아인들을 박해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사실 사마리아인들도 야훼 하느님을 믿고 있었고, 모세오경을 성경으로 사용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의 종교와 신앙을 인정하지 않고 무시했고, 배척하고 학대하고 박해했습니다. 사마리아인들은 그 박해에 맞서 싸울 힘이 없어서 소극적으로 적대감과 반감을 드러내는 정도로 그쳤습니다. 루카복음 10장에 있는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그런 상황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랑 실천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설명하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사마리아인으로 설정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의 박해를 받고 있는 입장에 있는 사마리아인이 박해를 하는 위치에 있는 유대인을 도와주는 이야기는 ‘이웃 사랑’과 ‘원수에 대한 사랑 실천’을 잘 보여줍니다.>
2) 아마도 사마리아인들은 예수님께서 보내신 심부름꾼들을 모욕하면서 쫓아냈을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신체적인 폭행도 있었을 것입니다. 어쩌면 그 심부름꾼들이 먼저 사마리아인들을 무시하면서, 오만한 태도로 음식과 숙소를 구했을지도 모릅니다. 먼저 자극했기 때문에 모욕당했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 심부름꾼들이 야고보 사도와 요한 사도였다면, 그들은 모욕당한 것을 참지 못하고 크게 화를 냈을 것입니다. 둘 다 불같은 성격이었기 때문입니다.(마르 3,17) <겉으로만 보면, 두 사도는 자기들이 당한 일은 곧 예수님이 거부당하고 모욕당하신 일이라고 생각해서 화를 내는 것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자신들이 모욕당한 것에 대해서 화가 났을 것입니다.>
몹시 화가 난 두 사도는 엘리야 예언자가 했던 일을, 사마리아인들에게 똑같이 하고 싶어 했습니다.(2열왕 1장)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불러내려 저들을 불살라 버리기를 원하십니까?”는, “저들에게 천벌을 내립시다.”, 또는 “저들에게 천벌을 내려 주십시오.”라는 뜻입니다.
3) 예수님께서 두 사도를 꾸짖으신 일은, 다음 가르침에 연결됩니다. “내 말을 듣고 있는 너희에게 내가 말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너희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잘해 주고, 너희를 저주하는 자들에게 축복하며, 너희를 학대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루카 6,27-28)
우리도 살다보면 두 사도와 같은 심정이 될 때가 있습니다. 너무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악인들의 횡포를 참기가 힘들 때, 세상이 돌아가는 모습이 너무나도 불공평하고 부당하게 보일 때...... 그럴 때에 하느님께 ‘정의의 심판’을 간청하기도 하는데, 그 간청이 선을 넘어서, 악인들에게 천벌을 내려 달라고 빌거나 악인들이 큰 불행을 당하게 해 달라고 청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기도’가 아니라 ‘저주’ 라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신앙인에게는 다른 사람을 저주할 권리와 권한이 없습니다. 가끔 예외적으로 하느님께서 직접 천벌을 내리시는 경우가 있긴 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우리가 청할 수는 없습니다. 저주 자체가 죄입니다. 우리는 죄인들의 회개와 구원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죄인들이 멸망당하기를 바라지 말고, 함께 구원을 받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야고보서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 혀로 주님이신 아버지를 찬미하기도 하고, 또 이 혀로 하느님과 비슷하게 창조된 사람들을 저주하기도 합니다. 같은 입에서 찬미와 저주가 나오는 것입니다. 나의 형제 여러분, 이래서는 안 됩니다. 같은 샘구멍에서 단물과 쓴물이 솟아날 수 있습니까?“(야고 3,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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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강수원 베드로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하늘에 올라가실 때”, 곧 당신의 수난과 부활과 승천을 위한 마지막 때가 왔음을 아시고 예루살렘으로 향하십니다. 여정의 첫 순간에 마주한 사람들의 외면과 배척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십자가에 들어 올려지실 여정의 마지막까지도 이어질 것입니다.
사마리아인들이 예수님을 맞아들이지 않은 것은 유다인들을 향한 오랜 반감과 더불어, 그분께서 그리짐산에 있는 자신들의 성전이 아닌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야고보와 요한이 그런 사마리아인들을 두고 ‘하늘에서 불을 내려 살라 버리겠다.’고 한 것은, 지난날 엘리야 예언자가 자신을 잡으러 사마리아에서 온 이들을 하늘에서 내린 불로 살라 버린 일을(2열왕 1,10.12 참조) 떠올렸기 때문이겠지요.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냉대와 무시에 분개하여 복수를 떠올린 제자들을 꾸짖으셨는데, 몇몇 수사본은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목숨을 멸망시키는 것이 아니라 구하려고 왔다.”(루카 9,56, 『성경』 각주 참조)라는 말씀을 덧붙여 그분의 속마음을 설명하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여정을 시작하시기 전에 제자들도 장차 당신처럼 사람들에게 외면과 박해를 당할 것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목숨을 걸고 복음을 전하며 구원을 선포하는 그들의 선의가 짓밟힐 때가 오면, 증오와 원망이 아닌 온유와 겸손으로 그 사명을 이어 갈 힘을 지니도록 미리 단련시키셨습니다.
제1독서에 따르면 욥과 같은 의인도 까닭 없는 고통과 지독한 시련 앞에서 자신의 처지를 처량히 한탄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세상에 파견된 주님의 사도임을 기억합시다. 내 진심을 왜곡하는 이들이나 거룩함을 간직하는 데 방해가 되는 일들을 만날 때, 흔들림 없는 내적 평화와 온유를 지켜 나갈 수 있도록 필요한 힘과 지혜를 주님께 청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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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고난수도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시려고 마음을 굳히셨다. 사마리아인들은 예수님을 맞아들이지 않았다. 그분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이었기 때문이다.”(9,51.53)
때론 우리는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채 길(=인생)을 걷고 있기에 그 길을 걸으면서 끊임없이 나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라고 묻지만,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때가 오신 것을 아시고 예루살렘으로 가시려고 마음을 굳히셨습니다. 사람이 자신의 때를 알고 어디로 가야 한다는 사실을 안다는 것은 인생이란 길을 걸으면서도 늘 자신이 누구이며 자신의 소명이 무엇인지를 물어왔기에 사람-사건-사물을 통해서 들려오는 아버지 하느님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이제 당신을 통해서 아버지께서 세상에 성취하실 구원의 때가 오신 것을 아시고 예루살렘으로 길을 잡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가셔야 할 예루살렘은 단지 지형학적인 장소이지만, 이는 우리에게는 도달해야 하는 인생과 영적 순례의 목적지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이 순례를 영적 달음질이라고 칭하였으며, 우리의 여정은 바로 “하느님께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우리를 하늘로 부르시어 주시는 상을 얻으려고, 그 목표를 향하여 달려가고 있는 것입니다.”(필3,14)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아직 그 목적지에 도달한 것이 아니기에 이미 우리보다 앞서 그 길을 걸으셨던 예수님을 본받아 뒤따라야 합니다.
본디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은 한민족이었지만, 기원전 722년 아시리아에 패망한 후 사마리아 사람들은 아시리아의 식민지 정책에 동화되어 혼혈 민족이 되었습니다. 이때부터 유대인들은 혈통을 보존하지 못한 사마리아 사람들을 개처럼 취급하고 멸시했으며, 회당에서 공공연하게 저주하고 상종하질 않았습니다. 그래서 갈릴래아에서 예루살렘으로 갈 때, 유대인들은 지름길을 두고 요르단강을 건너 사마리아를 우회해서 예루살렘으로 갔던 것입니다. 그런데 복음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통상적인 길이 아닌 사마리아를 지나가시려고 먼저 심부름꾼들을 보내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실 사마리아 하면 떠오르는 두 사람이 있잖아요. 착한 사마리아인(10,33)과 사마리아 여인(요4,1~42)입니다. 특히 사마리아 여인과의 만남에서 예수님은 그녀에게 이제 영과 진리 안에서 참된 예배를 드릴 때가 올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과의 만남 이후 많은 사마리아 사람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이런 배경에서 오늘 복음의 이야기를 묵상하면 좋으리라 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예상과 달리 사마리아 사람들은 예수님의 일행을 맞아들일 마음이 전혀 없었습니다. 이는 예상하지 못한 반응이었고, 이에 대해 예전 아름다운 기억을 품고 있었던 야고보와 요한이 “주님, 엘리야가 한 것처럼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불러내려 저들을 불살라 버리기를 원하십니까?”(9,54)라고 예수님께 물었던 것입니다. ‘아니 이런 싸가지들이 있나 그래!’ 저 역시도 그 자리에 있었다면 그들과 전혀 다르지 않은 반응을 했으리라 봅니다. 사실 5.18 광주 민주화 항쟁 때 저도 전두환 일당에게 하느님께서 엄중한 벌을 내려 주시길 간절히 기도했었습니다. 물론 다혈질적인 성격 때문에 야고보와 요한이 그렇게 사마리아인들에 대해 분노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그보다는 스승이신 예수님께서는 유대인들이 사람같이 취급하지 않은 데 반해서 그들을 배려하고 존중하며 사랑했는데, 돌아오는 것이 오히려 냉대이니 스승님에 대한 배려 차원에서도 그렇게 격한 반응을 보이셨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한마디로 예수님께 대한 사마리아인들의 배은망덕이라고 제자들은 생각했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역지사지의 심정에서 바라보면 약자이며 소수였던 사마리아인들은 다른 사람도 아닌 예수님께서 자기들을 멸시하는 유다 예루살렘으로 가신다니 자기들이 그렇게 믿었던 예수님께 배신감을 느꼈을 겁니다. 결국 당신도 다른 유대인들과 별반 다르지 않으시고 마찬가지시군요. 물론 예수님은 이를 이미 예견하셨기에 심부름꾼을 미리 보내셨고 격한 분노를 드러내는 제자들을 오히려 꾸짖으신 것은 이 일을 통해 사마리아 사람들을 시험하기 위해서라기보다 앞으로 세상에서 당신의 복음을 선포할 제자들에게 세상의 반응, 곧 거부와 배척에 어떻게 신앙적으로 대처해야 하는 가를 가르치려는 의도라고 미루어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마치 물 흐르듯이 모든 것을 순리대로 자연스럽게 응답하시고 수용하신 분이시기에 결코 자신의 계획을 집착하기보다는 사마리아 사람들의 관점이나 입장에서 이해하고 공감하셨던 것이라 봅니다. 자신이 베풀었기에 당연히 환대와 환영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면 굳이 심부름꾼들을 앞질러 보내서 당신의 행선지와 여행 목적을 알릴 이유가 없었으리라 생각합니다. 비록 그들이 당신을 환대하지 않았다고 해서 부정적인 느낌을 토로하시기보다 기꺼이 그들의 입장을 수용하시고, 가시려던 길을 바꾸신 그 유연함을 우리 또한 본받아야 하리라 봅니다. 자신이 가고자 했던 길, 자신이 계획하고 이미 시작한 일이라도 기꺼이 바꿀 수 있고 바꾸는 유연함과 열린 마음을 제자들도 그리고 우리 또한 닮아야 하리라고 봅니다.
오늘 소화 데레사 성녀 축일입니다. 축일 맞는 모든 분에게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2018년부터 대축일에서 기념일로 변경되면서, 갑자기 평가절하된 기분이 없지는 않습니다. 참으로 많은 성인 가운데 제가 닮고 살고자 하는 삶을 사셨던 분이 바로 소화 데레사입니다. 아무튼 축일을 축하드립니다. 작은 자의 길을 걸으시고, 하느님 자비 앞에 빈 손으로 살려고 했던 작은 꽃 데레사 성녀처럼 우리 또한 언제나 하느님의 눈길에서 벗어나지 않고, 하느님의 손길을 느끼면서 오늘 하느님의 아이답게 살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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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강의할 때 종종 감동적인 영상을 보여줍니다. 지난번에는 네 살짜리 꼬마 아이가 사고로 돌아가신 아빠를 그리워하는 영상을 틀었습니다. 네 살짜리 아이가 아빠에 대한 그리움에 도화지에 아빠를 그린 뒤에 “아빠, 보고 싶어.”라면서 그림을 자기 가슴에 안습니다. 이 영상에 신자들이 여기저기 훌쩍거리면서 곧 성당 안이 울음바다가 되었습니다. “어떻게~~~”하면서 안타까움을 표시하셨습니다.
측은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정신적으로 크게 문제가 없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런 마음을 갖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인간의 본질이 아닐까요? 하느님께서 인간 내면에 깊이 심어주신 본성입니다. 하지만 이 본성을 벗어나는 사람을 자주 보게 됩니다. 무례하고 불친절한 사람, 이기적이고 자기 욕심만 채우려는 사람, 사람을 단순히 경쟁 상대로만 보려는 사람….
우리의 본성은 사랑입니다. 그러나 세상을 살아가며 본성인 사랑을 내려놓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랑하라고 하신 것은 사랑을 특별히 우리에게 주신 것이 아니라, 우리의 본성을 다시 찾으라는 외침이었습니다. 사랑의 삶 안에서 우리 모두 잘 살 수 있습니다. 그리고 모두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이라는 커다란 선물을 받게 됩니다. 하지만 우리의 본성과 반대되는 삶을 사는 것이 아닐까요?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뜻을 따라 예루살렘으로 가십니다. 갈릴래아에서 예루살렘으로 곧장 가려면 사마리아 지방을 통과해야 했습니다. 도보로 사흘이 걸리는 여행길입니다. 그런데 사마리아 사람은 유다인들과 사이가 좋지 않았습니다. 국적으로 보면 같은 나라이지만, 민족적으로 유다인들이 사마리아 사람을 이방인 취급하며 그들의 음식을 부정하다 하여 먹지도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예수님에 대해 사마리아 사람들이 그렇게 부정적이지 않았습니다. 요한 복음을 보면 주님의 말씀을 듣고 믿었던 사람이 많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요한 4,,40-41). 그런데 이들이 예수님을 맞아들이지 않았던 것은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적개심보다는 과월절을 지내러 예루살렘에 가는 유다인들이기 때문임을 알 수 있습니다.
스승에 대한 홀대에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불러 내려 저들을 불살라 버리기를 원하십니까?”라고 묻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꾸짖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벌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구원하러 오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편협한 마음으로 유다인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마리아 사람이나, 사마리아 사람을 이방인으로 대우하는 유다인이나, 또 스승을 홀대한다고 벌하겠다고 하는 모습이나 모두 하느님 아버지의 뜻과는 반대되는 모습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우리의 본성인 사랑으로 다가가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십니다.
지금 우리는 우리의 본성인 사랑을 적극적으로 실천하면서 살고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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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품을 키워야 합니다>
갈릴래아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가장 빠른 길은 사마리아를 통해서 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길을 통하여 예루살렘에 가시고자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길을 가시기에 앞서 심부름꾼을 앞서 보내셨고, 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의 집에 들어가 예수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사마리아인들과 유다인들 간에는 종교적이고 민족적인 적대감이 있었습니다.(요한 4,9) 사마리아인들은 이스라엘의 주 하느님의 신앙을 받아들였으나 하느님께 대한 예배는 예루살렘이 아닌 그리짐산에서 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신명 11,29) 그리짐산에 자기들만의 성전을 건립하였습니다. 그래서 결국 예수님을 맞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께서 냉대를 받으시자 화가 났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여쭙니다.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불러내려 저들을 불살라 버리기를 원하십니까?”(루카 9,54)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꾸짖으셨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의 태도는 사마리아 사람의 태도와 다를 바 없었습니다. 그러니 야단맞는 것은 당연합니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인정을 받겠느냐? 죄인들도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은 사랑한다. 너희가 자기에게 잘해 주는 이들에게만 잘해 준다면 무슨 인정을 받겠느냐? 죄인들도 그것은 한다.”(루카6,32-33)
하느님이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단죄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아들을 시켜 구원하시려는 것입니다(요한3,17). 예수님께서는 길잃은 사람들을 찾아 구원하러 오셨습니다.(루카 19,10) 그리고 사도들도 역시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서 파견되었습니다. 사도행전 13장 47절에는 이렇게 기록되어있습니다. “ 사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명령하셨습니다. ‘ 땅끝까지 구원을 가져다주도록 내가 너를 다른 민족들의 빛으로 세웠다.’” 그러므로 그 본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앙갚음하고 싶은 마음을 거두기 전까지 그들은 결코 꾸짖음을 면할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저주할 수 있는 권한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냉대에 개의치 않고 당신의 가실 길을 가십니다. 맞서지 않고 그저 당신의 일을 찾아가실 뿐입니다. 순리를 따라가십니다. 우리도 주변 여건, 환경에 구애받지 말고 해야 할 일을 해야 하겠습니다. 누가 뭐라 하든지 그것이 주님의 일이라면 기쁘게 해야 하겠습니다. 아니, 무슨 일을 하든 그 일이 주님의 일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활동을 하다 보면, 가끔은 이런저런 소리를 듣기도 합니다. 예기치 않은 일을 접하게 되면 마음이 편하지 않습니다. 그래도 개의치 말고 주님을 향한 길에 흔들림이 없어야 합니다. 반대하고 배척하는 이들을 거부할 것이 아니라, 때를 기다리며 주님의 은총을 간구하는 것이 우리의 몫입니다. 그를 위해 기도하다 보면 내 마음이 먼저 커지게 되고, 이런 사람도 저런 사람도 다 품을 수 있게 됩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마음에 화만 쌓이게 되고 주님과 멀어지게 됩니다. 먼저 품을 키울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데레사 성녀에 의하면, “사랑은 커다란 맛을 느끼는 데 있지 않고 매사에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리려는 결단을 내리는 데에 있다. ……사랑은 넘어질 수도 있고 불충분한 행위를 저지를 수도 있다. 그러나 사랑은 모든 것에서 유익함을 얻어낼 수 있고 주님을 불쾌하게 하는 것들을 신속하게 없애 버린다…사랑을 산다는 것은 아무런 내색도 없이 어떤 요구도 없이 그저 베푼다는 의미입니다………사랑이란 결코 한가로울 수 없는 것, 한가로운 사랑은 벌써 잘못되었다는 표시인 것입니다.” 데레사 성녀에게 있어서 가장 큰 중심은 사랑이었습니다.
성녀는 “나의 소명은 사랑입니다. ‘어머니이신 교회의 마음’ 속에서 저는 사랑이 되겠습니다. 그리하여 모든 것이 되겠습니다”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도 사랑이 되기를 기도합시다. 주님의 사랑을 비추는 연장이기를 희망합시다. 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를 선교의 수호자로 모시는 것은 바로 교회의 소명이 사랑이고 그 사랑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세상에 사랑이신 주님을 전하려면 사랑을 살아야 합니다. 모두가 사랑의 사도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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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돌아가는 길>
루카 9,51-56 (사마리아의 한 마을이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다)
하늘에 올라가실 때가 차자,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시려고 마음을 굳히셨다. 그래서 당신에 앞서 심부름꾼들을 보내셨다. 그들은 예수님을 모실 준비를 하려고 길을 떠나 사마리아인들의 한 마을로 들어갔다. 그러나 사마리아인들은 예수님을 맞아들이지 않았다. 그분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이었기 때문이다.
야고보와 요한 제자가 그것을 보고,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불러내려 저들을 불살라 버리기를 원하십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는 돌아서서 그들을 꾸짖으셨다. 그리하여 그들은 다른 마을로 갔다.
<돌아가는 길>
“예수님께서는 돌아서서 그들을 꾸짖으셨다.
그리하여 그들은 다른 마을로 갔다.”(루카 9,55-56)
죽음으로써
살리는
가야할 길
가로막은 사람들
행여 다칠세라
차마 밟을 수 없어
돌아가는 길
길고 더디더라도
살림의 길
아무도
해치지 않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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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하늘에 올라가실 때가 차자,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시려고 마음을 굳히셨다.”
오늘 복음(9,51절)에서부터 시작되는 '예루살렘 상경기'는 19장 27절까지 이어지게 됩니다. 오늘 복음의 첫 구절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하늘에 올라가실 때가 차자,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시려고 마음을 굳히셨다.”(루카 9,51)
이 표현은 예수님께서 당신의 마지막 시각이 가까워진 것을 감지하시고, 십자가의 죽음을 향하여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시기로 결심하셨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곧 예수님께서는 그 수난과 죽음의 길을 자발적으로 작정하시고 출발하십니다. 그렇게 '마음을 굳히셨습니다.'.
그것은 그 죽음이 실패가 아니라 승리의 길이요, 하늘로 올라가는 완성의 길임을 말해줍니다. 왜냐하면 여기에서 '올라간다'(αναλημψεωσ)는 말씀은 승천을 암시하고, '때가 차자'라는 말은 완성(συμπληροω)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곧 죽음은 패배가 아니라 승리요 영광임을 암시해줍니다. 또한 이는 이미 ‘첫 번째 수난예고’에서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되살아나야 한다.”(루카 9,22)고 밝힌 바 있습니다.
그런데 갈릴래아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려면 사마리아 지방을 통과해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당시 사마리아사람들은 같은 이스라엘 백성이면서도 서로 대적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을 맞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기원전 721년 아시리아에 의해 북부 이스라엘이 멸망할 당시 사마리아에서 이스라엘인들을 쫓아내고 이방인들을 살게 하였는데, 훗날에 쫓겨난 이스라엘인들이 돌아와 그들과 같이 살게 되어 혼종이 생기게 되었고, 이에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을 같은 민족으로 취급하지 않고 이방인으로 멸시하게 되면서 서로 적대시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열왕 17,24-41 참조)
또한 예수님께서는 유대인들이 유일한 중앙 성소로 여기고 있는(신명 12,4-14 참조) 예루살렘 성전으로 향하여 가시는데, 사마리아인들은 아브라함이 이사악을 바치려했던 그리짐산의 중앙 성전으로 받아들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예수님을 맞아들이지 않는 사마리아 사람들을 보고, ‘천둥의 아들’(마르코 3,9)이라 불린 야고보와 요한이 말합니다.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내려 저들을 불살라 버리기를 원하십니까?”(루카 9.54)
여기에서 우리는 주님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는 제자들의 못난 마음을 봅니다. 사실 앞 장면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미 제자들에게 “누구든지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루카 9,47)라고 하셨건만, 그들은 자신들을 맞아들이지 않는 사마리아인들을 대적하여 보복하고 응징하려 한 것입니다.
혹 우리도 오늘 자신을 맞아들여주지 않는 이들에게 보복하고 응징하고 단죄하는 못난 마음을 가지고 있지 않는지 들여다보아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비록 우리가 걷는 길이 우리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할지라도, 기꺼이 예수님과 함께 가야 할 일입니다. 또한 몸은 예수님과 함께 가면서도 실상은 예수님과는 반대 방향으로 달려가고 있지 않는지 살펴보아야 할 일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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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샘 기도>
주님!
제 마음이 당신의 마음을 헤아리게 하소서.
응징이 아니라 끌어안게 하시고, 보복이 아니라 감싸 안게 하소서.
파괴가 아니라 건설을 도모하게 하시고,
용서할 뿐만 아니라 선을 더하여 갚게 하소서.
주님, 제 마음이 당신 마음에 들게 하시고,
당신의 기쁨이 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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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성화의 여정>
-시종여일(始終如一)한 삶-
가을의 절정이자 묵주기도 성월에 전교의 달 10월 첫날 오늘은 “아기 예수의 데레사 동정 학자 기념일”입니다. 어제는 성 예로니모 기념일이었고 글피인 10.4일은 성 프란치스코 기념일입니다. 참 아름다운 꽃같은 성인들입니다. 꽃의 색깔, 크기, 모양, 향기가 다 다르듯 성인도 다 고유의 아름다움을 지닌 꽃같은 분들입니다. 지금까지 여전히 저를 행복하게 하는 좌우명 같은 시(詩)입니다.
“꽃같은
하루
꽃같이
살자”
성인 축일은 기념하고 기억하라고만 있는 것이 아니라 각자 꽃같은 성인이 되라고 있습니다. 그러니 믿는 이들은 누구나 각자 고유의 성인이 되라 불림 받고 있는, 날로 주님을 닮아가고 있는 성화의 여정중에 있는 성소자들임을 깨닫습니다. 오늘 기념하는 작은 길, 작은 꽃이라 불리는 성녀 소화데레사는 비록 꽃다운 나이 스물 넷에 선종했지만, 여전히 끊임없이 감동을 선사하는 참으로 아름답고 향기로운 성녀입니다.
비오 10세 교황은 성녀를 현대의 가장 위대한 성인이라 불렀고, 비오 11세는 사후 2년만에 시성하였으며, 성녀를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와 함께 선교사의 수호성인으로 선포하고, 비오 12세 교황은 성 조안 오브 아크와 함께 프랑스의 공동수호성인으로 선포하였습니다. 성 요한 바오로 2세는 성녀를 보편교회의 박사로 선언합니다. 시에나의 카타리나와 아빌라의 데레사에 이어 세 번째입니다.
성녀의 삶은 복음의 메시지에 매우 가까웠고, 고통중에도 용기, 힘, 자기희생의 위대한 정신을 보여주었으며, 성녀의 내적 금욕주의는 단순한 외적 행위보다는 사심없고 무조건적인 순종에 기초했습니다. 작은 길로 알려진 성녀는 거룩함을 얻기위해서는 영웅적인 행동이나 위대한 행위가 필요없다는 것을 깨닫고 다음처럼 고백합니다.
“사랑은 행위들로 입증된다. 나는 어떻게 나의 사랑을 보여줄까? 위대한 행위들은 나에게 금지되어 있다. 내가 내 사랑을 입증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꽃을 뿌리는 것이고, 이 꽃들은 모든 작은 희생, 작은 시선과 말, 그리고 사랑을 위한 가장 작은 행동들이다.”
평범의 비범을 살았던 일상의 성녀, 소화데레사입니다. 임종 직전의 극심한 병고중에 감동적인 고백들을 소개합니다.
“나는 더 이상 고통을 겪을 수 없는 지경이 이르렀다. 모든 고통이 나에게는 달콤하기(sweet) 때문이다.”
“나는 매우 작은 영혼이어서 주님께 작은 것만을 바칠 수 있다.”
“나는 천국에서 보낼 시간을 이땅에 좋은 일을 하는데 쓰겠다.”
“내가 죽은 뒤에는 장미꽃이 비처럼 쏟아질 것이다.”
사랑으로 ‘교회의 심장’이 된 소화데레사는 누구보다 예수님을, 예수님의 교회를 사랑했고 예수님의 사랑을 닮았습니다. 사랑하면 닮습니다. 어제 참 많이 나눴던 10월 한달 행복하게 할 선물처럼 찾아 온 다음 시에 감사합니다. 불암산을 바라볼 때 마다 떠오르는 고백입니다.
“산앞에
서면
당신앞에
서듯
행복하다”
언제 어디서든 주님 앞에서의 삶이라면 참 아름답고 행복한 삶일 것이며 바로 성녀 소화데레사는 물론 모든 성인들의 삶이 그러했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의 예루살렘 도상의 십자가의 길이 참 감동적인 아름다움입니다. 우리 믿는 이들 모두가 걸어야 할 길입니다. 서두의 묘사가 단호한 아름다움을 보여줍니다.
‘하늘에 올라가실 때가 차자,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시려고 마음을 굳히셨다.’
성화의 여정은 십자가의 여정이자 하늘 향한 여정임을, 수난과 죽음, 부활과 승천의 여정임을, 궁극의 영적승리의 여정임을 깨닫습니다. 어디가나 반대자들은 있기 마련이요, 예수님은 사마리아인들의 마을을 통과하는 것이 거부되자 불같이 화내는 야고보와 요한 두 제자의 어리석음을 꾸짖고 불필요한 마찰을 피한후 지혜롭게 다른 마을을 통과해 예루살렘 여정에 오릅니다. 추호의 주저함이 없는 단호하고 아름다운 사랑의 처신입니다.
예수님도 아름답고 예수님을 지극히 사랑했던 소화데레사도 아름답습니다. 참으로 극도의 시련중에도 치열한 사랑으로 사명을 다했던 거룩한 분들입니다. 이 두분과 더불어 언급하고 싶은 인물이 제1독서의 욥입니다. 욥의 치열함이 참으로 감동적인 아름다움을 선사합니다. 욥은 입을 열어 제 생일을 저주하지만 결코 하느님을 저주하지는 않습니다.
“어찌하여 내가 태중에서 죽지 않았던가? 어찌하여 내가 모태에서 나올 때 숨지지 않았던가?... 나 지금 누워 쉬고 있을 터인데. 잠들어 안식을 누리고 있을 터인데...어찌하여 그분께서는 고생하는 이에게 빛을 주시고, 영혼이 쓰라린 이에게 생명을 주시는가?...어찌하여 앞길이 보이지 않는 사내에게, 하느님께서는 사방을 에워싸 버리고는 생명을 주시는가?”
하느님께서 침묵하시고 사방이 막힌 절망적 암흑같은 극한 상황중에서 ‘어찌하여’로 계속되는 처절한 물음이 일종의 치열한 기도처럼 생각됩니다. 끝까지 하느님 끈을 놓지 않고 온갖 부정적 말마디로 기도하는 치열한 아름다움의 극치를 보여주는 참사람 욥입니다. 그동안 믿고 희망했고 사랑했던 하느님이 없었다면 아예 이런 넋두리 기도도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내 목숨처럼 사랑했던 독자(獨子)를 잃은 어머니가 원망할, 울부짖을 하느님이라도 계셨기에 죽음 같은 고통을 살아낼 수 있었다는 고백도 생각납니다. 욥의 수난과 시련의 삶에서 예수님을, 또 소화데레사의 고통으로 점철된 삶에서 예수님을 봅니다.
참으로 ‘하느님의 전사’답게 결코 좌절하여 쓰러져 무너지지 않고, 끝까지 사명을 다하면서 치열한 아름다움을 살았던 세분들이요 우리 삶의 좌표가 됩니다.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시종여일, 성화의 여정에 결정적 좋은 도움을 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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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하늘에 올라가실 때가 차자,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시려고 마음을 굳히셨다."(루카9,51)
<(1)예루살렘!>
오늘 복음(루카9,51-56)은 '사마리아의 한 마을이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다.'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려고 마음을 굳히십니다. 예수님께서 올라가시려고 마음을 굳히신 예루살렘은 '예수님의 때(kairos)'가 기다리고 있는 곳입니다.
예수님의 여정은 갈릴래아에서 시작하여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여정입니다. 예루살렘은 예수님께서 이 지상에서 해야 할 마지막 일이 기다리고 있는 곳입니다.
그것은 바로 배척과 죽음입니다. 그곳에서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짊어지십니다. 그곳에서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많은 고난을 받으시고 죽으셨다가 다시 부활하십니다.
예수님의 삶은 사람들로부터 배척받으시는 삶이었습니다. 오늘 복음도 예수님께서 사마리아인들로부터 배척당하시는 말씀입니다.
"아버지, 제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십시오."(루카 22,42ㄴ)
예수님께서는 이 모든 배척을 받아들이셨습니다. 그것이 당신을 파견하신 하느님 아버지의 뜻이었기 때문입니다.
시월의 첫날, 묵주기도 성월의 첫날인 오늘은 '작은 꽃(小花)'이라고 불리는 '아기 예수의 성녀 소화 데레사를 기억하는 날'입니다. 오늘 영명축일을 맞이한 자매님들께 축하의 인사드립니다.
'소화 데레사 성녀'는 열다섯 살에 가르멜 수도원에 들어가 결핵을 앓다가 스물네 살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10여년의 짧은 수도 생활이었지만, 죄인들의 회개와 사제들, 특히 먼 지역에 가서 선교하는 사제들을 위해 끊임없이 기도하셨습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성인과 함께 '선교의 수호자'로 선포되셨습니다.
'세상 구원를 위하여' 모든 배척을 받아내신 예수님과 고통 속에서도 끝까지 예수님과 하나가 되셨던 성녀 소화 데레사를 기억하는 오늘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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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리아인들은 예수님을 맞아들이지 않았다."(루카9,53)
<(2)예수님을 맞아들이자!>
오늘 복음(루카9,51-56)은 '사마리아인들이 예수님을 배척하는 말씀'입니다. 유다인들로부터 배척을 받으면서 구원에서 배제되어 이방인 취급당하며 살아가고 있었던 사마리아인들이 예수님을 배척합니다. 예수님을 맞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러자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께 말합니다.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내려 저들을 불살라 버리기를 원하십니까?"(루카9,54) 예수님께서는 돌아서서 그들을 꾸짖으시고 다른 마을로 가십니다.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주님으로 모시면서 살아가는 우리들입니다. 주님 말씀에 귀 기울이고, 주님의 삶을 따라 살겠다고 약속한 우리들입니다. 그 길은 생명의 길이요 진리의 길입니다. 우리의 영과 육을 건강하게 하는 길이고, 죽음 저 너머에서 영원히 죽지 않고 살게 하는 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종종 사마리아인들처럼 주님을 맞아들이지 않는 죽음의 길을 걸어갈 때가 많습니다. 주님을 맞아들이지 않는 것은 주님의 뜻을 맞아들이지 않는 것입니다. 주님의 뜻대로가 아니라, 내 뜻대로 내 좋을대로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여기에서 주님께서 하시는 일(섭리)에 불만과 불평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주님을 맞아들이지 않는 것은 스스로 죽음의 길로 나아가는 자살행위와 같은 것입니다. 주님이신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죽음의 길에서 돌아서서 생명의 길을 걸어가기를 바라십니다.
'가난한 이들을 돕는 것이 곧 하느님을 섬기는 것'임을 깨닫고, 일생을 가난한 이들을 돕는 일에 헌신하신, '모든 자선 사업의 수호성인이신 성 빈첸시오 드 폴 사제를 기억합니다. 가난한 이들을 섬기고 죄인들을 위해 목숨을 바치신 예수님을 맞아들이면서 그분의 뒤를 충실하게 따라가는 하느님의 자녀들이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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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시려고 마음을 굳히셨다."(루카 9, 51)
하나의 작은 꽃이
자연스레 꽃길을
만들어갑니다.
아름다움은
길을 만듭니다.
아름다운
길은 언제나
마음속에 있습니다.
길은 예수님처럼
마음을 굳히는
이들의 길입니다.
예수님의 길이
우리의 길을
다시 따뜻하게
품어줍니다.
길은
사람입니다.
사람의 삶이
곧 길이 됩니다.
큰 길만
가려는 우리들에게
소화 데레사 성녀는
작은 길도 길임을
믿음으로 보여줍니다.
믿음의
길에서 만난
예수님을
보여줍니다.
아름다운 삶보다
아름다운 길은
없습니다.
작은 한 사람의
수도자 길이
가장 아름다운 길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향한
사랑의 길은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는 기쁨이
되었습니다.
무엇을 우리 또한
사랑해야 할지를
보여줍니다.
소박한 일상
소박한 기도로
소박한 주님께로
돌아서는 참된
기쁨이길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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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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