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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여자출정(女子出定)
- 여자가 선정에서 나오다
깨달음의 아라한 넘어 중생 제도하는 보살의 길 가야
깨달음 읊조리는 것과 실제 깨닫는 것 사이 엄청난 간극이 존재
석가모니 부처님 옆서 당당히 선정에 든 여인
임제의 수처작주 체득
옛날 문수(文殊) 보살이 여러 부처들이 모인 곳에 이르렀을 때, 마침 여러 부처들은 자신이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오직 한 명의 여인만이 석가모니 자리 가까이에서 삼매(三昧)에 들어 있었다. 그러자 문수는 세존에게 물어보았다. “어찌해서 저 여인은 부처님 자리에 가까이 할 수가 있고, 나는 그렇게 할 수 없는 것입니까?” 세존은 문수에게 말했다. “이 여자를 깨워 삼매의 경지에서 나오게 한 다음에, 네가 직접 물어보도록 하라!” 문수는 여인의 주변을 세 번 돌고서 손가락을 한 번 탁 튕기고는 여인을 범천(梵天)에게 맡겨 그의 신통력을 다하여 깨우려고 했으니 깨우지 못했다. 그러자 세존은 말했다. “설령 수백 수천의 문수가 있다고 하더라도 이 여자를 삼매의 경지에서 나오게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아래로 내려가 12억이라고 하는 갠지스강 모래알의 수처럼 많은 국토들 지나면, 이 여자를 삼매에서 꺼낼 수 있는 망명(罔明) 보살이 있을 것이다.”
그 순간 망명 대사가 땅에서 솟아 나와 세존에게 예배를 하였다. 세존은 망명에게 여인을 삼매로부터 꺼내라고 명령을 내렸다. 망명이 여인 앞에 이르러 손가락을 한 번 탁 튕기자, 여인은 바로 삼매의 경지에서 빠져 나왔다.
무문관(無門關) 42칙 / 여자출정(女子出定)
1. 문수는 지혜, 보현은 실천을 상징
서울을 북쪽으로 에워싸고 있는 북한산은 700~800미터 급의 수많은 봉우리들을 거느린 장대한 산입니다. 도처에 기암괴석이 즐비하고 아찔한 암릉들이 도처에 숨어 있어서 해발고도보다는 훨씬 더 고산의 풍모를 자랑하는 산이지요. 아마 서울과 같은 거대한 메트로폴리스 곁에 이만한 수준의 산이 있다는 것은 전 세계적으로도 특이한 경우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북한산이 백두산, 지리산, 금강산, 그리고 묘향산과 함께 대한민국의 오악(五嶽)에 당당히 속하게 된 것도 다 이유가 있었던 셈입니다. 과거에 북한산은 삼각산(三角山)이라고 불렸습니다. 북한산 동쪽 방향에 주봉인 백운대(白雲臺, 836.5m)가 있습니다. 이 백운대를 포함해서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두 봉우리, 그러니까 인수봉(仁壽峰, 810.5m)과 만경대(萬鏡臺, 787.0m)가 이루는 형세가 세 뿔처럼 보였기에 삼각산이라고 불렸던 거지요.
북한산의 명성을 직접 확인하려고 지방에서 올라오신 분들은 대부분 백운대를 중심으로 산행을 진행하곤 합니다. 그렇지만 이걸로 북한산을 경험했다고 말하기에는 충분하지 않을 겁니다. 백운대, 인수봉, 그리고 만경대와 쌍벽을 이루는 봉우리 군이 북한산에는 있기 때문이지요. 그렇습니다. 북한산 서쪽에는 문수봉(文殊峰, 716m)과 보현봉(普賢峰, 700m)을 정점으로 하는 웅장한 봉우리들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북한산은 백운대, 인수봉, 그리고 망경대로 이루어지는 동쪽 봉우리 군과 문수봉과 보현봉을 중심으로 하는 서쪽 봉우리 군으로 양분된다고 봅니다. 북한산의 서쪽 봉우리 군의 정점인 문수봉과 보현봉을 제대로 보려면, 청와대 뒷산인 북악산이나 인왕산에 올라 북쪽을 바라보면 됩니다.
흥미로운 것은 동쪽 북한산에 있는 봉우리의 이름들이 유교(儒敎)나 도교(道敎)에서 빈번히 사용되는 용어들과 관련이 있다면, 서쪽 북한산 봉우리의 이름은 불교(佛敎)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란 말은 불교에 관심이 있는 분들이라면 한번쯤은 들어보셨을 겁니다. 문수(文殊, Man͠juśrī)가 불교의 지혜를 상징하는 보살로 유명하다면, 보현(普賢, Samantabhadra)는 불교의 실천을 상징하는 보살입니다. 문수와 보현은 각각 석가모니의 왼쪽과 오른쪽에서 석가모니를 호위하고 있다고 알려져 있을 정도로 중요한 보살들입니다. 소승불교가 아라한(阿羅漢, arhat)을 강조한다면, 대승불교는 보살(菩薩, bodhisattva)을 강조합니다. 아라한이나 보살은 모두 깨달음을 지향하지만, 아라한과 달리 보살은 중생을 미혹에서 인도하는 역할도 수행합니다.
2. 보살은 대승의 인격적 이상이다
아라한이 스스로의 깨달음을 추구하는 자리(自利)에만 치중한다면, 보살은 자신의 깨달음뿐만 아니라 타인의 깨달음에도 힘을 기울인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보살은 자리(自利)와 이타(利他)를 동시에 수행하는 존재라고 할 수 있지요. 그래서 불교 학자들은 아라한이 소승불교의 이상적 인격이었다면, 보살은 대승불교의 이상적인 인격이라고 설명하는 겁니다. 이제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의 성격이 명확해지지 않나요. 문수보살의 이타행이 지적인 가르침에 중심이 있었다면, 보현보살의 이타행은 묵묵한 실천에 가깝다고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래서 문수보살이 석가모니에게서 직접 배웠던 아난(阿難, Ānanda)과 비슷하다면, 보현보살은 가섭(迦葉, Kāśyapa)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난이 ‘다문제일(多聞第一)’이라고 불릴 정도로 지적인 제자였다면, 가섭은 ‘두타제일(頭陀第一)’로 불릴 정도로 실천적인 제자였으니까 말입니다.
선종(禪宗)은 깨달음을 지적으로만 모색했던 교종(敎宗)을 비판하는 전통입니다. 말로 깨달음을 읊조리는 것과 실제로 깨닫는 것 사이에는 엄청난 간극이 있기 때문이지요. 그래서일까요. ‘무문관(無門關)’에 등장하는 48가지 화두를 살펴보면, 우리는 아난이나 문수보살이 폄하되어 있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무문관’의 마흔두 번째 관문에서 그렇게도 현명하다는 문수가 제대로 선정(禪定)에 든 여인네 한 명을 어찌하지 못하는 촌극이 펼쳐지고 있습니다. 사실 마흔두 번째 관문에서 우리가 만날 수 있는 문수보살 이야기는 이미 ‘대지도론(大智度論, Mahāprajnāp͠āramiātśāstra)’에도 ‘제불요집경(諸佛要集經)’에도 등장하는 이야기로 인용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선종 이전의 경전에 등장한 것을 선사(禪師)들이 하나의 화두로 발전시킨 것이 바로 이 문수보살 이야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적인 이해의 상징이었던 문수보살이 제대로 선정에 드는 여자만도 못하다는 취지의 이야기를 선사들이 놓칠 리 있었겠습니까. 선종의 정신은 지적인 이해와 논리적인 담론보다는 치열한 자기 수행과 실천을 강조하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자 이제 마흔두 번째 관문을 가로막고 있는 문수보살 이야기를 통과해보도록 하지요. 수많은 부처들이 석가모니의 처소에 모여들었나 봅니다. 이미 스스로 부처의 경지에 올랐다고 자임하던 문수보살도 회동에 참여합니다. 회동이 끝난 뒤 여러 부처들은 모두 자신이 있던 곳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한 여인만이 참선을 하다 삼매의 경지에 들어 석가모니 근처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삼매(三昧, samādhi)는 참선하여 무념무상의 경지에 이른 것을 말합니다. 일체의 잡념과 상념이 없기에, 삼매는 당연히 무아의 경지를 스스로 체현한 상태라고 할 수 있지요. 사실 이 순간 여인은 부처가 된 것이나 진배가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더군다나 모든 부처들이 다 떠나갔는데도 삼매의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는 것도, 또 석가모니 옆에서 위축되지 않고 당당히 선정에 들었다는 것도 이 여인이 이미 자신의 삶에 스스로 주인공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3. 분별적 지성 극복이 불립문자 정신
그렇습니다. 여인은 석가모니도 의식하지 않는 진정한 주인의 경지, 임제의 표현을 빌리자면 ‘수처작주(隨處作主)’의 경지, 그러니까 이르는 곳마다 주인이 되는 경지에 이른 겁니다. 그러나 석가모니의 처소에 들린 문수의 눈은 그저 여인은 보잘 것 없는 여인네에 불과했던 겁니다. 그래서일까요. 문수는 투덜거립니다. 지혜롭다고 자임하는 자신은 한 번도 그렇게 가까이 석가모니 곁에 있었던 적이 없었으니까요. 그래서 볼멘소리로 문수는 불평을 토로했던 겁니다. “어찌해서 저 여인은 부처님 자리에 가까이 할 수가 있고, 나는 그렇게 할 수 없는 것입니까?” 문수의 어리석은 투정에 웃음이 나지 않으시나요. 사실 자신의 자리에서 주인이 되지 못하고 석가모니 근처에 앉고 싶었던 것은 문수 자신이니까요. 반면 여인은 석가모니 근처에 있으려고 한 것이 아닙니다. 그녀는 오직 자신의 자리에 앉아서 삼매에 들었을 뿐입니다.
바로 여기서 우리는 문수가 아직 부처의 경지에 이르지 못한 것을 직감하게 됩니다. 석가모니를 죽여야 스스로 부처가 될 터인데, 문수에게 석가모니는 결코 부정할 수 없는 하나의 절대적인 이상이었기 때문이지요. 문수의 투덜거림은 자신이 그 여인보다 경지가 떨어진다는 것을 무의식중에 누설하고 있었던 겁니다. 문수가 자신이 가진 모든 능력을 다해 여인을 삼매에서 깨어나게 하려고 해도 그럴 수 없었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이미 그녀는 문수가 어찌할 수 없는 경지에 이르렀기 때문이지요. 바로 이 대목에서 석가모니는 문수에게 마지막 한 방을 제대로 먹이게 됩니다. 문수보다 지위가 한 참이나 열등한 것처럼 보이는 망명(罔明) 보살을 불러 여인을 삼매에서 깨어나도록 했기 때문이지요. 사실 ‘제불요집경’에는 망명이란 등장하지도 않습니다. 망명은 선사들이 만들어 놓은 허구의 보살인 셈입니다. 바로 여기에 마흔두 번째 관문의 묘미가 있는 겁니다.
문수라는 한자를 보세요. ‘무늬[文]가 뛰어나다[殊]’는 뜻, 그러니까 세계를 분별하는 지성이 발달했다는 뜻으로 교종의 이론적 경향을 상징합니다. 반면 망명이란 글자는 ‘밝음[明]이 없다[罔]’는 뜻으로, 분별적 지성을 극복했다는 선종의 불립문자의 정신을 상징합니다. 마흔두 번째 관문의 화두를 만든 선사는 매우 영민했던 것 같습니다. 문수와 망명이란 글자를 통해 선종이 추구하는 정신을 멋지게 형상화했으니까 말입니다. 문수와 망명으로 상징되는 대립은 사실 전체 화두를 관통하고 있습니다. 문수가 의지했던 범천(梵天, Brahmadeva), 불법을 수호하는 신이라고 믿어졌던 범천은 ‘맑은 하늘’, 그러니까 모든 것에 통용되는 투명한 지성을 상징했던 겁니다.
반면 망명이 살고 있던 ‘거친 땅’은 삶의 세계를 상징합니다. 이 삶의 세계에는 번뇌와 망상에 빠진 중생들이 살고 있습니다. 바로 이곳에서 망명은 중생에게 자비를 베푸는 보살행을 실천하고 있었던 겁니다. 그러니 삼매에 들어 ‘자리(自利)’의 경지에 오른 여인보다 한 단계 수준이 더 높았던 셈이지요. 망명은 이타(利他)를 실천하는 진정한 보살이었으니까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