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조의 개국 대첩]
(명나라의 지시에 따른 이조개국과 고려 양민 20만 대살륙)
이성계부자가 이조를 개국한직후 전국에 고려왕씨를 모두 잡아 죽였는데 이사건이 이조개국대첩이라고 합니다 그때 죽어간 숫자간 약20만명인데 우리의 교과서역사에서는 이 사실을 철처히 은폐하고 있다.
나찌의 유태인학살/박해와 같은 일이었다.
3년에 거쳐 대대적으로 이루어졌는데 왕족직계의 수급은 쌀두가마니 친사촌계열은 한가마니 외사촌은 반가마니의 포상을지급했다.
이씨조선왕조실록 (1395년 4월 26일) 기록에 보면 왕씨(王氏)들은 모두 어머니의 성으로 바꾸도록 명령했다. 이를 볼때 얼마나 철저하게 왕씨를 박멸했는지 짐작할수있을것이다. 이조 정조때 왕씨로 다시 원래 성을 바꾸어 사용하라고 명하였다. 그리고 왕씨의 본관을 옛 고려의 수도인 개성이라고 하고 왕원을 1세 조상이라고 명하였습니다. 허나 여전히 이러한 사실을 모른체 생활 하는 사람이 많았고 세월이 많이 흘러 자신의 혈통의 시조가 누군지는 알 수 없게 하였다.
[개성(開城) 왕씨(王氏) 유래]
개성왕씨의 시조 산해는 주신시대 신려(성주)이었는데, 후에 중국 황제 헌원씨가 되었고 헌원의 17세손 조명은 유누와 함께 동래하여 지금의 평양 일토산하에 정착하였다. 그후 조명의 후손 수극은 기자가 왕이 되었을 때 사사가 되었고 왕씨로 사성을 받았다. 그 후, 수극의 12세손 贄(지), 贄의 45세손인 염염의 13세손인 몽으로 이어져 왔는데 몽은 신라건국 초기에 시중을 지냈다.
당시 비결에 일토초가위왕이라 하였으므로 그 화가 미칠까 두려워 일곱째 아들 琳(임)을 데리고 지리산에 들어가 10여년간 수도 이인의 가르침에 따라 전, 신, 차 등으로 세 번 변성하였고 무일이라 개명하였다 하며 차무일의 셋째 아들이 왕식시였고 그의 후손인 건(고려태조)이다.
그는 송악군(개성의 고호)사람으로 신라 말기에 사직의 위기와 민심이 신라에서 이탈됨을 깨닫고 901년 궁예가 신라에 반기를 들고 자립하여 후고구려를 세우고 왕이 되었을 때 그를 도와 913년 시중이 되었다. 그러나 궁예의 횡포가 나롤 심해지자 민심이 궁예를 싫어하고 건을 추앙하게 되어 918년 6월에 례하장군등이 궁예에게 반기를 들고 원래 주신의 성주였던 가문의 건을 추재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왕씨 일가가 500여년 향국하였던 시원이다.
건은 국호를 구려를 계승한 뜻으로 고려라 하고 국기를 튼튼히 하여 마침내 신라 백제 려진을 통일하여 국위를 선양하고 민족문화를 후세에 전수하는 데 큰 업적을 남겼다. 따라서 왕씨일가의 세력도 크게 번성하였는데 이성계가 위화도에서 반역을 일으키고 이씨조선을 개국하여 대대적인 살륙을 가하니 산속깊이 숨어들은 일부는 옥(玉), 금(琴), 마(馬), 전(田), 전(全), 김(金)씨 등으로 변성하여 혈맥을 지속해 오다가 정조때에야 비로소 문헌을 조사하고 전국 각처로 수단이나 세보를 기록하게 되었으며 내주가 수도로 정한 송도(개성고호)를 연유하여 본관을 보성이라 하였다.
그리고 원(垣) (동양군)을 1세조로 함은 대부가 헌자를 할아버지라고 말하지 않기 때문이며 신종의 제2자서(양양공파)고종의 제2자(안경공파)충정왕자 제(시중공파)현종의 제4자 기(평양공파)등을 각각 파조로 하여 계세하고 있다.
고려의 장군이었던 이조 태조 이성계는 명나라의 밀명으로 위화도 회군하여 정권을 잡은 후, 다시 명나라의 명에따라, 우왕과 실권자인 최영장군을 "중국을 정벌하려한 죄"귀양 보낸 후에 살해하고 우왕의 아들인 창왕을 옹립한 후에는 "중 신돈의 자손이라고 모략"하여 또 살해하고 고려의 왕손인 공양왕을 옹립 한 후에는 "정신이 이상하다"고 모략하여 폐위시킨 후에 강제로 왕위를 넘겨 주게 한 후, 1392년에 역시 명나라의 명을 받아 이씨조선왕조를 창업을 한다.
고려의 장교였던 화교출신 이성계가 고려왕조를 멸망시키고 조선왕조를 창업한 것이다.
고려왕조를멸망시키고 새로운왕조(조선) 를세운 이성계는 고려왕조에 대한 백성들의 재건움직임등에 직면하자 명나라로부터 대대적인 숙청을 실시하라는 명을 받게되자, 후일의잡음등을 없애고저 전국적으로 고려의 신하들과 왕족들을 색출하여 살해하게 된다.
일례로 그 수법중의 하나를 소개하자면 개성의 왕씨들을 모두 체포하여 모았는데 그 수가 3만에 이르렀다. 이조왕실은 왕씨들을 각 섬에 귀양보낸다는 이유로 커다란 배 1600척을 만들게 한다음, 저녁무렵에 일시에 배에태워 바다로 나간후 심야에 이르자 배의 바닥을 뚫어 배를 침몰시켜 수장하는 수법을 썼습니다.
이러한 사실이 알려지자 남은 일족들은 심산유곡 깊은곳으로 도망쳐 성을 바꾸어 살게 되었는데 성을바꾼내역은 다음과 같습니다. (王--玉(점을찍음) 全(갓을씀) 田(옆을막음) 등등하여 왕씨가아닌겄처럼 살며 생명을유지했는데 이전에 이러한 성씨는 없었다는 사실이 이성씨들이 왕씨임을 증명한다.
또한, 고려의지조있는신하들은 강원도 정선의두문동으로숨어들어가 평생을그곳에서살았습니다. 그분들을(두문동출사105인,杜門洞出仕105人) 이라고하여 충절의표본이 되었는 바. 그후로
5백년의세월이 자나 이조가 왜에 멸망하자 본래의성씨를 찾아 왕씨가되었다. 오늘날 왕씨는 이러한 모진 풍파속에서 살아남아 전해져 온 수난의 성씨이다.(두문동출사72현 이라고해서 원래광덕산의두문동에 들어가신분중에 일부는 정선의두문동으로 거처를옮겨 은거하신것임)
연개소문의 비도(날아가는 칼=표도)의 진실
"연개소문이 다섯 자루의 칼을 차고 다니고 말을 타거나 내릴 때 땅에 엎드린 무장들의 등을 밟고 오르내려 백성들이 두려워했다"는 기록은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다. 우리회원은 아시겠지만 <<삼국사기>>는 이조태조 이방원이 원본 해동사를 없애고 삼국지를 토대로 중국의 기록을 근본으로 하여 재편한 중국위주의 사서이다. 오늘날 학교국사의 표본이 된것인데 이로 볼때 위의 기사는 唐 태종 이세민에 의한 연개소문의 인간성에 대한 여론조작으로 밖에 볼 수 없다. 당시 연개소문의 생존시 구려는 강했고 연개소문에 의해 멸망직전까지몰렸던 당태종으로써는 죽이고싶도록 미웠던 인물이라 나쁘게 묘사하고 있는것임은 두말할나위가 없다.
다섯 자루의 칼을 차고다니는 것은 구려 당시의 일반적인 모습으로써, 실력이 명예나 권위를 상징하는 실사구시의 구려시대에서 특별한 모습은 아니었다. 당나라에서 쓴 책인 한원이라는 책에는 고구려 사람들은 허리에 긴칼1자루와 별도로 등어리에 짧은 칼 5개를 별도로 차고 다닌다 라고 나와있는데 고구려의 고분벽화에서도 무사들을 보면 옆으로 칼을 몇개씩 차고 있음을 볼수있다.(벽화상태가 안 좋으나 자세히 보면 알수있음) 즉 비도는 던지는 칼로써 구려의 군사들의 비도술은 그 정확도가 활만큼이나 정확하여 중국인들에게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고구려의 사람들은 특히 지배계층에서 무예를 갈고 닦아 전쟁이 나면 솔선수범하여 큰 전공을 세웠으나 이조시대는 그 반대로 양반들은 상스럽다 하여 병역면제여서 전쟁나면 앞서 도망갔으므로 중이나 상놈,천민들이 의병을 조직하여 나라를 지킨 특징이 있는 시대였다. 칼5개를 별도로 차고다니면서 사냥하고 고기를 썰어먹는 오자도라는 칼모습을 보는 중국인들은 소름이 끼쳤다고 한다.
연개소문만이 특별하다는 증거로 칼 5개를 차고 다녔닌것이 아니라 구려시대의 보편적인 사회상이었다는 것이다.
연개소문은 고구려 최고 대신인 태대대로였다. 그 자신이 일반적인 무인의 복장을 하였다는 것은 그 자신이 솔선수범하는 모습을 천하에 보여주는 리더쉽이었다고 보여진다.
첫댓글 패스~
ㅇㅇㅇㅇㅇㅇ.......................... 그렇군요 감사
읽어보신분 요약좀요
왕씨를 잡아 죽인 것은 사실이지만 20만명이라니 -_-
딱히 거짓이다라고 할 이유없어보이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