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판으로 본 세계사」 저자 ; 박형남. 1960년생. 현직 판사
소크라테스 재판
소크라테스(BC 469~BC 399)는 고대그리스의 철학자로서 석가‧공자와 함께 세계 3대 성인으로 불
린다. 그가 살던 작은 도시국가 아테네는 왕정으로 출발했다가, 귀족들이 실권을 장악한 뒤부터 귀
족정으로 바뀌었다.
해상무역으로 부를 쌓은 상인들과 수공업자들은 귀족들에게 불만을 품고 솔론을 지도자로 뽑아 민회
를 중심으로 귀족들과 평민들의 권리와 의무를 조정하는 정책을 시행할 것을 요구했다.
평민들의 요구에 따라 지도자로 추대된 솔론은 여러 개혁정책을 추진했지만, 귀족들과 평민들 모두에
게 지지를 얻지 못해 이내 물러났다. 뒤를 이어 페이시스트라토스가 무력으로 권력을 장악한 뒤 스스
로 참주(僭主. 비합법적으로 권력을 장악한 독재자)에 올라 빈민을 구제하고 경제성장을 도모하는 정
책을 시행했다.
BC 6세기 말에는 클레이스테네스가 등장하여 귀족들의 권력다툼으로 혼란을 겪던 정세를 안정시키
고 여러 가지 개혁적인 정책을 수행하기 시작했다. 그는 배심원 제도, 평의회 제도, 추첨으로 임명한
공직자에게 수당을 제공하는 제도, 도편(陶片. 사금파리) 투표를 통해 독재자가 될 위험이 있는 인물
을 국외로 추방하는 제도 등을 시행하여 평민의 권한을 확대하면서 세계 최초로 급진적인 직접민주
주의를 구현했다. 18세 이상의 자유민 남자들은 평의회에 참석하여 공동체에 중요한 영향을 끼치는
사안에 대해 의견을 진술하고 투표로 의사를 결정했으며, 배심원 재판에 참여하여 죄인의 형벌을 결
정할 수 있었다. 재판을 담당하는 배심원은 투표를 통해 선출했으며, 시민 누구나 잘못을 저지른 사
람을 고발할 수 있었다.
BC 490년에는 동방의 대제국 페르시아가 그리스의 도시국가들을 침략한 페르시아전쟁이 일어났다.
아테네는 다른 도시국가들과 연합하여 마라톤전투와 살라미스해전에서 승리를 거둠으로써 페르시아
軍을 패퇴시켰다. 이후 중무장 보병과 갤리선의 노잡이로 참전한 평민들의 권한이 대폭 확대되었다.
이 승전으로 아테네는 그리스의 최강 도시국가로 급성장했으며, 소아시아까지 식민지를 확대하여 최
전성기를 구가했다. 내친 김에 아테네는 라이벌 스파르타를 제외한 도시국가 연합체 델로스동맹을
결성하여 강력한 해군력과 왕성한 무역으로 부를 축적해나갔다. 소크라테스가 거리의 철학자로 등장
한 것도 바로 이 무렵이었다.
그러나 아테네의 영광은 오래가지 못했다. 델로스동맹 체결에서 소외된 스파르타가 南그리스의 도시
국가들과 펠로폰네소스동맹을 체결하여 델로스동맹 도시국가들을 상대로 펠로폰네소스전쟁을 벌인
것이다. BC 431년에 시작된 두 동맹 간의 전쟁은 BC 404년 아테네가 스파르타에 항복하면서 막을 내
렸다. 아테네는 전란과 전염병과 국외 이주로 급격히 인구가 감소했으며, 전비와 스파르타에 지급한
배상금으로 재정이 바닥나면서 혼란이 극에 달했다.
BC 404년, 스파르타의 묵인 아래 귀족들과 부유층이 쿠데타를 일으켜 <30인 과두정권>을 수립했다.
이들은 권력을 잡자마자 시민들과 외국인들의 재산을 약탈하고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지도자 1500여
명을 처형했다. 참정권도 부유한 시민 3000명에게만 부여했다. 공포정치의 시작이었다. 민주주의를
경험했던 시민들은 군대를 조직하여 <30인 과두정권>과 한판 뜨기로 결정했다. 이에 놀란 과두파 인
사들은 협상을 제안했고, 논의 끝에 민주정으로 복귀하되 반대파를 직접 살해한 자를 제외하고는 일
체 죄를 묻지 않기로 했다. 겉으로는 평온을 되찾았지만 피비린내를 풍기던 갈등의 트라우마는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BC 399년 5월 3일 아침, 소크라테스는 재판을 받기 위해 아고라(광장)에서 열린 아테네배심원법정에
출석했다. 소크라테스도 젊었을 때는 1년 동안 평의회에서 일했으며, 중무장 보병으로 세 번이나 페
르시아전쟁에 참전한 공로로 ‘용감한 군인 상’을 받기도 했었다. 그러나 40세가 지난 뒤부터는 일반
시민들과 전혀 다른 길을 걷기 시작했다. 일은 하지 않고 아테네의 시장과 거리를 돌아다니면서 만나
는 사람마다 철학적인 질문을 던져 자신이 무지하다는 사실을 일깨워주고 올바른 삶을 살도록 이끌
어주기 위해 노력했다. 호불호가 극명하게 갈렸다. 더구나 펠로폰네소스전쟁에 져서 극도로 민감해
져 있던 시민들은 소크라테스를 희생양으로 삼기 위해 법정에 세웠다. 역사적으로 유명한 소크라테
스 재판이 벌어진 것이다.
공동 고발인은 시인 멜레토스, 웅변가 리콘, 정치인 아니토스 등 3인이었다. 고발장에 따르면 소크라
테스는 제우스를 비롯한 올림포스의 신들을 부정하고 새로운 신을 숭배하고 있으며, 아테네의 젊은
이들을 타락의 길로 이끌고 있다는 것이었다. 재판은 제비뽑기로 선출된 배심원 500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진행되었다. 배심원들의 직업은 매우 다양했다. 상굿도 판사‧검사‧변호사‧증인 등이 재판에 관
여하는 현대적 재판제도가 갖춰져 있지 않은 시절이었다. 상급법정도 없어 재판은 배심원 과반수의
의견으로 단번에 완료했다. 배심원들은 고발인들과 소크라테스의 진술만 듣고 하루 만에 결정을 내
렸다. 소크라테스에게 극심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던 고발인들은 여러 사람의 도움을 받아 장황한 내
용으로 배심원들을 설득했지만, 소크라테스는 증인은커녕 제자들의 지원요청마저 거절하고 혼자 힘
으로 변호를 계속했다.
플라톤이 지은 「소크라테스의 변론」에는 소크라테스의 변론 내용만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고 재판
절차나 고발인들의 변론은 생략되어 있다. 그의 변론은 고발의 배경이 된 사유에 대한 1차 변론, 유죄
판결 이후 형벌에 대한 2차 변론, 사형이 선고된 후 소회를 밝히는 3차 변론으로 구성되어 있다. 「재
판으로 본 세계사」에는 소크라테스의 변론 내용이 7페이지에 걸쳐 자세하게 나와 있지만 생략한다.
배심원들은 하루 종일 진행된 재판에서 소크라테스를 사형에 처하자는 고발인들의 제안을 360 대 14
0으로 가결했다. 소크라테스는 3차 변론에서 유‧무죄를 판결한 배심원들에게도 장황하게 자신을 변
론하지만 판결을 뒤집을 수는 없었다. 「소크라테스의 변론」에는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저 유명한
말이 기록되어 있다.
“아니 벌써 나는 죽으러, 여러분은 살러 갈 시간이 다 되었군요. 우리 중에서 어느 쪽이 더 좋은 길을
향해 가고 있는지는 올림포스의 신들만이 알 것입니다.”
소크라테스의 사형은 아테네 건국자 테세우스를 기리기 위해 아폴론 신에게 제사를 올릴 때까지 연
기되었다. 그 사이 어릴 때부터 친구인 크리톤이 감옥으로 소크라테스를 찾아와 간곡하게 탈출을 권
고하지만, 소크라테스는 ‘탈옥은 국법과 국체를 파괴하는 짓’이라면서 탈옥 권유를 거절했다. 크리톤
이 소크라테스를 설득한 내용과 소크라테스가 탈옥 제안을 거절하는 이야기는 크리톤이 직접 쓴 책
「크리톤」에 자세하게 나와 있다.
출처:문중13 남성원님 글
첫댓글 제3국 경유를 통한 북한개별관광을 북한과의 유대 인양 대통령의 신년 기자회견에서 언급 하였지만 정작 당사자인 북한이 호응 없으면 실현될수 없는 허망한 시나리오에 불과 할 뿐 입니다. 유엔 제재가 그대로 이고 미국 역시도 변함없는 원칙 임에도 주한 미대사를 정부 여당이 비난하는 처사는 옳지 못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