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bituary
<갬빗>의 앨런 릭먼.
“그럼 지금까지도?”(After all, this time?) 덤블도어 교수의 물음에 스네이프는 단호히 답한다. “언제까지나.”(Always.) 방대하지만 무난한 서사시 <해리 포터> 시리즈는 이 짧은 대사 한마디를 통해 어른들의 이야기로 거듭났다. 비극적 영웅 스네이프 교수는 사랑하는 여인의 아들이라는 이유만으로 자신을 희생해서 해리 포터를 구했다. 온갖 오명과 모욕, 고통 속에서도 그는 의연하다. 세베루스 스네이프의 관점에서 다시 읽은 <해리 포터>는 세상 다시 보기 힘들 순애보다. 그의 마음은 선악의 구태의연한 구분이나 거대한 음모, 소년의 영웅담을 넘어선 곳에서 그때부터 지금까지, ‘언제까지나’ 릴리 포터 한 여인을 향한다. 만약 볼드모트가 릴리 포터를 되살리는 권능을 지녔다면 그는 기꺼이 악을 좇았을 것이다. 스네이프를 움직인 건 오직 사랑이었다. 그의 열정은 이 평범한 동화를 믿지 않았던 이들의 가슴속 깊은 곳까지 자맥질해 들어간다. 그러니까, 이건 사랑에 관한, 그리고 사람에 관한 이야기다.
다양한 캐릭터에 자신의 기품을 더하다
1월14일(현지시각) 영국 배우 앨런 릭먼이 69살로 세상을 떠났다. 주변에도 알리지 않았던 췌장암 투병 끝에 친지와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깊은 잠에 빠졌다. “우리는 훌륭한 배우를 잃었고, 유가족들은 심장의 일부를 잃었다”라는 J. K. 롤링의 추모사를 비롯해 충격과 슬픔 속에 추모와 애도의 글들이 이어지고 있다. 호그와트행 급행열차가 정차하는 런던 킹스크로스 9와 4분의 3 승강장에는 지금도 스네이프 역으로 열연한 그를 기리는 수많은 팬들의 꽃과 편지가 쌓여가는 중이다.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캐릭터였던 만큼 앨런 릭먼의 대표적인 역할로 기억하는 이들이 적지 않은가 보다. 다만 스네이프와 앨런 릭먼이 겹쳐 보이는 건 단지 유명한 배역이었기 때문은 아닌 것 같다. 1편에서 6편까지 평범한 악역으로 보였던 이 캐릭터에는 앨런 릭먼의 연기 인생을 압축시킨 정수가 녹아들어 있다. 입체적인 연기를 위해 스네이프에 얽힌 비화를 책이 나오기도 전에 미리 알려줬다는 J. K. 롤링의 선택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사실 롤링이 앨런 릭먼의 연기에 영감을 얻어 결말을 수정했다고 해도 그리 놀랍지 않을 것이다.
스네이프, 아니 앨런 릭먼을 대표하는 캐릭터는 한마디로 최고의 악당이다. 그는 데뷔작인 <다이하드>(1988)에서 한스 그루버 역할을 맡아 잔혹하면서도 기품 있는 악역이 무엇인지 증명했다. 그 존재감은 <다이하드3>에서 제레미 아이언스가 형의 복수를 위해 테러를 한다는 거짓말에 절로 수긍이 갈 정도다. 이후 케빈 코스트너 주연의 <로빈 후드>(1991)에서 노팅엄의 영주로 출연해 악명을 떨쳤다. 그는 이 작품을 통해 런던비평가협회상 남우조연상을 수상하고 MTV에서 그해 최고의 악당으로 꼽히기도 했다. 물론 그 밖에도 런던비평가협회상 남우조연상 후보에 오른 리안 감독의 <센스, 센서빌리티>(1995), 닐 조던 감독의 <마이클 콜린스>(1996) 같은 작품들도 있다. 앨런 릭먼은 몇 가지 한정된 역할에 스펙트럼을 가두는 배우가 아니라 다양한 캐릭터에 자신의 기품을 더하는 쪽이었기에 역할을 가리지 않았다고 보는 편이 맞을 것이다.
이는 애초에 연극에서 탄탄하게 다져진 기초로부터 기인한다. 1946년 런던 해머스미스에서 태어난 그는 8살에 아버지를 여의고 안정적인 수입을 위해 첼시예술대학에서 그래픽디자인을 전공했다. 학교 졸업 후 친구와 관련 회사까지 차렸지만 연기에 대한 욕구를 억누르지 못하고 3년 만에 왕립연극학교(Royal Academy of Dramatic Art)에 다시 입학해 연기를 시작한다. 이후 로열 셰익스피어 극단(Royal Shakespeare Company)의 배우로 활약한 그는 고전에 대한 폭넓은 이해를 바탕으로 셰익스피어의 적자가 되었다. 크리스토퍼 햄튼의 연극 <위험한 관계>에서 발몽 역을 맡아 토니상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오랜 연극 생활 덕분에 영화 데뷔는 다소 늦어진 셈이지만 첫 등장부터 강렬한 악역을 맡아 단번에 주목해야 할 배우의 명단에 올랐다. 이후 앤서니 밍겔라 감독의 <진실로, 미치도록, 깊게>(1991), 에미상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라스푸친>(1996)은 물론 1997년 각본과 연출을 맡은 <겨울방문객>을 들고 베니스국제영화제를 찾아 황금사자상 후보에 오르기도 하는 등 광범위한 영역에서 활동을 이어간다.
많은 작품에 출연했지만 그중에서 몇개만 고르라면, (지극히 주관적인 관점에서) <센스, 센서빌리티>와 <갤럭시 퀘스트>(1999), 그리고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2005)를 꼽고 싶다. 셋 다 필모그래피에서 대표작으로 남길 작품은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각각 악역과 함께 앨런 릭먼의 대표적인 이미지로 각인된 로맨틱한 남자, 시니컬하고 권태로운 표정, 그리고 동굴 같은 울림의 목소리를 만끽할 수 있는 역할이다. <센스, 센서빌리티>에서 마리안(케이트 윈슬럿)에게 지고지순한 사랑을 보내던 그의 수줍은 미소는 이 남자의 본질이 거기에 있는 게 아닌지 믿고 싶게끔 만든다. <갤럭시 퀘스트>에서는 한물간 SF배우로 등장해 망가지기를 주저하지 않으며 건조한 농담을 뿌려대고, <은하수를…>에서 우울증에 빠진 로봇 마빈의 목소리 연기를 맡아 녹음기사들이 사랑한다는 특유의 중후하고 나른한 발음으로 매력을 어필한다. 세 캐릭터 모두 겉과 속이 다른, 혹은 숨겨진 사연이 있는 스네이프 교수의 흔적이 묻은 조각들이다.
역할이 아니라 사람을 연기하다
다시 악역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한스 그루버는 악역인가. 브루스 윌리스의 대척점에 선 캐릭터로서는 당연하다. 그럼 앨런 릭먼의 한스 그루버는 어떤가. 선뜻 대답하기 어렵다. <로빈 후드>의 노팅엄 영주도 마찬가지다. 단지 악역을 입체적으로 표현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앨런 릭먼은 본인이 가진 아우라 덕분인지, 연기에 대한 철학이 있는 건지 정확히 알 길은 없지만(“배우는 한편의 영화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생전 인터뷰로 미뤄볼 때 후자인 것 같지만) 배역을 극중에 주어진 역할에 머물게 하지 않고 이야기 바깥으로 확장시킨다. <해리 포터>처럼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아도 캐릭터의 전사, 혹은 사정 같은 게 그의 표정에서 이미 감지되는 것이다. 그건 때론 노팅엄 영주의 우스꽝스런 얼굴에 묻어 있기도 하고, 한스 그루버의 단정한 몸가짐에서 배어나오기도 한다. 말하자면 그는 역할이 아니라 사람을 연기한다. 그것도 자신의 속마음을 쉽사리 드러내지 않고, 어쩔 땐 정반대로 표현하는 법밖에 모르는 미숙한 사람. 앨런 릭먼은 그 미숙함을 ‘고뇌’라는 이름으로 전달하는 배우다. 셰익스피어로부터 다져진 캐릭터에 대한 높은 이해와 표현력이라 칭찬해도 좋을 것이다. 다만 그를 떠나보낸 지금에 와선 오직 (연기와 인간에 대한) 사랑이었다고 말하고 싶다. 엄청난 연기 스펙트럼을 보여줬음에도 그 끝에 남는 건 항상 캐릭터가 아닌 배우 앨런 릭먼이었다.
그가 남긴 흔적에 기대 표현해보자면, 그는 스네이프처럼 용감했고 과시하지 않았으며 스스로에게 열정적인 삶을 살았다. 비밀주의라고 할 것까진 없지만 자연인으로서의 자신을 드러내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던 그는 2012년 리마 호튼과 비밀리에 결혼식을 올렸다. 19살에 만나 50년을 함께한 두 사람은 “아무도 없어서 더 좋았다”며 반지 하나 주고받는 간소한 결혼식으로 부부의 연을 맺었다. 주변에 떠들썩하게 알리지 않고, 첫 사랑과 마지막 사랑을 한 사람에게 바친 그의 삶에서 스네이프의 흔적을 발견한다고 해도 놀랄 일은 아니다. 연기도, 삶도 흔들림 없이 “재능을 배신하지 않고 할 일을 해왔을 따름”이라 말하는 이 멋진 저음의 소유자를 떠나보낼 준비는 안 되어 있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 사랑하는 것들은 예고 없이 우리 곁을 떠나기 마련이다. 80살이 되어도 <해리 포터>를 계속 읽겠다는 그의 소망은 이뤄지지 않았지만. 우리에겐 그의 숱한 작품들이 남아 있다. 비록 미래의 그를 만나볼 순 없을지언정 그가 남긴 기억들은 무심한 듯 다정하게 우리를 위로할 것이다.
“Always.” 글 송경원 2016-01-22
자료출처: 씨네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