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토머스 모어(1478~1535)는 영국 역사상 최고의 지성인으로 꼽히는 인물로서 인류의 이상향을 그린
소설 「유토피아」의 저자다. 사상가‧저술가‧법률가‧정치가로도 각각 일가를 이루었다. Utopia는 그
가 만든 신조어로 그리스어의 ou(없다)와 topos(장소)를 조합한 말이다. 즉 ‘어디에도 없는 세상’이
라는 뜻이다. 법률가의 아들로 태어난 모어는 14세에 옥스퍼드대학에 들어가 그리스어와 수학을 공
부했다. 18세 때는 링컨법학원에 들어가 4년 간 법학을 공부했으며, 22세 때는 법학교수와 변호사 자
격을 취득했다. 그는 철학‧역사학‧문학 서적도 두루 탐독하면서 다양한 분야의 인사들과 깊은 교우관
계를 쌓아나갔다. 4년 간 수도사 생활을 하던 모어는 ‘불충한 사제가 되느니 충실한 남편이 되겠다’며
1505년 수도원을 뛰쳐나와 제인 콜트와 혼인했다. 부부는 3녀 1남을 낳아 모두 기품과 교양이 있는
훌륭한 사회인으로 키워냈다.
모어는 공직생활에서도 성공가도만 걸었다. 모어는 1504년 하원의원에 선출되어 정계에 입문했다. 1
509년 18세의 젊은 나이로 국왕에 즉위한 헨리 8세(1491~1547)는 모어를 신뢰하여 잇달아 고위직에
임명했다. 모어는 1510년 하원의장과 런던 부시장 겸직을 시작으로 국왕재판소 판사, 추밀원 의원,
외교관, 재무차관, 잉글랜드왕국 하원의장, 랭카스터 왕실 직할영지 대법관, 잉글랜드왕국 수상 겸
대법관 등을 차례로 역임했다. 공직에 있는 동안 모어는 공정한 행정가로, 곤경에 처한 시민들의 보
호자로, 국왕과 국민들로부터 큰 찬사를 받았다. 특히 모어는 공정한 재판으로 정평이나 있었으며,
어떠한 뇌물도 단호하게 거절했다.

헨리 8세는 만능 스포츠맨인데다 라틴어와 프랑스어를 자유롭게 구사하는 지식인이기도 했다. 외모
도 걸출했고 다방면에 자질도 뛰어났다. 그러나 왕비 문제가 헨리 8세와 토머스 모어의 운명을 갈라
놓았다. 헨리 8세는 6세의 어린 나이에 죽은 형의 아내인 캐서린과 혼인했는데, 이는 캐서린이 당시
유럽 최강인 에스파냐 왕족이기 때문에 잉글랜드왕국의 안전을 위해 정략혼인을 한 것이다. 나이가
들어 보위에 오르자 늙은 왕비보다 젊은 여인들에게 마음이 끌리기 시작했다. 헨리 8세는 숱한 외도
끝에 캐서린의 시녀인 앤 불린에게 홀딱 반해버렸다. 하지만 깜찍하고 도발적인 앤은 정식 혼인하기
전에는 절대로 몸을 허락할 수 없다고 버텼다. 앤과 혼인하자면 캐서린과 이혼해야 하는데, 가톨릭法
은 이혼을 금하고 있었다.
헨리 8세는 밤잠을 설쳐가며 캐서린과 이혼할 방안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내세운 이유는
캐서린이 아들을 낳지 못하기 때문에 왕실의 대를 이을 수 없다는 점이었다. 캐서린은 딸만 6명을 낳
았는데, 어려서 모두 죽고 메리 공주만 살아남았다. 다음으로는 ‘제 형제의 아내를 데리고 사는 것은
추한 짓’이라는 성경의 한 구절을 이혼 사유로 내세웠다. 헨리 8세는 교황의 혼인 무효 결정을 받아내
기 위해 여러 경로로 줄을 댔지만 끝내 실패했다. 이에 교황 설득을 담당했던 토마스 울지 대법관이
혼인 무효 시도를 재고하라고 권고하자 화가 난 헨리 8세는 그의 재산을 몰수하고 교수형에 처해버
렸다. 그리고 토머스 모어를 후임 대법관에 임명했다. 그러나 모어 역시 헨리 8세의 혼인 무효 노력에
협조하기를 거부했다.

헨리 8세는 캐서린과 이혼하기 위해 교황청과 결별하는 방법을 택했다. 그리고는 국왕이 잉글랜드
교회의 수장을 겸하는 새로운 법을 만들기로 했다. 영국성공회는 이렇게 해서 탄생한 신흥종교다. 헨
리 8세는 잉글랜드왕국의 신학자와 성직자를 총동원하여 ‘왕과 캐서린의 혼인은 원천적으로 무효이
며, 왕의 혼인은 국가적 중대사이므로 교회법이 아니라 국법에 의해 결정되어야 한다’는 논리를 개발
하여 널리 알리도록 했다. 1532년 헨리 8세는 잉글랜드 교회가 교황청에 바치는 헌금을 폐지했으며,
대주교회의는 국왕의 동의 없이 중요한 결정을 내리지 않겠다고 선포했다.
그리고는 1533년 1월, 임신 중인 앤과 비밀리에 혼인했다. 아니, 정식 혼인하기 전에는 절대로 몸을
허락할 수 없다고 해놓고서는… 3월에는 교황청에 상소하지 못하도록 하는 법을 제정했으며, 5월에
는 국왕재판소로부터 헨리 8세와 캐서린의 혼인이 무효라는 판결을 받아냈다. 6월에는 앤을 왕비에
책봉했다. 이 일련의 사태에 분노한 교황은 즉각 헨리 8세를 파문했지만, 잉글랜드왕국 의회는 헨리
8세가 지상에서 잉글랜드 성공회의 유일한 수장이라고 선언하는 <수장법>을 제정하여 교황의 파문
이 헨리 8세에게 적용되지 않는다고 맞섰다. 잉글랜드 성공회는 더 이상 교황청 소속이 아니라 헨리
8세 소속임을 선포한 것이다.

헨리 8세와 의회의 조치가 매우 부당하다고 여긴 토머스 모어는 건강상의 이유를 들어 대법관직에서
물러났다. 왕이 이혼하는 것은 받아들일 수 있지만, 왕이 잉글랜드 성공회의 수장이 된다는 것은 세
속권력이 교회의 권위보다 우위에 놓이는 것이 되어 신앙의 자유를 훼손하는 일이므로 결코 용납할
수 없다는 신념에서였다. 그리고는 앤 왕비의 대관식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추밀원 의원
신분은 유지하면서 시민들의 존경을 받고 있었다. 헨리 8세를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토머스 크롬웰(1
485~1540)은 모어를 반대파의 지도자로 보고 그를 처단하기 위해 온갖 추악한 모함을 가했지만 이내
거짓임이 드러나곤 했다.
1534년 3월, 의회는 헨리 8세와 앤 불린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만이 왕위를 계승할 수 있다는 <왕위계
승法>을 제정했다. 이어 모든 신하들은 이 법의 효력을 지지하는 선서를 하도록 했다. 의회는 선서를
받기 위한 특별위원회를 설치했다. 1534년 4월 17일, 모어는 특별위원회에 소환되었다. 그 자리에서
<왕위계승法>에 왕을 잉글랜드 성공회의 수장으로 인정해야 한다는 구절이 포함되어 있는 것을 보
고 모어는 자신의 신념에 어긋난다며 선서를 거부했다. 5일 후, 특별위원회는 모어를 런던탑에 구금
하고 모든 재산을 몰수했다. 모어는 15개월 동안 구금되어 있으면서 온갖 방법으로 회유를 받았지만
끝내 거절하여 반역죄로 기소되었다.

1535년 7월 1일, 재판관 18명으로 구성된 재판부가 설치된 가운데 웨스트민스터 홀의 왕좌법정에서
모어에 대한 반역죄 재판이 열렸다. 법무장관 크롬웰이 장황한 허위 공소장을 낭독한 뒤 심리에 들어
갔다. 모어는 크롬웰이 제기한 공소 내용을 조목조목 반박했다. 재판부는 왕의 뜻에 따른다면 선처를
베풀겠다고 제안했지만 모어는 이 제안마저 거절했다. 마지막으로 모어의 최후진술이 끝나자 재판부
는 각본대로 그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토머스 모어는 1535년 7월 6일 처형되었다. 참수된 머리는 한
동안 런던교에 매달려 오가는 시민들의 구경거리가 되었다. 몇 달 뒤, 모어의 딸 마가렛은 아버지의
머리를 몰래 수습해다가 시댁 가문의 지하납골당에 안장해주었다.

사족 ; 헨리 8세는 앤 불린 왕비에게도 이내 실증을 느끼고 바람을 피우기 시작했다. 앤이 심하게 바
가지를 긁자 연산군보다 더 잔인한 헨리 8세는 앤이 여러 사내와 바람을 피웠다고 모함하여 반역죄
로 참수했다. 영화 《1000일의 앤》은 앤 불린의 불행한 왕비 생활 1000일 간의 이야기다. 헨리 8세는
이후에도 네 명의 왕비를 더 맞아들이며 질탕한 생활 끝에 죽었다.
출처:문중13 남성원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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