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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랭크 더프의 십자가 권용오 마티아 신부 안동교구 상주 가르멜 여자 수도원
‘프랭크 더프의 생애’를 저술한 로버트 브레드쇼 신부는 프랭크 더프가 레지오 마리애를 성장시켜가는 과정에서 큰 십자가를 져야 했다고 전합니다. 소수의 친밀한 사람들에게만 고백한 프랭크 더프의 십자가는 자신이 속한 더블린교구의 성직자들이 레지오 마리애를 불쾌하게 여기는 것이었습니다. 브레드쇼 신부는 프랭크 더프의 표현을 그대로 사용하여 “불쾌하게 여긴다”라고 썼지만, 객관적인 사실로 설명하자면, 레지오 마리애라는 단체 자체를 인정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더블린교구가 레지오 마리애 교본을 인준한 것은 레지오 마리애의 첫 모임이 열린 1921년부터 20년이 지난 1941년이었습니다. 이때는 이미 레지오 마리애가 전 세계로 확장세를 타고 있어서 그 영향력을 무시할 수 없었습니다. 더블린교구가 마지못해 인준해 주었을 것이라고 보는 것은 그 뒤에 나온 수정 교본에 대해서도 인준을 오랫동안 미루었기 때문입니다. 프랭크 더프에 대한 더블린교구의 불신이 얼마나 큰 십자가였을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브래드쇼 신부는 더블린교구의 성직자들이 레지오 단원들을 “참견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단언하였다고 합니다. 또 프랭크 더프가 교권에 반대하는 사람이고, 사제의 일을 대신하고 있다며 비난하였다고 전합니다. 프랭크 더프에 대한 더블린교구 성직자들의 비난과 불신은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을 연상케 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에 놀라면서도 자기들보다 못한 보잘것없는 목수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배척하고, 심지어 죽이려고까지 하였습니다. 피놀라 케네디의 분석에 따르면 더블린교구와 프랭크 더프 사이에 계속된 갈등의 근본적인 원인은 평신도 사도직에 대한 견해의 차이에 있습니다. 프랭크 더프가 제출한 수정 교본을 교구장이 즉시 인준하지 않고 거부한 이유는 신학적으로 정교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프랭크 더프는 신학자들에게 부탁해서 보완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교본은 교리서가 아니라 레지오 단원들을 위한 실천적인 지침서로서, 레지오 마리애가 앞으로 유지되고 발전하도록 지켜줄 수 있는 규범이 되어야 했습니다. 신학적인 정교함이 아니라 레지오 활동의 노하우를 전수하는 매뉴얼, 즉 안내서(handbook)가 되는 것이 중요하였습니다. 레지오 마리애 교본의 특징은 프랭크 더프 자신이 조셉 가베트에게서 배운 것과 같은 도제식 교육을 모델로 합니다. 그의 입장에서 교본의 수정은 레지오의 정체성과 존립이 걸린 문제였기 때문에 수정본을 사이에 둔 갈등에서 물러설 수 없었습니다. 평신도의 사도직 역량을 불신하는 교도권의 견제를 프랭크 더프는 인내하며 받아들여야 했습니다.
더블린교구 성직자들과의 갈등이 프랭크 더프의 십자가 협력관계여야 할 성직자와 평신도가 갈등관계로 발전하는 현상은 복잡한 사회 현실 안에서 불가피한 측면이 있습니다. 더블린 성직자들의 오해는 평신도 사도직에 대한 이해의 부족을 보여줍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평신도 사도직에 대한 명확한 정의를 내리고 사제의 사도직과 구별함으로써 레지오 마리애가 시대를 앞섰다는 것이 증명되었습니다. 교본은 레지오 사도직을 별도의 장으로 나누어 다루면서 사제와 레지오의 관계에 대해서 교황 비오 11세의 가르침과 일화로 설명합니다. 교황은 사도들이 평신도들의 협력을 받지 않았더라면 아무 일도 하지 못하였을 것이라고 말하고, 세상을 구원하는데 가장 필요한 것은 참다운 사도직 정신을 지닌 평신도라고 말했습니다. 프랭크 더프는 교황의 가르침에 힘을 얻어 성직자들과 갈등을 극복하고, 레지오를 사제의 충실한 협력단체로 성장시켰습니다. 프랭크 더프의 십자가는 레지오가 더블린교구를 넘어 전 세계로 향하게 하였습니다. 당시 교황 비오 11세는 가톨릭 액션을 강조하며, 평신도의 활동을 장려하였습니다. 프랭크 더프는 가톨릭 액션의 교황에게 레지오 마리애를 알리고 지지받을 생각을 하였습니다. 교구장의 소개서가 없었으나, 친구이자 아일랜드 수상이었던 윌리암 코스그레이브가 도와주어 1931년 기적적으로 교황 알현이 이루어졌습니다. 교황은 프랭크 더프에게 레지오에 대해 많은 질문을 하고, 또 무엇을 해주기를 바라는지 물었습니다. 프랭크 더프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교황 성하께서 레지오 마리애가 전 세계로 확장되길 개인적으로 바라신다.”는 말을 할 수 있도록 허락을 받았습니다. 그 순간 프랭크 더프의 십자가에 부활의 서광이 비치기 시작하였습니다.
십자가 없는 영광은 없다는 것을 레지오 마리애가 증거 프랭크 더프는 레지오 활동을 통해 많은 기적을 경험하였습니다. 그는 한 강연에서 이런 경험이 가능했던 것은 레지오 단원들이 기적을 필요로 했고, 또 기적이 일어날 수 있도록 대가를 치를 각오를 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였습니다. 레지오 마리애의 존재를 세상에 알리게 해준 첫 번째 기적은 더블린의 매춘부 31명이 집단으로 회개한 사건입니다. 병원 환자들만 방문하던 단원들이 더블린시의 매춘부 문제를 안건으로 다루었을 당시에 이 문제를 누구나 구제하기 어려운 사회문제로 간주하였고, 성직자들까지도 회피할 구실만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용기와 신념만으로 이 문제에 도전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프랭크 더프는 그 동기가 레지오가 하지 않으면 아무도 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단원들이 스스로 생각해낸 매우 소박한 해결방안은 매춘부들에게 봉쇄피정을 받게 하여 회개시키는 것이었습니다. 한 사람의 영혼이라도 구할 수 있다면 가치 있는 희생이라는 각오로 매춘부들을 개별 면담으로 설득하기 시작하면서 기적은 시작되었습니다. 매춘부들의 마음이 움직이고, 피정 장소를 제공하려는 수녀원이 나오고, 피정 지도를 자청하는 사제가 등장한 것은 물론 피정이 끝나는 날 새로운 삶을 위한 생활 터전을 제공하겠다는 시장의 확답까지 받게 됩니다. 이 모든 과정이 마치 예정이라도 된 것처럼 기적적인 연쇄작용을 일으켰습니다. 이 기적은 프랭크 더프에게 하느님의 현존을 느끼게 하였습니다. 브래드쇼 신부는 프랭크 더프가 회개하는 여인들에게 놀라운 은총이 쏟아지고 있는 것을 보면서 하느님의 크신 자비 앞에서 자신이 얼마나 작고 비참한지 느꼈다고 기록하였습니다. 레지오 마리애는 프랭크 더프의 십자가가 없었다면 세계적인 평신도 사도직 단체가 될 수 없었습니다. 만일 그가 교구 성직자들의 오해와 비난을 십자가로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레지오를 포기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반대로 그들의 편견에 굴복하였다면 세계적인 단체로 성장하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모두가 인정받기를 바라는 오늘의 사회 분위기에서 무시당하는 것은 죽음과 같습니다. 레지오 단원들도 자신들의 활동을 인정받지 못할 때 교회를 떠나고 싶은 충동을 느낄 것입니다. 프랭크 더프의 십자가는 이런 경우에 빛을 발합니다. 용기와 신념만으로 기적을 일으켰던 레지오의 힘을 보여줄 때입니다. 십자가 없는 영광은 없고, 십자가가 클수록 영광이 크다는 것을 레지오 마리애가 증거하고 있습니다. 레지오 단원들이 자부심을 가지고 레지오 마리애를 더욱 영광스럽게 빛내려는 열의를 가지도록 성모님께 기도드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