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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푸 행단호텔앞 공자상과 '행단유풍' 글씨
행단에서 바라본 취푸 대성전. 대성전은 그 규모가 중국 3대 전통건축물에 들어간다.
인물화에 뛰어났던 당나라 오도자가 그린 행단소영도(杏壇小影圖). 석각 탁본.
위진남북조시대 동진의 화가 고개지의 행단소영도와 비교하면 수염이 풍성하다.
두 사람의 행단소영도는 취푸 공묘孔廟 성적당聖蹟堂에 전해왔지만
현재는
오도자의 이것만 전해오고 있다.
화상찬畵像賛
덕모천지 德侔天地 덕은 천지와 나란하고 ,
도관고금 道冠古今 도는 고금에 으뜸이셨네.
산술육경 刪述六經 육경을 정리하고 기술하시어
수헌만세 垂憲萬世 만세토록 법도를 드리우셨네.
대성전 앞 행단
행단 앞의 어린 살구나무
행단 앞의 안내문
‘송나라 때 행단을 만들고, 여기에 살구나무(apricot)를 심었다. 정자는 금나라 때 행단터 위에 지었고 명나라 때 중건하였다. (The terrace was built in Song Dynasty, and apricot trees were planted here, the pavilion was built on the site of the terrace in the Jin Dynasty and rebuilt in the Ming Dynasty.)'
금나라 학사 당회영의 글씨 행단.
이 글씨의 탁본을 임원경제지를 쓴 서유구와 좌소산인 서유본의 아버지, 서호수가 연경에 사신으로 다녀오며 구해왔고, 오주연문장전산고를 편찬한 이규경이 서유본의 집에서 보았다.
청나라 건륭제의 행단찬비
비액(碑額): 황제가 지음(御製)
행단찬(杏壇贊)
기억하자니, 그 옛적 공자께서 임유(검푸르게 짙은 숲: <<장자>> <어부>가 출전)의 행단에서 제자들에게 시(악), 서(예)를 가르치신 그 교육활동이 활발하였다. 복사꽃 지고 버들이 푸르러며 세월은 변하지만 넓고 두터운 땅의 덕과 높고 밝은 하늘의 덕과 같은 공자님의 가르침은 유구하다. 만세토록 세상을 다스리는 법도의 가르침을 받을 살구나무 숲은 어디에 있는가? 어필(황제의 붓글씨).(御製. 憶惜緇帷 詩書授受 與有榮焉 軼桃轢柳 博厚高明 亦曰悠久 萬世受治 杏林何有 御筆)
행단도(누구 그림인지는 모르겠으나 자세히 보면 붉은 살구꽃이 활짝 피어난 살구나무 숲이다.)
취푸 행단호텔의 행단도(누구 그림인지 모르겠지만 우측 상단에 살구꽃이 보인다.)
공자탄신 2560주년 기념 경인년에 그린 현대중국인화가의 행단도
살구꽃이 대단히 화사하다.
대사성 윤탁이 중종14(1519)년에 행단제도를 모방하여 손수 심은
성균관 명륜당 마당의 은행나무 노거수 2그루
정선의 행단고슬도
심사정의 연비문행도(燕飛聞杏圖: 여기서 聞자의 훈은 '향기를 맡다'임. )
중국 절강성 텐무산 자생 은행나무
중국 산동성 거현 정림사 은행나무
중국 정림사 은행나무
중국 운남성 麗江市 白沙壁畵 사원 대보적궁 뜰의 은행나무
영국 왕립 큐(Kew)식물원 은행나무
양평 용문사 은행나무
남양주 운길산 수종사 은행나무
(두물머리 수종사 부근의 북한강에 살았던 한음 이덕형을 찾아보고 지은 노계 박인로의 가사가 사제곡)
일본 홍서원弘誓院 은행나무(숫컷)
홍서원 은행나무 암컷
일본 홍서원 경내에 우뚝하게 서 있는 암수 은행나무이다. 본당 남쪽의 것이 숫나무이고 서쪽의 것이 암나무이다. 암나무에는 유주가 생겼는데 모유가 적게 나는 부인이 이것을 잘라서 삶은 물을 마시면 젖이 풍부해진다고 하는 말이 전해온다.( 弘誓院境内にそびえる雌雄2本の銀杏樹です。本堂南側のものが雄樹で、西側のものが雌樹です。 雌樹には乳柱が発生しており、母乳の少ない婦人がこれを削り、煎じて飲むと乳に恵まれるという言い伝えがあります。)
일본 정토진종 본원사파 법운산 광명사 경내 남쪽에는 높이 약20미터, 허리둘레 약 5.5미터, 수령 미상(1000년?)인 큰 은행나무가 있다.
이 은행나무는 쇼와38년 3월 5일에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사방 10개 시 지정문화재(하전의 은행나무)로 지정되어
중요하게 유지 관리되고 있다. 지금도 이 큰 은행나무가 보이는 가을의 노란색 잎과
봄의 짙은 녹색은 사람의 마음을 매료시키고
잠시나마 마음을 편안하게 해 준다.
((浄土真宗本願寺派 法雲山 光明寺경내 境内の南側には高さ約20m、幹回り約5.5m、年齢不詳(1000年?)の大銀杏樹があります。この銀杏樹は、昭和38年3月5日付、天然記念物に指定され、四万十市指定文化財(下田のイチョウ)として、大切に維持管理されている。今も、この大銀杏樹に観られる秋の紅葉や春の深緑は人の心を魅了し、一時の安らぎを与えてくれます。)
미국 하버드대의 은행나무
According to campus legend, classes are cancelled on the day the Ginkgo trees shed their leaves. As a practical matter, some believe that classes should be cancelled when the female tree drops its malodorous fruit. However, that would require cancelling classes for most of the fall term.
Some communities actually do interrupt their fall schedules to celebrate the ginkgo. Many Japanese cities, and at least a couple here in the U.S., have Ginkgo Festivals. Less grand affairs, sometimes referred to as “Ginkgo Day,” are more attentive to the trees. Activities include catching the leaves as they fall or shaking the limbs to harvest the stinky fruit.
Campus rituals that revolve around trees are not uncommon, but according to folklorist Simon Bronner, most take place in the springtime and feature the planting of new trees. One such “Tree Day,” begun at Wellesley in 1877, grew into an elaborate pageant to celebrate the end of the school year (see more at www.wellesleyhistory.com). At Simpson College, Tree Day became a time for the community to clean the grounds (Bronner 103). At BSC, there has been more than one suggestion over the years that a Keeper of the Trees be appointed—a Grand Lorax, perhaps—to sound the alarm when the leaves begin to fall.
It seems entirely appropriate that college communities take time to honor their trees. As Bronner notes, “the pastoral campus with large shady trees and flower beds has historically been the ideal image of campuses because it embodies the peace and contemplation evoked by nature” (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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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bliography:
순흥 객사터의 은행나무
순흥 금성단
경주 강동면 왕신리 운곡서원 행단
중국 취푸 대성전 마당의 선사수식회
(공자님이 손수 심은 회나무-여러번 죽고 되살아나기를 반복했다)
겸재 정선의 부자묘노회도夫子廟老檜圖
(공자님 사당의 늙은 회나무. 위 사진의 취푸 공묘 '선사수식회'가 모델인 것 같다.
檜나무는 전나무의 일종이라고 하는데 위 사진의 나무가 회나무인데, 측백나무와 닮았다.)
행단과 은행나무
<<장자>> <어부>에는 ‘공자는 우거진 숲 속을 지나다가 살구나무가 있는 높고 평탄한 곳에 앉아서 쉬었다. 제자들은 책을 읽고 공자는 노래를 하며 거문고를 타고 있었다.(孔子游乎緇帷之林, 休坐乎杏壇之上, 弟子讀書, 孔子絃歌鼓琴.)’고 하였다. <<사기>> <공자세가>에는 ‘큰 나무 아래에서 제자들에게 예의를 강습하였는데, 환퇴가 공자를 죽이려 하여 떠났으며, 그 나무도 뽑아버렸다. 공자는 하늘이 '나에게 덕을 이을 사명을 주셨는데 환퇴가 나를 어찌하겠는가!’ '고 하였다. 행단(杏壇)은 동아시아 유교문화권에서는 공자님이 살구나무 아래에서 제자들을 가르친 유교 교육의 마당을 상징하는 공간이다. <사진1. 오도자의 행단소영도(杏壇小影圖)(작게)>
2014년 1월, 내가 중국을 여행하며 갔던 취푸(曲阜)의 호텔 이름이 ‘행단’이었다. 그 마당에 공자상을 세워두었으며, 호텔 현관의 처마에는 ‘행단유풍(杏壇儒風)’이라고 써놓았고, 호텔 로비에는 분홍색 꽃이 피어난 살구나무 고목 아래의 토단에 공자님이 앉아 있고 제자들이 거문고와 죽간을 들고 배움을 청하러 가는 행렬이 그려진 대형의 ‘행단도’가 걸려 있었다. <사진2. 호텔의 행단도(보통)>
다음날, 평생의 소원이었던 공자님의 사당과 묘소 참배를 할 수 있었다. 비늘을 번쩍이며 금방이라도 승천할 것만 같은 용이 조각된 석주들이 열 지어 있고 이층의 황색 유리기와 지붕이 장엄한 대성전(大成殿) 마당에는 ‘행단’이 조성되어 있었다. 정자에는 건륭제가 쓴 ‘행단’ 편액이 걸려 있었다.
한나라 명제가 공자가 천하를 주유하다가 노나라로 돌아와 제자들을 가르친 공자의 고택에서 경전을 설하였다고 하는 이 자리는 원래 강당자리였다. 송나라 때 공자의 후손 공도보(孔道輔)가 감수하여 대성전을 현재와 같이 크게 중수할 때 이 자리에 벽돌을 쌓고 둘레에 살구나무를 심어서 ‘행단’을 조성하였다. 금나라 때 정자를 짓고 국학의 학사, 당회영(黨懷英)이 전아한 전서체로 쓴 ‘杏壇’ 두 자를 새긴 비를 세웠다. 정자 안에는 청나라 건륭제의 ‘행단찬(杏壇賛)’ 비가 당회영의 행단비와 함께 있고 정자 앞 좌우에는 어린 살구나무가 두 그루씩 심어져 있었다. <사진3 취푸 대성전 행단(크게)>, <사진4 당회영 행단비(작게)>, <사진5 중국 현대 행단도(작게)>
유교문화인 ‘행단’은 송나라에서 고려로 일찍부터 전파되었다. 신하들에게 궁궐에서 국왕이 하사한 여러 그림에 <부자행단도(夫子杏壇圖)>가 등장하는 것을 <<삼국사기>>를 편찬한 김부식의 글에서 찾아볼 수 있다. 고려 말, 유학의 최고봉으로서 정몽주 등과 성균관에서 선비들을 양성했던 목은 이색도 젊은 나이에 원나라 태학에서 유학하며 가 본 행단을 회상하였다.
조선 중종 14년(1519) 대사성 윤탁(尹倬)이 중국의 행단제도를 모방하여 직접 문행(文杏), 곧 은행나무 두 그루를 성균관 명륜당 마당에 심었다. 우리나라의 서원, 향교, 사대부가, 관아에도 은행나무 노거수를 볼 수 있는데, 모두 행단이다. 포항에는 귀양 온 우암 송시열 선생이 아이들을 가르칠 때 조성했다고 하는 행단이 장기초등학교에 있다.
중국과 달리 우리나라에서는 행단에 살구나무가 아니고 왜 은행나무를 심었을까? 이에 답할 문헌을 찾아볼 수가 없다. 조선시대에도 이에 대한 의문이 있었다.
이규경(1788~?)은 <<오주연문장전산고>> <행단변증설>에서 행단의 행은 도행(桃杏:살구나무)이 아니라 문행(文杏:은행나무)이라고 하였다. 그는 당회영의 행단비 탁본을 서유본(徐有本)의 집에서 보았다. 그것은 아버지 서호수가 베이징에 사신으로 가서 구해온 것이었다.
이유원(李裕元, 1814~1888)은 <<임하필기>> <행단도변(杏壇圖辨)>에서, 황해도 문회서원(文會書院)에서 행단도를 보았다. 행단의 ‘행(杏)’이 세인들이 말하는 것처럼 압각수(鴨脚樹:은행나무)가 아니고 감행(甘杏:살구나무)이고, 공자가 제자들을 거느리고 나무 아래에서 강학을 하는데 꽃이 선명하고 예쁘며 수백 그루나 되고 강단도 넓어서 장관이었다고 하였다.
겸재(謙齋) 정선(鄭敾, 1676~1759)의 <행단고슬도(杏壇鼓瑟圖)>에는 은행나무이고, 그의 제자 현재(玄齋) 심사정(沈師正, 1707~1769)의 <연비문행도(燕飛聞杏圖: 나는 제비가 살구꽃 향기를 맡음)>가 있다. 식물학자 박상진은 행단의 행이 식물의 특성으로 보면 사람이 머물며 가르치기 좋은 것은 살구나무보다 은행나무일 것이라고 하였고, 식물문화사학자 이상희, 강판권은 살구나무라고 하였다. <사진6 행단고슬도(작게)> <사진7 연비문행도(작게)>
은행나무는 꽃이 피는 35만종의 식물이 등장할 동안의 2억년 넘는 시간을 견뎌내고 친척 식물이 모두 멸종하여 지구상에서 가장 외로운 생물이다. 은행나무는 식물계, 겉씨식물문, 강·목·과·속·종이 모두 은행나무 하나뿐이고, 꽃가루 관 속에서 정자가 움직이는 등 고대 식물의 특징을 지녀 다윈은 ‘식물오리너구리’라고 불렀다.
은행나무는 공룡이 번성하던 중생대 쥐라기와 백악기에 전성기를 맞아 전 세계에 분포했고 중생대 말기에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냄새가 고약한 은행 열매의 과육을 먹고 씨앗을 퍼뜨리던 동물이 멸종하고 지구의 기후변화는 은행나무에 큰 타격을 주었다. 포유류와 인류가 지구상에 출현해 진화하는 과정을 지켜본 은행나무는 신생대에 들어 쇠퇴하다가 1만 년 전에 끝난 지구의 마지막 빙하기 때 중국의 일부 지역에서만 살아남았다. 5만 년 전 인류가 중국에 왔을 때 은행나무는 피난처에서 간신히 살아남은 멸종위기종이었다. 야생 은행나무 자생지는 중국 동부 저장성 텐무산(天目山)과 서남부 충칭의 진포산(金佛山) 정도가 확인된다. <사진8 텐무산 자생 은행나무(작게)>
한국의 은행나무는 텐무산에서 들어온 것으로 추정된다. 중국에서 은행나무에 관한 믿을 수 있는 기록은 980년이 처음이고, 10세기 기록에 이어 11세기의 인물이던 구양수와 매요신(梅堯臣)의 시에도 등장한다. 이것은 오래전부터 은행나무를 많이 심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중국 해안 무역로를 따라 북상해 한국으로 은행나무가 확산되었고, 그 시기는 16세기말 이전에 황해를 건너온 것으로 여겨진다고 영국왕립큐(Kew)식물원장을 지내고 <<은행나무-시간을 망각한 나무>>를 지은 진화생물학자 피터 크레인(Peter Crane) 예일대 교수는 말한다.
중국에서 은행나무는 오래 사는 큰 나무여서 숭배의 대상이었고 목재와 열매가 유용하여 1,000년 전부터 사찰과 그 주변에 심었다고 한다. 이것은 중국에서 은행나무가 멸종하지 않고 인간의 손에 의하여 번식하게 된 계기가 된 것이다. <사진9 정림사 은행나무(작게)>
중국역사상 가장 정치한 문학이론서, <<문심조룡(文心雕龍)>>을 쓴 위진남북조 시대 양나라의 유협이 머물며 불경을 열람하고 정리했던 산동성 거현(莒縣) 부래산(浮來山) 정림사(定林寺)에는 ‘은행나무의 왕’이 라고 하는 노거수가 있다. 텐무산에는 고려시대에 전래되어 한국불교 강원의 사집과에 드는 선종불교의 필독서인 <<고봉화상선요(高峰和尙禪要)>>를 남긴 송원대의 고승인 고봉원묘(高峰原妙, 1238-1295)가 수행하며 제자들을 가르쳤던 임제종의 본산인 선원사(禪源寺)가 있다. 한국의 선종은 고려말 태고보우(太古普愚)와 나옹혜근(懶翁惠勤) 이후 임제종의 법통을 이었다.
사찰주변에 은행나무를 승려들이 심는 문화가 고려시대에 송나라에서 우리나라로 들어온 것으로 보인다. 불교국가 고려가 유교국가 조선으로 교체되며 사원의 인적 물적 토대가 서원이나 향교로 편입되었다. 유불이 교체하는 이 과정에서 행단 문화와 결합하여 ‘杏’자를 같이 쓰고, 사찰주변에 심던 은행나무를 그대로 유교 교육기관인 서원, 향교, 사대부 가옥, 관아에 심게 된 것으로 여겨진다. 이것이 한·중·일의 사찰에 은행나무를 심는 문화가 있지만, 유교 공간인 행단에 중국과 달리 우리나라에서는 살구나무가 아니라 은행나무를 심고 있는 연유로 보인다. <사진10 큐식물원 은행나무(작게)>
은행나무는 17세기에 일본에서 유럽으로 전파되었고, 괴테 시절 은행나무는 동양의 상징으로 널리 심었고 곧 북미로 전파되었다고 한다. 큐식물원에도 은행나무 노거수가 있다. 그런데, 국제연구진이 한·중·일의 은행나무 노거수를 분석한 결과 유럽과 미국의 은행나무는 한국의 것과 유전자가 가장 가까운 걸로 나타났다.
다른 노거수처럼 은행나무도 사람들이 신성시 여겼다. 높이 26.3미터, 허리둘레가 15.7미터, 땅을 덮는 면적이 660평방미터인 중국 정림사 은행나무를 문화혁명 당시 지역의 노인들이 목숨 걸고 제지함에도 불구하고 홍군 아이들이 베려고 하자 나무에서 선홍빛 피 같은 수액이 끊임없이 흘러나와 혼비백산하였다고 한다. <사진11 양평 용문사 은행나무(크게)>
수령이 1,100년이 되고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며 피뢰침을 달아 보호하는 양평 용문사 은행나무는 의상대사가 꽂은 지팡이에서 자라났다고 하고, 경순왕이 왕사인 대경대사를 찾아와서 심은 것이라고도 하고, 마의태자가 금강산으로 들어가며 심었다고도 한다. 이 절에 고려시대 승탑이 있는 것으로 보아 고려시대의 승려가 이 나무를 심은 것으로 생각된다. 세종 때 당상관 벼슬을 받았고, 1907년 일본군이 의병의 근거지가 된 용문사를 불태웠지만, 화기에 강한 이 나무는 살아남아서 사찰을 수호한다고 ‘천왕목’이란 이름을 얻었다. 나라에 변고가 있을 때마다 울었다고 한다.
성균관 명륜당 마당의 두 그루 은행나무의 열매가 땅에 떨어져서 냄새가 나서 사람들이 가까이 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성균관 관원이 나무에 제사를 지냈는데 그 뒤로 다시는 나무에 열매가 맺히지 않아서 세상사람들이 기이하게 여겼다.
부활을 반복한 나무로 취푸 대성전의 ‘선사수식회(先師手植檜, 공자가 손수 심은 회나무)가 유명하다. 순흥부 객사 곁에 은행나무 노거수가 명륜당을 덮을 정도로 장대하였다. 1453년에 갑자기 죽자 사람들이 두려워 점을 치니 ‘압각수가 되살아나면 순흥 고을이 회복될 것이다’고 하는 점괘가 나왔다. 1457년에 금성대군의 단종 복위 운동이 실패하고 부사 이보흠 등 수 많은 사람들이 죽임을 당하여, 죽계천이 피로 물들고 관아는 초토화되고 고을은 폐지되어 풍기에 예속되고 말았다. 1696년, 숙종 때에 그루터기에서 움이 트고 가지가 자라나 옛 흔적의 둘레만큼 회복되었다. 1698년에 단종과 사육신, 생육신이 모두 복위되고, 1742년 영조 때 나무 아래에 금성단을 설치하라는 명이 내렸다. <사진12 운곡서원 행단(크게)>
단종의 이모부로 사육신의 복위운동이 실패하자 54세의 종부시첨정 죽림(竹林) 권산해(權山海)는 누각 지붕에서 투신 자결하였고, 그 가족은 100년 동안이나 관직에 나가지 못하며 포항 대이동 같은 변방으로 쫓겨났다. 순흥부의 은행나무가 되살아나고 단종 복위 운동 연루자들이 모두 복위되었지만 죽림은 그러지 못했다.
죽림의 후손으로 경주 국당리 사람 갈산(葛山) 권종락(權宗洛)이 상소를 올리고 거둥하는 정조에게 격쟁(擊錚)을 한 끝에야 1789년에 죽림이 복작될 수 있었다. 서울과 경주를 오가며 순흥의 은행나무와 금성단 앞에서 선조의 복작을 기원하였던 그는 선조의 복작 교지를 받아오며 5월 5일에 순흥의 은행나무 가지를 도끼자루 길이만큼 잘라서 행낭에 넣어 왔다. 예천의 죽림 묘소에서 복작 사실을 고유하고 6월 16일에야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죽림을 제사지내는 사당으로 1784년에 세운 추원사(追遠祠; 운곡서원) 마당에 은행나무를 심었다. 남들이 그것이 살아날 리가 만무하다고 하였지만, 선조의 충절에 감응이 있다면 틀림없이 되살아날 것이라고 격앙되어 말했다. 과연 이듬해에 나무가 되살아나고 3년이 지나서 죽림공에게 정려비가 내리고 증직이 이루어졌다. 운곡서원(雲谷書院) 행단에는 충절과 효성의 정신이 서려 있다.
-<<노거수>>23호(2016.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