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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문화유산(8)/ 한국
조선 왕릉(Royal Tombs of the Joseon Dynasty; 2009)
조선 왕릉(朝鮮王陵)은 1392년 조선이 건국된 후 국권 피탈로 망한 1910년까지 519년 간 조선 시대의 역대 왕과 왕비, 추존된 왕들의 무덤을 총칭하는 말이다. 조선 왕릉은 삼국시대와 고려시대의 왕릉 제도의 영향을 받았는데 고구려의 호석(護石) 제도는 신라와 고려를 거쳐 조선 왕릉에 그대로 전해졌고, 조선 왕릉의 전체적인 형태는 공민왕의 무덤인 현정릉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았다. 조선 왕릉은 한국 역대 왕조의 왕릉들 중 보존 상태가 가장 양호하다. 왕과 왕비들의 능이 모두 완전한 보존성을 지니고 있을 뿐만 아니라 조선시대의 왕자와 공주, 후궁들의 무덤까지 함께 보존되어 있으며, <국조오례의>, <경국대전>, <의궤>와 같은 조선 왕릉에 대한 구체적인 규정과 각 왕릉들의 조성 과정에 들었던 인력, 그리고 도구에 대한 상세한 기록까지 보존되어 있어 조선시대의 장례 문화와 조선 왕릉의 규정 및 역사, 조선 왕릉의 제례 과정 등을 알 수 있다. 또한 이러한 기록을 바탕으로 조선 왕릉에서는 때마다 제례 의식을 치르고 있어 조선시대의 무형적인 문화와 전통을 이어오고 있다.
조선 왕릉의 구조는 크게 재실과 진입 공간, 제향 공간, 전이 공간, 능침 공간으로 나눌 수 있다.
재실과 진입 공간; 재실(齋室)은 능이나 종묘에 제사를 지내기 위하여 지은 건물로 제사 기구를 보관하고, 제사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숙식 제공과 제사에 쓰는 음식을 장만하는 용도로 쓰여 졌다. 진입 공간에는 금천교와 홍살문, 배위가 있다. 가장 먼저 나타나는 금천교(禁川橋)는 속세와 신성한 공간(왕릉)을 구분하는 역할을 하는 다리다. 금천교 앞에 있는 홍살문(紅살門, 紅箭門)은 붉은 물감을 칠한 나무 문으로, 둥근 기둥 두 개를 세우고, 위에는 지붕 없이 화살모양의 나무를 나란히 세워 놓았는데 그 중앙에는 삼태극 문양이 있다. 능·원·묘·궁전 앞에 세웠는데, 해당 장소의 신성함을 알리는 역할을 했다. 왕릉 입구뿐만 아니라 왕릉군의 입구에도 홍살문을 세워놓는다. 홍살문 바로 옆에는 배위(拜位)가 있는데, 한 평 정도 되는 공간에 돌을 깔아 놓았다. 여기서 왕이 절을 하는데, 판위 또는 어배석, 망릉위라고도 한다.
제향 공간; 제향 공간에는 정자각과 참도, 수라간, 수복방이 있다. 홍살문과 정자각을 잇는 길인 참도(參道)는 혼령이 다니는 신도와 임금이 다니는 어도로 나뉜다. 황제릉의 형식으로 조성된 홍유릉의 참도는 세 개로 이루어져 있다. 참도는 대게 정자각 앞까지 가다가 동쪽으로 방향을 바꿔서 정자각의 측면으로 연결된다. 참도 양 쪽 옆에는 제사를 준비하는 수라간(水刺間)과 능참봉(왕릉 관리직)이 거처하는 수복방(守僕房)이 있는데 대부분은 난리로 인해 파괴되어 그 터만이 남아있었다. 현재는 조선 왕릉 복원 정비 사업으로 여러 조선 왕릉의 수라간과 수복방 등이 복원되고 있다.
정자각; 정자각(丁字閣)은 정(丁)자 모양의 건물로 제례 시 정자각 내부에 있는 제구에 제물을 진설하고 제사를 지낸다. 조선 왕릉에서는 필수적인 건축물이다. 조선 왕릉의 정자각은 대게 맞배지붕으로 되어있지만 동구릉 내에 있는 숭릉은 팔작지붕으로 되어 있다. 이는 당시 병자호란과 명나라의 멸망 직후인 17세기 말에 불던 중국화의 유행에 따른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또한 숭릉의 정자각에는 좌우에 익랑(翼廊)이 붙어 있는데 이는 후대의 정자각으로 계승되어 휘릉과 의릉 등의 정자각에도 익랑이 추가되었다. 2011년 12월에는 문화재청은 동구릉에 위치한 건원릉과 숭릉, 목릉의 정자각을 역사적·예술적·학술적 가치가 큰 곳으로 밝혀 국가 지정 문화재인 보물로 지정했다. 정자각 내부에는 제사를 지내는데 쓰이는 제구(祭具)가 있다. 제후국이었던 조선에서는 제구들을 붉은색으로 칠해놓았으며, 대한제국 때는 황릉과 황제로 추숭된 능의 제구들에 황제를 상징하는 노란색으로 칠했다. 황릉인 홍유릉과 황제로 추숭된 태조의 능인 건원릉의 제구가 대표적인 예이다.
전이 공간; 전이 공간에는 왕릉의 주인을 설명하는 비석이 있는 비각(碑閣)이 있고 축문(祝文)을 태우는 예감(소전대 또는 망료위)과 능이 위치한 산의 산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산신석이 있다. 초기 조선 왕릉 양식에는 비석과 함께 왕의 사적(事蹟)을 기리는 신도비(神道碑)가 있었는데 문종 때 왕릉에 신도비를 세우는 것을 금하게 하였다. 그러한 까닭에 조선 왕릉 중 신도비가 있는 왕릉은 태조의 건원릉과 태종의 헌릉뿐이다.
능침 공간; 성역 공간이라고도 하며, 경사면이 완만한 언덕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러한 언덕은 고려 왕릉에서 유래되었다. 장대석(長臺石)에 의해 능침 공간은 하계, 중계, 상계로 나뉘는데 하계에는 봉분을 지키는 무인석과 석마 한 쌍이 있고, 중계에는 능 주인의 명을 받드는 문인석과 석마 한 쌍, 장명등(長明燈)이 있다. 상계에는 봉분(封墳)을 중심으로 혼이 쉬는 공간인 혼유석(魂遊石)이 봉분 앞에 있고, 봉분의 양 쪽에는 망주석(望柱石)이 하나씩 있다. 망주석에 대해서는 혼령이 봉분을 찾는 표지설과 음양의 조화설, 풍수적 기능설 등의 주장들이 있다. 봉분 주위로는 석호와 석양이 봉분을 둘러싸 능침 공간의 밖을 지켜보는 형상으로 봉분을 보호하고 있다. 석양은 악귀를 제거하고, 석호는 산천의 맹수로부터 봉분을 수호하는 역할로써의 의미를 담고 있다. 그리고 문무인석의 옆에 있는 석마는 희생수(犧牲獸)로 영혼의 운송자로서 성격을 가지고 있는데 이들은 모두 고대 중국의 능묘 제도에서 유래하였다. 봉분 밑부분을 둘러 싼 병풍석(屛風石)에는 12개의 방위를 담당하는 12지신상을 해당 방위에 양각하였는데 봉분을 침범하는 부정과 잡귀를 쫓아내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병풍석과 함께 난간석(欄干石)이 봉분을 둘러싸는데 후기의 조선 왕릉에는 난간석만이 봉분을 둘러싸는 양식으로 변모하였다. 3면의 담장으로 능침 공간을 둘러싼 곡장(曲牆/曲墻)은 조선 왕릉에 처음으로 도입되었다. 능침 공간의 동, 서, 북의 삼면을 둘러싸 봉분을 보호한다. 능실(陵室)은 재궁이 들어가는 곳인데 건원릉 조성 당시 석실과 회격 중 무엇을 사용할 지에 대해 논의 끝에 석실로 조성하게 되었고, 그 뒤 조선 초기의 왕릉에는 석실로 조성하게 되었는데 세조의 광릉을 조성할 때는 광릉의 능실을 회격(관을 광중에 내려놓고, 그 사이를 석회로 메워서 다지는 방식)으로 조성하면서 조선 왕릉의 능실은 크게 석실과 회격으로 조성하는 방식으로 나뉘게 되었다.
봉분과 능침 공간에 따른 분류
같은 능침 공간에 조성된 경우; 단릉(單陵)은 왕이나 왕비 둘 중 한 사람의 봉분만 있는 일봉일실(一封一室)의 능으로 조선 왕릉 중 왕의 단릉은 3개의 능이 있고, 왕비의 단릉으로는 11개의 능이 있다. 쌍릉(雙陵)은 왕과 왕비의 봉분을 나란하게 배치한 이봉이실(二封二室)의 능으로 헌릉, 강릉 등이 있고, 삼연릉(三連陵)은 한 언덕에 왕과 왕비, 계비의 세 봉분을 나란히 배치한 삼봉삼실(三封三室)의 능으로 조선 왕릉에서는 헌종의 경릉이 유일하다. 합장릉(合葬陵)은 하나의 봉분에 모두 합장한 동봉이실(同封異室) 또는 동봉삼실(同封三室)의 능으로 세종의 영릉, 고종의 홍릉 등은 동봉이실(同封二室)의 합장릉이고, 순종의 유릉은 유일한 동봉삼실(同封三室)의 합장릉이다.
다른 능침 공간에 조성된 경우; 동원이강릉(同域異岡陵)은 한 능 내에 있지만 서로 다른 언덕에 봉분과 석물을 배치한 이봉이실(二封二室)의 능으로 광릉과 현릉 등이 있다. 동원상하릉(同原上下陵)은 한 언덕 위와 아래에 왕과 왕비의 봉분과 석물을 배치한 이봉이실(二封二室)의 능으로 효종의 영릉과 경종의 의릉이 대표적이다.
태조의 건원릉(경기 구리)
조선왕조는 유교 국가이면서 동시에 풍수를 신봉하는 국가였으며, 저 왕릉은 왜 그 자리에 있어야 했고, 왜 그렇게 조성되었는지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경국대전 기록에는 조선의 왕릉은 도성 4대문으로부터 80리 안에 두어야 한다는 입지조건이 명시 되어있는데, 그 이유는 나라에 변고가 생겼을때, 왕은 가장 먼저 왕궁을 장악하여야 했기 때문에 능제를 지낸 왕들이 서둘러 출발할 경우 하루면 도착할 수 있는 왕궁과의 거리를 계산하여 80리가 정해졌던 것입니다.
물론 예외적인 경우도 있습니다. 거기엔 그럴 수밖에 없는 역사가 또한 있었습니다. 가장 남쪽에 있는 왕릉은 수원에 있는 사도세자와 정조인데, 수원은 당시 궁궐에서 88리에 해당되었기에 대신들이 반대했습니다. 그러자 정조는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이제부터는 수원을 80리라고 명하노라.”
그래서 그때부터 수원은 한양에서 80리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옵니다.
사도세자의 융릉(경기 화성)
정조의 건릉(경기 화성)
역풍수 : 풍수를 거슬러 뜻을 이루다.
풍수는 믿는 사람에게는 실현 가능한 미래였는데, 이 풍수를 역으로 이용할 수도 있었습니다. 말하자면 순리의 천명을 거슬러 목적을 달성하는 일이었습니다. 당시 풍수 정서로는 그러한 것이 가능했다고 여겼졌습니다.
세종 23년 그러한 비극의 역사가 시작되었는데, 세종 23년(1441년) 7월 23일, 조선 왕실에는 경사가 있었습니다. 세종임금의 며느리인 왕세자빈 권씨가 손자 단종을 낳았는데, 조정의 기쁨도 잠시, 다음날 단종 출산 하루만에 권씨가 숨을 거둔겁입니다. 장례 절차가 진행되던 와중에, 전농시에 소속된 종 목효지는 감히 노비의 신분으로 상소문을 올린 것입니다.
빈궁의 능소인 안산 고읍 땅은 ‘낳은 아이 (兒)가 녹아버리며, 사내를 죽이고 어른을 죽이고 장자·장손이 일찍 죽는 흉악한 땅’ 이라는 것을 세종실록은 전합니다.
[임금이 말하길, “목효지의 말은 나도 역시 믿지 아니하나, 다만 그 땅이 바다에 가까워 서 파도 소리가 있을까 염려되고...”]
결국 풍수 초보자도 아는 ‘바닷가에 명당 없다’는 금기사항을 깬 특이한 장지 선정 이었습니다.
그로부터 불과 1년반 후인 1443년 1월 30일.
조정에서는 아버지 태종 곁에 묻히고 싶어 한 세종이 신후지지로 미리 정해놓은 수릉자리가 흉지라는 주장이 흘러나왔고, 그러한 주장을 한 사람은 바로 최양선이었는데, 그의 주장은 “세종의 수릉자리에 그대로 왕릉을 쓸 경우, (세종의) 자손이 끊어지고 맏아들을 잃는다 ” 라고 하였지만 세종은 승하후 예정대로 태종의 옆에 묻혔습니다.
현재 세종임금의 능은 경기도 여주의 영능. 그러나 이곳은 후일 천장하여 옮겨간 곳이고 당시 세종의 초장지는 지금의 태종릉 즉 헌릉의 옆에 있는 인릉 자리였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세종의 영릉(경기 여주)
세종에 이어 재위에 오른 조선 제5대왕 문종이 2년 3개월이라는 짧은 재위기간을 끝으로 승하하였습니다.
앞서 문종의 왕비였던 현덕왕후 권씨의 능에 대해 논란을 벌였던 노비 목효지가 이번에 다시 문종왕릉이 나쁘다는 주장을 합니다.
그 주장인즉슨, 헌릉의 내맥이 좋지 않아 주인은 약하고 객은 강하여 정룡·정혈이 아니라는 것이었습니다.
정룡·정혈이 아니라면...? 방룡 자리! 말하자면 적자, 적손자로 이어지는 직계가 아닌 방룡, 즉 방계가 잘되는 자리라는 것입니다.
이번에도 목효지의 주장은 받아들여 지지 않고 결국 먼 변방, 안성참 아전 소속 노비로 쫓겨 갑니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문종릉 예정지 남혈에서 물이 솟아오르고 돌이 나왔습니다.
장지에 대한 지관들의 문제점 언급 에도 불구하고, 그 반대의 논지로 애초에 정해진 왕릉들을 그대로 강행하려 한 세력들이 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언급된 지관들의 주장은 초장지 모두 문제가 있다는 것, 한결같이 장자 즉, 맏아들에게는 불리한 자리였다는 점입니다.
문종의 현릉(경기 구리)
이 말은 반대로 유리한 쪽이 있었다는 말. 그들이 누구인가?
장자 장손이 잘못되는 자리로 방룡, 즉 방계가 잘되는 자리로 강행하려 한 세력들. 이정녕, 정인지를 비롯한 일단의 세력들 배후는 수양대군 이었습니다.
수양대군은 이후 조선 제7대 세조로 재위에 오르지만, 그는 당시 정상적으로는 왕위에 오를 수 없었던, 세종의 둘째 아들로 즉 방계, 여기서는 방룡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역사라는 것이 희한하게 도 그 말대로 됩니다.
세종 이후에 문종, 단종, 세조, 예종 까지... 약 20년 동안에 거의 자손이 없었습니다. 세조만 빼놓고.”
세조가 계유정난을 통해 왕권을 틀어쥐면서 이제 모든 것이 해결된 듯이 보였으나, 이 무렵 조선왕실 주변을 떠도는 소문들이 있었으니, 조선 왕실에서는 진작부터 ‘장남 왕통 불길이라는 소문’이 떠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한 세조에게 첫번째 타격은 장남이었던 왕세자 의경세자의 돌연한 죽음이었습니다. 의경세자의 이때 나이 스무살. 이때가 세조 3년 (1457년) 9월 2일이었습니다.
풍수가들이 말한 ‘절사손장자’라는 비극적 예언이 당대로 끝나지 않고 세조의 맏아들에게 까지 그 여파를 미친 것인가?
이에 세조는 죽은 의경세자의 묘자리 선정에 대단한 정성을 기울였습니다.
경릉, 지금도 관련 전문가들이 인정 하는 명당중의 명당으로 실측 결과, 능침의 규모가 조선왕릉 40여기 중에서 가장 크다고 합니다.
제7대 세조의 왕릉 광릉
처음 광릉이 조성될 즈음, 이곳은 몇 만평의 광대한 영역을 자랑하였으며, 떨어진 낙엽 하나 함부로 주워갈 수 없는 금역이었습니다.
5백여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광릉 숲이 천혜의 자연공원으로 유지되고 있는 것은 이 광릉 조성에 힘이 컸습니다.
세조릉의 풍수관련 변화들은 의미 심장한 부분이 많습니다.
광릉은 여타의 왕릉, 특히 개국시조 이성계 의 건원릉보다 상윗자리에 매김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좌우 산들이 가깝게 있으면 빨리 영향을 받게 되겠고, 그 분명한 기운이 빨리 후손에 영향을 준다고 합니다.
세조의 장례가 끝나자 예종에게는 시급히 서둘러야 할 하나의 책무가 남아 있었는데, 그것은 이미 왕실내에 불길한 소문으로 떠돌고 있던 ‘장자 불길론’. 세조의 장례가 끝나자 세종의 영릉을 옮기는 일에 착수합니다.
세조의 광릉(경기 남양주)
[출처] 세계문화유산 ; 조선왕릉(朝鮮王陵)|작성자 담쟁이가이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