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리오카 여행3 - 모리오카 성을 보고 나와 덴덴무시를 타고 이자카야에 가다!
7월 9일 일본 동북지방 이와테 岩手(암수) 현의 모리오카 盛岡(성강) 에 도착해 도시 순환
버스인 덴덴무시 でんでんむし 를 타고는 귀노수형(鬼の手形) 신사 를 구경 합니다.
다시 덴덴무시 でんでんむし를 타고는 모리오카성터 공원 에 내려서 오래된
신사 를 구경하고는..... 다시 언덕길을 올라 모리오카성 으로 들어 섭니다.
모리오카한 盛岡藩(성강번) 은 이와테 현 중북부에서 아오모리 현 동부에 걸친 지역으로
가이 겐지 가문 의 계보를 잇는 번주의 성을 따서 난부 (南部 남부) 번 으로도 불립니다.
모리오카 성 은 해자 를 두른데다가 외부 성벽이 엄청 높은데 다시 내부에 여러겹
성벽이 있고 언덕 정상부에 혼마루가 있으니 가히 난공불락 이라고 할만 합니다.
남부 이상 중위의 동상 이 있는데 동상은 사라지고 좌대 만 남았지만 크기나 예술적 가치로 볼때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어 읽어보니... 번주 난부 가문의 42대 당주 인 南部利祥(남부이상) 은
1904년 러일전쟁에 참전해 황족인 竹田宮桓久王(죽전궁환구왕) 을 지키다가 전사 했으니
1908년에 동상을 세웠는데, 1944년 태평양전쟁 당시 구리로 만든 동상은 군에 헌납 했답니다.
조선에서도 밀정들이 놋쇠로 만든 밥그릇이나 숟가락 도 걷어가고 쌀이나 목화 공출 독촉이
심했으니 1945년 8.15 해방이 되자 친일파 밀정 들은 지은죄가 있으니 살기위해
도망쳤는데.... 조선에 진주한 미군 은 사전 준비가 전혀 안된 태평양 주둔군 부대라!
중국 주둔 미군이 들어왔으면 협력해 왔던 김구의 광복군 이 국내 치안을 맡았을 것일러나?
하지만 미국은 조선을 당장 독립시켜줄 의사가 없고 신탁통치 를 할 생각이라 기존에 협력해
왔던 김구의 임시정부가 걸림돌이 된다고 보고는 전혀 준비가 없었던 태평양 주둔군 을
진주시켰으며.... 임시정부의 귀국마저 불허 하며 이승만을 먼저 귀국 시켜 자리를 잡게
한후 김구 등은 1945년 11월 23일 과 12월 1일에 그것도 개인자격 으로 귀국을 허락했습니다.
미군은 일본군과 단 한차례의 전투도 하지 못한 400명 정도의 광복군을 인정하지 않은것인데, 당장
조선의 치안유지 가 급선무가 되니 미군정은 저들 친일파 밀정 들을 불러 순경과 간부로 채용
해서는 조선의 방범과 치안 을 맡겼고, 1948년 이승만 정부 가 서니 독립운동 지사들을 체포해
고문하고 전쟁중 일제 수탈에 혈안이 되어 날뛰었던 저들 악질 친일파들을 법정에 세워야 하는데.....
때문에 국회에 반민특위 가 설치되어 경찰서장 둘을 우선 잡아들이자..... 저들은 백주대낮에
총을 들고 습격해 반민특위를 무력으로 해산 하니 사실상 반란 행위 가 일어났는데도,
이승만은 북한을 추종하는 공산 좌익세력이 남한을 공산화 하려고 날뛰는 급박한 정세에
또 자신의 정권유지를 위해 반민족 친일파들을 기용하는데 아니면 한국이 공산화 되었을라나?
임종국 씨의 연구에 따르면 이승만 정권 수립후에는 친일 경찰 이 총감 1명중 1명,
관구장 8명중 5명, 도경 국장 10명중 8명, 총경 30명중 25명, 경감
139명중 104명에 그리고 경사 969명 중에 806명을 저들 밀정 들이 차지했다네요?
친일 민족 반역자 들은 해방후 좌우익 혼란과 6.25 전쟁때 공산주의자를 척결 하고 질서를
유지하는 등 대한민국 건국에는 1등 공신 으로 크게 이바지 하였는지는 몰라도....
정의가 거꾸로 물구나무 섰으니.... 이후 역대 정부의 친일파 청산도 실패 로 끝납니다.
친일 민족 반역자들이 좌익분자 척결에 앞장서지 않았으면 대한민국이 공산화 되었을지도?
하기사 친일파 들이 어찌 저들뿐이랴? 을사 5적 외에도, 을사늑약을 지지하고 한일합병을
순종에게 청원한 "일진회" 는 회원수가 아무리 적게 잡아도 15만명 이 넘는다고 합니다!
러일전쟁에 협력하고 의병 진압에 참가한 일진회 이용구는 100만 회원 이름으로 청원했으니!
송병준 과 함께 일진회를 만든 이용구 는 동학군 북접 5만명을 지휘 하던 자로.... 일본군에 진압된 후에는
일본으로 건너가 눈이 휘둥그레지는 서구 문명의 발전상 을 보고는 마음을 바꾸어 친일파 가 됩니다.
친일파 는 겨레의 선각자로 3.1운동 독립선언서 를 기초한 최남선에 이광수, 최린, 노천명, 서정주, 모윤숙,
김동인, 주요한,김동환에다가 가곡 “선구자” 의 작곡가 윤해영과 작사자 조두남 등도 마찬가지이지만.....
특히 이광수 는 “조선인을 적자(嫡子) 로 거두어 주시는 천황 폐하의 은덕에 감읍하여 우리
"살과 뼈" 까지도 천황폐하를 위해 일본인으로 거듭나야 한다” 고 말했던 것이지요!!!
이용구와 이완용, 최린, 최남선과 이광수는 선각자로 애국자 였으나, 조선이 자립 하는 것은
"불가능" 하니...... 차라리 일본인 으로 사는 것이 "겨레를 위하는 길" 이라고 여겼을라나?
몇년전 롯데 그룹에서 형제의난 이 일어났는데, 정작 한국인들이 분노한 것은 신격호와 장남 신동주
가 서로 일본말로 대화 하는 것이네요? 동생인 신동빈은 떠듬떠듬 한국말 을 하지만 장남
동주는 한국말을 전혀 못하는듯 심지어 한국 기자회견도 일본말 로 해서 사람들이 경악한 것이지요?
반면에 중국인들은 해외에 나가 몇대를 내려가도 전통 중국식 생활을 하는 차이나타운 을
만들고 중화문화 자부심 때문인지 중국 문화를 지키며 중국말을 하고 살지만......
재일 교포와 재미 교포는 2~3세를 내려가면 한국말을 거의 하지못하니 중국인과는 다릅니다.
우리나라 국민들은 롯데가 한국 기업 인줄 알고 그중에도 나 같은 부산 ~ 경남 사람들은
롯데자이언츠 에 열광했는데, 알고 보니 롯데는 일본 기업(?) 이더라는......
재일교포들이 한국말을 전혀 할줄 모르는 것은 상식인데 한국인들만 모르고 있었다는?
그러니까 북한을 지지하는 조총련은 민족의식 이 있으니 온갖 차별과 불이익을 감수 하면서
조선인 학교에 다니고 한복 치마 저고리 를 입으며 집에서 한국말 을 사용합니다.
반면에 대한민국을 지지하는 민단은 일본인 학교에 보내고 집에서도 일본어를 사용합니다.
대학에 갈때 등본을 떼어보고 기절 하는 것이니 일본인인줄 알고 자랐는데 한국인 이었다니?
엄마가 한국인이어도 한국말을 못하는데 롯데 신격호 부인은 일본 여인 이니....
동빈씨도 어른이 되어 한국 롯데를 맡게되자 필요에 의해 한국말 을 배웠을거라고 짐작됩니다.
그런데 한국이 88올림픽에 월드컵을 치르고 경제발전 을 이루어 관광객으로 일본을 찾아오고
한류로 한국 연속극과 노래 에 일본 여성들이 환호 하며, 아베 신조 총리 부인 아키에 며
전총리 부인등 한국어를 배우는 붐으로 인해 요즘은 재일교포도 한국말을 약간은 하나 보네요?
성공한 재일 교포 중에서 한국말 을 할줄 아는 사람도 있으니 중국의 알리바바에 손 크게 투자해서
무려 3천배 수익을 올렸다는... 일본 소프트뱅크 회장인 손정의 씨가 그나마 위안이 됩니다.
1961년 90$ 국민소득이 35,000$ 에 이르고 한류로 한국 위상 이 올라가니 이제는 나아지는 듯....
성을 내려오니 넓은 운동장에 많은 사람들이 팀을 이루어 우리나라로 치면 자치기나
비석치기 같은걸 하고 있는데... 분위기로 보아 현청이나 시청 공무원들 같네요?
며칠후에 있을 "산사 마쓰리" 행사 일부인지 아니면 전혀 다른 별도의 행사인지는
몰라도 부서별로 팀을 이루어 대회를 여는데.... 그 "연습" 인가 봅니다!
그리고 올라갈때 운동장 한 편에 북 을 치던 사람들이 있었는데
내려오면서 다시 보니 그새 북 치는 사람들이 더 늘었습니다.
잠시 지켜보노라니 그중에 일부가 일어서더니 줄을 맞추어 운동장을 돌면서 북을 치는걸
보니..... 이건 8월 1일 부터 나흘간 열리는 "산사 마쓰리 연습" 인게 틀림 없습니다!
그러고는 언덕을 넘어 성을 내려와 다시 도시 순환 버스인 덴덴무시 でんでんむし
버스를 타고는........ 네 정거장을 가서는 모리오카역 앞에서 내립니다.
그런데 버스 안에서 보니 도중에 시내 번화가이고 체인 이자카야 인
와라와라 わらわら (笑笑 소소) 가 보이기로 잠시 갈등을 느낍니다.
결단을 못내린 사이 버스는 다시 떠나고 다리를 건너서는 모리오카역 에 도착한지라......
300엔 주고 산 일일패스 가 있으니 다시 반대 방향 덴덴무시 でんでんむし 를 탑니다.
우리 부부는 두정거장을 되돌아 가서 유신도 정류소 에 내려 걸어서 이자카야인 와라와라
わらわら (笑笑 소소) 로 들어가서는 생맥주 나마비루 한잔과 소주 한잔 을 시킵니다.
그런데 이눔의 일본 소주 가 무슨 위스키 도 아닌 것이......
"얼음" 을 타서 내왔기로 닝닝해서 영 맛이 없네요?
해서 다시 일본 정종 을 시키니 쯔메타이 로 줄까? 아니면 아쯔이 로 줄까 하고 묻기에....
옛날 남포동에서 잔술 마시던 생각이 나서 뜨거운 잔술 "아쯔이 사케" 로 주문합니다.
일본의 이자카야 는 자리에 앉아 술을 시키면 1인당 300엔 정도 하는 기본 안주 를
주는데.... 양이 적은데다가 취향이 다르니 대개 다른 안주를 더 시킵니다.
우리 부부는 보통 이 "안주로 저녁을 떼우는" 지라.... 식사 가 되어야 하니 보통은
군만두나 소바, 우동, 어묵이나 피자 등을 시켜 저녁 까지 한꺼번에 해결 합니다.
소주에 정종과 맥주 등 3가지가 짬뽕 이 되니 술이 오르는지라 몇년전에 동아일보에
“내가 바뀌면 세상이 바뀐다 146화, 일본 음식점 왁자지껄 코리언” 이 떠오릅니다.
오사카 일본 식당에 아르바이트를 하는 한국 학생 이 들려주는 얘기로 한국 손님들이
들어와서는 일본 종업원이 안내를 하기도 전 에 스스로 창가 좌석 에 앉는지라....
종업원이 다가가 여긴 예약석 이라고 말하자 크게 화를 내며 일어서더라는 것이라네요?
이건 예약 문화가 발달하지 못한 한국과 일본간에 "문화의 차이" 로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술이 취해 큰소리로 왁자지껄 대화" 를 하니 소음 수준이라......
다른 손님들이 쳐다 보아도 한국인들은 대개는 개의치 않는다고 하네요?
더 황당한건 음식 나오자 고국에서 부터 준비해 온 "김치와 소주" 를 슬금슬금 꺼내 놓는
것이라.... 경악한 종업원이 제지 를 하면 바로 "욕설에 가까운 험담" 을 늘어 놓는데
여기 한류 바람이 분 덕분에 "한국말 대개는 알아들어요" 라고 말하면 말문을 닫는다나요?
예전에 직장 동료와 함께 도쿄 아카사카의 한국 식당 에 갔는데 아르바이트 점원이 한국
유학생이라 마음이 놓여 곱창 2인분과 부대찌개 2인분에 맥주 2병을 시켰는데...
주인이 주방 문턱 까지 나와 자꾸 홀에 앉은 우리를 쳐다보기에 불편했던 적이 있습니다.
나는 맥주파 라 처음에는 몰랐는데, 우리 일행이 마호병에 소주 를 넣어 와서 마시고
있는 것을 재일교포 주인이 눈치를 채고 자꾸 쳐다 보았던 것이니, 저 주인이
바로 눈치를 챈 것을 보면... 그전에도 한국인들이 종종 이런 일 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한국인 손님들이 가고난 후에 일본인 점장 이 아르바이트를 하는 한국 대학생에게
“강고쿠진와 얏파리 겐키데스네 韓國人 は やっぱり 元氣 ですね”
라고 말하더라나요.... 직역 하자면 “한국인은 원기왕성 하네요” 라는 말입니다만?
한국인은 종업원이 사전에 매너를 설명해도 무시해 버리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말이 나온
김에 입에발린 말이지만 일본인은, 미국인이 “아임 쏘리” 하듯 “스미마셍” 을 입에 달고
사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실례합니다만...” 정도 일까요? 나의홈 : cafe.daum.net/baikal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