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 12: 4-6
이에 아브람이
본문의 내용은 아브람이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구체적으로 순종하면서 하나님을 실제로 경외했는가? 를 밝혀줍니다. 그리고 그가 나아가야 할 방향과 참 안식의 궁극점이 제시되고 있습니다.
1. 본문 4절은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좇아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그 나이 칠십 오세 였더라” 입니다.
하나님이 지금 하란에 있는 아브람에게 말씀하고 계신 것으로 추측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이 말씀이 자기들의 오류를 지원해 주고 있는 증거라고 우기며 꼭 붙들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무가치한 트집은 쉽사리 배제될 수가 있습니다. 모세가 그들의 출발 원인을 언급한 후에 아브람이 하나님으로부터 그의 고향 땅을 떠나라는 명령을 받았다고 언급하고 나서 지금은 다시 그 이야기 줄거리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아브람이 당분간 하란에 머물러 있어야만 했었던 이유에 대하여 우리는 모르고 있습니다.
다만 아는 것은 하나님이 그에게 손을 얹어 그가 즉시 그 땅 광경을 보지 못하게 막으신 것이라는 점입니다. 비록 지금까지 그에게 알려지지 않았지만 자기 고향보다는 그 땅을 더 좋아했던 것입니다. 그는 이제 이미 시작한 여행을 완전히 마치려고 하란을 떠났다고 언급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한 그 사실을 다음 구절에서 확증해 주고 있습니다. 거기에 보면 그는 자기에게 주신 사래와 조카 롯을 함께 데리고 갔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치 그의 아버지 데라의 지시와 도움 하에서 그들이 갈대아를 떠났던 것과 같이 이제는 아브람이 그 가족의 족장이 되어 그의 아버지가 시작했던 일을 추구하며 완성시키고 있습니다 도중에 그의 아버지가 죽는 일이 겹치기는 했지만 여호와께서는 다시 그를 격려하여 나아가게 하셨습니다. 그 결과로 그가 두 번째로 말씀하여 그를 불러주신 이전의 그의 소명을 확신하게 되었다는 사실은 가능성이 있는 말입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믿음의 순종이 찬사를 받고 있는 사실이 확실합니다.
그리고 단순히 일회의 행동이 아니라, 생애의 지속적이며, 항구적인 과정으로서의 순종을 믿음으로 한 것에 대하여 찬사를 보내고 있습니다. 아브람이 하란에 남아 있는 것이 그의 소명을 향하여 곧장 가는 도성에서 빗나가려고 기울여졌던 사실을 회개해서가 아니고 자기 마음 속에 언제나 고정되어 있는 하나님의 명령을 지니고 있었으므로 거기에 남아 있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의심하지 않습니다. 또한 모세도 그렇게 말하려고 의도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을 오히려 이렇게 언급하고 싶습니다. 첫 번째의 말씀으로 여호와께서 그에게 말씀하셨으므로 모세가 말하기를 ‘그가 그분의 목적에 굳게 서 있었으며 하나님께 순종하려는 그의 간절함은 그의 아버지가 죽은 사건으로도 전혀 파괴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전 생애의 주제를 위하여 각자에게 선포되고 있는 규칙을 받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전 생애가 오직 하나님의 신적인 권위로 통제되게 하려는 규제입니다. 그러나 인간들은 덕성들과 의무들에 관하여 때로는 분쟁을 야기시키기도 합니다. 때문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어떤 행위도 칭찬을 받을 가치가 없습니다 그리고 덕성들 가운데 인정받을 만한 것이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자신이 친히 증거하시기를 제사보다는 순종을 훨씬 더 고귀한 것으로 여기신다고 하셨습니다(삼상15:22).
때문에 우리 생애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완전히 의존할 때에 올바로 형성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직 그분의 명령만을 수행할 때 우리의 삶이 올바로 정립될 것입니다. 여기서 언급되는 문제는 비단 어떤 사람의 특별한 일에만 관련되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우리가 경건하게 생활하는 것이 일반 원리에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될 것입니다. 여기에서 다루어지고 있는 제목은 아브람의 소명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곧 모든 신실한 자들의 공통된 생활 양식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무작정 우리의 고향 땅을 버리라는 명령을 받은 것은 결코 아닙니다.
우리가 인정하거니와 이 점은 아브람의 경우에서 특별한 예입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생활의 규칙으로 그분의 율법을 지키려고 추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여 그들이 자기 자신들의 뜻이나 많은 대중들의 다수에 의하여 부화뇌동(附和雷同) 되지 않게 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람의 본보기로 전체적인 자기포기가 전적인 자기 부정이 요구되고 있습니다. 또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만 살며 하나님을 위하여만 죽어야 한다고 요구하고 있습니다. 사도의 말씀처럼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라는 말씀 그대로입니다. 이것이 또한 개혁자들의 신앙 정신이었습니다.
2. 본문 5절은
“아브람이 그 아내 사래와 조카 롯과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와 얻은 사람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떠나서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갔더라” 입니다.
여기서 사람들이라고 하는 것은 남녀 종들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이것은 노예에 대하여 처음 언급되고 있는 말씀입니다. 이 사실에서 우리는 홍수가 난 후 사람들의 죄악이 본래부터 모든 사람들에게 공통적으로 부여되었던 자유를 말살시키고 있는 사실을 볼 수 있습니다. 노예 제도가 전장에서 기원 되었다고 지배적으로 통용되고 있는 의견을 떠나서는 과연 그 기원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에 대하여 결정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정복자들은 전투에서 그들이 잡은 자들을 데리고 가서 자기들을 섬기게 강요했습니다.
그 때문에 농노라는 이름이 유래되었습니다. 그러나 처음에 노예였던 그들이 전쟁의 법규로 복종 당해서 그렇게 노예가 되었는지 또는 결핍으로 인하여 이 상태로 떨어지게 되었는지 간에 단지 확실한 사실은 자연의 질서가 무참히도 침해 당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인간이 서로간에 상부상조의 사회를 개발시키려는 목적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와 같은 목적에는 역행하고 있습니다. 때문에 자연의 질서가 침범을 당하고 파괴되었습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을 지휘해야 되는 것이 편리한 점이긴 합니다.
그러나 동포들 가운데서와 같이 평등성이 반드시 유지되어야 했습니다.하지만 노예제도가 그런 올바른 정치제도에 역행하는 것이긴 하지만 가장 바람직한 정부에 대치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노예제도의 시초에도 잘못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 때문에 그 후에 관습으로 받아들여지고 필요에 의하여 집행되었던 그 제도의 이용이 불법적이라는 것으로는 볼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아브람은 돈으로 산 종들과 자기 집에서 출생했던 노예들을 소유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처음부터 지배적인 것이 아닌 것은 시간의 길이로 그것이 유효화 될 수가 없다’는 속담은 잘 알려진 대로 몇 가지의 예외를 시인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48장에서 그 점에 대하여 하나의 예를 보게 될 것입니다.
3. 본문 6절은
“아브람이 그 땅을 통과하여 세겜 땅 모레 상수리나무에 이르니 그 때에 가나안 사람이 그 땅에 거하였더라” 입니다.
1) 6절 초두는 “아브람이 그 땅을 통과하여 세겜땅 모레 상수리나무에 이르니”입니다.
여기서 모세는 아브람이 그 땅에 들어가는 길에 즉시 자기가 안주(安住)할 수 있는 처소를 발견하지 못하였다는 사실을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통과하여’ 라는 그 표현과 그가 지나간 곳의(세겜) 위치는 그가 지금까지 얼마나 먼 여행을 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겜은 그리심 산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곳이며 남부 지역의 사막으로 향하는 곳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브람의 신앙이 하나님이 그에게 안정되고 확실한 처소를 주시기 전에 모든 땅을 쏘다니는 방랑자로서 그에게 고통을 주실 때에 다시 한번 시험을 받게 된 것은 모세가 전에 언급한 사실과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발 하나 붙일 만한 조그마한 땅도 주시지 않고 하나님은 계속해서 그의 보호자가 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니 이 얼마나 믿기 어렵게 보였겠습니까? 그러나 그는 보다 철저하게 자아부정을 실현하고 단련하기 위하여 반복되는 과정을 방황하도록 강요받았습니다. 여기서 언급되고 있는(엘론)이라는 말은 몇몇 사람들에 의하여 상수리나무 숲이라고도 하며 다른 자들은 계곡이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 이 말은 그곳의 고유명사로 여기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레’ 라는 말이 장소를 가리키는 고유명사라는 데에는 의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엘론이라는 말은 ‘평원’을 의미하는 말이든지 또는 ‘상수리나’를 의미하는 말이라고 설명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단지 한 나무를 가리키는 말이 아닙니다. 여기서 단수는 복수를 가리켜 사용되어지고 있다고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해석을 우리는 가장 인정하고 있습니다.
2) 본문 6절 끝 부분은 “그 때에 가나안 사람이 그 땅에 거하였더라” 입니다.
가나안 사람들에 관한 이 구절은 무작정 첨가시켜 놓은 것이 아닙니다. 그 이유는 모든 인간성이 결핍되어 있는 불신과 죄악스런 사람들 가운데 던져지는 것이 가벼운 시험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상황에서 그 거룩한 사람이 어떻게 생각했겠습니까? 그는 오직 ‘이제야 가장 방탕한 사람들의 손에서 시달리도록 버림을 받았구나 이제 그들이 머지않아 나를 죽이게 될 거야’ 하는 식으로 생각하지 않았다면, ‘처참한 생활과 사사건건 방해를 받는 생활이 계속되는 상태와 고통 가운데서 해야만 될 신세구나’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의 결과는 달랐습니다. 그런 단련과 시련을 통하여 보다 더 나은 소망을 아끼고 그리워하는 상태에 그가 익숙하게 되는 점이 그에게는 더 유익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만약 가나안 사람들의 친절과 정중한 예의로 환대를 받았다면 그곳에서 하나의 귀빈으로 지내는 생활보다 더 나은 것을 전혀 바라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 하나님은 그의 생각을 보다 차원 높은 곳으로 끌어올리셔서 결국 머지 않은 장래에 그곳의 정착인들이 모두 멸망될 때에 그가 그 땅의 주인이 되며 상속인이 될 것이라는 것으로 결론을 짓게 하신 것입니다.
그 외에도 편히 쉴 곳을 계속 상실하고 있는 그의 처지로 인하여 하늘나라를 바라보는 생활에 소망을 갖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 땅의 정착이 자기에게 특별히 약속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자기 때문에 후손들에게 속하게 될 것이므로 자신이 지금 굉장한 천대와 비인간적인 대우를 받고 있는 그 땅은 그 자신에게는 하나의 궁극적인 목표로 설정된 것이 아니고, 다만 하늘 나라 그 자체가 그가 마지막으로 가서 안식하는 곳으로 그에게 제시되고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암시해 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