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샘통문 Ⅱ-28]‘오수개의 세계화’를 위하여!
전북 임실의 작은 면소재지, 오수의 ‘원동산(園東山)’을 잘 모르시리라. 이곳에는 세운 지 1천년이 넘었다고 촌로들에 의해 입으로 입으로 전해져 온 의견비가 엄존하고 있다. 아마도 세계에서 가장 오래되고, 두 개도 없는 유일무이한 의견비일 터. 이를 증명하듯, 2023년 금석문학자 손환일 박사가 여러 번 탁본을 떠 해독한 바, 비의 건립연대가 처음으로 밝혀졌다. <壬戌年 三月中>의 임술이 정확히 몇 년인지는 모르나, 여러 문헌을 바탕으로 추정컨대, 962년이나 1022년으로 추정된다. 그렇게 추정하는 이유는 넘친다. 고려의 문인 이규보의 한시에 ‘오수’라는 이 땅의 이름이 처음 나왔다. 조선 세조조 문인 노숙동의 한시에도 오수역과 의견묘를 바라본다는 구절이 있다. 이로 미루어, 그때까지 의견묘가 있었을 것이나, 묘는 끝내 1천년의 세월을 이기지 못하고 멸실되었으리라. 의견 오수는 ‘큰 개 오(獒)’ ‘나무 수(樹)’. 지명은 자신(김개인)을 살리고 죽은 의견이자 충견의 무덤에 지팡이를 꽂고 슬피 울며 ‘견분곡(犬墳曲)’이라는 노래를 불렀다는 설화(1254년 최자의 <보한집> 출처)에서 유래됐음이 틀림없을 터. 정확히 언제부터 이렇게 불렸는지는 ‘임술년’이라는 건립연대 규명과 함께 학자들의 연구과제. 2026년 예정된 학술대회에서 공인될 것으로 전망된다.
비는 을축대홍수(1925년) 때 오수천변 상리에서 발견되어, 현재의 자리로 1940년 4월 옮겨졌다(동아일보 ‘충견비 이전’기사 참조). 의견비 주변에는 수령이 족히 500년 내지 700년은 됐을 노거수 서너 그루가 역사의 무게를 힘들게 버티고 있다. 아무튼, 1980년대 후반 오수JC회장(심재석. 당시 30대후반)이 “이미 멸절된 오수개를 생물학적으로 복원하여 오수를 세계적인 반려동물의 성지로 만들어야만 고향이 인구소멸 위기지역을 넘어 미래가 있다”는 엉뚱하고도 야심찬 꿈을 꾸며 지난 30여년간 힘들게 추진해 왔다. 그 꿈에 힘을 보탠 전국의 내로라하는 수의학자와 교수들에 의해 1998년 오수개 복원에 성공, 오늘에 이르고 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그가 꿈꿨던 목표의 70%는 이룬 셈으로, 오수에 ‘오수개연구소’를 비롯하여 수만평의 ‘의견테마랜드’가 조성되고 있고, ‘펫추모공원’이 공립으로 전국 최초로 운영되고 있다. 인근 인문계 고교도 이름을 ‘전북펫고등학교’로 바꾸어 반려동물산업과를 개설하는 등, 반려동물의 성지로서의 입지를 차곡차곡 다져나가고 있다.
이에 발맞춰, 임실군은 기초자치단체로는 전국 처음으로 ‘반려동물산업과’를 지난 7월 신설하여 행정적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으니, 반려동물의 불모지였던 30년 전의 오수를 생각하면 상전벽해(桑田碧海) 상황이 된 셈이다. 수 억 명에 이르는 세계 반려동물 애호가들이 한국하고도 남부지역 작은 면소재지 1천년된 의견비를 보고자 올 지는 아직 미지수이지만, 세계반려동물산업박람회 등이 열리고, 국가적 차원에서 홍보를 한다면 불가능한 일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충분히 가능한 일이고, 그 긴 여정이 마무리단계라면 너무 앞서가는 걸까. 옆에서 5년여 동안 지켜보았는데, 역시 꿈은 꾸어야 이뤄지는 것이고, 혼자 하면 안될 일을 여럿이 힘을 합치면 ‘큰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번번히 느꼈다. 처음엔 미약하지만 나중엔 창대할 거라는 성경의 말씀도 실감한 셈이다.
아무튼, 지난 연말 오수개를 생물학적으로 복원하는데 지대한 공헌을 한 수의학자이자 동물병원 원장(윤신근 박사)이 저간의 발전상황을 살핀 후, 군에 “오수개의 세계화를 위해 써달라”며 거금을 기탁한 ‘아름다운 일’이 있었다. 이에 오수개연구소는 임실군 반려산업과와 협의, 해를 거듭 할수록 추레해지는 사적지 원동산 주변을 재단장하고, 오수개의 동상을 보다 정밀하게 새로 제작해 현재 의견상의 높이를 방문객들의 어깨 높이로 낮추어 방문객들이 오수개를 쓰다듬거나 인증샷을 찍는 등 보다 친화적인 명소로 만들려 한다며, 기부자 윤박사께 자문을 하니 서울에서 추운 날씨인데도 내려오셔 좋은 의견을 주셨다. 이 졸문으로 '오수개연구소'를 대신하여 윤박사께 감사를 드린다. 윤 박사님의 춘부장은 90세를 훌쩍 넘으셨는데, 이날 한일장신대에서 명예신학박사를 수여받는 경사도 겹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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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 박사님은 사람 키 높이의 의견상 뒤로는 설화가 아닌 실화의 ‘오수개 줄거리’를 7-8폭의 병풍처럼 부조(浮彫) 조각해 둘러놓으면 좋겠다고 하여 박수를 받았다. 또한 소생도 의견상 앞에는 <보한집>에 실린 내용을 원문과 함께 현대적으로 풀이한 글을 실었으면 좋겠다고 했으며, 조각은 서울시립대학교의 정대현 교수(광화문의 대한민국 도로원표 제작)에게 애향심(오수가 고향)이 지대한만큼 맡겼으면 좋겠다는데 동의했다. 또한 의견비를 둘러싼 회향목들을 모두 걷어내어 시원한 기분을 느낄 수 있고, 의견비도 방문객들이 친숙하게 관람하는 환경 조성이 시급하다는 데도 의견을 같이 했다. .
한편 의견비와 함께 부각될 수 밖에 없는 오수의 원동산은, 1919년 3.1만세운동의 ‘전국 10대 의거지’(파고다공원, 아우내 , 평양, 수원 화성 제암리 등)로도 유명한 데, 3월 10일 당시 오수보통학교(현 초등학교. 1917년 개교) 1,2학년 학생들이 담임인 설산 이광수 선생과 함께 이곳에서 만세를 불렀다. 일본 경찰들은 국민학생들에게도 칼을 찌르는 등 무자비한 단속을 하여 면민들의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국민학생이 만세운동을 부른 곳은 오수가 전국에서 최초이어서, 해마다 3월 10일엔 학교 강당에서 기념식을 하고 만세운동을 재현하고 있다. 또한 인근 둔기리의 전주 이씨 등 한 마을 애국지사 16명을 중심으로 한 면민 2000여명이 3월 22일과 23일에 걸쳐 만세운동을 대대적으로 전개했다. 주모자들을 검거하자 석방을 외치며 파출소를 습격, 구해내는 등 일제를 서늘하게 한 만세운동을 전개한 것이다. 오수보통학교 이광수 선생은 고종황제 인산일에 천도교 지도자 손병희 선생에게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받아와 지역 만세운동을 이끌었으며, 석방 후 상해 임시정부에서 독립운동을 계속했다. 교정에 그를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좌우지간, 60이 훌쩍 넘어 42년만에 귀향한 내 고향 오수가 의견비와 3.1만세운동 10대 의거지 등 역사적으로 유명한 고장임을 알게 된 것은 행운일 터. 엊그제 가본 바위에 새겨진 무수한 윷판 암각화 등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하자고 움직임과 노력에 조금이라도 힘을 보탤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만 갖고 있다. 현재 전라북도 민속자료 1호로 돼 있는 ‘오수 의견비’야말로 하루빨리 국가유형문화재로 승격돼야 함은 두 말하면 잔소리일 터. 또한 그 가치와 의미 때문에라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를 추진해야 할 것이다. 지난해 유엔 FAO에서 '대한민국의 고유한 개품종'으로 오수개가 등재된 것은 특급경사. 하여 군민이 일심으로 1천년만에 다시 <오수개 의견 기념비>를 세우게 될 줄을 어느 누가 짐작이나 했겠는가. 다시 1천년이 흐른 뒤 어떤 형태나 이유로 3번째 <개비>가 세워질 수 있을까?를 생각하며, 소생이 졸시를 즉석에서 낭송하는 기쁨도 누렸으니 홍복(洪福)이었던 것을.
오수에 뜨거운 바람이 불고 있다. 머지 않아 오수는 반려동물 문화거리가 조성돼 세계의 이목을 끌 게 틀림없다. 한 집 건너 오수개 '팬시상점'이 들어설 것이고, 오수는 어느덧 '개판의 읍'이 되어 창작 판소리 '오수 개판가'와 윤신근 박사가 작사작곡한 '오수개 아리랑'이 시도때도 없이 울려퍼지리라. 아아, 세상은 변하고 변해, 오수가 이제 '이판사판 개판'이 되려는가. 이미 국민여가캠핑장이 문을 열어 주말이면 '우리 아기'인 반려동물과 함께 하는 반려동물 식구들이 들어차고 있다. 쁨! 쁨!! 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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