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998
10월2일[수호 천사 기념일/연중 제26주간 수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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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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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2J-pTuNoiBc
[의정부교구 김명식 사도요한(지축동 요한성당 주임)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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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혹시 그런 사람 있으신가요? 나보다 더 나를 사랑하는 사람!>
혹시 그런 사람 있으신가요? 나보다 더 나를 사랑하는 사람 말입니다. 언제 어디서든 나를 지지해주고, 나를 걱정해주고, 나를 생각해주는 사람, 나를 위해 대신 죽을 수도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이 단 한 명이라도 있다는 것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모릅니다.
사극(史劇)에 등장하는 인물 가운데 호위무사(護衛武士)라는 직책이 있습니다. 왕의 신변의 안전을 위해 무예나 검술이 뛰어난 민첩한 사람을 호위무사에 임명합니다. 이 사람의 행동의 특징은 은밀함입니다. 언제나 왕 근처에 있지만 있는 듯 없는듯 존재합니다.
그러나 그의 시선과 온몸의 신경은 언제나 왕의 안전을 위해 깨어있습니다. 위기 상황이 오면 지체 없이 개입하거나, 최악의 상황에서는 온몸을 던져 왕을 대신해 칼을 맞습니다. 그의 존재 이유는 오로지 왕의 안전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하느님께서는 우리 각자의 안전과 영혼 구원을 위해 아주 충실하고 날렵한 호위무사(護衛武士)를 파견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명령을 받고 우리에게 파견된 그의 이름은 수호천사(守護天使)입니다.
믿기 어려우시겠지만 그만큼 우리 각자는 하느님께 소중한 존재인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그토록 우리를 끔찍히 생각해주시고 귀히 여기시는 것입니다. 언제나 우리를 위해 노심초사하시면서 돌보아주시는 것입니다.
비록 우리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우리 매일의 인생 여정 안에, 지근 거리에서 경호실장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는 수호천사들은, 하느님을 대신해서 인생의 세세한 부분까지 배려해주십니다. 얼마나 은혜롭고 감사한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결국 수호천사의 존재는 우리 인간 한 사람 한 사람을 향한 극진한 하느님 사랑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수호천사들은 하느님의 마음으로 우리 인생길을 동반하고 있습니다. 수호천사들은 하느님의 시선으로 매일 우리를 지켜보고 있습니다. 수호천사들은 매일 우리가 걷는 여행길의 방향을 올바른 쪽으로 인도하고 있습니다.
과거와는 달리 천사에 대한 강조가 많이 약해진 것이 사실이지만, 성경 여러 곳에서 수호천사의 존재와 역할에 대해서 아주 명백히 표현되고 있습니다. 뿐만아니라 예수님께서도 이 부분에 대해서 언급하신 바가 있습니다. 그리스도 신자로서 수호천사의 현존에 대해 의심치 말고 믿어야 마땅합니다.
수호천사는 굴곡지고 사연 많은 우리네 인생길을 지켜줍니다.(시편 91,11) 수호천사는 우리를 올바른 길로 인도합니다.(탈출 23,20) 뿐만 아니라 수호천사는 우리의 시중까지 들어줍니다.(히브 1,14) 하느님을 대신해 인간에게 복을 내려줍니다.(창세 48,16)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 서서 우리의 기도를 하느님께 전달해 줍니다.(토빗 12,12) 투옥되어 큰 곤경 중에 빠져있던 베드로 사도는 여러 차례 수호천사의 도움을 받았습니다.(사도 12,7)
베르나르도 성인의 권고에 따라, 늦은 감이 없지 않지만 순수하고 어린이다운 마음을 회복해야겠습니다. 수호천사에 대한 신심을 좀 더 키워야겠습니다. 하느님을 대신해서 우리를 수호하는 그들의 존재에 감사하는 마음을 지녀야겠습니다.
“보라, 내가 너희 앞에 천사를 보내어, 길에서 너희를 지키고 내가 마련한 곳으로 너희를 데려가게 하겠다.”(탈출 2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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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Ulujz-KqDb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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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자기를 멸시하지 않고는 타인을 멸시할 수 없다>
오늘은 수호천사 기념일입니다. 예수님은 “너희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주의하여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에서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늘 보고 있다.”라고 하십니다. 작은 이들을 멸시하지 않아야 하는 이들이 그들이 수호천사를 통해 하느님 아버지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란 뜻입니다.
여기에 타인을 멸시하는 이들은 반드시 자기 자신부터 멸시하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소위 ‘땅콩 회항’과 같이 나의 위치로 타인을 멸시하는 행위는 이미 자신이 자기를 멸시하고 있음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내가 먼저 사랑받는 사람이라면 사랑받는다는 증거를 지니고 있어야 합니다. 그 가장 큰 증거가 수호천사입니다. 수호천사와 가까웠던 비오 신부님은 항상 영적 자녀들에게 수호천사를 공경하고, 그들에게 기도하라고 가르쳤습니다.
수호천사에 대해 열심히 가르치셨던 비오 신부님은 때때로 밤새도록 수호천사들이 메시지를 전하는 바람에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어느 날 밤, 비오 신부님과 함께 산 조반니 로톤도에 있는 방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때 이미 밤 11시가 되었고, 잠자리에 들기 전에 누군가가 성스러운 수호천사를 비오 신부님께 보내어 축복받자고 제안했습니다. 모두 무릎을 꿇고 그렇게 했습니다.
다음 날 아침, 비오 신부님이 고아원으로 가시던 길에 그들 앞을 지나가시며 웃으며 말씀하셨습니다. “어젯밤 11시에 다섯 명의 수호천사가 한꺼번에 들이닥쳤었소.”
어느 날 한 부부가 퇴근하고 집에 돌아왔을 때 아이가 열이 나고 있었습니다. 약이 있긴 했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자정 무렵, 남편이 아내에게 말했습니다. “당신은 아이와 함께 여기에서 잠을 자고, 나는 옆 방에서 자겠소.”
그러고 나서 남편은 잠들기 전에 자신의 수호천사를 비오 신부님께 보냈습니다. 정확히 1시 5분 전이었습니다. 새벽 3시에 남편이 깨어나 아이를 생각하고 가 보니, 아이의 열이 내리고 평온하게 잠들어 있었습니다. 남편은 기뻐서 아내를 깨웠습니다. 그러자 아내는 말했습니다. “나도 그것을 알고 잠자리에 들기 전에 내 수호천사를 비오 신부님께 보냈어요.” 그러자 남편도 자기가 그렇게 했다고 고백했습니다.
몇 주 후, 남편은 감사의 뜻을 표하기 위해 비오 신부님을 찾아갔습니다. 성당에서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었고, 비오 신부님은 남편을 향해 가리키며 농담을 하셨습니다. “당신 집에서는 밤에도 쉴 시간이 없어요!” 남편이 미안하다고 말하자, 비오 신부님은 밝게 웃으며 말씀하셨습니다. “미안해할 일이 아니오. 밤에도 수호천사들이 찾아오는 것은 나를 기쁘게 하는 일이오.”
남편이 다시 한번 감사를 표하려고 하자, 비오 신부님은 그 감사를 사양하셨습니다. “먼저 감실로 가요 아니면 성모님께 가든지.” 사람들이 모두 자기를 보고 있는 것을 안 남편은 겸연쩍게 물었습니다. “비오 신부님, 하나 여쭤볼까요? 어느 쪽 수호천사가 먼저 왔지요? 제 아내의 수호천사였습니까, 저의 수호천사였습니까?” 이에 비오 신부님은 미소를 지으며 답하셨습니다.
“당신 수호천사가 먼저 왔소. 1시 5분 전에 당신의 수호천사가 왔고, 조금 뒤에 아내의 수호천사가 왔소.”
비오 신부님은, 미사에 참석하지 못할 상황이 생기면 자신의 거룩한 수호천사에게 미사 중의 뜻을 하느님께 전해달라고 요청할 수 있다고 가르치셨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믿음이 아니라, 사랑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수호천사를 통해 은총을 받는 존재임을 믿는 사람들이라면 타인을 멸시할 수 없습니다. 타인도 그러한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남을 무시하는 사람은 나도 무시당하는 사람이라 여기기 때문입니다. 미움이 사라지려면 우리 곁에 수호천사를 많이 두어야 합니다.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 형제들]에서 드미트리 카라마조프의 변신은 극적으로 전개됩니다. 아버지를 죽인 누명을 쓰고 감옥에 있는 동안 그의 자각이 깊어지고 사랑과 구원의 본질을 이해하기 시작합니다. 아버지로부터 사랑받지 못해 그를 공개적으로 죽이고 싶다고 말해왔지만, 정작 아버지를 죽인 사람은 사생아였던 스메르쟈코프였습니다.
드미트리는 자기 애인인 그루센카도 아버지가 빼앗으려는 것을 알고는 아버지와 형제들,
애인에게까지 분노합니다. 그러나 스메르쟈가 자신의 살인이 들통날까 봐 자살하자, 형의 약혼녀인 카테리나와 바람을 비운 동생 이반까지도 형의 편을 들어 그를 석방시키려 합니다.
알료샤는 수도사가 되어 하느님께서 사랑하심을 매일 방문하여 끊임없이 설득하고 그루센카는 자신과 함께 벌을 받자며 20년 동안 드미트리를 기다리겠다고 말합니다.
이에 지금까지 자신이 아버지와 형제들과 애인까지도 멸시하며 살아온 것에 20년 형도 부족하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아버지를 통한 모든 이들도 자신처럼 사랑받는 존재임을 알고는 모두를 존중하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이렇게 사랑받는 소중한 존재임을 일깨우는 이들이 수호천사들입니다. 하느님은 그 사랑을 의심하지 말라고 우리 각자에게 수호천사를 보내주신 것입니다. 수호 천사를 믿지 않으면 자기를 멸시하는 사람이고 그 멸시는 이웃에게 이어집니다.
1948년 10월 3일, 요한 23세 교황은 자신의 여동생 안젤라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요한 23세 교황은 매일 최소 다섯 번은 천사에게 기도하고, 마음속에서 자주 천사와 대화한다고 고백했습니다.
“네 수호천사와 친해지고, 당신이 알고 사랑하는 사람들의 수호천사와도 가까워져라. 이 하늘의 파수꾼들, 그 신비로운 증인들과 함께하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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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잘못된 길에서 벗어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이유는 몇 가지 있습니다. 잘못된 길에서 얻는 쾌감이 크기 때문입니다. 흡연, 음주, 도박, 마약과 같이 중독성이 있는 것은 웬만한 결단으로는 벗어나기 어렵습니다. 내가 잘못된 선택을 했다는 것을 받아들이기 어려운 상황도 있습니다. 특히 집단적인 선택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이탈리아는 로마의 영광을 되찾겠다는 명분으로 오스트리아와 전쟁을 벌였습니다. 처음 전투에서 15,000명이 사망했습니다. 이때라도 정치인들이 잘못된 선택이었음을 인정하고, 평화협정을 맺었으면 더 큰 피해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정치인들은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려 하지 않았고, 이탈리아는 12번의 전투를 더 벌였고, 700,000명의 군인이 사망하고 나서야 전쟁을 끝냈습니다. 스코틀랜드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습니다. 스코틀랜드 정부는 시청사 건물을 4000만 파운드를 들여 2년 안에 건축하기로 했습니다. 건설사는 비용이 더 든다는 이유로 예산을 청구했고, 시간도 늘여야 한다고 했습니다. 스코틀랜드 정부가 건설사를 잘못 선택했다는 사실을 인정했으면 더 큰 손실은 없었을 것입니다. 스코틀랜드 정부는 그것을 인정하지 않았고, 수렁에 빠져들 듯이 예산을 쏟아 부었고, 4억 파운드를 들여 5년이 지나 완공할 수 있었습니다.
“호미로 막을 수 있는 걸, 가래로도 막지 못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2년 전에 이태원 참사가 있었습니다. 1년 전에 해병 순직 사고가 있었습니다. 최근에는 전공의들의 집단 사직이 있습니다. 응급실에 의사가 부족해서 군의관과 공공 보건의가 파견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손이 잘못하면 손을 버려야 한다. 두 손으로 불타는 지옥으로 가는 것 보다는 한 손 만으로도 천국으로 가는 것이 좋다. 발이 잘못하면 발을 버려야 한다. 두 발로 불타는 지옥으로 가는 것 보다는 한 발만으로도 천국으로 가는 것이 좋다. 눈이 잘못하면 눈을 버려야 한다. 두 눈으로 불타는 지옥으로 가는 것 보다는 한 눈만으로도 천국으로 가는 것이 좋다.” 가장 현명한 방법은 책임자를 문책하고, 진실을 파악하고, 잘못된 것에 대한 사과가 있는 것입니다. 국회는 야대여소로 구성되고 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야당의 협조 없이는 국정을 이끌어가는 것이 어렵다는 것도 인정해야 합니다. 행정부는 이런 현실을 인식하고 쌓여 있는 국가의 현안을 풀어가야 합니다.
김구 선생님이 꿈꾸던 나라가 되면 좋겠습니다. 김구 선생님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내가 원하는 우리 민족의 사업은 결코 세계를 무력으로 정복하거나 경제력으로 지배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직 사랑의 문화, 평화의 문화로 우리 스스로 잘 살고 인류 전체가 의좋게 즐겁게 살도록 하는 일을 하자는 것이다. 어느 민족도 일찍이 그러한 일을 한 이가 없으니 그것은 공상이라고 하지 마라. 일찍이 아무도 한 자가 없기에 우리가 하자는 것이다. 이 큰일은 하늘이 우리를 위하여 남겨 놓으신 것임을 깨달을 때에 우리 민족은 비로소 제 길을 찾고 제 일을 알아본 것이다.” 오늘 독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보라, 내가 너희 앞에 천사를 보내어, 길에서 너희를 지키고 내가 마련한 곳으로 너희를 데려가게 하겠다. 너희는 그 앞에서 조심하고 그의 말을 들어라. 그분이 당신 천사들에게 명령하시어, 네가 가는 모든 길을 지켜 주시리라.” 누가 천사일까요? 아첨과 아부로 눈과 귀를 가리는 사람은 결코 천사가 아닙니다. 책임을 회피하려고 권력의 동아줄에 의지하려는 사람도 결코 천사가 압니다. 법과 원칙을 무시하고, 자신의 이권만 챙기려는 사람도 결코 천사가 아닙니다.
주변을 보면 아름다운 나눔을 실천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연말연시에는 사랑의 나눔이 있었습니다. 어린아이가 돼지 저금통을 가져오기도 하고, 군인들도, 기업체를 운영하는 분들도 이웃을 위한 나눔에 동참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예전에는 이런 나눔이 더 많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김치를 해도 함께 나누고, 잔치가 있으면 이웃을 초대하였습니다. 누군가 돌아가시면 마을 사람들이 모두 돌아가신 분의 장례를 위해 함께 수고하였습니다. 현대사회에서 예전에 농경시대에 있었던 방식의 나눔이 계속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바쁘고 분주한 현대사회에 살면서도 나눔의 아름다운 모습을 계속 이어나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이런 나눔을 실천하는 사람들이 바로 수호천사입니다. 오늘 내가 전하는 따뜻한 말과 친절은 고통 중에 있는 이웃에게, 절망 중에 있는 친구에게 위로와 힘을 줄 것입니다. 수호천사는 눈에 보이지 않는 모습으로 우리를 위해 기도하지만, 우리는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기도 할 수 있고,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바로 그런 우리들의 모습이 수호천사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하느님의 사랑이다. 보라, 내가 너희 앞에 천사를 보내어, 길에서 너희를 지키고 내가 마련한 곳으로 너희를 데려가게 하겠다. 누구든지 이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이가 하늘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다. 또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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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18,1-5.10: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라
오늘 교회는 수호천사 기념일을 지내고 있다. 수호천사는 하느님의 뜻에 따라 각 사람에게 파견되어 그를 악으로부터 보호해주고 선을 행하도록 이끌어주는 사명이 있는 천사이다. 예수께서는 아무도 업신여기는 일이 없도록 하라고 하신다. “너희는 이 보잘것없는 사람들 가운데 누구 하나라도 업신여기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여라. 하늘에 있는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를 항상 모시고 있다는 것을 알아두어라”(10절). 제자들은 예수님께 “하늘나라에서는 누가 가장 위대합니까?”(1절) 라고 묻는다. 예수께서는 어린이 하나를 불러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는, 제자들처럼 자신을 높이지 말고 어린이들처럼 자신을 낮추어야만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하신다. 오직 일정한 자격을 갖춘 사람만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하신다. 하늘나라에 들어가기 위해 겸손을 촉구하신다. “하늘나라에서 가장 위대한 사람은 자신을 낮추어 이 어린이와 같이 되는 사람이다”(4절).
예수께서는 사회로부터 버림받고 소외된 자들을 예수님의 처신과 명령, 즉, 예수님의 이름으로(5절) 받아들이고 사랑하는 것이 바로 주님을 받아들이고 사랑하는 것이라 하신다. 예수께서 우리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한 선행이 바로 당신 자신에게 베푼 선행으로 간주하신 최후의 심판(마태 25,31-46)을 연상케 한다. 물론 이 구절이 앞의 내용, 즉 겸손과는 별로 상관이 없는 것 같아도 마태오는 여기에 수록하고 있다. 아마 그것은 이러한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받아들이고 사랑하는 것도 자기 자신을 그만큼 낮추지 못하면 진정한 사랑을 줄 수 없으므로 여기에 수록하고 있을 것이다.
“이 보잘것없는 사람들”(10절)은 마르코 복음에서는 주님을 가까이 따르던 제자들이었다. 여기서는 마태오 교회의 미천한 교우들을 가리킨다. 그들의 그리스도 신앙을 무너뜨려서도 안 되고 그들을 업신여겨서도 안 된다. 왜냐하면, 바로 그러한 사람들을 염려하는 천사들이(토비 5,6-7.22; 사도 12,15)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를 항상 모시고 있기”(10절) 때문이다. 이 천사들은 하느님 가까이서 시중드는 매우 높은 천사들이다. 이 천사들은 보잘것없는 이들을 위해 하느님의 도움을 청하기도 하고 그들을 업신여기는 자들을 하느님께 고발하기도 하는 자들이다. 우리 자신을 우리 스스로 낮추어 겸손한 자세를 가지고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도록 하고, 또한 우리가 우리 형제를 업신여김으로써 또한 그들을 창조하신 하느님까지 멸시하는 결과를 초래해서는 안 될 것이다. 눈에 보이는 인간은 바로 보이는 하느님이라는 것을 생각하고 받아들이고 사랑할 수 있도록 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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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성 도미니코선교수녀회 안소근 실비아 수녀님]
예수님께서는 작은 이들을 업신여기지 말라고 하시면서, “하늘에서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늘 보고 있다.”(마태 18,10)라고 말씀하십니다. 말하자면 그들 곁에 천사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에 의문을 품을 수도 있습니다. 작은 이들, 그들을 그 자체로 존중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 곁에 있는 천사들과 하느님 때문에 소홀히 여기지 말아야 할까요?
사실 그리스도교에서 인간을 이해하려 할 때는 언제나 그를 하느님과 맺는 관계 안에서 바라봅니다. 우리 눈앞에 있는 한 사람 한 사람은 하느님의 모습대로 창조되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되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그에게 존엄성을 부여합니다. 사람을 죽이지 말라는 계명의 근거를 말할 때도 마찬가지로 그 근거는 하느님께 있습니다. 사형 폐지 문제로 가면 더 분명해집니다.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든 관계없이, 어떤 끔찍한 범죄를 저질렀다 하더라도 그의 생명을 존중하여야 하는 것은 그의 ‘뒤에’ 하느님께서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제 다시 오늘 복음의 작은 이들에게 돌아와 봅시다. 그 작은 이들이 어린이들이나 겸손한 이들만이 아니라 사회의 많은 사람이 죽여야 한다고 외치는 흉악범이라고 생각하여 보십시오. 또는 나와 반대되는 주장을 하는 이들, 나와 맞서 있는 이들이라고 생각하여 보십시오. 그들에게도 그들을 돌보는 천사가 있습니다. 저런 인간을 왜 천사들이 돌보느냐고 투덜거릴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들이 천사들의 돌봄에 감사하고 주의를 기울이며, 천사들에게 이끌려 하느님께 돌아오도록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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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우리는 서로 수호천사가 되어 주어야 합니다.>
“너희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주의하여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에서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늘 보고 있다."(마태 18,10)
1) 여기서 ‘작은 이들’은 ‘나보다 작은 이들’, 즉 ‘나보다 힘이 약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천사들’은 ‘그들의 수호천사들’을 뜻합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늘 보고 있다.”라는 말씀은, 수호천사가 항상 하느님 곁에 있으면서, 자기가 맡고 있는 사람의 일을 하느님께 곧바로 말씀드린다는 뜻입니다. 수호천사가 항상 곧바로 말씀드리기 때문에 하느님께서이 각 사람의 일을 세세하게 잘 알고 계신다는 것인데, 그것은 곧 ‘하느님의 보호와 사랑’을 뜻합니다. 알고 계시니까 곧바로 조치를 취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보호와 사랑을 인간에게 전달하는 일도 수호천사가 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사실, 천사가 하는 일은, 또는 천사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일은, 실제로는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의 진짜 뜻은, “하느님께서는 각 사람의 일을 언제나 항상, 늘 살펴보시고, 다 알고 계시고, 언제나 항상 ‘사랑으로’ 보살펴 주시고, 보호해 주신다.”입니다.>
수호천사가 늘 지키고 있으니까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주의하라는 예수님 말씀은, 작은 이들을 무시하고 업신여기는 것은 곧 그들을 보살펴 주시는 하느님을 무시하고 업신여기는 일이 되기 때문에 그런 짓을 하면 안 된다는 뜻입니다.
2)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서 이런 의문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나의 수호천사는 어디에 있는가? 내가 힘이 없어서 무시당하고, 억울한 일을 당할 때, ‘나의 수호천사’는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예수님의 말씀을 반대로 읽으면, “너희가 힘이 없어서 업신여김을 당하더라도 좌절하지 마라. 하늘에서 너희의 수호천사들이 하느님께 늘 말씀드리고 있으니.”입니다. 이렇게 읽으면, 이 말씀은 ‘작은 이들’, 즉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을 위로하고 격려하시는 말씀이 됩니다.
그런데 실제 현실에서는, 억울한 일을 당해도 그냥 그렇게 끝나버리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수호천사가, 또 하느님께서 우리를 보호해 주신다는 것이 실감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늘만 쳐다보면서 언제 올지 모르는 하느님의 도움을, 또는 수호천사의 도움을 마냥 기다리고 있어야만 하는가? 그렇지만, 인간 세상에는 착한 사람들도 많고, 곤경에 처한 이웃을, 또는 힘이 없어서 억울한 일을 당하는 이웃을 마치 자기 일처럼 나서서 도와주는 이들도 많습니다. 그런 이들이 많이 있기 때문에, 이 세상이 그런대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바로 그 사람들을 하느님께서 보내신 수호천사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지금 나를 도와주고 있는 그 사람이 나의 수호천사입니다.>
3) 그것을 믿는다면, 이제 우리도 ‘작은 이들’을 위한 수호천사가 되어 주어야 합니다. 무기력하게 하늘만 쳐다볼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나서서, 정의와 평화가 제대로 실현되는 세상을, 억울한 일을 당하는 사람이 없는 세상을 만들어야 합니다. 너무 거창하게 생각할 것은 아니고, 지금 내가 있는 위치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면서, 조금씩이라도 세상을 바꾸려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어떤 경우에는 개인의 힘만으로는 안 될 때가 있습니다. 그때에는 공동체가 나서야 하고, 서로 연대해야 합니다. 사실 신앙인들의 공동체, 즉 교회는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을 위한 안식처와 피난처가 되어 주어야 하는 사명을 받았습니다. <교회는 작은 이들의 수호천사가 되어 주어야 합니다.>
4) 수호천사의 반대쪽에는 항상 악마가 있고, 수호천사는 늘 선행과 사랑을 권고하는데, 악마는 늘 악행을 부추깁니다. 천사의 권고대로 할 것인지, 아니면 악마가 유혹하는 대로 할 것인지, 선택과 결정은 내가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궁핍한 성도들과 함께 나누고 손님 접대에 힘쓰십시오. 여러분을 박해하는 자들을 축복하십시오. 저주하지 말고 축복해 주십시오. 기뻐하는 이들과 함께 기뻐하고 우는 이들과 함께 우십시오. 서로 뜻을 같이하십시오. 오만한 생각을 버리고 비천한 이들과 어울리십시오. 스스로 슬기롭다고 여기지 마십시오."(로마 12,13-16) <궁핍한 성도들, 우는 이들, 비천한 이들은 ‘나보다 작은 이들’이고, 그들과 함께하는 것은 곧 수호천사의 권고대로 선행과 사랑을 실천하는 일이기도 하고, ‘작은 이들’을 위해서 수호천사가 되어 주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악마는 그들을 무시하고 외면하라고 유혹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스스로 복수할 생각을 하지 말고 하느님의 진노에 맡기십시오. 성경에서도 ‘복수는 내가 할 일, 내가 보복하리라.’ 하고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오히려 ‘그대의 원수가 주리거든 먹을 것을 주고, 목말라하거든 마실 것을 주십시오. 그렇게 하는 것은 그대가 숯불을 그의 머리에 놓는 셈입니다.’ 악에 굴복당하지 말고 선으로 악을 굴복시키십시오."(로마 12,19-21) <내가 ‘작은 이’의 입장에 있을 때, 수호천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선으로 악을 굴복시켜라. 주님의 심판에 맡겨라.”라고 권고하는데, 악마는 “주님의 정의가 실현되는 때가 언제인지 알 수 없으니 기다리지 말고 직접 정의를 실현해라.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라는 율법이 있으니, 네가 당한 만큼 앙갚음해도 된다.” 라고 유혹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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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정진만 안젤로 신부님]
마태오 복음 18장의 전반부(1-14절)는 ‘작은 이들’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10절에서 언급된 ‘작은 이들’은 제자 공동체의 구성원을 가리킵니다. 그들은 힘없고 약한 존재인데, 2-5절에서 등장하는 ‘어린이’와 비교됨으로써 제자들의 취약성이 확인됩니다.
작은 이들은 비록 나약하지만 하느님께는 중요한 존재입니다. 그들을 염려하고 걱정하며, 그들을 위하여 봉사하는 천사들이(토빗 5,6-7.22; 사도 12,15 참조) 하느님의 얼굴을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천사들은 천상 세계에서 하느님의 시중을 드는(히브 1,14 참조) 높은 위치에 있는 이들로서 작은 이들을 위하여 하느님께 도움을 청하고, 누군가 작은 이들을 업신여기면 그들을 고발할 것입니다.
천사의 신원과 역할은 제1독서에서 구체적으로 제시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기 전에 천사를 보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천사는 이스라엘 백성을 보호하고 그들을 약속된 땅으로 인도하도록 하느님에게서 파견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천사의 말에 순종하도록 요구하셨습니다.
천사는 하느님의 전령으로서 하느님의 지시에 따라 그 권한을 행사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천사의 말에 따라 실행할 때 그들의 생명은 보호받을 것입니다.
수호천사 기념일에 온갖 유혹과 악에서 보호받고, 구원받을 수 있도록 우리 각자의 수호천사에게 전구를 청합시다. 수호천사는 하느님 백성의 순례 여정의 동반자이며 보호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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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이기우 사도요한 신부님]
<하늘에 있는 우리의 수호 천사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듣고 나서, 이를 믿고 따르는 백성의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느님의 얼굴을 늘 뵙고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마태오 복음 18장 10절)
이를 수호천사라고 부르는데, 그들의 역할은 하느님과 백성 사이를 연결해 주고, 백성을 하느님께로 이끌어 오기 위해서 위험에서는 보호해 주고 선행에서는 도와주는 것입니다.(탈출기 23장 20절.23절)
이렇게 하느님 백성으로 살아가고자 하는 우리를 돕는 수호천사를 영적으로 알아보는 능력을 신앙 감각이라고 합니다.
세례를 받은 모든 신자들은 올바른 그리스도교 교리와 실천을 파악하고 그에 동의하며, 잘못된 것을 배척하도록 해 주는, 복음의 진리에 대한 본능, 즉 ‘신앙 감각’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에 바탕해서 모든 세례 받은 이가 그리스도의 세 가지 직무, 곧 예언자직, 사제직, 왕직에 각자의 고유한 방식으로 참여할 수 있다고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가르쳤습니다.
아직 복음서가 쓰여지기도 전에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과 부활에 관한 기쁜 소식에 접한 초대교회 신자들은 이를 기억하도록 이끌어주신 성령의 은총으로 신앙 감각을 발휘하여 주일마다 모여서 이 소식을 되풀이하여 공유했는데, 이것이 복음서의 원재료로서 ‘Q 자료’라고 불리는 사도 전승이 되었습니다.
신자들의 집단적인 신앙 감각은 앞으로 올 일들에 대해서도 집단지성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요즘처럼 보건비상사태로 주일이나 평일의 미사참례가 어려워지고 성당 안에서 신자들의 모임도 어려워지면,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나 애덕을 실천하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스스로 신앙 감각을 발휘하게 될 것입니다.
가정에서 부모가 자녀들과 무엇을 해야 하는지, 이웃 신자 가정과 함께 할 수 있는 것은 없는지, 부동산으로 불로소득을 저마다 탐내는 세상의 우상숭배 풍조에 맞서 의롭게 살기 위한 길은 무엇일지 등등 얼마든지 능동적으로 처신할 수 있습니다.
마치 박해시대 교우촌이 교우들의 집단지성과 자발성으로 생겨났듯이 그렇습니다.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미사에 참석할 수 있든 없든 상관없이 첫째, 매일미사 책이라도 보고, 그날 하느님께서 들려주시는 말씀을 경청하는 것이고,
둘째, 이 말씀에 대해 응답을 하기 위하여 천사들의 도움을 청하는 것입니다.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하기를 바라면서 하늘에 있는 우리의 수호천사들이 귀기울여 듣고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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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교구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늘 보고 있다.”
한 교우가 자기 강아지를 보여주면서 하는 말이 새끼 강아지는 참 이쁜데 크면 보기 싫어서 크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세상에 자기 마음대로 안되는 것 중에 하나가 세월을 멈추게 하는 것입니다. 강아지가 예뻐서 크지 않으면 좋겠다는 뜻에서 시간이 흘러가지 않으면 좋을 법한 희망은 희망일 뿐입니다. 왜냐하면 세월은 멈출 수가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에게도 세월이 멈출 수만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어린이가 좋지만 영원히 어린이로 남을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어린이는 순진하고 단순합니다. 그렇지만 어린이는 철이 없어서 세상 물정을 모릅니다. 그래서 정상적인 성인과는 다르기 때문에 구약에서 약자의 대명사는 바로 어린이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작은 어린이 같은 사람을 업신여기지 말라고 당부하십니다. 사람들의 눈에는 그 사람이 보잘 것 없이 보일지라도 그에게도 천상에서 하느님을 마주하는 수호천사가 있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질문합니다 “하늘나라에서는 누가 가장 큰 사람입니까?”(마태오 복음 18장 1절)
예수님께서 어린이 하나를 불러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마태오 복음 18장 3절)
제자들은 어린이가 아니고 이미 어른이 된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세상 이치로 따져 다시 어린이가 될 수는 없습니다. 주님의 말씀대로라면 그들은 세상을 거꾸로 살아야 하는 것이지요. 주님께서 다시 어린이가 되는 것에는 단서를 붙입니다.
회개하는 것입니다. 무엇을 회개해야 하는 것일까요? 제자들은 어린이 되기에는 나이가 들었을 뿐 아니라 어린이 시절에 가졌던 특징도 이미 사라진 것입니다. 그러면 인체학적으로 다시 어린이가 되는 것이 아니라 어린이로 지녔던 그 좋은 특징을 회복하라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주님께서는 어린이의 특징 중에 ‘이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이’(마태오 복음 18장 4절)가 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어린이는 교만해 질 수 없었습니다. 교만은 무엇인가 힘이 있거나 믿는 구석이 있는 사람이 할 수 있는데, 어린이는 부모의 보살핌 없이는 살아남을 수 없을 정도로 약하고 힘이 없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어린이를 가리켜 가진 것 없는 가난하고 겸손한 모습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우리가 회개해야 하는 것은 바로 우리가 그렇게 잡으려고 했던 재물, 명예도 사실 사라지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거나 잡을 수 있는 것들에 대해서 욕심을 갖고 조금이라도 더 갖고 누리려고 애쓰며 살아 왔다고 하겠습니다.
그렇게 하다 보니 사실은 내 것도 아닌데도 내 것인 양 착각하며 살아 왔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느님 앞에서 회개할 때에 비로소 그런 것들을 벗어 버리고 우리의 본래 모습으로 돌아 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어리석었던 탐욕의 굴레에서 빚어지는 교만과 겉꾸밈으로 일그러졌던 지난 허물의 모습에서 진실한 나의 모습을 찾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동안 우리는 진실보다는 겉으로 꾸며진 것들에 관심이 많았고 그것을 당연한 진실로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그런 것들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면 우리는 가난하고 순수한 어린이의 모습인 우리를 찾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 비로소 우리는 주님께서 “그러면 너희가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요한 복음 8장 32절)라고 하신 말씀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우스운 얘기 같지만 여기서 ‘회개’를 목욕에다 비유해서 설명할 수 있겠습니다. 우리는 나가서 지내다 보면 땀도 나고 때가 끼고 합니다. 그런데 집에 돌아와 비누나 샴프로 머리를 감고 샤워를 합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 몸에 붙었던 군더더기의 때를 말끔히 청소할 수가 있는 것이지요.
회개하는 것도 어린이의 우리 모습에 어른이 되면서 쌓아두고 계산하고 꾸미고 하다 보면 군더더기들이 붙어서 가난하고 순수한 어린 아이의 모습을 가리거나 일그러트릴 수 있는 것입니다.
회개는 창조된 ‘하느님의 모상’의 본 모습으로 돌아 갈 수 있는 필수적인 조건입니다.
주님께서 어린이의 비유에서 의미하는 것은 ‘힘없고 보잘 것 없는 사람’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또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너희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주의하여라.”(마태오 복음 18장 10절)
그래서 우리는 주님의 말씀대로 보잘 것 없고 소외된 이들에게도 잘 해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말씀을 마무리하시며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에서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늘 보고 있다.”(마태오 복음 18장 10절)라고 이르십니다.
여기서 두 가지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제자들 가운데 세운 어린 아이일 수 있고, 또한 힘없고 가난한 이를 말 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천사들 중에 사람을 보호하고 이끌어 주는 역할을 맡은 천사를 수호천사(守護天使 custos angelus)라고 하지요. 한국 천주교회에서 ‘호수천신 (護守天神)’이라고 하다가 ‘수호천사’로 바꿔 불렀습니다.
성경에서 수호천사의 모습을 보면 ‘모든 길에서 사람을 지키게 하시고.’(시편 91장 11절), ‘하느님께 기도를 전하며,’(토빗기 역사서 12장 12절) 또한 ‘모든 불행에서 사람을 구하는’(창세기 58장 16절) 임무를 띠고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하늘에서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늘 보고 있다.”(마태오 복음 18장 10절)라고 말씀하신대로 사람마다 그들을 보호하는 수호천사의 모습을 찾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교회의 전례력으로 정한 수호천사 기념일을 맞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회개하여 어린아이와 같이 되어야 한다.’고 하신 주님말씀을 우리의 삶에 새겨야 하겠습니다.
감사를 드려야 하겠지요. 나아가 내 이웃도 그들 각자의 수호천사가 있는 하느님의 사랑 받는 존재라는 사실을 일깨우며 그들을 이해하고, 용서하며 사랑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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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고난수도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하늘에서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보고 있다.”(18,10)
예전 어느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마니또’ 게임을 하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베트남에 있을 때 저도 학생들과 마니또 게임을 통해서 자신이 뽑은 형제의 보이지 않는 수호천사가 되어 그를 위해 기도하고 말없이 도와주다가 어느 정한 시기가 되면 미리 준비한 선물을 주면서 내가 바로 너의 수호천사였다, 하고 고백하도록 한 적이 있었습니다. 이런 게임을 통해서 우리는 수호천사가 누구인지를 확실히 알지 못하지만, 누군가가 나를 위해 기도하고 나의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누려고 한다는 사실이 삶에 큰 위로와 힘이 되리라 봅니다. 또 누군가에 관심을 가지고, 그 사람에게 수호천사임을 드러내지는 않지만, 그의 행복을 빌어주고 그가 잘되길 바라면서 살아갈 때 상대방에 대한 이해와 관심의 폭이 넓어지고 깊어지면서 본인 역시도 기쁨과 보람을 느낄 수 있었으리라 생각됩니다. 이처럼 우리는 수호천사가 분명히 누구인지 알지는 못해도 수호천사가 있다는 사실만으로 마음의 안정을 느낀다면 우리 또한 누군가의 수호천사가 되고자 할 것입니다. 이런 생각은 광주 망월동 5,18 국립묘지에서 어느 분의 묘비에 "당신의 나의 천사’였습니다,"라는 표현을 보면서 더 실감 나게 다가왔었습니다.
사실 과거보다 현대에 들어와서 천사들에 대한 공경은커녕 언급조차 회피하고 존재마저 의심하는 경우가 많음을 느낍니다. 어느 분의 표현에 의하면, 이런 현상은 성전 건축물에서 그대로 드러난다고 하더군요. 중세기부터 근대 이전에 봉헌된 유럽의 성전들에서 쉽게 볼 수 있던 천사들의 성상이나 성화들이 요즘 현대식 성전에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음을 저도 안식년 동안 유럽 각 나라를 여행하면서 유심히 살펴보니 그러더군요. 이는 곧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에만 의존하려는 유행이 현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의 정서에도 영향을 미친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천사들은 오늘도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전능하신 주 하느님, 전에도 계셨고 지금도 계시며 또 앞으로 오실 분!”하고 외치면서(묵4,8) 성인들과 함께 천상 예배를 드리며, 지상에서도 수많은 영혼과 함께하여 그들을 지켜주고 보호하며, 기도를 하느님께 바치고 있음을 우리는 매일 미사 감사송에서 노래하고 있습니다.
일찍이 클레멘스 10세 교황(1670-1676)은 10월 2일을 수호천사 축일로 정하여 온 교회가 기념토록 하였습니다. 수호천사들은 “모두 하느님을 시중드는 영으로서, 구원을 상속받게 될 이들에게 봉사하도록 파견된”(히1,14) 존재들입니다. 이와 같이 수호천사들은 자신들에게 맡겨진 인간들을 위험과 악마의 해로부터 보호하고 지켜주며, 선한 생각과 관심을 불어넣어 주며, 사람을 위해 스스로 기도하고, 사람의 기도를 하느님 대전에 올려주는 영적 존재들입니다. 따라서 수호천사의 보호와 도움을 받고 살아가는 어떤 사람도 세상에서 업신여김을 받아서는 아니 됩니다. 그러기에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하늘에서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보고 있다.”(18,10)라고 하신 말씀을 명심해야 합니다. 이런 시선에서 시편 8편을 음미하면서 들어 보도록 합시다. “인간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기억해 주십니까? 사람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돌보아 주십니까? 천사들보다 조금만 못하게 만드시고 영광과 존귀의 관을 씌워 주셨습니다. 당신 손의 작품들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의 발아래 두셨습니다. (...) 온 땅에 당신 이름, 이 얼마나 존엄하십니까?”(시8,5.7.10) 오늘 수호천사의 축일을 지내면서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섭리와 배려에 감사하면서 늘 수호천사들의 보호하심과 돌보심에 힘입어 하느님의 모상적 존재로서 품위와 존엄함을 잃지 않도록 깨어 살아가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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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100달러 지폐 속 인물이 누구신지 아십니까? 미국 건국의 아버지라 불리는 벤저민 프랭클린입니다. 그는 정치적으로도 뛰어났지만, 대단한 세계적인 과학자이기도 합니다. 피뢰침, 다초점 렌즈, 민간형 비행기, 뇌파 측정기, 홀로그램 기술 등을 발명했습니다. 더군다나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의 저자 스티븐 코비가 벤저민 프랭클린이 64년 동안 기록하고 실행한 13가지 덕목을 기본으로 하여 디자인한 시스템 다이어리로도 유명합니다. 그렇다면 그의 모습을 어떻게 기억하십니까?
대부분 땅딸막하고 뚱뚱했을 것으로 예상합니다. 100달러 속에 있는 노년의 프랭클린을 보면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그의 실제 키는 177cm로 그 당시에는 장신이라 할 수 있습니다. 또한 평생 꾸준히 운동해서 아주 단단한 근육질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매력적인 갈색 눈동자에 숱이 아주 많은 갈색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100달러 속에 있는 인물과 왜 다를까요? 몸 좋은 프랭클린의 초상화가 하나도 남아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몸이 좋을 때는 유명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모두가 노년의 벗겨진 머리, 많이 나온 배만 두드러집니다.
외모에 신경을 많이 쓰는 요즘입니다. 그래서 성형도 하고, 또 명품으로 온몸을 감싸기도 합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떻게 사느냐가 아닐까요? 그래서 사람들에게 어떻게 기억되느냐가 큰 가치입니다. 사람들은 화려한 외모보다 삶 자체에 더 큰 관심을 갖고 그 삶을 기억합니다. 벤저민 프랭클린처럼 말입니다.
예수님도 세속적 삶보다 영적인 삶을 강조하셨습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을 통해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고대사회에서는 어린이를 미숙하고 유치한 존재로 취급하여 경멸적인 태도를 취했습니다. 우리 나라에서도 옛날에는 아이들은 어른들의 말참견을 할 수 없었고, “조그만 게 까불어.”라면서 무시하곤 했었지요. 이렇게 보잘것없는 어린이가 오히려 하늘 나라를 차지하게 된다고 하십니다.
세상의 기준과 다른 하느님 나라의 기준을 이야기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순간의 만족보다 영원한 만족을 어디서 얻을 수 있는지를 늘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순간의 만족만을 추구하는 세상의 기준만을 따르다가는 후회할 삶을 만들게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린이처럼 되는 것은 물론이고, 어린이를 당신 이름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누군가의 수호천사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주님께서 큰 관심을 갖고 우리의 삶을 기억해 주십니다. 수호천사 기념일인 오늘, 우리는 누구의 수호천사로 살고 있는지를 떠올려 보았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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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누가 가장 큰 사람입니까?>
“천사”라는 말은 어떤 존재의 본성이 아니라 기능을 가리키는 명칭입니다. “하느님의 메시지를 전하는 자”,“하느님의 심부름꾼”입니다. 천사는“모두 구원을 상속받을 사람들에게 봉사하도록 파견된 시중드는 영들”(히브1,14)입니다. 그리스도의 협조자들이 된 인간을 보호합니다(마태18,10). 그들은 하느님께 성도들의 기도를 전달하고, 의인들의 영혼을 천국으로 인도합니다(루카16,22). 그리고 자기들의 지휘자인 미카엘과 더불어 교회를 보호하기 위해 태초부터 사탄과의 싸움을 계속합니다(묵시12,1-9). 모든 천사들은 그리스도께 복종함으로써 하느님의 계획안에서 하나의 자리를 차지합니다. 우리를 보호하는 천사가 있어서 감사합니다.
“타산지석”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남의 실수나 잘못을 거울삼아 나는 그런 잘못을 하지 않도록 노력한다는 말입니다. 누군가의 허물과 부족함을 보면 내 부족함을 챙겨봅니다. 누군가의 꾸중을 접할 기회가 있다면 내가 그 꾸중을 듣는 것처럼 부끄러워합니다. 잘 준비된 고해성사를 접하면서 저의 무뎌진 마음을 질책합니다. 나 자신을 보고, 또한 상대의 부족함을 어떻게 보완해 줄까를 생각합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하늘나라에서는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어린이 하나를 불러 세워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누구든지 이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이가 하늘나라에서 가장 큰사람이다”하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늘나라의 주인공은 어린이가 아니라 어린이같이 된 사람입니다. 어린이가 지닌 가장 큰 특성은 의존성입니다. 어린이는 어리면 어릴수록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특별히 부모의 품에 있어야 합니다. 맑고 밝은 순수함은 그다음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늘나라에서 큰 사람은 하느님께 온전히 의탁하는 사람입니다. 그 무엇에 앞서 하느님의 품에 안겨 있는 사람입니다. 계산하지 않고 하느님만을 믿고 의지하는 사람이 큰 사람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많이 가진 사람, 높은 지위에 있고, 권력을 가진 힘 있는 사람을 높은 사람이라고 하지만 하늘나라에서는 가진 것이 없는 사람이 위대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너에게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 가서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마르10,21). “내 이름 때문에 집이나 형제나 자매, 아버지나 어머니,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모두 백배로 받을 것이고, 영원한 생명도 받을 것이다”(마태19,29).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결국,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생각, 관념, 틀, 명예욕, 지배욕, 물질에 대한 애착을 버리고 주님께로 향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하늘나라의 주인이 어린이가 아니라 ‘회개하여 어린이같이 된 사람’이라는 의미가 바로 이것입니다. 다른 무엇에도 흔들리지 않고 주님께만 의지하는 사람은 복됩니다. 워즈워드는 ‘어린이를 어른의 아버지’라고 말했습니다. 어린이의 솔직함과 겸손, 단순함, 신뢰, 순진무구, 천진난만, 특별히 의존성 안에서 한 수 배우시길 바랍니다. 키가 커서 큰사람이 아니라 주님을 차지해서 큰 사람, 마음의 품이 넓어서 큰 사람이 되시길 바랍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 가끔은 사람을 든 사람, 난 사람, 된 사람으로 구별합니다.
든 사람은 배운 것이 많아서 학식이 뛰어난 사람입니다. 당해 분야에서 누구보다 많이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난 사람은 이름이 알려져서 누구나 아는 사람입니다. 당해 실무 분야에서 뛰어나게 실무 처리 능력이 있습니다! 된 사람은 이름이 알려지지 않아도 배운 것이 없어도 인간으로서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사람입니다. 꼼수보다는 원칙을 살아갑니다. 곧 하늘을 두려워합니다. 그렇다면 주님 앞에서 큰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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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이어진 눈길>
마태오 18,1-5.10 (하늘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 작은이들을 업신여기지 마라)
그때에 제자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하늘나라에서는 누가 가장 큰 사람입니까?” 하고 물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어린이 하나를 불러 그들 가운데에 세우시고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이가 하늘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다. 또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너희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주의하여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에서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늘 보고 있다.”
<이어진 눈길>
“하늘에서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늘 보고 있다.”(마태 18,10)
땅에서
우리에게 닿은
우리의 천사들의 눈길은
하늘에서
하느님께로 이어지지요
하늘에서
하느님께 닿은
우리의 천사들의 눈길은
땅에서
우리에게로 이어지지요
땅에서
우리의 천사들에게 닿은
우리의 눈길은
하늘에서
하느님께로 이어지지요
하늘에서
우리의 천사들에게 닿은
하느님의 눈길은
땅에서
우리에게로 이어지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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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오늘은 수호천사 기념일입니다. 오늘 <복음>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주의하여라.~
하늘에서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얼굴을 늘 보고 있다.”(마태 18,10)
하느님께서는 ‘작은이들’ 하나라도 그지없이 존귀하게 여기신지라 그들의 수호천사들을 두어 당신과 함께 있도록 하셨음을 말해줍니다. 곧 천사들이 존귀한 존재인 것이라기보다 천사들을 붙여 보호해야 할 만큼 ‘인간이 존재가 존귀함’을 말해줍니다.
그래서 사도 바오로는 서로 송사하는 코린토 신자들에게 말합니다.
“여러분은 성도들이 이 세상을 심판하리라는 것을 모릅니까? 세상이 여러분에게 심판을 받아야 할 터인데, 여러분은 아주 사소한 송사도 처리할 능력이 없다는 말입니까? 우리가 천사들을 심판하리라는 것을 모릅니까.”(1코린 6,2-3)
그렇습니다. 그날이 오면, 천사들이 인간을 심판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천사들을 심판할 것입니다. 이토록 인간은 존귀합니다.
이는 <시편> 8편을 떠올려줍니다.
“인간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기억해주십니까? 사람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돌보아주십니까? 신들보다 조금만 못하게 만드시고 영광과 존귀의 관을 씌워 주셨습니다.”(시 8.5-6)
그렇습니다. ‘영광과 존귀의 관’이 천사에게 씌워진 것이 아니라, 우리네 인간에게 씌워진 것입니다. 결국, ‘천사’는 하느님이 되지 못하지만, ‘인간’은 하느님이 되는 ‘영광과 존귀의 관’이 씌워졌습니다. 그러기에 인간은 참으로 존엄합니다. 그지없이 ‘존귀한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의 이 존귀함을 잘 보전해야 할 뿐만 아니라, 타인의 존귀함도 잘 보호해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우리 인간의 존귀함은 개인의 능력이나 재능에서 오는 것이 하느님으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잘 알아야 할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이토록, 인간의 존귀함이 하느님으로부터 온 것이기에, 그 누구도 자신의 필요에 따라 인간의 존엄을 평가하거나 도구로 전락시키서는 안 될 일입니다. 또한 누구든지 예외 없이 존귀한 존재로 존중되어야 할뿐만 아니라, 이를 지켜나가야 할 사명도 부여받고 있음을 알아야 할 일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오늘 <복음>의 제자들처럼, 혹 우리의 관심이 ‘큰 사람’에게 있지는 않는지 들여다보아야 할 일입니다. 진정, 중요한 것은 소중한 것을 ‘소중한 것으로 볼 줄 아는 눈’입니다. 곧 우리가 “큰 사람이냐 작은 사람이냐?”가 아니라, 하느님께 얼마나 “소중하고 존귀한 존재냐?”를 보는 일입니다. 그리고 곁에 있는 형제가 나에게 ‘얼마나 귀중하고 소중한 존재인지’를 보아야 할 일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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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마태 18,5)
주님!
무엇을 하든 당신을 지향하여 일하게 하시고,
아무리 사소한 일일지라도 당신의 이름으로 하게 하소서!
모든 주어진 것을 당신의 이름으로 받아들이게 하시고,
당신의 이름으로 드리는 감사가 되게 하소서!
오늘, 나의 모든 삶이 당신께 바치는 기도가 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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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길 위의 종교, 길 위의 그리스도, 길 위의 사람들>
-그리스도인의 삶-
“산앞에
서면
당신앞에
서듯
행복하다”
10월 한달 저를 행복하게 살게 할 좌우명시입니다. 선물처럼 찾아온 시입니다. 산은 ‘불암산’을, 당신은 ‘주님’을 가리킵니다. 날마다 일찍 일어나 강론 쓸때가 바로 주님앞에 서듯 하루중 가장 행복하고 평화로운 시간입니다. 날마다 기록을 남기듯 일기쓰듯 하는 강론입니다. 수도원은 섬이 아니라 세상에 활짝 열려 있는 중심지이자 세상의 축소판같은 곳입니다. 온갖 일이 다 일어납니다. 세상에 나가지 않고 평생 정주의 삶을 살아도 세상 공부가 가능한 곳입니다. 12세기 마지막 교부라 칭하는 성 벨라도는 말합니다.
“오늘 우리가 공부할 책은 우리 체험의 책이다. 내 매일 삶의 책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읽는 것을 배울 때 전체를 한눈에 파악해서 매일의 일을 잘 통합하여 일관성있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성경만이 렉시오디비나 대상이 아니라 일상의 하루도 렉시오 디비나 대상의 또 하나의 성경이라는 것입니다. 살아있는 한 계속될 아직은 미완(未完)인, 하루하루가 내 삶의 성경책 1쪽입니다. 어제도 눈부시게 아름다운 전형적인 가을이었습니다.
“하늘보면
마음은
훨훨날아
흰구름되네”
흰구름 가을 하늘보며 배밭사이 산책중 떠오른 시입니다. 아침부터 저녁늦게 까지 수도원 초창기부터 수도원 제반 공사시 많이 봉사한 포크레인 기술의 달인, 요한 형제가 시종일관 즐거운 모습으로 길 보수에 정성을 쏟고 있었습니다. 신고배 수확이 끝난 창고에 들리니 엄청나게 큰 배들에 경탄했고 부럽고 부끄러웠습니다. 저절로 나온 시입니다.
“배가
엄청나게 크다
밤낮
쉬지않고 컸구나!
나는
그동안 뭘했나?”
살아있는 동안 쉬지 않고 일하는 배나무들이요 밤낮 쉬지 않고 큰 배들이 놀라웠습니다. 얼마전 루벵 대학교수들에 대한 교황님의 강론도 일부 생각났습니다.
“약자들을 배려하는 연민가득하고 포용적인 문화를 건설하도록 하라. 이 불꽃이 내내 살아 있도록 하라; 영역을 확장하라! 쉼없는(restless) 진리 추구자들이 되라. 너희들 열정이 쇠퇴함을 허용하지 말고, 지적 무기력함에 항복하지 마라.”
바로 오늘 복음의 예수님이, 제1독서의 욥이 그러합니다. 쉼이없이 참으로 치열히 한결같이 주님을 섬겨온 욥이요 예수님입니다. 훌쩍 뛰어넘어 욥기 9장을 공부하지만, 시간되면 생략된 4-8장까지 읽어보세요. 욥의 내공이 얼마나 깊은지, 왜 그토록 하느님의 신뢰와 인정을 받았는지 확인할 것입니다.
“사람이 하느님 앞에서 어찌 의롭다 하겠는가? 하느님과 소송을 벌인다 한들 천에 하나라도 그분께 답변하지 못할 것이네....내가 의롭다 하여도 답변할 말이 없어 내 고소인에게 자비를 구해야 할 것이네.”
누구보다 하느님을 잘아는 겸손하고 지혜롭고 신심깊은 욥임을 깨닫습니다. 유비무환입니다. 그가 이런 엄청난 하느님의 시험과 시련을 통과할 수 있음도 평소 쉼없이 주님을 섬기고 공부하며 살아온 내공의 결과임을 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루살렘을 향한 도상중에 있는 예수님께도 이런 내공을 느낍니다.
길 위의 주님이요, 길 위의 종교인 그리스도교입니다. 예수님은 집이 없었던 길 위의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다른 길들(other Ways)에게 열린 길(the Way)이었습니다. 루카는 마태오나 마르코와 달리 예수님과 당신 일행의 집에 계시는 모습을 한 번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새삼 ‘길 위의 그리스도(Christus Viator)’, ‘길 위의 인간(homo viator)’임을 깨닫습니다. 우리 길가는 사람인 구도자는 ‘정처없는 방랑자’가 아니라 ‘정처있는 여행자’라 할 수 있습니다. 문득 박목월의 나그네란 시가 생각납니다.
“강나루 건너서
밀밭 길을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길은 외줄기
南道 삼백리
술 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놀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가끔은 이런 나그네 되어, 하느님 찾는 나그네 되어 홀가분하게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베네딕도회의 정주생활은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요? 정주의 ‘뿌리(root)’와 내적 여정의 ‘길(route)’이 공존하는 삶입니다. 밖으로는 하느님 기다리는 정주의 산이요, 안으로는 끊임없이 하느님 바다 향해 흐르는 강같은 삶입니다. 물도 고이면 썩듯이 삶도 고이면 썩습니다. 물길따라 끊임없이 맑게 흐르는 내적여정이어야 안주가 아닌 진짜 정주의 삶이 됩니다.
참으로 뿌리와 길의 모순을 절묘하게 살아내는 베네딕도회 수도자들이요 예수님과 당대의 제자들이 그러합니다. 끊임없는 주님을 향한 길 위의 삶이지만 정주처 하느님께 날로 깊이 뿌리내린 삶이었던 것입니다. 오늘 복음이 예루살렘을 향한, 십자가와 부활의 도상이라는 아주 절박한 시점에 배치되어 있습니다. 역시 길을 가는데 일어난 일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예나 이제나 얼마나 절박한 일인지 깨닫습니다. 오늘 세 경우의 주님 말씀은 주님을 따르는 우리의 평생 화두가 됩니다. 얼마나 예수님의 제자들로서 우리의 삶이 변질되고 타락했는지 부끄럽지만 인정할 수 뿐이 없습니다.
1.“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 기댈 곳조차 없다.”
하느님만을 정주처로 한 나를 과연 따를수 있겠느냐며 첫째 사람의 요구를 은연중 거부하는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일이 결코 낭만이 아닌 현실이라는 것입니다. 날마다 처음이자 마지막처럼 절실하게 살아내야 할 삶이라는 것입니다.
2.“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고, 너는 가서 하느님의 나라를 알려라.”
두 번째 나를 따르라 할 때 아버지의 집에 가서 먼저 장사지내는 것을 허락해 달라는 자에 대해 에둘러 거부하는 예수님입니다. 하느님 나라 선포의 절박성을 앞서는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죽은 이의 장사는 살아있다 하나 실상 주님을 모르는 죽어있는 이들에게 장사를 맡기라는 것입니다. 정말 삶과 죽음의 차이가 무엇인지 자주 물어야 할 것입니다. 죽음같은 삶을 사는 이들이 너무 많습니다. 예전 사막을 찾았던 구도자들의 공통적 목표는 단 하나, 한 번 뿐인 인생을 “참으로 사는 것”이었습니다.
3.“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
세 번째 가족들에게 작별인사를 하겠다는 추종자에게 주신 주님의 말씀이 참 냉혹해 보입니다. 역시 임박한 하느님 나라를 향한 절박한 삶에 부수적인 것들은 생략하라는 것입니다. 과거 지향이 아닌 미래 지향의 하느님 나라를 향해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투신하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이 주옥같은 말씀은 무뎌지고 세속화되는 우리를 부단히 일깨우는 평생 화두같은 말씀입니다. 날마다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뿌리의 사람이자 길의 사람이 되어 파스카의 여정에 충실하도록 도와줍니다. 좌우명 애송 고백기도시로 강론을 마칩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일일일생(一日一生), 하루를 처음처럼, 마지막처럼, 평생처럼 살았습니다.
저에겐 하루하루가 영원이었습니다.
어제도 오늘도 이렇게 살았고 내일도 이렇게 살 것입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 받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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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하느님 없이는 천사도 없다.>
수호천사 축일은 신학적 또는 교리적으로 다가갈 주제가 아니라고, 특히 이 축일을 지내면서는 더욱 그렇게 접근치 말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교리로는 천사의 존재 그러니까 영적인 존재가 있다는 것만 믿을 교리이고 천사와 관련하여 그 외 다른 주장은 믿을 교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영적인 존재로 천사와 악마가 있는데 악마가 하느님과 하느님의 뜻을 거부하는 존재인 데 반해 천사는 하느님을 섬기고 하느님 뜻을 받드는 존재라는 의미 정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천사 교리가 아니라 살아가면서 천사를 실제로 만나는 것이고 그리하여 천사를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을 만나고 천사의 도움을 받아 하느님께 가는 것입니다.
천사란 우선 하느님으로부터 우리에게, 아니 나에게 파견된 존재입니다. 오늘 독서는 하느님께서 천사를 보내신다는 것을 분명하게 말합니다.
"보라, 내가 너희 앞에 천사를 보내어 길에서 너희를 지키고 내가 마련한 곳으로 너희를 데려가게 하겠다."
그러므로 보내시는 하느님을 떠나서 천사만 따로 만나서는 안 됩니다. 길을 가는데 길을 몰라 어려움을 겪는 나에게 누가 길을 가르쳐줄 때 우리는 그런 사람을 천사라고 하고 고마워하는데 하느님께서 그를 보내셨음을 우리는 믿어야 하고, 그것을 볼 줄 알아야 하며 그러므로 감사드려야 할 것은 그 천사뿐 아니라 하느님이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사람을 통해서 하느님을 보고, 하느님 안에서 사람을 보듯 천사의 선행을 통해서 하느님 사랑을 만나고, 하느님 없이 천사를 만나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보내는 존재는 영적인 존재인 천사뿐 아니라 천사와 같은 수많은 존재가 있고, 그중에는 당연히 우리 인간도 있지요.
그런데 실제로 살아가면서 우리는 천사를 만나지 못하는 경우도 있고, 특히 사람의 경우는 하느님이 보내신 천사인데 그저 인간으로만 만나고, 분간을 잘못하여 천사를 악마로, 악마를 천사로 잘못 만날 수도 있습니다.
영적인 존재인 천사는 확실하게 우리를 하느님께 인도하고, 하느님께서 마련해 놓으신 하느님 나라로 우리를 인도하지만 사람의 경우에는 그가 천사같은 악마일 수 있고, 악마같은 천사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의 경우 저를 사랑해주시는 분들을 하느님께로 인도하지 않고 저에게 오게 하며, 하느님을 사랑케 해야 하는데 저를 사랑하는 것에 머물게 하는데 그때 저는 무척 죄책감을 느끼게 되어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하느님께로 가야할 분들을 제가 가로채는 느낌이기 때문입니다.
앞서 봤듯이 사람을 하느님께로 인도하는 존재가 천사인데 이런 저는 정결하지 않고 천사일 수 없는 거지요.
같은 뜻에서 저에게 듣기 좋은 말을 하는 분보다 제 마음을 아프게 하지만 저의 잘못을 꼬집는 분이 저에게 천사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모를 때에는 이 고마운 천사를 원수로 생각하기도 하지요.
그래서 프란치스코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우리에게 부당하게 번민과 괴로움, 부끄러움과 모욕, 고통과 학대, 순교와 죽음을 당하게 하는 모든 이들이 바로 우리의 벗들입니다. 그들이 우리에게 끼치는 그것들로 말미암아 우리들은 영원한 생명을 누릴 것이기에 우리는 그들을 극진히 사랑해야 합니다."
그리고 오늘 저는 천사들, 특히 저에게 맞춤형 도우미와 수호자와 인도자인 수호천사를 보내주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매순간 느끼는, 그런 제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하는데 여러분도 그렇게 되시길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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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에서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늘 보고 있다."(마태18,10)
<수호천사!>
오늘 복음(마태18,1-5.10)은 '하늘 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에 대한 말씀과 '작은 이들을 업신여기지 마라.'라는 말씀입니다.
오늘은 '수호천사 기념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천사'(天使.angel)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주의하여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에서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늘 보고 있다."(마태18,10)
가톨릭 교회는 천사들의 존재를 받아들입니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는 천사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천사는 그 존재 전체가 하느님의 심부름꾼이며 전령이다. 그들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얼굴을 늘 보고 있기'(마태18,10) 때문에, '그분 말씀에 귀 기울이고 그분 말씀을 실천하는 힘센 용사들'(시편103,20)이다."(329항)
"사람은 일생동안, 생명의 시작부터 죽음의 이르기까지, 천사들의 보호와 전구로 도움을 받는다."(336항)
이처럼 '천사는 하느님의 일을 하는 존재'로서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중개자'입니다. 천사에는 '아홉 개의 천사 계급'이 있는데, 곧 천사, 대천사, 권품천사, 능품천사, 역품천사, 주품천사, 좌품천사, 케루핌천사, 세라핌천사입니다.(위 디오니시우스의 9품천사)
우리를 위한 수호천사가 존재한다는 것은 우리에게는 큰 힘이며 기쁨이고 희망입니다.
수호천사 기념일을 맞이하여 우리의 수호천사께 깊은 감사를 드립시다! 그리고 우리도 서로가 서로를 지켜주는, 서로를 위해서 기도해 주는 수호천사가 됩시다!
"하느님, 놀라우신 섭리로 천사들을 보내시어 저희를 지켜 주시니, 저희가 사는 동안 천사들의 보호를 받다가, 마침내 천사들과 함께 영원한 기쁨을 누리게 하소서."(본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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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늘 보고 있다."(마태 18, 10)
수호 천사는
용서와 사랑을
일깨워줍니다.
고된 우리의
삶에 수호 천사를
하느님께서
주셨습니다.
아끼고 품어주는
사랑의 하느님께로
우리를 인도합니다.
하느님의
천사를 통해
우리의 삶은
수호하고 수호받는
소중한 여정을
걸어갑니다.
삶의 시작도
삶의 마침에도
하느님의 천사는
늘 함께합니다.
수호 천사가 있기에
삶의 이아픔도
견딜 수 있습니다.
깊이깊이
삶의 신비를
느끼게합니다.
끊임없이 하느님을
믿도록 우리를
도와줍니다.
저마다의
수호 천사를 통해
차별없는 하느님
사랑을 만납니다.
하늘의 은총은
천사를 통해
드러납니다.
사람을 살리시는
하느님을 깨닫습니다.
수호 천사가 있기에
외롭지 않습니다.
신앙의 기쁨을
누리게합니다.
일상에서 만나는
평범한 모습이
가장 빛나는
수호 천사의
모습입니다.
우리의 참모습을
일깨워주는
수호 천사와 함께
우리의 삶이
사랑하는 삶으로
나가길 기도드립니다.
수호 천사가 있기에
살 만한 세상이 됩니다.
모든 삶은
수호 천사와
함께하는 하느님
사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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