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강 예레미야 목차>
머리말
서론. 예레미야와 그의 시대 (1:1-3)
예레미야서의 짜임새│예레미야서를 읽을 때│예레미야의 말들│아나돗 제사장 예레미야│예레미야의 시대
1. 예레미야의 소명 (1:4-19)
2. 돌아오라 (2:1-4:4)
3. 성전 설교 (7장, 26장)
4. 예레미야의 고백 (11-20장)
5. 참 예언자와 거짓 예언자 (27-28장)
6. 새 언약 (30-31장)
7. 돌이킴의 의미 (32장, 34-36장)
8. 예루살렘 멸망 후 (37-44장)
9. 열방을 향한 말씀 (46-51장)
10. 예루살렘의 최후 (52장)
*아래 내용은 김근주 저 <특강 예레미야> 전체 10장 중 6장 부분을 요약한 내용입니다.
(5장 "참 예언자와 거짓 예언자 부분"은 조만간에 올릴 예정입니다)
제 6장 새 언약 (30-31장)
회복에 대한 오해
이스라엘 민족에게 생명과 같이 중요한 것은 아시다시피 하나님과의 언약이다. 그래서 그들은 스스로 언약백성이라는 자부심이 아주 강했다.
바벨론으로의 패망은 누구도 희망하지 않은 피하고 싶은 재앙이었지만, 결국 그들의 죄로 인한 심판은 회복을 준비시키는 하나님의 또 다른 은혜의 징표임에 분명하다. 30-31장은 그런 의미에서 회복의 책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
현재 ㅅㄹㅇ교회 사태를 바라보면 예레미야 선지자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과 놀라울 정도로 닮아 있다
얼마전 우리지를 통해서 서초 예배당 완공에 대해서 언급한 것을 요약하자면 이렇다.
서초 예배당 공사의 여러 어려움(기술적인 어려움은 물론이고 반대세력의 모함과 근거없는 공격들)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훌륭한 예배당이 완공된 것이 너무 감격스러운 일이며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가 아니면 불가능한 것이라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얼마나 멋진 믿음의 고백인가!
하지만 그 이면에는 결국 호화로운 예배당의 완공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일이기에 그동안의 장애물과 방해는 아무런 문제가 없으며 앞으로는 영광의 자리만이 기다리고 있다는 맹목적인 믿음의 고백이 또아리를 틀고 있다. 그래서 이미 승부는 끝난 것처럼 들떠 있으며 자축을 하는 분위기이다.
그리고 반대편에 선 우리는 화려한 예배당에 압도(?)되어 의기소침해 있기도 하다.
하지만 속지 말자. 예레미야 선지자 당시 유다의 여러 선지자들도 거짓 예언으로 백성들을 미혹했다.
그들은 예루살렘은 하나님께서 영원히 보호하실 것이라 예언했다.
그래서 바벨론을 통한 고통은 지극히 일시적이며 이내 회복이 될 것으로 믿었다. 하지만 그것은 거짓 예언이었다.
하나님의 회복은 하나님을 버린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있고 난 이후에 도래한다.(162p)
ㅅㄹㅇ교회 사태를 보는 시각도 마찬가지다. 서초 예배당이 신축되고 그곳으로 평탄(?)하게 이전한다고 해서 그것이 과연 하나님께서 허락한 참 평화를 의미하는 것일까? 그렇게 본다면 하나님을 크게 오해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거짓 희망과 거짓 평화에 대한 선포는 거짓 예언자들의 상징이다. (163p)
예레미야를 포함한 구약시대때의 여러 예언자들은 이러한 거짓 희망과 거짓평화에 대해서 끊임없이 싸워왔으며 이것은 현재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심판이 고통스럽기는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의 또 다른 표현이라는 사실을 기억한다면 거짓 예언으로 점철된 현 상황에 대해서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심판의 과정이 마치면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포로된 신분에서 돌아오게 될 것이라는 약속을 하신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범죄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법대로 통치하실 것이라는 것을 함께 말씀하신다.
(이것은 공평과 정의로 하나님께서 세상을 통치하는 원칙을 세우신다는 말이다. 하나님은 사랑과 은혜가 풍성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그의 백성이 회복되기를 원하시지만 결국 합당한 징계를 함께 말씀하신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우리가 너무나 쉽게 간과해 버린다. 그것이 신앙생활에서 있어서 큰 무지라 할 수 있다.)
하나님과 그의 백성
회복한 이스라엘과 하나님사이의 관계는 이렇게 표현된다.
"너희는 내 백성이 되겠고 나는 너희들의 하나님이 되리라.(30:22)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언약에서 서로간의 관계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와 당신사이에서 분명한 언약을 말씀하시고 그의 백성으로 이것을 힘써 지킴으로써 올바르게 살아가기를 원하신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죄된 우리들을 향한 회복의 목적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시 지도자가 하나님께 가까이 간다는 말은 결코 가벼운 고백이 아니다. 이는 담대함이 필요한 일이었으며, 곧 자신의 삶을 걸어야하는 매우 중대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30:21 참고)
예레미야의 불평, 항의, 탄식은 하나님께 내어 놓는 그의 마음과 관련이 있으며, 우리가 그의 탄식을 깊이 있게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바로 우리가 삶의 전부를 하나님께 내어 놓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너무 쉽게 하나님을 찬양하고 감사한다)
31장은 출애굽에 대한 기억을 언급하는 말씀으로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모든 백성을 애굽과 광야를 통해서 인도하신 사건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 때 공동체의 소외된 자(고아, 과부, 나그네, 장애인 등)도 예외가 될 수 없다.
참된 복은 가장 연약한 이들에게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가에 따라 판가름 난다. 좋은 일이 생겼는데 그 공동체의 가장 연약한 지체들의 삶은 여전히 고통스럽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베푸시는 은혜가 아닌것이다. (173p)
(이것은 새로운 예배당을 입당하는 현 싯점에서 새겨 들어야 할 말씀이다!)
남유다의 멸망기와 멸망 이후에 살았던 예레미야가 남 유다뿐 아니라 북 왕국 에브라임의 회복도 언급한 것은 연합된 회복을 원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이라고 할 수 있다. (현재 지도자를 사이에 두고 두갈래로 갈라진 현 ㅅㄹㅇ교회 사태도 결국 이러한 관점을 가지고 있어야 할 것 같다)
예레미야와 많은 다른 예언자들이 흩어진 포로들의 귀환을 통해서 영광스런 회복과 새로운 사회 건설을 꿈꿨지만 결국 유다의 현실은 그리 아름답지 못했다. 당장은 그 예언이 성취되지 못했지만 하나님께서 그 언약을 온전하게 이루실 것이라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눈앞의 성취(화려한 예배당 입당 등)을 두고 승리와 패배를 판단해서는 안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당장눈에 보이는 성취가 없다고 해서 절망하거나 낙담해서는 안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현실과 거리가 멀더라도 하나님이 주신 이상을 마음에 품고 선포하고 증언하는 사람들이다. 그에 비해 오늘 우리교회들의 목표는 너무 "현실적"이다. 교회를 교회답게 하기 위해서는 세상에서 비현실적이라고 여길 만한 이상들, 돈으로 환산할 수 없고 돈도 되지 않는 이상들을 끝까지 품고 간직하고 확신하며 살아가야 한다. (180p)
새로운 시작
31장 28절에 등장하는 이전에 있던 것을 파괴하고 부수어 버리는 것을 의미하는 다섯개의 동사(뿌리뽑다, 무너뜨리다, 전복하다, 멸망시키다, 괴롭게 하다)와 새로운 회복과 건설을 의미하는 두개의 동사(세우다, 심다)는 결국 1장 10절의 예레미야의 사명과 연관되어 있다. 이렇듯 심판은 새로운 회복의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다.
출애굽 당시 옛언약이 하나님이 시내산에서 돌판에 새겨진 하나님의 법이라면, 새 언약은 이스라엘에 대해서 어떠한 요구도 없이 하나님의 일방적인 행동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백성들의 마음판에 새겨진 것이다. 이를 통해서 서로는 하나님과 그 백성이 된다.
결국 새언약은 "토라(언약)"의 내면화라는 점에서 옛 언약과 뚜렷하게 구별된다.
내 백성과 너희 하나님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다스림, 하나님 나라를 의미하며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토라를 준행하여 살아가는 삶은 옛 언약 (율법을 준행할 때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사실)과 함께 여전히 중요한 일이었다.
"내가 기쁨으로 그들에게 복을 주되 분명히 나의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그들을 이 땅에 심으리라" (32:41)
이 새언약은 결국 신약의 예수님이 주신 새언약과 자연스럽게 연결이 된다. (눅 22:20) 신약의 죄사함은 결국 예수의 피로 말미암은 죄사함이며, 이것은 예레미야서가 강조하는 새언약 즉 하나님의 일방적인 사랑과 관계가 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예루살렘을 친히 뽑고 뒤집으셨으나 이제 예루살렘은 뽑히거나 뒤집어지지 않을 것이다. 새언약은 예레미야가 받은 소명의 최종적인 국면이며 완성이다. (31:28)
결론
거짓 평화와 회복을 외치는 현 시대를 사는 우리들은 쉽게 낙담하거나 방심해서는 안된다. 눈에 보이는 성취는 우리에게 결코 약이 될 수 없으며 때로는 우리를 위협하는 무서운 독이 될 수 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서를 통해서 새 언약에 대해서 말씀하셨다. 이것은 우리가 율법 준행을 통해서만이 그의 백성이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죄성에 불구하고 하나님은 일방적으로 우리의 하나님이 되시고 우리는 그의 백성이 된다는 선포이다. 하지만 우리는 토라(율법)의 내면화를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을 제대로 알게 되며 그 백성으로 온전히 살아갈 수있다는 점이다.
<생각할 문제>
1. 눈앞에 보이는 성취나 좌절로 인해서 쉽게 승리감으로 도취되어 있거나 패배감에 사로잡혀 있지는 않은가?
오늘 본문에서 보이는 하나님의 관점은 어떠한가?
2. 심판과 회복은 결코 분리될 수 없으며 하나님 사랑의 양면이라는 사실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가?
3. 새 언약을 "토라의 내면화에 기반을 둔 하나님 백성으로서의 삶"이라고 할 때 그 구체적 의미는 무엇인가?
첫댓글 소중한 글 마음에 담습니다.
회복의 은혜가 우리 교회로부터 시작되기를 소원합니다.
오늘의 고난 능히 감내할 힘도 주시리라 믿습니다.
푸른 애벌레님 내가 사랑하는것 아시지요.
집사님! 늘 관심과 격려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함께 기도하고 섬기겠습니다
와우! 멋진 글이자 마음을 움직이는 힘있는 글로 다가옵니다. 이 글에 담겨 있는 통찰의 샘이 모든 이에게 있기를!
늘 좋은 글로 섬겨주셔서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