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Romance of Astrea and Celadon/2007/에릭 로메/109분/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오후 5시/CGV 5
1995년에 타계한 프랑스의 영화감독 피에르 주카(에릭 로메가 “포스트 누벨바그 세대 중 장 외스타슈와 함께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 감독)가 수년 전 로메의 로장주 영화사를 찾아와 만들고 싶다고 제안했던 것이 실은 17세기 프랑스의 유명 목가 소설 <아스뜨레>였다. 이 영화 <로맨스>의 원작이다. 주카의 영화는 만들어지지 못했지만, 그의 사후에 소재를 찾던 로메는 평소 자신과 문학적 취향이 유사하던 주카의 미완성 프로젝트를 생각해냈고 마침내 <로맨스>(원제는 <아스트레와 셀라동의 사랑>)에 착수했다. 이렇게 하여 주카에게 이 작품을 헌사하고는 있으나, 로메는 당연하게도 초점을 옮기고 형식을 바꿔 ‘로메적인’ 것으로 만들어냈다. 미남 목동 셀라동은 착한 시골 처녀 아스뜨레와 연인사이다. 그런데 어느 날 셀라동이 다른 여인과 있는 장면을 본 아스뜨레는 그가 변심했다고 생각하여 더 이상 그를 만나지 않는다. 자기의 진심을 몰라주는 아스뜨레에게 셀라동은 강가에 투신하여 결백을 인정받으려고 한다. 그가 강물에 뛰어들고 아스뜨레는 셀라동이 죽었다고 생각하며 슬퍼한다. 하지만 요정들의 도움으로 살아나게 된 셀라동. 그는 요정들에게도 인기를 얻게 되지만 오로지 아스뜨레 생각뿐이다. 셀라동은 여장을 하고 아스뜨레를 찾아가기로 한다. <로맨스>는 간결하기 그지없다. 17세기에는 어울리지 않는 고대의 의상을 입은 인물들이 최소한의 소도구와 배경만 있는 프레임 안에서 때때로 발생하는 우연들을 인정하며 단지 서성거린다. 얼핏 보면 아무 것도 아닌 영화 같다. <로맨스>는 그러나 영화가 어떤 물질이 되고, 그 물질 중에서도 무색무취의 공기가 되는 기이한 경험을 선사한다. “이전의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이 영화는 거대한 기하학적 형상, 우연의 결정적인 간섭으로 조직되어 있다”고 로메는 전하고 있는데, 그건 이 영화의 폭넓은 경이로움에 대한 힌트 중 일부일 뿐이다. 글 정한석(부산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 2008-05-03
DVD
<로맨스> Les Amours d’Astree et de Celadon
17세기 초엽, 작가 오노레 뒤르페는 고대 양치기들의 이야기를 소설로 썼고, 소설 <아스트레>는 에릭 로메르의 각색과 연출을 거치며 다시 17세기 스타일로 재현됐다. 셀라동과 아스트레의 사랑엔 걸림돌이 많다. 부모와 경쟁자들이 두 사람의 사랑을 방해하고 시기하는 과정에서 아스트레는 셀라동의 사랑을 불신하게 된다. ‘다시는 눈에 띄지 마라’는 그녀의 명령을 따라 셀라동은 급류에 몸을 던진다. 사제의 예언에 맞춰 강가를 찾은 님프들이 셀라동의 생명을 구하지만, 이 사실을 알 리 없는 아스트레는 슬픔에 빠진다. 인간의 세상과 신화의 세상 가운데 위치한 숲에서 구원을 기다리는 셀라동에게 어느 날 사랑과 지혜의 전도사가 찾아온다.
이전에도 로메르는 연작과 연작 사이에 간혹 시대극을 배치하곤 했는데, ‘사계절 이야기’를 마친 뒤엔 다소 이례적으로 계속해서 시대극만을 연출하고 있다. 시대의 정신, 상대방의 진심 혹은 내면을 깨닫지 못하는 여자들의 이야기란 점에서 <영국여인과 공작> <삼중 간첩> <로맨스>를 ‘어리석은 여자의 실수’ 시리즈로 묶을 수 있으나, <로맨스>는 로메르가 이전에 만든 시대극과 근본적으로 다른 노선을 취한다. 시대극에서는 유독 실내, 세트를 선호했던 로메르는 이번에 자연과 인물만 담기로 작정한 듯하다. 몇몇 실내장면을 제외한 모든 신은 나무와 강과 숲과 바람과 새소리를 배경으로 하고 있으며, 영화의 인물들은 흡사 그들이 수세기 전의 공간에 존재하는 양 연기한다.
<로맨스>는 1995년에 세상을 떠난 감독 피에르 주카를 애도하는 작품이다. 주카의 이른 죽음을 슬퍼한 로메르는 주카의 작품이 해외는 물론 프랑스에서도 외면받았다는 사실을 기억했을 것이다. 주카가 미완의 프로젝트로 남긴 <아스트레>를 영화화하며 로메르가 의도한 바는 <로맨스>에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다. 인물 구성과 내러티브가 복잡한 소설은 영화로 옮겨지면서 단순한 모습으로 바뀌었다. 인공의 장치, 티끌이나 군더더기는 모두 제거되고, 오직 자연스러움이 영화를 다독인다.
왜 그럴까? 영화의 주제가 ‘순수한 사랑’이기 때문이다. 대다수 로메르의 영화에서 주인공들은 오해, 불신, 질투, 배신, 현혹, 착각을 거친 뒤에야 (영화에서 고작 몇분의 시간만 허락되는) 사랑의 환희에 도달한다. 반면 <로맨스>는 사랑에 충실한, 사랑의 진심을 간직한 남자가 들려주는 교훈극이다. 아스트레가 짧은 순간 의심하고 뉘우친 다음, 영화의 많은 부분은 셀라동의 헌신에 집중한다. 셀라동은 사랑의 신전을 짓고 사랑의 계명을 쓴다. 거기엔 ‘끝없는 사랑, 지고한 사랑, 하나뿐인 사랑’이 적혀 있다. <로맨스>는 눈에 보이는 허상과 어색한 가장 아래의 진실을 꿰뚫어보고 참사랑을 발견하기를 원하며, 로메르는 인간의 변덕스러운 마음, 거추장스러운 도덕과 씨름하는 대신 사랑에 종교적 지위를 부여한다. <로맨스>가 아흔을 앞둔 로메르가 도착한 종착역이라 해도 난 놀라거나 섭섭해하지 않겠다. 일생 인간과 이야기와 관계를 탐구했던 노대가는 그 여정의 말미에서 ‘로맨스의 정수’를 완성해놓았다.
현재 프랑스 바깥에서는 구하기 힘든 <로맨스>의 DVD가 한국에서 출시된 것 자체가 기쁨이다. 로메르 영화의 전통적인 포맷인 1.33:1 스탠더드 화면비율의 영상과 특이하게 3채널로 수록된 사운드는 둘 다 나무랄 데 없다. 부록은 예고편뿐이지만, 그건 여타 로메르 영화의 DVD도 마찬가지란 점을 밝혀둔다. 글 이용철(영화평론가) 2009-01-16
자료출처: 씨네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