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젯밤에 긴장을 해서 그런지 새벽 2시를 넘겨 간간이 잠을 깼다.
6시 45분, 채 날이 밝지 않았지만 신발장에서 운동화부터 챙겨 신었다.
수능날엔 운동화가 필수, 하루 종일 서 있으려면 구두 같은 것을 신었다간 큰일난다. 게다가 예민한 수험생들은 구두 발자국 소리에도 민감한 반응을 보이기 때문에...
배정 받은 잠실의 한 고등학교로 향했다. 북을 치며, 격려하러 나온 학생들 몇과 학부모들이 교문 양편에 늘어서 있지만 점점 그나마 줄어드는 추세인 듯하다. 이곳은 어제 감독관 회의도 왔었지만 아무리 남자 고등학교라지만 너무 열악한 학교 환경으로 나를 놀래킨 곳...게다가 아직도 그냥 분필이라니...
감독관들이 학생 식당에 모여 대기하다 다시 한 번 주의 사항과 시험실 배정에 관해 듣고 배정표를 들여다본다. 제 2감독관이다. 다행이다. 제1감독관은 좀더 챙길 것들이 많아 상대적으로 부담이 된다.
드디어 8시 10분 입실. 1교시 언어 영역은 8시 40분 시험 시작까지 준비하는 데만 30분이 걸린다. 부정행위 예방 및 주의 사항 고지, 소지금지 물품 수거, 필기구 배부, 개인 소지물품 제출, 결시자 확인, 본인 대조, 심리적 압박으로 시작 전 화장실 가는 사람도 제일 많고...귀마개를 해도 되느냐, 이런 필기구를 가지고 해도 되느냐 질문도 많다. 가끔 답안지 수정을 위해 수정테이프를 요구하는 친구들 중에는 긴장으로 손이 떨려 제대로 칠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이게 다 1교시에 일어나는 일들이다. 1교시만 잘 넘기면 나머지 시간은 학생들이나 감독관들이나 비교적 시험장에 잘 적응 한다.
드디어 8시 40분 시험 시작, 나라 전체가 조용하다는 듣기평가 방송 시간이다. 교실 가장 눈에 안 띄는 곳으로 갔다. 예민한 수험생들은 자기 앞에 가까이 서 있는 것도 신경 쓰고 또 듣기 문제는 아무래도 다들 신경이 곤두서기 때문에 최대한 조심해 주어야 한다. 1교시 시험장은 결시자가 없다. 응시원서철을 보니 특목고를 비롯한 인근 3개 학교 인문계 학생들이다. 모두들 긴장된 얼굴이지만 포기자 없이 열심히 푼다.
중간에 한 학생이 손을 든다. 얼른 다가가는데 1감독관 선생님도 동시에 도착... 용건은 시계가 바닥에 떨어졌으니 주워 달라는 것, 친절한(?) 감독관들의 배려에 학생도 빙긋 웃는다.
다시 기나긴 긴장의 침묵.... 가끔 초콜렛 까 먹는 소리...
1교시 종료 3분전인데 그 때까지 답지에 옮겨 적지 않고 푸는 학생이 있다. 내가 다 애가 탄다.
드디어 10시 종료령,
별다른 일 없이 언어영역 시험이 끝나니 나도 안심.
2교시는 수리 영역. 이번 교실도 역시 인문계 교실인 듯 결시자가 많지 않다. 문제지 받자마자 3명이 바로 엎드린다. 그래도 수포자 수가 이 정도면 양호한 편.
나머지 학생들은 어쨌든 끝까지 붙들고 있다. 역시 별다른 일 없이 지나가고. 수리영역 끝나니 12시 10분.
점심 시간이 되자 비로소 학생들도 긴장이 많이 풀린 듯하다.
부리나케 점심 먹고 나니 3교시 언어 영역에도 시험감독이 배정되어 있다. (아니 우째 이런 가혹한 일이?) 다리가 저려온다. 이번에 배정된 교실은 3교시만 하고 가는 예․체능 학생들이 주로 모인 시험실이다. 결시자가 11명이나 된다. 28명 정원의 반 가까이가 비어 있다. 응시생들의 면면도 포스가 장난이 아니다.
영어 듣기 문제가 방송되었지만 아예 모자를 쓰고 노골적으로 자든가, 시험지 뒷면에 낙서를 하며 멋진 작품을 그리는 학생들까지 다양하다. 끝까지 푸는 학생들은 손에 꼽을 정도... 긴긴 시간 이렇게 자야 하는 학생들의 모습을 보니 가슴 한 켠이 저려 온다. 외국어영역시간에 자야 했던 이들은 분명 2교시 수리 영역 시간에도 이렇게 엎드려 있었을 것이므로! 이 교실엔 초콜렛도 별로 눈에 띄지 않는다. 1교시 시험실과 사뭇 대조적이다.
50문항 중 17문항이 듣기 문제인데 그다지 어려운 것 같지는 않았다. 잠깐 잠깐 보니 나머지 문제는 거의 대부분이 독해 문제. 그나마 문법 관련한 문제는 그다지 많이 눈에 띄지 않는다. 문제 유형도 국어 문제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집에 와서 뉴스를 보니 올해 외국어영역이 쉽긴 쉬운 모양이었지만.) 앞뒤 문맥을 유추하여 알맞은 단어 고르기, 문단의 순서 바로 잡기, 내용 이해하고 알맞은 제목 붙이기 등.
영어 문외한인 내 생각에도 평소 책을 많이 읽은 아이들은 얼마든지 눈치로도 풀 수 있을 것이란 생각도 든다. 물론 다른 선생님들은 수능 영어는 별거 아니고 다 맞는 것을 전제로 해야 한다고들 하시지만.
......
시간은 흘러 흘러
마지막 5교시의 종료령.... 여기 저기서 내쉬는 한숨과 미묘한 표정들은 참 뭐라 한 마디로 말할 수 없을 만큼 복잡다단하다. (나도 그 옛날 학력고사 끝났던 시간에 잠시 감정이 복받쳐 울었던 기억이 난다.) 드디어 끝났다. 어쨌든.
어둑한 운동장을 지나 집으로 오는데 지난 번 조국 교수님이 ‘선거일’은 최대의 정치학습일이라고 했던 말이 생각난다. 그렇다면 수능일은 우리 나라 교육에 대한 관심이 최대 정점을 찍는 날 아닌가. 오늘 감독했던 다양한 시험실의 학생들이 우리 교육의 정단면을 보여주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마음이 또 한 번 복잡해 온다.
첫댓글 시험감독하셨군요. 하루종일 서 계시느라 힘드셨겠어요. 시험장이 눈에 그려지네요. (전 왜 이리도 글로 표현하는게 힘드는지...ㅠㅠ) 선생님의 배려도 느껴지고 시험장의 고단한 아이들의 모습은 전해들은 저도 안타까워요.
네 감사합니다. 정말 안타까운 광경들이 아직도 눈에 선합니다.
선생님의 글을 따라 아이들의 미세한 숨소리, 긴장감을 함께 느끼며 읽어내리다보니 저도 어제 수능장에 있었던듯하네요...
한 고비를 넘은 아이들에게 이것도 삶의 경험으로 남아 성숙의 길로 이어지기를 기도해봅니다. 선생님도 애쓰셨어요!!
어제 저도 참 많은 생각을 한 하루였어요. 언젠가 우리의 아이들도 그 자리에 앉게 되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