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발없이 걷기 연습 둘째 날이다
오늘은 불과 4년 전에 복원된 동래 사직단(東萊 社稷壇)을 답사하기로 한다
동래 사직단이 있었기에 지금의 사직동이라는 지명이 생겨났으니
왕이 친히 제례를 올리는 서울의 사직단과는 비교가 되지 않겠지만
부산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사직단의 복원이 어찌 반갑지 않을 수 있으랴
대부분의 부산시민들은 물론 사직동에서 오래 살았다는 사람들조차도 잘 모르고 있을 것같은 동래 사직단을
나도 '58마당 카페'에서 '지금은 노인'이 소개한 복원소식을 접하고서 호기심을 가지게 되었다
내친김에 사직동의 옛 자연부락이었던 여고리(余古里)와 석사리(石社里)의 흔적들도 함께 답사를 할 것이다
동래 사직단은 지하철 3호선 사직역 4번 출구를 나와 사직운동장 쪽으로 조금 가다가.....
왼쪽의 언덕길을 올라가면 되는데
사직단과 담장을 같이 하고 있는 사직 대건성당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저 언덕을 올라가면 대건성당 바로 옆에 사직단이 있는데
옛 사직단 자리와 지금의 사직단, 그리고 옛 여고 주산당이
옛날에는 언덕 위 주위가 터진 제법 높은 곳에 있었다는 것을 유추할 수 있다
사직 대건성당
한국 최초의 천주교 신부이자 순교자인 김대건(金大建)신부(1821~1846)의 이름을 딴 성당인데
여늬 천주교 성당과는 달리 지붕 위에 십자가나 마리아상이 없어
얼핏보면 성당인줄 모르고 지나칠 정도다
성당 마당 한쪽에 서 있는 김대건 신부 석상이나 마리아상이 있으니 성당인줄 알겠다
김대건(金大建)신부는 순교자 집안에서 태어나, 모방 신부를 통해 마카오로 유학하여 신학 교육을 받았고
이후 우리나라 최초의 신부로 임명되었다
조선에 돌아와 전교 활동과 선교사들의 입국을 돕다가 1846년 새남터에서 순교하였는데
그의 열성적 전교 활동과 경건하고 당당한 신앙자세는 이후 천주교인들의 귀감이 되었다
1984년 한국카톨릭 200주년을 맞아 우리나라에 온 교황 성 요한 바오르 2세에 의해 성인으로 시성(諡聖)되었고
유네스코는 2019년 11월 14일, 김대건 신부의 탄생 200주년이 되는 2021년 유네스코 세계기념인물로 선정하였다
성당의 주차장 담 너머가 동래 사직단이다
동래 사직단(東萊 社稷壇) : 부산광역시 동래구 사직동 407-3
지금의 사직동이라는 지명은 이 사직단(社稷壇)에서 따온 마을 명칭이다
일제 강점기 이전에 지금의 사직동 일원에는 대표적 자연 마을인 '석사리(石社里)'와 '여고리(余古里)'가 있었고
약 200여 세대의 마을 주민들이 살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1945년 일제 식민 정책에서 해방된 후에 두 마을 모두 사직동이라고 개명하였고
여고(余古)라는 옛 지명은 인근에 있는 지금의 '여고초등학교' 교명에서 그 명맥을 이어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1984년에 개교한 인근의 여명(余明)중학교도 1995년에 교명을 변경하기 전까지는 여고(余古)중학교였다
사직단(社稷壇) 전경
사직(社稷)에서 사(社)는 토지의 신을, 직(稷)은 오곡의 신을 뜻한다
즉 사직단은 왕을 비롯한 지방 수령이 토지 신과 곡물 신에게 제사를 드려 나라의 풍요와 지방의 안녕을 비는 곳이었다
신라가 중국의 사직단 제도를 도입한 이래, 역대 왕조는 사직단을 건립하였다
1530년(중종 25)에 간행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동래현의 서쪽에 사직단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영조(英祖) 때 저술된 『동래부지(東萊府誌)』에는
1640년(인조 18) 동래 부사 정호서(丁好恕)가 사직단을 건립하였고
현종(顯宗) 때 동래 부사 이하(李夏)가 중창하였으며
1709년(숙종 35)에 동래 부사 권이진(權以鎭)이 지금의 위치 인근으로 옮겨 건립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숙종(肅宗) 때 지금의 위치 인근으로 옮긴 사직단은 정당(正堂) 1칸, 재실(齋室) 5칸의 규모였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 때 방치되어 주택가로 변하여 흔적이 사라지고 말았다
복원된 사직단(社稷壇)
그러다가, 2020년 1월에 옛 여고 주산당(余古 主山堂)과 여고 경로당이 자리잡고 있던 지금의 터를 기증받아
복원 작업에 착수한 끝에 이듬해인 2021년 1월 27일에 복원되었으며
복원된 사직단 한 변의 길이는 6.5m, 높이는 0.78m이고, 사방에 天地人을 상징하는 3단 계단을 두었고
단의 동서남북 바깥 사방에는 유(壝)와 유문(壝門)/홍살문(紅箭門)을 설치하였다
제사는 매년 음력 2월 상무일(上戊日)에 올린다고 한다
관리자에 의하면 창고로도 쓰고 있다는 1칸 짜리 맞배지붕의 신실(神室)과
신실(神室) 뒷쪽 한 단 아래에는 4칸 규모의 맞배지붕을 한 재실(齋室)이 있는데
관리자가 재실 한 칸을 사무실로 사용하고 있었다
재실 오른쪽 뒤로 돌아가면 모퉁이 담장 옆에 주산신위(主山神位)가 있다
사직단 주변의 여고부락은 당산제를 지내오던 여고 주산당(余古 主山堂) 부지를
2019년 사직단 복원을 위해 기증하였고
당산제 풍습과 전통을 위해 기여한 분들을 기리기 위하여 이 주산신위를 세웠다
옛 여고 주산당(余古 主山堂) 안에 모셨던 나무로 된 주산신위 위패 대신 이 돌로 된 주산신위를 새로 세운 것이다
뒷면을 보면 2019년 사직단 복원사업을 위해 부지를 양도하였고
1934년 2월 임야 오백여 평을 당산터로 기증한 김녕 김씨 성술공의 공덕비와
이조말엽 여고부락민에게 전재산을 기증한 양공의 공덕비를 이곳에 매안(埋安)하고
여고부락민들의 발전과 안녕을 기원하기 위하여 주산당 제당을 세운다고 기록되어 있다
(매안(埋安)이란 신주(神主)를 묘소에 묻는 상례의식을 말한다)
<참고사진> 옛 여고 주산당(余古 主山堂)과 여고 경로당
이 두 건물을 헐고 그 자리에 지금의 사직단을 복원한 것이다
사직동 여고 주산 당산제(社稷洞 余古 主山 堂山祭)는 음력 정월 초하루 자정 무렵에
저 여고(余古) 주산당에서 1년에 한 번 마을의 수호신인 할배신(남신)에게
동네의 안녕과 풍요를 기원하며 마을 공동으로 제사를 지냈던 것이다
여고 마을의 제당은 원래 1898년 마을 서쪽 야산의 가운데에 있었으나 1980년 10월에 저 제당을 세웠으며
사직동의 여고 주산당(余古 主山堂)과 석사 주산당(石社 主山堂)은 서로 마주 보고 있는 형국이고
여고 제당은 남신(할배신)이며, 석사 제당은 여신(할매신)이라고 한다
옛 사직단이 있던 자리는 지금의 사직단에서 80여 걸음 떨어진 가까운 곳에 있는데
1709년(숙종 35)에 동래 부사 권이진(權以鎭)이 이 자리에 옮겨
정당(正堂) 1칸, 재실(齋室) 5칸의 규모로 건립하였으나
일제 강점기 때 방치된 이후 주택가로 변하여 흔적이 사라지고 말았고
아파트와 주택으로 빽빽하게 들어선 자리에서의 복원이 현실적으로 어렵자
인근의 여고 주산당(余古 主山堂)과 여고 경로당을 기증받아 지금의 자리에서 복원을 하게된 것이다
이제 발걸음을 돌려 여신(할매신)을 모신 석사 주산당(石社 主山堂)으로 향하는데
언덕 아래 저 너머 어딘가에 석사 주산당이 있을 것이고
그 뒤로 쇠미산(금정봉)이 우뚝하니 산그리메를 보이고 있다
석사 주산당은 사직역 3번 출구를 나와 사직야구장 방향으로 조금 가다가 오른쪽으로 꺾는다
석사 주산당도 다소 높은 곳에 있는지 가벼운 언덕길을 조금 오르면 나오는 사거리에서.....
이쪽은 사직야구장으로 내려가는 왼쪽 길이고
석사 주산당은 오른쪽 단비어린이집 뒤편에 있다
단비어린이집 담벼락 옆 골목 끝 저기에 석사 주산당 건물이 보인다
사직동 석사 주산당(社稷洞 石社 主山堂)
부산광역시 동래구 석사로18번길 27-3(사직1동 74-35)
사직1동경로당을 비롯한 사직1동 주택가 집들 한가운데에 자리를 잡고 있다
사직1동경로당
석사 주산당(石社 主山堂)에서는 음력 정월 초하루 자정에
마을 수호신을 모시고 동네의 안녕과 번영을 기원하며 마을 공동으로 지내는
석사 주산 당산제(石社 主山 堂山祭)를 올리고 있다
석사 마을은 지금의 사직동에 있었던 자연 마을이었고
사직동은 동래부에 세워진 사직단(社稷壇)에서 따온 마을 명칭이다
옛날 선조들이 이곳에서 마을을 이루고 살았을 때부터 마을의 수호신을 모신 신단을 두었다고 한다
옛 제당은 사직동의 동쪽 야산 위에 있었는데 1976년 마을의 중앙에 지금의 제당을 다시 만들었다
석사 주산당에서 모시는 수호신은 할매신으로서
인근의 여고(余古) 주산당에서 모시는 할배신과 서로 마주하고 있다
제례일이 아니면 출입을 금하기에 출입문이 굳게 잠겨있다
1976년에 중건한 석사 주산당(石社 主山堂)은 8개의 기둥이 떠받치고 있는 형상의 2층 건물이다
건물 상부는 팔모지붕의 양식으로 되어 있으며, 벽은 블록을 쌓아서 시멘트로 마감되었다
내부의 제단 위에는 ‘주산신위(主山神位)’라고 쓴 목제 위패가 위패함에 들어 있으며
제당 밖 왼쪽에는 ‘석사부락수호신지(石社部落守護神趾)’와
오른쪽에는 ‘석사성황당중건비(石社城隍堂重建碑)’등 비석 2개가 기단 위에 세워져 있다고 한다
돌이켜보니 사직야구장 인근 지금의 '사직역 삼정그린코아 더베스트아파트' 단지 자리에
'석사촌'이라는 이름의 분위기 고즈녁한 'ㅂㅅ탕' 집이 있었는데
그 집 상호인 '석사촌'이 이 석사(石社)마을의 옛 명칭에서 따온 것임을 알게되었다
그 집은 입구에서부터 약10여 m를 키 큰 대나무 숲 사이 호젓한 오솔길로 걸어가게 되어 있었고
사방이 나무숲으로 둘러싸인 넓직한 마당 안 원두막에서는
윗저고리를 벗어 제낀 런닝 차림으로 한여름의 더위를 식히기도 하였던 추억이 서린 맛집이었고
그 주변에는 청도집이니, 고정집이니 하는 유명 'ㅂㅅ탕' 집들이 몇몇 있었는데
적지않은 세월을 살다보니 많은 것들이 변하고 사라지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