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연산에는 시민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경관도 많거니와
경관 명칭의 와전도 많다.
소중한 문화재인 암자터도 파괴되고 있는 현실이다.
무풍계: 보경사에서 연산폭까지의 계곡, 한자가 '無風溪'가 아니라 '舞風溪'이다.
사자폭(獅子瀑): 조선시대 문헌에 모두 사자폭으로 나오지만 해방 뒤 어느 시점에서 상생폭으로 부르고 있다.
사자쌍폭, 쌍폭을 상폭(相瀑)으로, 다시 상생폭(相生瀑)으로 와전 시킨 것.
선열대(禪悅臺): 선열대의 백운암과 운주암을 합하여 선열암이라 하였고, 그 동쪽의 암대를 선열대라고 하였다.
선열은 선정 수행 중에 생기는 열락을 의미한다. 두 암자는 선정 수행 공간이었다.
해방 뒤 어느 시점에서 선열대가 발음이 와전되어 선일대가 되고,
선일대에다 선일대라는 한자로 표기하고
선일대 한자에서 다시 신선이 숨는다, 잠룡폭의 용이 숨는다 등의 황당한 말을 지어내기에 이르렀다.
비하대(飛下臺): 비하대의 본래 명칭은 월영대(月影臺)이다. 속칭 기하대라고 하였는데 포항의 연일현감으로 온
영남퇴계학의 정맥을 잇는 대학자 대산 이상정이 1754년 3월에 보경사 대비암의 오암당 의민 스님,
흥해군 향리이고 천재 시인이던 농수 최천익 진사와 더불어 비하대에 올라와
기하대가 뜻이 좋지 않고 기하대라는 이름은 주자의 시 <취하축융봉(醉下祝融峰)>의
제4구 '낭음비하축융봉(朗吟飛下祝融峰)'의
'비하'가 와전된 것이라 하며 비하대로 고쳤다. 물론 이상정의 아전인수격의 억지 해석이다.
더욱 심한 것은 비하대라는 한자의 뜻을 가지고 신선이 비하대에서 날아내려와 다시
선일대로 올라가 숨었다가 신선계에 갔다는 둥 이상한 이야기를 지어낸 것이다.
비하대의 다른 이름은 중허대이다.
비하대 입구의 석문은 청풍문으로 월영대에 짝하도록 청풍명월(淸風明月)에서 해월 황여일이 취한 것이다.
비하대에 새겨진 '대산선생명명 비하대'라는 글자는 봉화의 유학자 강필효(姜必孝)의 글씨를 받아
대산 이상정의 손자인 청하현감 이병원이 새긴 것이다.
내연산 경관의 명칭 회복과 문화재 보호
2015년 12월 28일, 내연산 선열대에 세운 정자의 제막식이 있었다. 그런데, 정자에는 ‘선일대(仙逸臺)’라는 편액이 걸렸다. 선열대(禪悅臺)가 20세기 후반에 ‘선일대’로 와전된 것이다. 2015년 3월, 10년 간의 문헌과 현장 조사 끝에 『인문학의 공간, 내연산과 보경사』(포항문화원)를 간행하였다. ‘선열대’라는 본래 이름을 되찾지 못한 것이 이 책의 공저자로서 정말 아쉽다.
인간은 자연에 명칭을 부여하고 그를 통해 그 의미를 인식한다.『유마경』에 나오는 것처럼, ‘선정(禪定)의 열락(悅樂)’을 음식의 맛으로 삼으며 스님들이 수행을 하였던 운주암(雲住庵)과 백운암(白雲庵)이 있었고, 이 두 암자를 합하여 ‘선열암’이라고 불렀던 데서 선열대라는 이름이 유래한다. 두 암자는 겸재 정선의「내연산폭포도」에도 등장하고, 일제강점기까지도 선열대라고 하였으며, 선열봉, 운주봉, 기화봉, 백운대라는 이칭도 있다.
임진왜란 5년 전인 1587년 음력 8월 7일, 해월(海月) 황여일(黃汝一)은 보경사 승려들의 안내를 받으며 내연산 최고의 명소인 선열대에 올라 주변 경관과 '만경창파의 바다를 굽어보고, 광활한 우주를 우러르며, 정신이 시원하고 몸이 가벼워졌다.’고 하였다. 명나라에 서장관으로 다녀 올만치 그는 당대의 문장가이고 학봉(鶴峯) 김성일의 제자로서 『퇴계집』 간행 책임자가 될 정도로 뛰어난 학자였다. 그의 내연산 유산기, 「유내영산록(遊內迎山錄)」은 조선시대에 단행본으로 유통될 정도로 빼어난 문학이다.
접근시설을 만들며 일어난 화재로 묘입문(妙入門)의 수백 년 솔이 죽고 정자를 만들며 나무가 잘렸다. 소중한 문화재인 백운암터의 석축이 파괴된 채 방치되어 있다. 안내판에는 ‘신선이 학을 타고 비하대에 내려와 삼용추(三龍湫)를 만들고 선일대에 오래 머물렀다.’고 하였다. 학소대(鶴巢臺), 비하대, ‘선일대’의 이름에서 나온 말이다. 영남퇴계학의 정맥을 잇는 대학자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 선생이 영일현감으로 재임하던 1754년 3월, 흥해의 천재시인 농수(農叟) 최천익(崔天翼) 진사, 대비암(大悲庵)에 머문 시승 오암(鰲巖)스님과 어울려 계조암(繼祖庵)에서『논어』를 강의하고 월영대(月影臺)에 올랐다. 그가 주자의 시,「취하축융봉(醉下祝融峯)」의 제4구, ‘낭음비하축융봉(朗吟飛下祝融峯)’에서 취하여 월영대의 속칭이던 기하대(妓賀臺)를 비하대(飛下臺)로 개명했다.
내연산에는 명칭이 와전되거나 상징 경관인 삼동석(三動石), 낙호암(落虎巖), 서하굴(棲霞窟)처럼 그 존재 자체가 우리에게 인식조차 되지 못하고 있는 경관이 약 40곳이나 된다. 또한 탐방로 옆의 쉼터가 된 적멸암터처럼 문화재 표시판도 없이 파괴되거나 방치되고 있는 암자터가 약 14곳이 된다. 안타깝고 부끄럽다.
포항시는 보경사서 삼용추까지 탐방로 정비, 쉼터, 포토존, 겸재 작품 전시대 설치 등을 연차적으로 조성한다. ‘동궁과 월지(안압지)’처럼 내연산 명소의 바른 이름을 회복하고, 잃어버린 경관을 되찾으며, 암자터에 문화재 안내판을 세워야 한다. 예로부터 ‘소금강산’이라 불린 내연산의 수려한 자연과 풍부한 인문학 유산을 우선 보호하고, 다음에 계발하는 일을 새해부터라도 시급히 해야 할 것이다.
-김희준(노거수회, 포항문인협회, 대동중 역사교사)
-경북일보 2016.2.24.에 위의 글이 몇 구절 삭제되고 '내연산 정자 명칭 바로잡아야'라는 타이틀로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