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태어나서 가장 먼저 부르는 이름이 “엄마” 라고 한다.
성장해서는 “어머니”라 부르게 되지만, 엄마든 어머니든 이보다 더 편하고 정겨운 말은 없을 것이다.
올해 회갑이 된 나는, 아직도 어머니라는 이름을 부를 수 있어 행복하다.
내 어머니는 올해 연세가 97세로, 2년만 더 지나면 白壽가 되신다.
어머니는 乙酉 생으로 나하고 띠가 같다.
막내인 내가 올해 회갑이 되었는데도 이런 저런 사유로 잔치도 안 하고 여행이나 다녀 온 것에 대해 어머니는 좀 서운한 마음이 있으셨던 것 같다.
효라는 것이 나를 위해서가 아니고 어머니를 기쁘게 해 드려야 하는 것인데, 아무리 내가 사정이 있다고 해도 어머니 마음을 채워드리지 못한 것에 대해서는 죄송한 마음이 든다.
이제부터 우리 어머니에 대해 좀 자세히 소개해 보고자 한다.
19세 어린(?) 나이에 더 어린 아버지(17세)에게 시집오셔서 모두 7남매를 낳으셨는데, 지금은 3남매만 살아있다.
어머니는 친정이 반월로 6남매의 맏딸로 태어나셨는데, 정식 학교를 다니지 않고도 한글을 깨우쳤다고 하신다. 이 때문에 시집와서 등잔불 밑에서 시댁 어른들께 고대소설(홍길동전. 장끼전 등)을 많이 읽어드려 귀여움을 받으셨다고 한다.
우리 아버지는 8남매의 맏이였고 시할머니까지 계셨다니 대가족이었는데, 어머니가 시집오셔서 얼마나 일이 많았는지는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옛날에는 일손이 모자라 일찍 며느리를 보는 경우가 많았다.
우리 집은 담배 집으로 불렸는데, 아버지는 20대에 마을 구(이)장을 보시고 30대에는 면서기로. 또 지방의 각종 위원으로 공적인 일을 많이 보셨기 때문에, 농사일보다는 바깥 활동이 많으셨다.
그러니 자연히 집안일에서의 어머니 몫은 클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아버지는 사람들과 얘기를 나누는 것을 좋아하셔서 면사무소. 파출소. 우체국. 군청 등에서 공무원이 오면 우리 집부터 먼저 찾는데, 점심은 항상 어머니 몫이었다.
관내 공직자중 우리 어머니 점심 대접 안 받은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였다.
언제인가 내가 짓궂게 어머니에게 사랑방 손님 밥 해대기가 짜증나시지 않았느냐고 물으니 어머니는 전혀 아니라신다.
내 집에 찾아온 손님, 때가 되면 식사 대접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라 억울하거나 힘든 생각은 안 하셨단다. 부창부수라고 할 것이다.
아버지 말씀 어느 것에도 “아니요”라는 말씀을 한번도 하시지 않은 어머니의 삶은 전통적인 한국여인의 삶의 모습인 “여필종부” 바로 그것이다.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삼촌..모두가 한복을 입으시고 머슴까지 있었으니 빨래거리는 물론. 옷 꿔 메고 버선 양말 깃는 일도 많았다. 한겨울에도 가마솥에 양잿물을 넣고 빨래 감을 삶아 개천에 가서 흐르는 찬물에 맨손으로 빨아서 통에 담아 머리에 이고 벌겋게 언 손은 광목 앞치마에 넣고 오시는 모습을 여러 번 보고도 아무런 도움도 못 드린 게 지금 생각하니 죄송스럽다.
모든 바깥일은 아버지가 하셨기 때문에 어머니는 외출도 거의 없이 동네 안에서만 지내셨다.
외삼촌이 지방에서 교편을 잡으셨는데 방학 때 집(친정)에 오시면 친정 동생 보러 가시는 것이 큰 즐거움이라고 하신 적이 있다.
초등학교 때 점심시간에 친구는 장(판교)에 나가서 자기 어머니가 호떡을 사주어 먹었다고 자랑할 때는, ‘우리 어머니는 왜 장에도 안 오시나’ 하는 생각도 해봤다.
나의 학창 시절 중, 소풍, 운동회, 초‧ 중‧ 고‧ 대학 졸업식 때도 오신 적이 없다.
그 후 결혼하고 살면서 다닌 교육대학원을 졸업할 때 어머니가 학교에 오신 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이 얘기를 지금에 와서 다시 하는 것은 어머니에게 대한 서운한 마음이 지금도 남아 있어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 당시 어머니는 운동회부터 졸업식까지 참여 여부에 대한 선택권이 전혀 없었다고 하는 우리 집의 폐쇄적인 분위기를 고발(?)하고 싶어서이다.
어머니가 언젠가 처음 시집가서는 눈멀고, 귀멀고, 벙어리로 3년을 지내야 된다고 하신 기억이 나는데 본인께서 이것을 그대로 지키신 것 같다. 그것이 일가친척이 많은 대가족 속에서 화목을 깨지 않는 생활의 지혜였다고 할 수 있겠으나 얼마나 힘이 드셨을지 가슴 아픈 느낌도 든다.
내가 봉천동에 살 때 둘째 아이가 서울대학에 합격해, 어머니에게 자식이 다닌 학교는 못 가봤어도 손자가 다닐 학교라도 가보시자며 위로 겸 자랑삼아 내 차로 대학 캠퍼스를 한바퀴 돌았는데,
“대학이라는 곳이 이렇게 넓구나.” 하시며 흡족해 하시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교육에 대한 관심은 요즘 말하는 치맛바람과는 거리가 멀다.
어머니는 “너 어려서 기억력이 좋다고 작은 할아버지가 칭찬을 많이 하셨다”는 말씀을 하시고는 그 이상 공부 잘하라고 부담을 주신적은 없다. 아마 “나는 너를 믿는다 ” 그러신 것 같다.
먼발치서 바라만 보셨다 고나 할까? 그러면서도 눈은 떼지 않으시고...
나는 결혼하여 처음 수원에 살다. 직장 따라 인천. 서울. 일산으로 3번 이사를 했다.
우리 집에 오실 때면 바깥구경이나 가시자고 여기저기 모시고 다녔는데, 강화도 보문사를 갈 때 배가 자동차를 실고 가는 것을 보시고 저렇게 큰 배는 처음 본다며 신기해 하셨다.
6.25때 충청도 예산으로 피난 갔다 오신 것 말고는 수도권(서울. 경기. 인천)밖을 나가 보신 적이 없다. 그런데도 나는 어머니 모시고 해외여행(중국정도)한번 같이 갔으면 하는 소망을 떨치지 못한다.
성남시 운중동과. 시흥시 경계에 있는 “하우고개”는 우리 어머니에게 남다른 의미가 있다.
처음 가마타고 시집오실 때, 눈이 무릎까지 쌓여 가마꾼들이 이 고개를 넘으면서 고생을 많이 했다는 얘기를 들려주신 적이 있고. 또 친정에 가실 때는 아이인 나를 등에 업고 하우고개까지 단숨에 올라와 쉬시면서 멀리 안양이 보이면 절반을 온 기분이고, 기차 기적소리까지 들으면 더욱 가깝게 보였단다.
그리고는 그 다음 인덕원에서 쉬고 안양까지 30리 길을 걸어 다니셨다.
변변히 좋은 옷도 가지지 못하신 어머니지만, 내가 가장 좋아 하는 어머니의 옷이 있다.
한 여름에 우리 집에 오실 때 어김없이 입고오시는 모시옷이다.
당신이 직접 빳빳하게 풀을 메겨 곱게 다려 입으신 하얀 모시옷을 보면 나는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다. 여러 사람 속에 계셔도 단연 돋보인다.
나뿐 아니라 이웃사람들도 모시옷을 입으신 할머니의 모습이 그렇게 좋아 보일 수가 없다고 한다.
그래서 나는 모시옷 입은 어머니의 사진을 내가 직접 찍어 안방에 걸어놓고 아침저녁으로 바라본다.
어머니는 모시옷을 입고 우리 집에 몇 번이나 더 오실까?
우리 어머니는 지금도 그 흔한 닭고기를 안 드신다.
양계를 하여 손님이 오시거나 특별한 날이면 어머니는 닭을 잡아 대접하는 일이 많았는데도 말이다.
사연인즉 원래 친정에서는 잡수셨는데 시집와서 대식구인데 닭 한 마리가 너무 적어 당신의 몫은 처음부터 포기 하다보니 나중에는 아예 먹고 싶은 생각도 없어졌다는 것이다.
그 말씀을 듣고 어머니 삶의 무게가 새삼 느껴지면서 마음이 편치 않았다.
또 우리 아버지가 그렇게도 무심하셨나하고 원망스럽기도 했다.
닭을 고아 살은 다 발라낸 뼈를 어머니는 나를 주셨는데, 갈비와 목뼈에 그래도 고기점이 좀 남아있어 좋아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막내 삼촌하고 우리 누님은 비슷하게 출생했는데, 할머니는 젖이 부족하여 어머니는 시동생(삼촌)에게 먼저 젖을 먹이고, 그 다음 딸(누님)에게 젖을 물렸다고 한다. 부잣집에 시집와서 배는 안 골았다지만 그런 기막힌 사연인 있을 줄이야. 시골 부자는 일부자라고 하듯이 밤낮 없이 사시사철 일이 많았다. 어머니는 지문이 닳아 없어지고 손마디가 너무 굵어 반지를 낄 수 없을 정도다.
지금도 나는 어머니를 뵐 때마다 거칠어진 손마디부터 만지는 버릇이 있다.
그러면서 어머니의 삶을 내 머릿속에서 반추해 보는 것이다.
손을 보면 그 사람의 살아온 역정을 대강 알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어머니에게 아직도 풀어지지 않는 가슴 속 응어리가 남아 있는데, 그것은 맏아들의 일이다.
다른 자식은 정들기 전에 어려서 잃어서 그리 큰 정을 느끼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맏아들은 장성하게 잘 키웠는데 6.25때 학도병으로 나가 양평(?)전투에서 전사(미확인)하였다.
동작동 현충원 분향소 안쪽 무명용사비에 군번과. 이름 석자가 있는데도, 시신을 못 보셨기 때문에 혹시 피납되어 북한 땅에서 살고 있지 않나 하는 미련을 갖고 계신다
가끔 나에게 네 큰형만 있었으면 우리 집안이 지금보다 더 나아질 걸 그랬다고 아쉬워하신다.
기대가 컸던 만큼 상심도 크신 모양이다.
“쓸만한 재목은 하느님이 먼저 불러 가신데요” 하며 막내인 제가 형님 몫까지 잘 할게요 하고 위로를 해드리지만 부질없는 소리다.
성남 충혼탑으로 현충일 행사에 매년 모시고 참여했는데,
지금은 거동하시기가 어려워, 집에서 TV방송으로 중계하는 것을 보시고, 허전한 마음을 달래신다.
종가(소종)집이라 제사도 많았고, 명절 때나 아닐 때나 우리 집에는 손님들이 유난히 많이 오셨는데, 이는 우리 어머니의 후덕한 인심 때문이었던 것 같다. 나는 어린 마음에 손님오시는 게 좋기만 했다.
그런 어머니가 언제는 성남 시장님이 주는 장한 고부 상을 받기도 하셨는데, 어머니 며느리 시절에는 그런 상이 없었나보다. 그러니 나중에 장한 시어머니 상을 받은 것이다.
예전에 그런 상이 있었다면 장한 고부 상 보다는 장한 며느리 상을 받으셨을 것이다.
나는 13살 (중학교) 때부터 집을 나와 고교, 대학, 군 생활, 직장생활로 이어지면서 지금까지 48년간 어머니 곁을 떠나서 살고 있어 그런지 환갑이 지난 나이에도 어머니에 대한 그리운 마음이 떠나지를 않는다.
나는 초등학생 시절 어머니 아버지 사이에서 팔을 베고 잠자며 즐거워했던 것을 지금도 최고로 행복했었다고 기억한다.
중고(6년) 시절에는 방학 때 집에 왔다 방학이 끝나고 어머니 곁을 떠나 수원 고모님 댁으로 가려고 하면 정말 발걸음이 떨어지지를 않았다.
대학 때는 거처할 마땅한 친척도 없고 하여 학교(한양대) 앞 행당동에 전세방을 얻어 자취를 하기로 했다. 어머니가 시장에서 취사도구 일체를 사서 주시며 “쌀과 고추장, 간장은 집에서 갖다 먹고, 무말랭이 같은 밑반찬은 있고, 반찬은 가게에서 사다 먹으면 되니 때 거르지 말고 밥은 꼭 챙겨먹으라“고 이르고 가셨다. 그때는 라면도 없던 시절이라 급할 때는 마가린과 왜간장을 넣고 비벼 먹고. 콩장. 콩나물. 두부를 제일 많이 먹은 것으로 기억 된다.
어머니를 바래다드리러 먼데까지 따라갔다가 자취방으로 되돌아와 앞으로 대학 생활의 기대와 또 혼자 생활하는데 따른 불안감 등 만감이 교차했던 기억이 난다.
이 시기에 어머니는 언짢은 기억도 가지고 계신 것이 있다. 겨울방학이 끝나고 어머니하고 자취방에 가서 주인집의 연탄 밑불을 얻어 불을 피우는 데는 한 시간 이상 걸렸고 겨우내 비웠던 방은 바닥이 얼음장 같이 차고 두꺼운 이불을 깔고 앉아 있어도 웃풍이 있어 어깨와 코끝이 시려 왔다.
평소에 별로 말이 없으신 어머님이 “어쩌면 주인이 안에 들어와 몸을 녹이라는 말을 안 하니” 하시는데, 나는 이 말씀이 “네가 평소에 주인한테 어떻게 보였 길래” 하시는 것 같아 몸 둘 바를 몰랐던 적이 있었다. 어머니! 용서 하세요. 다 제가 못난 탓 이예요
그 후로도 몇 번이나 그 얘기를 하시는 것을 보니 야박한 서울 인심에 크게 실망하셨던 것 같다.
한번은 일산 우리 집에 계실 때인데, 공원에서 노인들끼리 대화 중에 어머니는 “막내 아들집에 다니러 왔는데 아침에 출근 때와 저녁에 퇴근해서는 꼭 인사를 한다”고 아들 자랑을 하신 모양이다.
후에 안 사람이 공원에 나가니 전부터 아는 할머니가 “자네 시어머니는 아들 자랑만하고 며느리 칭찬은 안 하시더라”고 했다고 해서 오해를 살 번한 적도 있다.
그렇다고 어머니한테 정말 그런 말씀을 하셨어요!하고 여쭈어 보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 할머니가 어떤 생각으로 그렇게 말씀을 하셨는지 지금도 모르겠다.
역대 어느 대통령은 고급관료 임명 때 “부모를 어떻게 모시고 있나“를 참고 했다는데 좋은 것 같다.
나도 제자 결혼식 주례사에는 “孝”를 꼭 강조한다.
효는 백가지 행동의 근본이고. 삼천 가지 “罪” 가운데 불효한 죄가 가장 크다는데,
어찌 소홀히 할 수 있겠나?
얼마 전 시골에 가서 누님이 어머님 목욕을 시켜 드린 후 내가 손톱과 발톱을 깎아 드리면서 여기 저기 만져 보니 예전에 단단하던 그 몸은 어디가고 앙상한, 너무도 앙상한 팔과 다리, 피골이 상접하다는 표현은 차마 쓸 수 없고 너무나 수척하신 얼굴을 보고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와 고개를 들어 천정을 보았다.
전에는 바깥 구경이나 하시자면 마다 않고 따라 나서시더니 이제는 기력이 딸려 모든 것이 귀찮다고 하신다.
아버지도 다니시는 것을 좋아 하셨지만 그때는 자가용차가 없어 못해 드려 아쉬움이 큰데, 지금 어머니는 아무리 좋은 차로 모시려 해도 외출을 하시기가 어렵다.
운명이라고 치부하기엔 너무나 굴곡이 많은 삶을 사신 우리 어머니,
이제는 지치신 것 같다.
네 아버지가 왜 나를 빨리 안 데려가니 하시는데 괜히 하시는 말씀은 아닌 듯 싶다.
그래도 나는 어머니가 계신 게 의지가 되고 때로는 무릎에 누워 재롱도 부리고 싶다.
크지도 않은 키에 등이 굽으시니 걷기에 더욱 불편해 하신다.
철없는 증손자들이 꼬부랑 할머니라고 놀리면 그냥 웃으시기만 하신다.
안쓰러운 마음이 들어 내가 명아주 지팡이(상품) 사다드릴까요! 하니,
지팡이는 자식이 사다 드리는 게 아니라며 그만 두라신다.
5월 8일 어버이날 학생들이 쓴 글을 보면, “다음에 커서 돈 많이 벌어서 좋은 옷과 맛있는 음식도 사드리고 해외여행도 시켜드리겠다” 고 많이 하는 데, 나는 그때마다 효는 지금 현재 부모님이 바라시는 것을 잘해 드리는 것이지, 다음에 미루었다 어떤 조건이 충족 되면 하는 것이 아니라고 지적해 준다.
“나무는 가만히 있고자 하나 바람이 그치지 않고
자식은 효를 다 하고자 하나 부모는 기다려 주지를 않네“
앞으로 어머니 가슴에 카네이션 꽃을 몇 번이나 더 달아드릴 수 있을까?
전화로 듣는 목소리가 전보다 작게 들리고, 귀도 점점 어두워지시는 것 같다.
봄이 오면 공원에 모시고 나가 벤치에 나란히 앉아 오순도순 정답게 이야기를 나누고 싶고, 걷기가 불편하시면 휠체어에 태워 드리고 뒤에서 밀며 호수공원을 돌며 그동안 못 하셨던 지난 세월에 대한 어머니의 진솔한 애기도 더 듣고 싶다.
어머니의 은혜와 그리움에 대한 노래가 많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내 마음에 와 닿는 것을 적어본다.
“ 나실 때 괴로움 다 잊으시고 기르실 때 밤낮으로 애쓰는 마음
진자리 마른자리 갈아 뉘시며 손발이 다 닳도록 고생 하시네
하늘아래 그 무엇이 넓다 하리요. 어머님의 은혜는 가이 없어라“
(양 주동 작사. 이 흥렬 작곡)
"어머님 은혜"를 이 이상 더 잘 표현 한 게 또 있을까?
"어머니한테 회초리를 맞는데 너무 아프지 않아 울었고.
어머니를 업으니 너무 거벼워 울었다"는 말의 의미를 새겨보며,
못 나고 불효만 하는 아들이 어머니에게 부탁의 말씀을 드려봅니다.
어머니!
때가 되면 아버지가 부르실 거예요.
그때 가시면 아버지도 만나고 몽매에도 그리던 큰형도 만나실거예요.
하 지만 지금은 아버지가 조금만 더 있다 오시래요.
그때까지 조금만 더 건강하게 오래 사세요, 끝
경문님의 어머니에 대한 효심이 이 글 속에 얼마나 절절하게 느껴지는지 가슴이 찡 합니다.우리 어머니들은 시대를 잘 못 타고 나셔서일까,넘우 고생들을 하셨습니다.경문님! 어머님은 행복하신 분입니다.이렇게 효자 아들이 옆에 있으니 넘우 보기 좋습니다.경문님 이제 카네이션 몇번을 더달아 드릴수 있을까요?저도 물론
경문의 어머니에 대한 효심은 글을 읽는이에게 감동. 감명을 주는구려.... 아무튼 이 진솔한 글이 많은이들에게 자신을 돌아보게하며 가슴을 찡하게 합니다. "어머니한테 회초리를 맞는데 너무 아프지 않아 울었고. 어머니를 업으니 너무 거벼워 울었다"는 말의 의미를 새겨보며..귀한 글, 좋은 글 올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첫댓글 어머님에 대한 친구의 진솔하고 효성스런 생각이. 구구절절 불효자인 나의 가슴을 찡하게 하는구먼 . 친구가 그렇게 반듯하고 효성스런 마음이 있기에 어머님은 더욱 건강한 삶을 보내시리라 밑내. 좋은글 잘읽고 가네
효자라고 나설 자식이 어디 있을까만 경문의 효심은 이 글속에서 잘 읽을 수가 있구료. 자식이 효하는 것은 하늘이 정했다고 했고 孝는 百行之本이라 하였으니 자식된 자 마땅히 효를 행해야 되겠지요.눈시울이 붉어지는 구절구절 잘 읽고 가오.
경문님의 어머니에 대한 효심이 이 글 속에 얼마나 절절하게 느껴지는지 가슴이 찡 합니다.우리 어머니들은 시대를 잘 못 타고 나셔서일까,넘우 고생들을 하셨습니다.경문님! 어머님은 행복하신 분입니다.이렇게 효자 아들이 옆에 있으니 넘우 보기 좋습니다.경문님 이제 카네이션 몇번을 더달아 드릴수 있을까요?저도 물론
경문의 어머니에 대한 효심은 글을 읽는이에게 감동. 감명을 주는구려.... 아무튼 이 진솔한 글이 많은이들에게 자신을 돌아보게하며 가슴을 찡하게 합니다. "어머니한테 회초리를 맞는데 너무 아프지 않아 울었고. 어머니를 업으니 너무 거벼워 울었다"는 말의 의미를 새겨보며..귀한 글, 좋은 글 올려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