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석규의 대몽골 시간여행' - 185. 갈단과 강희제 대결의 끝은? ①
▶ 총과 대포가 등장한 적봉전투
[사진 = 울란 하르(적봉) 초원]
갈단이 몽골 고원으로 들어선 지 2년 반이 지난 1,690년 9월, 내몽골 적봉(赤峰)시 부근에서 준가르와 청이 충돌했다.
적봉시는 북경에서 북쪽으로 3백Km정도 떨어져 있는 곳이다.
몽골 이름으로 ‘울란 하르’라 부르는 곳이다.
[사진 = 적봉 위치]
이곳에서 벌어진 전투는 과거 초원의 전투모습과 많이 달라져 있었다.
활과 칼 대신 소총과 대포가 등장한 것이다.
청나라 군대는 선교사들이 만든 대포를 가지고 있었고 갈단군은 러시아가 제작한 대포를 갖추고 있었다.
갈단군은 낙타 등 가축들의 다리를 묶어 땅에 앉힌 뒤 상대방의 탄환을 막는 방패막이로 이용하기도 했다.
[사진 = 청나라 소총(몽골 군사박물관)]
[사진 = 청나라 대포(몽골 군사박물관)]
화력은 청나라가 우세했기 때문에 갈단군은 고전 했다.
하지만 청나라도 피해가 만만치 않아 지휘를 맡았던 강희제의 외삼촌이 전사하는 등 승패를 판정하기가 어려웠다.
전투 후 북경으로 돌아간 청나라 출정군의 지휘관들이 자격박탈과 강등 등의 처분을 받았다는 청나라 측의 기록을 감안하면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과는 달리 청나라 측의 피해도 적소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교섭 실패, 갈단군 철수
아무튼 이 전투 후 양측 간에 강화를 위한 교섭이 시작됐다.
그러나 갈단은 여전히 투시에트 칸과 젭춘담바의 인도를 요구했고 청나라는 이를 거부했다.
그러는 사이에 청나라의 증원군이 가까이 오고 있다는 것을 알아챈 갈단은 서둘러 전군을 고비사막 이북 쪽으로 철수 시켰다.
▶ 청나라 지배아래 들어간 몽골
[사진 = 몽골인의 충성 맹세]
1,691년 5월, 과거 상도인 돌룬노르에서 할하인들이 강희제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의식이 거행됐다.
투시에트 칸과 젭춘담바 등 할하 좌익의 지도자들은 이 자리에서 청나라에 신종(臣從)할 것을 다짐했다.
이 자리에는 할하 좌익 뿐 아니라 할하 우익의 인사들도 참석했다.
이로서 20세기 들어 외몽골이라 부르게 되는 할하부의 영주들은 모두 청나라의 신하가 됐다.
내몽골이 청의 지배아래 들어간 지 반세기가 지나 외몽골도 청나라 황제에게 무릎을 꿇으면서
몽골은 220여 년 동안 이어지는 청나라 지배를 스스로 선택한 것이다.
하지만 할하 몽골인들은 자신들이 중국에게 항복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청 태종 이래 청 황제는 몽골의 대칸이라는 얼굴도 동시에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만주인 황제에게 충성을 맹세한 것은 같은 유목민으로 몽골제국의 옥새를 가진 만주의 대칸에게 복종하는 것으로 여겼다.
1,912년 신해혁명 후 만주인 왕조가 무너졌을 때 몽골이 독립을 선언하게 된 것도 그러한 관계가 소멸됐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 강희제, 몽골고원 親征 결심
[사진 = 20대의 강희제]
할하인들을 완전히 복속시킨 강희제는 이제 초원 깊숙이 사라진 갈단을 처리해 장래의 우환을 없애기로 마음먹었다.
그래서 직접 대군을 이끌고 몽골 고원으로 들어가 갈단을 치기로 결심했다.
강희제(康熙帝)와 그의 아들 옹정제(雍正帝)의 일대기를 그린 대하소설이 출판돼 한 때 인기를 끄는 등 강희제에 얘기는
비교적 잘 알려져 있다.
[사진 = 강희제∙옹정제 서적 표지]
7살에 황제의 자리에 오른 강희제는 무려 61년 간 그 자리에 있었다.
긴 세월을 황제의 자리에 있었던 그는 청나라의 기반을 닦은 어질고 영특한 인물로 인간적인 전제군주라는 평을 얻고 있다.
만년에 후계자 문제로 오점을 남기기는 했지만 그 것을 덮을 만한 여러 치적을 남겼다.
그가 닦아 놓은 바탕 위에서 옹정제(雍正帝)와 건륭제(乾隆帝)는 청나라의 전성기를 구가하게 된다.
강희제가 거둔 외치의 성과 가운데 준가르의 갈단을 제압한 것은 가장 손꼽을 치적 중의 하나로 꼽을 만하다.
▶ 초원 원정 기피했던 정주민 군주
그동안 유목민과 정주민의 대결을 숱하게 언급했지만 직접 군대를 이끌고 고비사막을 넘어 몽골을 공격한 군주는 그리 많지 않다.
초원 한가운데서 기동성이 뛰어난 유목민 군대를 제압한다는 것은 모험에 가까운 일이기 때문에 대부분 군대를 이끌고
초원으로 들어서는 것을 기피했다.
그래도 가장 적극적으로 초원 원정에 나섰던 인물이 명나라의 영락제다.
그는 수차례의 몽골 원정 후 별 성과를 거두지 못한 채 귀로에 숨졌다.
그 어려운 초원 원정을 이제 강희제가 선택하고 나섰다.
만주족을 유목민으로 분류할 수도 있지만 이미 중국 대륙을 장악한 상황이라 이제는 정주민이나 다름없었다.
친정을 결심했지만 갈단은 너무 멀리 있었다.
▶ 홉드 지역를 본거지로 삼은 갈단
[사진 = 홉드지역 초원]
고비사막을 넘은 갈단은 알타이산맥 근처 홉드 지역으로 멀찌감치 물러나 있었다.
홉드는 오이라트의 기원지인 홉스골 근처 지역보다 더 서쪽에 있다.
알타이산맥 북부의 동쪽 면에 위치한 산지와 초원이 뒤섞인 지역이다.
[사진 = 몽골 서부 키아르가스 호수]
알타이산맥에서 발원한 홉드강은 무려 5백Km이상을 달려 면적이 270㎢에 달하는 홉드 아이막에서
가장 큰 담수호 하르오스 호수로 흘러 들어간다.
[사진 = 홉드지역]
홉드시에서 하르오스호로 흘러 들어가는 근처 지역은 100Km에 걸쳐 광활한 평야를 이루고 있다.
갈단은 몽골 고원의 중심부에 머물지 않고 바로 이 서쪽 끝 지역에다 본영을 설치하고 머물고 있었다.
북경에서 홉드까지는 3천 Km이상의 거리, 이곳까지 대군을 몰고 들어간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강희제는 갈단이 몽골고원의 동쪽으로 이동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동안 그는 말을 살찌우고 병사를 훈련시키는 것은 물론 각종병기를 갖추고 식량 수송로와 진군로를 점검하는 등 전투에 대비했다.
과거 쿠빌라이가 양번에서 남송군이 걸려들기를 바라면서 취했던 전략과 비슷했다.
▶ 강희제의 몽골 고원 출정
[사진 = 몽골 동부 헨티 초원의 제르떼]
1,695년 가을, 마침내 갈단은 헨티산맥을 넘어 케룰렌강 상류지역으로 이동해 와 그 곳에 본영을 설치했다.
그 곳이라면 북경에서 천 Km 남짓의 거리로 강희제는 갈단이 행동반경 안으로 들어온 것으로 판단했다.
그래서 출사표를 던졌다.
"갈단이 할하인의 재산을 빼앗거나 괴롭히기 때문에 천지와 종묘사직에 아뢰어 갈단을 반드시 멸하고자 출정한다."
강희제의 첫 출정은 이렇게 1,696년 4월에 시작됐다.
이후 그는 1,697년 여름까지 세 차례에 걸친 원정을 주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