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숙자도 함께 책 읽는다
누구나 환대하는 보스턴도서관
최여정 작가
울타리 치고 경계하지 않는 도서관
춥다. 날씨 앱을 켜니 영하 12도. 이상 기온으로 따뜻했던 뉴욕 맨해튼을 벗어나 보스턴에 도착하자 눈바람이 마중을 나와 있다. 추위 하면 한국이지, 겨울이면 영하 10도를 오르락내리락하는 건 다반사이니 이 정도쯤이야, 라고 생각했건만 다르다. 북대서양을 건너온 차갑고 축축한 바닷바람을 맞으며 걷다 보니 뱃속까지 헛헛하다. 그래서 이 도시의 명물이 조갯살을 듬뿍 넣은 뜨거운 크림 수프구나. 보스턴만의 항구를 따라 늘어서 있는 노점상에 들러 고칼로리 수프 한 그릇으로 배를 채우고 나니 이제야 추위와 맞설 만하다.
무장을 하고 보스턴 시내 인근에 있는 하버드와 MIT 대학을 구경하기 위해 나섰다. 소복이 눈 쌓인 하버드 교정에서 영화 ‘러브 스토리’의 연인들처럼 눈밭을 뒹굴어 볼까 했지만, 로맨스도 날이 좋아야 가능하다. 방학을 맞아 텅 빈 교정에는 관광객 몇몇만 오간다. 날이 추워 좋은 것이 하나 있었다. 존 하버드 동상 앞에 줄이 없다! 전 재산을 기증해서 학교를 일군 존 하버드 동상의 구두 끝을 만지면 하버드에 입학한다는 전설의 주인공. 사람들이 어찌나 닳도록 만져 놨는지, 눈사람이 되어버린 존 하버드 동상은 형체도 알 수가 없건만 그의 발끝은 반질반질 금빛으로 빛난다. 나도 구두 끝에 살포시 손을 얹고 사진을 찍었다. 내가 아니면 자식이라도 하버드에 온다는데, 무자식이니 이 행운은 누구에게 가려나. MIT 대학은 하버드와는 사뭇 다른 인상이다. 꼬장꼬장하게 나이 먹은 근엄한 노교수처럼 오래된 붉은 벽돌 건물들이 웅크리고 앉은 하버드 캠퍼스와 달리 1861년에 문을 연 MIT 공대의 장식 없는 콘크리트 건물들은 무심한 듯 시크한 표정으로 IT 기업에서 일할 법한 청년 같다.
어느새 짧은 겨울 해가 지고 있었다. 서둘러 보스턴공립도서관으로 향했다. 보스턴에서 가장 방문하고 싶었던 곳이 도서관이었던 이유는 사진 한 장 때문이었다. 유럽의 대성당처럼 높다란 대리석 아치 천장 아래 초록색 스탠드 불빛에 의지해 골똘히 책장을 넘기고 있는 사람들이 가득한 공간, 바로 이곳이 보스턴공립도서관의 상징 ‘베이츠 홀(Bates hall)’이다. 1895년에 설립되어 미국 최초의 공립 도서관으로 기록된 그 역사도 유구한데, 1900만권이나 되는 소장 도서 역시 자랑거리다. 3400만권을 소장한 미국 의회도서관 다음가는 규모. 우리에게는 이런 도서관이 있을까.
국내에서 가장 많은 장서를 소장한 국립중앙도서관의 규모는 1500만권, 대학 도서관 중 가장 많은 장서를 소장한 서울대가 500만권 남짓이다. 그렇다면 지방 대학 사정은 어떨까. 얼마 전 ‘울산대학 도서관 책 구하기’ 사건이 화제가 되었다. 교육부 지침 대학 도서관 필수 장서 기준(70만권)을 간신히 넘기는 92만권의 책을 소장하고 있던 울산대학 도서관이 무려 45만권 폐기를 발표했다. 그 기준은 ‘한 번도 대출 기록이 없는 책’. 폐기 목록에는 귀중한 학술적 가치가 있는 절판 도서부터 심지어 문화재급 책도 있었다. 교수 몇몇이 말 그대로 책 구하기에 나섰다. 심폐 소생술을 하듯 폐기 리스트를 꼼꼼히 살펴 45만권 중 17만권을 다시 살려냈지만 결국 나머지 책들은 폐지로 처리됐다.
차르륵, 차르륵. 책 넘기는 소리만 떠다니는 베이츠 홀에 이어 오래된 대리석 복도를 지나가니 산뜻한 분위기로 꾸며 놓은 신관으로 연결된다. 널찍하고 쾌적한 공간의 열린 서고에는 안락한 의자와 테이블이 넉넉하게 놓여 있어 절로 읽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한다. 미국 독립을 이끈 보스턴의 역사를 담은 책 한 권을 찾아 소파에 앉았다. 그런데 옆을 보니 색을 알 수 없을 정도로 때 묻은 털모자를 귀밑까지 눌러 쓰고 손질하지 못한 거친 수염 사이로 커다란 코만 간신히 보이는 남자가 팔짱을 낀 채 고단한 숨소리를 내며 잠들어 있었다. 발치에는 누추하고 커다란 가방 두 개. 추위를 피해 도서관에 들어온 노숙자였다. 그제야 주위를 둘러보니 커다란 헤드폰을 머리에 두르고 노트북 화면에 집중하는 10대 소녀 곁에도, 안락의자에 파묻혀 책장을 넘기는 은발의 할머니 곁에도 노숙자들이 조용히 앉아 있었다. 술이나 약에 취해 소동을 피우면 퇴장을 당하거나 출입이 제한될 것이기에 그들은 그저 눈을 감고 있거나, 지루해지면 신문을 뒤적이거나 책을 한 권 꺼내어 슬쩍 펼쳐 보기도 한다. 어느 누구도 그들을 제지하지 않았다.
갑자기 도서관 전체에 명랑한 피아노 소리와 함께 폐관 시간을 알리는 방송이 들린다. 붉은 티셔츠를 입은 도서관 직원이 서고를 돌면서 퇴장 안내를 하며 다가오더니 잠에서 깨어날 줄 모르는 노숙자의 어깨에 조용히 손을 댄다. 그제야 잠이 깬 남자는 도서관 직원과 친근한 인사를 몇 마디 나눈다. 가방을 들고 돌아서는 노숙자를 향해 도서관 직원이 바지 주머니에서 꺼내 건넨 초코바 하나. 울타리를 치고 경계하지 않고 누구나 환대하는 장소, 도시에 사는 모든 사람이 함께하는 장소. 보스턴공립도서관이 아름다운 이유였다.
첫댓글 존 하버드 동상 구두에 손이 닿은 그 행운의 기운 혹 저에게 오길 소망 해 봅니다. 20년 안에 저도 존 하버드 동상이 있는 교정을 거닐고 있을 날을 상상 해 봅니다.
보스턴 도서관에서 사진도 찍어 오세요 ~~~~~^^*
기도 해 주세요. 단순히 교정을 거닐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버드대에 입학하여 졸업할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