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장사
신라시대에 의상 대사가 창건했다고 전하지만 그밖의 연혁은 사적이 알려지지 않아 알 수 없다. 그 동안 구전되기로는 현재 지장사 요사에 걸려 있는 「지장사(地藏寺)」 편액이 숙종(肅宗, 재위 1675~1719)의 친필로 어느 때인가 이곳에 들른 뒤 쓴 것이며, 그 뒤로 지장사에 하마비(下馬碑)와 어각(御閣)이 지어졌다고 한다. 어각은 지금 남아 있지 않지만 하마비는 아직 있다. 그리고 1882년(고종 19)에 명성황후가 임오군란을 피하여 이곳에 머물렀던 적이 있다고 하며, 그때 축원문을 남겨 1970년대까지 절에 보관되었으나 지금은 없다고 한다.
1722년(경종 2)에 적은 「복장문(腹藏文)」을 통해 이 해에 법선(法禪)·광식(廣湜) 스님 등이 모연하여 불화를 조성했음을 알 수 있다. 법선 스님은 혹시 1684년(숙종 10) 영주 부석사 괘불을 조상할 때 참여했던 법선 스님과 동일인물이 아닐까 추측해 본다. 그런데 이 복장문에는 이 불사를 위해 당시 의성읍의 태수가 여러 관원들과 함께 시주자로 참여하고 있음이 확인된다. 지장사의 사격(寺格)이 높았음과 아울러 일반인뿐만 아니라 유학자 또는 관리들도 불사에 적극적이었음이 기록된 매우 흥미로운 자료인 듯하다. 이 복장문은 당대의 이름 높은 화사(畵師)였던 용안 성징(龍眼性澄) 스님이 작성한 것이다.
1803년(순조 3)에 기록한 「용궁지장사성적암개금발원문(龍宮地藏寺性寂庵改金發願文)」에는 지금은 없어진 지장사의 산내암자로 보이는 성적암에서 불상을 개금하고 후불탱·중단탱(中壇幀)·신중탱 등을 조성하였음이 기록되어 있다. 이 불사에는 지장사의 초행(草行)·긍천(亘天), 성적암의 취봉 도윤(翠峰道允) 스님 등의 이름이 보인다.
그리고 1838년(헌종 4)에 기록한 「누상량문(樓上樑文)」을 보면 이 해에 누각을 지었는데, 역시 성적암 등에서도 함께 참여하였다. 이 불사는 지장사에서 금파 성징(金波性澄)과 영일(永一)·원응(圓應) 스님 등이 주도하였고, 성적암에서는 율암(栗巖) 스님 등이 참여하였다.
지장사 입구
지장사 전경
지장사 수조와 부도
지장사 삼층석탑
지장사 요사
지장사 극락보전
지장사 극락보전내 아미타불
지장사 명부전
지장사 명부전내 지장보살상
지장사 명부전내 시왕상
지장사 명부전내 시왕상
지장사 응진전
지장사 응진전내
지장사 응진전내 나한들
지장사 응진전내 나한들
석조 비로자나불 좌상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76호.
안사면 월소리 쌍호 초등학교 교정화단에 철창 안에 갇혀 있던 부처님이시다. 이부처님은 원래 지장사 부근 야산에 방치되어 있던 것을 1978년 학교에서 보관하다, 1985년도난당하였다 다시 찾아 보호철책으로 철창을 하고 보관하다 지장사로 오셨다. 비, 바람에 표면이 심하게 마모되어 제 모습은 잃었지만 중대석이 없는 방형의 연화대좌위에 안치 되었고, 수인이 왼손을 가슴까지 올려 들고 오른 손을 감싸는 지권인은 비로자나불의 모습이다. 머리에는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과 얼굴은 약간 긴 사각형이고 눈은 감은듯하고 귀는 짧고 작은데 어느 정도 사실적으로 표현하였다. 불상의 비례나 얼굴 표현, 투박한 옷 주름, 사각형 대좌의 연꽃무늬 등으로 보아 고려시대 불상으로 추정된다. 총 높이 96cm, 좌불 높이 63cm, 상대석 높이 19cm, 하대석 14cm.
지장사 삼성각
지장사 삼성각내 칠성탱
지장사 삼성각내 산신상과 산신탱
지장사 삼성각내 독성탱
지장사 찾아가는 길
중앙고속도로 의성 I.C - 28번 국도 봉양 방면 - 안계 - 912번 지방도 안사 방면 - 신평 - 지장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