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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 : 제주시 노형동 607번지(1100로 3213)
시대 : 대한제국
유형 : 교육기관(중등학교)
제주고등학교는 순수 민족계 민간자본으로 설립된 의신학교에서 개편된 학교로서 현재 전국에 존속중인 실업계학교 중 순수 민족계 민간자본으로 설립된 실업계 학교로서는 그 역사가 가장 오래다.
1907년 07월 01일 지역 유지들의 성금으로 당시 제주군수인 윤원구(尹元求)가 사립제주의신학교(義信學校) 설립 개교(보통과, 농림과, 연구과)하였으며 초대 교장은 윤원구 군수이다.
※1907년 10월 윤원구 군수 명의로 당시 학부에도 보고된 『의신학교총책』과 『연의문』에 의신학교의 성격, 설립과정, 설립자금 등에 관하여는 상세히 설명되어 있으나, 정부자금에 관한 언급은 일체 없다. 당시 제학교령은 학교명 첫머리에 관립, 공립, 사립 등 학교의 설립주체를 명시하게 하고 특히 중학교 규칙은 관민(官民)이 공동으로 설립한 경우에도 공립으로 하도록 하고 있었다. 의신학교가 정부자금으로 설립되었다면 학교명에 “사립’을 관명(冠名)할 수 없었던 것이다.(제주고100년사)
※《私立濟州義信學校費 基本金 捐義文》
〈學校者는 維國之基礎요 敎民之根本也라 國家興廢와 人民文野가 專在於敎育一事니 是以로 上自 朝家로 下及守宰히 莫不眷眷於此야 現今十三道 三百四十餘州에 學校之風이 蔚然興之니 將來 維新之方 其亦盛矣乎고져 唯我本島는 地廣四百里 人衆十萬餘口 즉 亦一大都會也라 聰俊子弟不爲不多어늘 公私學校가 俱無一立니 在前字牧者不知其義而然歟아 抑亦民志頑固而然歟아 余到郡之初에 聖朝亦不於此土로 返棄사 置諸普通學校이 敎育케시니 聲敎攸曁에 民有將進之漸야 學徒聚集이 非一普通學校之所能容也라 自是欲設私立야 益於勸勉에 於心甚切이나 費用이 浩大야 事非容易 즉 其所悶歎이 倘何如哉아 乃與有志者로 日夜謀詢에 以爲一郡儒林紳士가 合成一圜야 四圓金을 各其捐出이면 細流就海之意를 庶有可望이라사 鄭顯龜 洪鍾時 十餘人이 特設義信學契고 唱聲吴起이되 儒林公議즉 時位訓長及曾經大儒가 義捐四圓이라사 有所稟目이나 衆論이 不一에 終無結果이더니 何幸紳士及有志人民이 自願捐義者 爲一千三百四十圓也즉 儒林도 亦自奮發야 以儒名通籍者은 擧以六十錢捐義之意로 更有稟目之際에 且五面面里長及大小民人이 一齊會議於觀德亭야 因其戶數고 計其學費야 與儒禀辭意로 同一히 一戶六十錢式分排야 以作基本金이되 該原本金은 仍寘各該戶主고 每戶一年利條十一錢四里만 春秋分納야 以充費用之意로 公議完定니 該金額이 爲一萬二千三百三圓也라 幷與義捐金合之면 一學校之基本에 綽猶有餘故로 學舍는 欲以本郡有鄕校로 用之則非但儒生之靳持라 修費夥多에 還不若新築故로 以敬信齋酌定야 新室一鞭을 管度建築之際에 幸以儒領兪晙河之七面儒生同意로 金七百圓을 別有捐補於新築費니 本島人士之如是赴義則何事不做리요 卽於敬信齋基內에 三十一間學舍를 更爲新築고 仍卽學部認許를 認准而私立義信學校를 剏設야 普通科學齡以上 生徒를 選擇 敎育니 本校資格은 普通科는 中學校待遇요 農林科는 專門學校 待遇요 硏究科는 大學待遇라 靑年子弟가 從此進步於開明之域즉 國家基礎를 亦可期於萬年이니 不亦偉哉아 基本金之實數와 利子幾何를 叧具冊子야 一一列錄고 義捐諸員도 亦爲騰列야 須給于五面各里며 所及官廳에도 各一件式 存檔야 永爲鞏固維持케오니 如替引之是所厚乧也夫
隆熙 元年(1907) 十月 日 濟州郡守 尹元求〉
〈학교라는 것은 오직 나라의 기초요, 백성을 가르치는 근본이다. 나라의 흥폐와 백성의 문명함과 야만스러움이 오로지 교육 하나에 달려 있다.〉는 문장에서 나라를 흥하게 하고 백성을 문명하게 하는 것이 바로 학교 설립의 목표임을 밝히고 있다. 요컨대 의신학교의 건학 이념은 ‘나라를 부흥시키고 백성들을 문명화’하자는 것으로, 그 가치를 ‘흥국 문민(興國文民)’으로 요약할 수 있다.(제주고100년사)
※사립학교 설립을 위한 관계당국의 인가가 강제된 것은 1908년 사립학교령이 시행된 이후부터였다. 의신학교 설립당시에는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인가 없이도 사립학교를 임의로 설립할 수 있었다. 이에 따라 무인가 군소 사립학교들이 난립하기도 했다. 그러나 의신학교는 1907년 4월 1일 학부로부터 미리 인가를 받아 설립 절차에 착수했고, 그 절차가 마무리되자 학부의 최종 승인을 거쳐 1907년 7월 1일 개교했다. 연의문에도 학부의 인허를 받아 창립한 것으로 명기돼 있다. 연의문에서의 인허는 학교 설립절차에 착수하기 전에 미리 받는 설립 인가와는 다른 것으로, 학교설립절차가 마무리 된 후에 받는 보고적 성격의 인가이다.(제주고100년사)
※의신학교비 개별 출연자 명단
▲본군수 윤원구(尹元求) 100원
▲판사 최원순(崔元淳, 당시 공식 직책은 제주재판소 검사. 1908.6. 제주區 재판소 판사에 임명) 40원
▲세관 한병호(韓秉昊, 제주재무서 재무관 ) 20원
▲금릉위 박영효(朴泳孝, 철종의 사위. 갑신정변을 주도한 개화파의 거두) 100원
▲前승지 김홍조(金弘祚, 박영효의 측근, 1907.9. 박영효 제주유배시 동행) 20원
▲前주사 안영중(安泳中, 박영효의 측근, 박영효 제주유배시 동행) 10원
▲군수 장용견(張容堅, 제주군 주사, 정의군수 역임) 40원
▲주사 홍종시(洪鍾時, 제주목 주사 역임, 제주재판소 주사) 10원
▲前참판 김응빈(金膺斌, 제주관찰부 주사, 제주판관 등 역임) 100원
▲前승지 송두옥(宋斗玉, 정의현감, 제주판관, 비서승 등 역임) 200원
▲前위원 김만수(金滿洙, 제주군 종두지소 사무위원) 10원
▲前주사 김시제(金時濟, 전 충청남도 관찰부 주사) 10원
▲박리혁(朴离爀, 전 충청남도 관찰부 주사, 동중면 어업면허권 보유) 20원
▲김병해(金秉海, 전 제주관찰부 주사 ) 10원
▲한석봉(韓錫俸, 조천 사립의흥학교 설립자) 20원
▲진사 김병윤(金炳胤, 대동학회 제주군 지회장 , 호남학회 회원) 4원
▲김운낙(金雲洛, 내부 주사 역임), 10원
▲부정규(夫正奎, 신좌면 북촌 출신 유학자. 당 36세. 1920년대 후반 3남 병준과 4남 기준이 항일운동에 투신) 400원
▲이창훈(李昌薰) 20원
▲김시형(金時瀅) 20원
▲장제인(張濟寅) 10원
▲고형두(高衡斗) 10원
▲하형도(河亨圖) 4원
▲김용희(金鏞熙, 성산 고성리 해초 채취면허권 보유자) 4원
▲고정식(高貞植) 4원
▲김병익(金炳翊, 제주군 주사 역임) 10원
▲김희경(金羲暻) 5원
▲강성모(姜聖模, 대동학회 제주군지회 평의원 역임, 1907.5. 윤군수 환임청원 ) 4원
▲강행표(康行杓) 5원
▲부재원(夫在元, 1907.5. 윤 군수 환임청원.) 4원
▲고수봉(高壽鳳, 1907.5.윤 군수 환임청원) 4원
▲장지우(張志瑀, 대한협회 제주지회 회원) 2원
▲진정국(秦貞國, 신우면 면장 역임) 4원
▲정언조(鄭彦祚, 법관양성소 교관 역임,대동학회 회원) 2원
▲안승우(安承佑, 신좌면장 역임) 10원
▲김기수(金基洙, 전 제주목 주사, 제주향교 直員, 대동학교 교장, 제주군 중면 면장) 10원
▲강희룡(姜熙龍, 제주목공립소학교 부교원, 제주지방위원회 위원, 대동학회 제주군지회 평의원 등 역임, 1907.5. 윤 군수 환임청원) 10원
▲이훈석(李訓奭, 제주군 관원 역임, 1907.5. 윤 군수 환임청원 ) 6원
▲변지묵(邊之默, 1907.5.윤 군수 환임청원) 4원
▲양응상(梁應祥, 제주향교 경학강사, 대동학회 제주군지회 평의원 역임) 4원
▲양보상(梁保祥) 1원
▲김기순(金基順, 1907.5. 윤 군수 환임청원) 4원
▲김세화(金世華) 4원
▲김영수(金營銖, 1907.5.윤 군수 환임청원) 4원
▲강희경(姜熙慶, 대동학회 제주군지회 평의원 역임, 1907.5.윤 군수 환임청원) 3원
▲前만호 강석오(康錫五, 비서감승 역임) 20원
▲문두천(文斗天, 대동학회 제주군지회 평의원 역임) 6원
▲김준형(金準衡) 10원
▲현승림(玄升琳, 1907.5.윤 군수 환임청원) 4원
▲김언홍(金彦洪) 1원
▲강재두(姜績) 4원
▲오인송(吳仁松) 4원.
이어 제주군내 5개 면리의 면장과 리장, 주민대표들도 관덕정에 모여 각 리별 실제 가구수를 집계하고 가구별 분담액을 정했다. 이에 제주군내 구좌, 신좌(조천), 중(제주), 신우(애월), 구우(한림,한경)등 5개면 88개리 20,505호 전 가구가 60전씩 분담하여 의신학교 기본금 원금 1만2,303원을 마련토록 하되, 다만 주민 부담을 고려하여 원금(가구당 60전)은 해당 호주에 유보하고 그 이자조로 1년에 가구당 11전 4리 씩만 봄 가을에 분납하여 학교 운영비로 쓰도록 했다. 제주군내 전 가구가 1년간 납부하기로 된 금액은 모두 2,337원 57전이 된다. 일반 주민들의 의신학교의 운영자금 거출은 제주군 지역만을 대상으로 했는데, 이는 당시 제주도가 제주, 대정, 정의 3개 군으로 정립되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의연금의 조성 경위와 출연자 명단, 리별 분담액 등은 1907.10. 「의신학교 총책」에 정리되어 제주군청과 의신학교 교육회는 물론 각 면과 리사무소 등 주요 기관 단체에 배부 비치되어 의신학교비 수납 관리에 참고하도록 했다. 학부에도 보고되었다.
한편 이와 별도로 제주군과 정의군내 7개지역에 거주하는 유림 지도자 유준하의 제자들이 700원을 출연했다. 교실 하나를 짓던 중 이 자금을 계기로 31간짜리 학사를 신축하게 됐다.
지역별 내역을 살펴 보면 제주군 관내의 속칭 평대면 지역(구좌면내 평대리 以西 방면)과 속칭 별방면 지역(하도리 印 방면) 각 70원, 신우면내 속칭 귀일면(하귀리 印 방면)과 속칭 애월면 (하가리 以西 방면. 귀일면과 애월면 사이의 구엄~신엄 방면은 속칭 엄장면이었다) 지역 각 92원 50전, 구우면 내 속칭 명월면(귀덕리 以西 ~ 월령리 印 방면으로 현재 한림읍 지역. 한경면 지역의 속칭은 널개면; 板乙浦면.) 지역 150원, 정의군내 오늘날 표선면 지역인 동중면 지역 150원, 오늘날 남원읍 지역인 서중면 지역 75원이었다. 제주군 뿐만 아니라 정의군의 일부 지역 유림들 까지 참여한 것이다.(제주고100년사)
학교는 당초 제주향교를 사용하려고도 했으나 향교를 이용하는 유생들이 불만을 나타내는 데다 건물 또한 노후하여 수리하여 쓰는 것보다 차라리 새로 짓는 것이 낫다 하여 경신재(敬信齊) 터에 새 교사를 짓기로 되었다. 경신재는 고종12년(1875) 이희충(李熙忠) 목사가 선비들의 자제교육을 위하여 현 오현단 인접 북면 일대에 있던 귤림서원(橘林書院) 터에 건립한 교육시설이었다. 행정구역상으로는 제주군 중면 이도리 1437번지이다. 경신재에 교실 하나를 짓던 중 정의현 유림 지도자 유준하의 7개 지역 제자들이 의외의 자금을 출연함에 따라 31간짜리 학사를 다시 신축했다. 31간 규모의 교사는 귤림서원 당시 12간이었던 장수당의 3배 정도의 크기로서 1907년 12월 화재로 소실된 제주공보교의 총물당 교지 교사(약30간, 황성신문 1907.12.25.)와 비슷한 규모였다. 따라서 의신학교 출범 당시의 건물은 모두 2개동으로 소형건물은 관리용, 31간 규모의 건물은 校舍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교지 면적은 연의문에 명시돼 있지 않으나 1911년도 조선총독부 통계연보에 1912.3.31.현재 제주공립농업학교의 교장 기타 건물 면적이 30평, 부지 및 부속지 면적이 2,395평으로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의신학교 설립 당시 교지 면적 또한 이와 같았을 것으로 보인다.(1909년의 도량형법은 6尺은 1間으로 하고 면적의 단위는 평(坪, 6尺 평방 즉 1間×1間)으로 하고 있다).
한편 당시에는 전국적으로 사립학교가 급증하면서 근대적인 신학문을 익힌 교사가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사립학교 교사들은 학력 면에서도 관공립학교 수준에 미치지 못하여 학교 설립취지에 맞는 교육을 제대로 실시하지 못했다. 당시 관립이었던 한성중학교조차도 졸업생들이 바로 모교 교사를 맡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러나 의신학교에서는 사범학교 출신자 등 우수한 인사를 고빙(雇聘)하여 학생들을 지도했다.(1908.7.14. 대한매일신보는‘의교흥왕’제하 기사에서‘의신학교가 사범학교 출신자들을 고빙하여 교육하고 있다’고 보도) 의신학교 교사명부는 전해지지 않으나 제주지역 최초의 서점을 운영한 고성주와 제주 출신으로서는 처음으로 수원 농림학교를 졸업한 조병채 등도 의신학교 교사였던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고성주(高性柱, 1880.1.29 ~ ?) 고성주는 한문수학 후 1909.9. 학부시행 교원 검정시험에 합격(한문전과 부훈도, 합격자 7명)했다. 일제 강점기 초의 인명록인 「조선신사대동보」(오가키다케오(大垣丈夫), 1920년 경 조선신사대동보발행사무소 발행 추정. 국사편찬위원회 소장)에 의신학교 교사를 지낸 것으로 실려 있다. 일도리에 있던 제주도 최초의 서점이자 인쇄소인 영주서관 주임으로서 1907.10. 학부편찬 교과용도서발매 허가를 얻고 도내 각 학교에 교과용 도서를 공급했다. 1918년에 김석익이 저술한 『탐라기년』의 발문을 쓰고 발행했으며 1928년 김정희의 『완당탁묵』에 이어 1930년 고정종의 제주도 편람을 간행했다. 1908년에 대동학회 제주군지회(지회장 김병윤) 결성시 회원으로 활동했고, 1921년 초등학교 과정인 사립제주명신학교 신축의연금으로 50원을 출연했다. 1923년 사립제주명신학교의 재정지원조직인 명신학회 간사를 지내고 1925.6. 화북청년회 창립시 찬조금을 출연하기도 했다. 1926.3. 제주기자단 창립시 홍순녕 등과 함께 집행위원을 맡았고 1930년 매일신보 제주지국장을 지냈다.
△조병채(曹秉采, 본관 昌寧, 1880.11.14 ~ ?, 이명 曺秉和) 외지에서 입도하여 정착한 제주인이다. 매일신보(1921.7.15.)에 따르면 본래 외지 출신인 최원순 ‧ 박종실 등과 함께 1921.7. 외지 출신 제주인 친목단체인 제주의신계(濟州義信契)를 결성했다. 1897.5. 한국최초의 관립소학교인 서울의 관립소학교와 1899.5. 당시 유명한 사립 일어학교이던 사립 경성학당을 졸업했다. 1899.7.부터 전라남도 사립장성군소학교 교사로 있다가 1900.4. 학부 시행 교원자격시험에 합격하여 장성군공립소학교 부교원으로 옮겼다. 1902.9.경상북도 삼림검사위원으로 잠시 근무하다 1903.5. 장성군 공립소학교 부교원으로 복귀했다. 1905.2. 서울의 사립온수동 온수학교 교사로 옮겼고 이어 사립우산학교(뒤에 의법학교로 개칭), 사립현성학교 교사 등으로 근무하던 중 제주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1907.4. 관립수원농림학교 임학 속성과를 1회(졸업생 12명)로 졸업했다. 졸업과 동시 농상공부 임업과 임업수에 촉탁되어 수원종묘양성소에 근무하다 1907.6. 농상공부 기수(임업수, 판임관 8급)에 임용됐고, 1907.10. 농상공부 직원들과 함께 제주지역 삼림을 조사했다. 1908.10. 대동학회 본부에 제주군지회의 설립을 청원하고 同 지회 총무로 활동했다. 1910년 의신학교가 제주농림학교로 개편되면서 이재신 교장과 함께 4월 11일 부교수겸 학원감으로 임용돼 재임하다 1911.8. 제주군 서기로 옮겨 1913.4.까지 재직했다. 1921년 사립제주명신학교 신축자금으로 100원을 출연했고 1923년에는 제주지역의 금주운동 전개를 목적으로 결성된 제주금주회 평의회 의원으로도 활동했다. 조병채의 출신과 재반 경력으로 보아 1907.10. 농상공부 재직시 제주지역 삼림 조사차 내도한 것을 계기로 1907년 하순~1908년 초에 의신학교 교사로 고빙된 것으로 분석된다.(제주고100년사)
1908년 12월 윤원구 교장이 퇴임한 후에는 그동안 윤원구 군수를 보필했던 이재신(李載莘, 이명 李載荷, 1881.2.14~1953.1.12) 제주군 주사가 제주군수 서리를 맡으면서 의신학교 교장직도 겸임했다. 이재신 교장은 의신학교가 제주농림으로 전환되자 정부로부터 제주농림 교장(사무촉탁)으로 다시 겸임발령을 받았다.
그 동안 정부의 방임 내지 장려를 받으면서 활발하게 구국교육운동을 전개하던 사립학교들은 일제 통감부의 간섭으로 1908.8. 사립학교령(시행 1908.10.1)이 제정 공포되면서 엄격히 규제되기 시작했다. 사립학교의 설립은 학부의 인가를 받도록 하고 기존의 학교들도 인가여부에 관계없이 6개월 이내에 새로 인가를 받게 했다.
교과용 도서는 학부 편찬 또는 학부 검정을 받은 것만 사용하고, 안녕질서를 문란케 하거나 풍속을 괴란할 우려가 있을 경우 등에는 학교를 폐쇄할 수 있게 했다.
또한 군수들의 사립학교 설립과 교장 겸직을 금지시키면서 사립학교에 대한 감독을 강화하도록 하는 한편 1909년 2월 사립학교 기부금품모집취체규칙을 공포하여 기부금품 모집은 경찰서와 지방장관을 경유하여 내부대신과 주무대신의 허가를 받게 하고 허가를 받은 후에도 언제든지 금지할 수 있게 했다. 또한 1909. 4. 지방비법 시행으로 지방의 공공사업 재정은 해당 지방 자체에서 조달토록 함으로써 그동안 지방 수령들의 배려로 사립학교 운영에 쓰이던 공공재산들이 지방 정부에 환수되어 갔다. 당시 제주지역을 관할하고 있던 신응희 전라남도관찰사는 공사립학교들이 애국사상을 포함한 창가 교육과 학교경비에 대한 기부 등의 행위를 금지하는 훈령을 내리기도 했다. 이에 민족계 학교 등 다수의 사립학교가 재정난을 겪으면서 폐교되어 갔다. 한편 정부는 사립학교보조규정을 공포하여 소정의 기준에 달한 학교는 운영비 보조를 받을 수 있게 했으나 기준이 엄격하고 주로 보통학교를 대상으로 했다. 이러한 정부의 사립학교 규제 정책으로 인하여 의신학교의 재정 환경 또한 악화되게 되었다.(제주고100년사)
1909년부터 제주지역 경제사정은 극도로 악화되었고, 이에 따라 제주군 주민들로부터 연 2회 의신학교비를 분납받아 운영비로 쓰던 의신학교에도 심대한 타격을 끼칠 수밖에 없었고, 특히 의신학교와 원거리에 위치하여 의신학교 취학이 현실적으로 곤란하거나 취학 적령자가 없는 가정들이 의신학교비 납부를 기피하는 현상도 노정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와중에 1907년 5월에 설립된 제주공보교가 1910년 3월 첫 졸업생을 배출하게 되는 등 1907년을 전후하여 각지에 설립된 보통학교급 초등학교 들의 졸업생 배출이 임박해지면서 중등 교육 수요가 급증하게 됐다.
1909년부터 학부는 1도 1실업학교를 설립한다는 계획하에 <실업학교령>과 <실업학교시행규칙>이 공포하였으며, 학부가 공립 실업학교 설립을 적극 추진함에 따라 재정 문제 등으로 어려움에 처한 의신학교에서도 공립실업학교로의 전환을 모색케 되었고,
1909년 5월 경에 학부에 의신학교를 공립실업학교로 전환해 줄 것을 신청.
1909년 8월 25일자 황성신문은 의신학교의 공립 전환 신청 사실을 〈何故靳持(왜 처리하지 않고 붙들고 있는가)〉제하로 1면에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濟州郡私立義信學校를 公立實業學校로 承認키 爲야 學部에 請願을 지가 于今 數朔에 尙不處理으로 該校情況이 困難 貌樣이라더라.’ 황성신문에 나오는 '청원'은 단순한 민원성 탄원이 아니라 제반 서류를 갖춘 정식 신청을 의미한다.
1909년 6월말 학부에서는 학무국 1,2과장을 겸임하면서 실무책임을 맡고 있던 구마모토(隈本) 서기관이 제주도에 내도하여 학술조사를 실시하기도 했다.
1909년 12월 22일 농업학교의 필요성을 인정하여 공립제주농림학교 개칭 인가. 당시 황성신문 보도 〈改稱 承認〉濟州郡私立義信學校는 農林學校로 改稱기 爲야 學部의 認可를 受얏다더라.
1910년 4월 11일(월요일)자로 당시 제주군수 서리로서 의신학교 교장을 겸하고 있던 이재신 교장을 제주농림 교장(사무촉탁)으로 발령했다. 당시 관공립학교의 교장은 학부직할 학교 및 공립학교 관제에 따라 학부 또는 기타의 관리가 겸임할 수 있게 하고 있었다. 같은 날 의신학교 시절 교사로 있던 조병채를 학원감(판임관3등)으로 새로 발령하고(조병채 부교수겸 학원감은 측량과목도 담당), 제주공보교 본과 훈도 겸 교감으로 있는 일본인 고마츠(小松兼吉)를 학감으로 겸임발령했다.
1910년 04월 27일 제주 출신으로 수원농림을 졸업한 홍순녕(홍종시의 3남)을 부교수(판임관4등)로 발령(제주고100년사)
1910년 05월 02일 공립제주농림학교(3년제) 설립하여 1회 입학. 제주농림학교가 개교됨에 따라 의신학교는 폐교되고, 교지 및 학생도 제주농림학교로 병합하였다. 설립 초기의 연간 수업일수는 250일이며, 교과목은 수신·국어 및 한문·일본어·수학·이과·도화·체조·농업·실습 등이었다. 개교 당시 입학생은 31명이었으나 1912년 제1회 졸업생 12명만을 배출하였다.(위키백과) 1910년도의 교사는 이재신 교장, 조병채 학감, 홍순녕 부교수 등 한국인 3명과, 고마츠(小松兼吉) 학감, 이토우(伊東五八郞) 교수 등 일본인 2명이 재임했다. 1910년 8월 이재신 교장이 퇴임한 후 1911년에 한국인 교사 대신 일본인 교사들이 부임하기 시작했다.
1910년 6월 11일자 관보에 제주농림의 인가 내용을 고시했다.《學部 告示 第十五號》全羅南道濟州郡에 公立濟州農林學校 設置의 件을 隆熙三年 勅令第五十六號 實業學校令에 依야 隆熙 三年 十二月 二十二日에 認可 事 隆熙 四年 六月 九日 學部大臣 李容稙 ※학교 이름이 '공립제주농림학교'로 된 것은 실업학교령시행규칙 제1조가 “實業學校의 名稱에는 其學校의 種類 又는 學科目 名을 表이 可홈 但 單히 實業學校라 稱을 得홈. 前項 學校 名稱에 官立 公立 又는 私立의 文字를 冠이 可홈”이라고 규정한데 따른 것이다(학교명에 관공립 또는 사립의 冠名을 넣는 제도는 1949.12.31 법률 제86호 교육법 시행으로 폐지됐다).
1910년 8월 25일 이재신 군수서리가 전라남도 장흥군수로 영전되면서 제주농림 교장 사무촉탁직도 동일 부로 자연 해촉되었으며, 제주공보교 교감 고마츠(小松兼吉)가 잠시 교장직을 대리했다.
1911년 하순부터 홍순녕 교사가 제주농림 초창기 학사자료를 취합하여 1912년에 학적부를 완성.
1911년 11월 01일 제주공립농업학교로 교명 변경
1912년 05월 06일 제주공립보통학교의 부설형태인 제주공립간이농업학교(2년제)로 교명 변경. 《朝鮮總督府告示 第216號》明治45年5月6日全羅南道濟州郡所在濟州公立農業學校ノ廢止 竝 濟州公立普通學校ニ濟州公立簡易農業學校ノ附設ノ件認可セリ 明治45年5月8日 朝鮮總督 伯爵 寺內正毅
교사의 명칭도 교유에서 훈도로 바뀌었다. 제주공보교 부설 체제 초기에는 고타(御田尹太郞)가 제주간이농업 교장직을 맡고 있었으나 1912.9.19. 교장직에서 퇴임하고 가게이(影井市藏)가 당일자로 제주공보교 교장과 제주간이농업 교장으로 겸임발령됐다. 가게이(影井市藏) 교장은 東京市 田原尋常小學校 훈도 겸 교장으로 있다가 1912년 9월 19일 제주간이농업 교장 겸 제주공보교장으로 발령되어 4년6개월간 겸임하다 1917년 3월31일부로 나주공립보통학교장으로 전출(조선총독부관보 제1404호 1917.4.12)되었다. 그는 그곳에서 교장배척운동을 당하여 1918년 사임했다.
당시 간이실업학교의 교장과 공립보통학교의 교장은 조선실업학교 관제와 조선공립보통학교 관제에 의해 부윤 또는 군수의 지휘를 받아 교무를 장리하고 소속직원을 감독 통솔하도록 함으로써 제주간이농업과 제주공보교는 법령 체계상으로는 별개였으나, 실제로는 겸임체제로 운영된 것이다. 이는 주로 경비 절감 목적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졸업식도 제주공보교와 같은 날 지내기도 했다.(제주고100년사)
1920년 10월 20일 제주공립농업학교 3년제로 개편
1925년 미마 교장 배척 동맹휴교
1926년 7월 야나기다(柳田) 교유(敎諭)를 배척하는 항일학생운동이 있었다.
1931년 3월 스기사키(杉崎) 교장관사 피습사건,
1932년 3월 제농(濟農) 독서회사건
1933년에는 농업과와 축산과를 두었다.
1940년 04월 01일 5년제로 승격
1940년 05월 26일 오현단 부지가 협소하여 삼도리 283번지(광양부지)로 이전
1941년 12월 대한독립만세 낙서사건
1943년 04월 01일 조선교육령 개정에 의하여 4년제 4학급으로 학칙 변경
1945년 광복 후 초대 교장에 최계순(崔季淳)이 취임하였다.
1946년 09월 01일 제주공립농업중학교 6년제로 개편
1951년 08월 31일 교육법 개정에 따라 제주농업고등학교 9학급(농업과 6학급, 축산과 3학급, 수의학과 3학급)과 제주제일중학교 12학급으로 분리, 제주농업고등학교(3년제)로 학제 변경
1969년 08월 01일 학칙변경, 농업과 3학급 폐과, 전자과 3학급 신설
1976년 03월 01일 광양 부지에서 현 제주시 노형동 607번지(1100로 3213)로 이설
1978년 08월 31일 농촌지도과 폐과, 축산과 3학급 증설(축산과 6학급, 원예과 6학급, 농업기계과 6학급, 전자과 6학급 계 24학급)
1983년 08월 05일 전자과 폐과, 원예과, 농업기계과 각 3학급 증설(축산과 6학급, 원예과 9학급, 농업기계과 9학급 계24학급)
1992년 07월 15일 축산과 3학급 감축, 식품가공과 3학급 증설(축산과 3학급, 식품가공과 3학급, 원예과 9학급, 농업기계과 9학급 계24학급)
1995년 06월 19일 농업기계과 3학급 감축, 식품가공과 3학급 증설, 원예과를 도시원예과로 과명 변경(축산과 3학급, 식품가공과 6학급, 도시원예과 9학급, 농업기계과 6학급 계 24학급)
1997년 06월 03일 축산과를 동물자원과로 과명 변경(동물자원과 3학급, 식품가공과 6학급, 도시원예과 9학급, 농업기계과 6학급 계 24학급)
1998년 06월 22일 골프관리과 3학급 증설(동물자원과 3학급, 식품가공과 6학급, 도시원예과 9학급, 농업기계과 6학급, 골프관리과 3학급 계 27학급)
1999년 10월 12일 특성화고등학교 지정 고시(관광호텔과 3학급, 관광조리과 3학급, 관광골프관리과 3학급, 관광외국어과 9학급, 관광원예과 3학급, 동물자원과 3학급, 산업기계과 3학급 계 27학급) 단, 관광외국어과는 2학년부터 전공을 구분함
2000년 03월 01일 제주관광산업고등학교로 교명 변경.
2005년 03월 01일 특수학급 1학급 설치 인가 (특수학급 포함 계 28학급)
2008년 03월 01일 제주고등학교로 교명 변경, 특수학급 1학급 증설(특성화 27학급, 특수 3학급)
2012년 현재 관광호텔과, 관광조리과, 관광골프관리과, 관광영어과, 관광중국어과, 관광일본어과, 관광원예과, 동물자원과, 산업기계과 등 9개 학과 운영
2016년 09월 01일 제31대 교장 김종식 선생 취임
2017년 02월 07일 제106회 졸업(졸업생 총 19,055명)
2019년 09월 01일 33대 교장 고용철 선생 부임
2021년 01월 08일 제110회 287명 졸업
2021년 03월 01일 관광그린자원과 6학급, 관광경영과 4학급, 관광호텔경영과 2학급, 관광외국어과 9학급, 관광조리과 6학급, 관광시스템설비과 2학급(총 29학급)
교훈은 ‘성실·근면·창조’
운동부는 야구부·검도부·골프부·사격부가 있다.(제주고 홈피,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작성 220322, 보완 2604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