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 12: 2-3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아브람의 대한 기록은 우리 모두가 하나님을 어떤 분으로 알아 모셔야 되는가와 신앙생활의 전진성을 보여주는 모본으로 있습니다.
1. 본문 2절 초두는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입니다.
여기까지 모세는 아브람이 명령을 받은 것만을 계속하여 말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하나님의 약속을 그 명령에다 첨가시키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신 것은 경미(輕微)한 원인 때문에 약속하신 것이 아니라는 것을 설명합니다. 우리가 태만을 부리면서 순종을 하는 데에 하나님의 은혜와 복에 대하여 더 첨가된 확신으로 활기를 부여받지 않으면 여호와께서 하신 명령은 헛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노아의 이야기에서 전에 이 사실을 암시한 적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다시 여기서 상세하게 설명하는 것은 그 말씀 자체가 다시 한번 언급해야 될 것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런 위대한 계기에 대한 말씀을 반복하는 것이 절대로 불필요한 것이라고 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그 이유는 신앙이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하지 않고는 절대로 그것이 지탱할 수가 없기 때문이라는 사실은 너무도 명백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신앙만으로도 순종을 낳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을 따를 의향을 갖게 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그분의 복에 대하여 약속을 하시지 않으시면 단순히 그분이 기뻐하시는 것을 명령하는 것만으로는 절대로 만족하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까지도 아들을 두지 못하고 있는 아브람이 분명히 큰 민족이 될 것이라는 그 약속을 기억해야 될 것입니다.
이 약속은 만약 하나님이 모든 일들의 실제적인 상태로 그것의 성취에 관한 소망의 근거를 제공하셨다면 아주 효력이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의 아내의 불임증이 자손에 대한 소망을 항구적으로 제거함으로 그를 위협하고 있는 것을 볼 때에 만약 아브람이 하나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의지하지 않았다면 그 순수한 약속 자체가 냉냉 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 아내의 불임증에 대하여 알고 있었지만 그러나 아직까지도 그는 소망으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약속된 큰 민족을 이해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사야는 하나님이 복을 내려주심으로 그분의 종 아브람을 증거해 주셨다는 이 호의에 찬 행동을 극구 찬양하고 있습니다. 그는 그렇게 큰 민족이 될 아브람이 고독하며 너무도 자손이 없이 혈혈단신이라는 사실을 알았던 것입니다(사2:2).
여기서 명사 (고이)라는 말은 즉 ‘나의 민족’이란 의미인데 비록 그 말이 유대인들에게는 가증스런 것이지만 여기서 많이 다른 곳에서와 같이 명예로운 용어로 간주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자기의 씨에서 엄청난 숫자의 자손을 갖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하여 그 말이 여기서 강조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신분은 다른 사람들보다는 특이하고 구별된 백성들이며 그들은 그의 자신의 이름으로 불려지게 될 백성들이 될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제시하는데 그 말이 사용되고 있는 것입니다.
2. 본문 2절 하반은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입니다.
이 말은 이전의 문장을 설명하려고 부가되고 있는 말입니다.
아브람이 실망하지 않게 하려고 하나님이 그분의 복을 제공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일반 자연적인 방법으로 다른 경우에서 효력을 볼 수 있는 것보다는 더 기적적인 방법으로 보다 더 효과를 낼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선포되고 있는 그 복은 자손보다 더 멀리 적용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그의 모든 일에서 번영하고 기쁨에 넘치는 결과를 갖게 될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그 다음에 계속되는 문맥에서 나타나고 있는 대로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어다’ 라고 표현되고 있습니다. 모든 곳에서 사람들에게 감탄을 자아내게 될 행복이 그에게 약속되어진 것처럼 모든 사람들이 아브람의 이름을 본보기로 삼아 복을 선포하는 공식으로 소개하게 될 것이라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이 말을 첨가된 의미로 사용하면서 ‘너는 복의 근원이 될 것이며’ 라는 말은 ‘모든 사람이 너를 축복할 것이며’ 라는 식으로 해석합니다.
그러나 전자의 의미는 다른 것보다 더 적절한 의미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또한 그 말을 적극적으로 주해하여 마치 ‘내 은혜가 너에게만 거하며 너만이 그것을 누리게 하지 않고 그것이 모든 민족들에게로 멀리 흘러갈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 그것을 너에게 예치시켜서 모든 세상에 흘러 넘쳐 들어가게 하려는 것이다’ 라고 표현된 것처럼 주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대화의 범위까지 나아가지 않으신 것입니다.
3. 본문 3절 상반절은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이 자체적으로 나타나고 있으니 말하자면 그분이 가족적으로 아브람과 언약을 맺으신 사실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실은 사람들이 그들의 친구들과 같은 동년배들과 곧잘 하는 식으로 하나님이 언약을 하고 계신 데서 그분의 특별한 은총이 현현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왕들과 다른 왕들 사이에 체결되는 일반화된 언약 형식이니 그들은 상호간에 한 적(敵)에 대하여 같은 적으로 그리고 서로 같은 우정을 갖는 것을 약속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그토록 공손하고 겸허하게 머리를 숙이신다는 사실은 도저히 헤아릴 수 없는 그분의 특별한 사랑의 서약입니다. 비록 여기서 그분이 한 사람에게만 말씀하고 계시지만 다른 곳에서는 그분의 신실한 모든 백성들에게 대하여 그와 똑같은 애정을 선포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일반적인 교리를 추론할 수가 있습니다.
즉 하나님은 그분의 호의를 베풀어 우리를 너무도 다정하게 안아주시기 때문에 그분은 우리들의 친구들에게도 복을 주실 것이며 우리들의 원수들에게는 분명히 보복을 하실 것이라는 점입니다. 모든 사람들의 존경을 받으려고 사람들 가운데서 평화스럽게 자신들의 행동과 처신 면에서 주의를 기울여 생활해 온 모든 사람들 가운데 아브람이야말로 가장 손꼽히는 자들 중에 한사람이라고 인정될 수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에게 원수가 없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에게 원수로서 마귀가 버티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마귀는 자기의 손에 악한 자들을 붙들고 있는 자이며 그들을 끊임없이 충동시켜 선한 사람들을 괴롭히는 원수인데 아브람에게 그런 마귀가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언급되고 있는 말씀으로 무엇보다도 경고를 받고 있는 사실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제아무리 화평을 가지기를 원한다 할지라도 그들은 절대로 원수들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많은 사람들이 무조건 우리를 증오하고 있다고 해도 세상의 배은망덕이 우리를 새삼스럽게 실망시킬 이유가 없으며 그리고 우리에게 어떤 해도 끼치지 못하고 다만 우리를 해칠 방법을 모색하고 있다는 것을 알 때에 다른 것은 생각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이 우리 편에서 그 전쟁을 담당하고 계신다는 이 단순한 위로로 만족해야 될 것입니다. 그 외에도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들이 모든 선한 사람들과 함께 선의를 갖고 인간상을 갖기를 격려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모든 해를 끼치는 일에서 손을 떼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만약 우리가 그들에 대한 모든 의무를 소홀히 하고 팽개친다면 하나님이 틀림없이 갚아주신다는 사실이 믿는 자를 도와주도록 우리를 자극시키는 평범하고 흔해빠진 상투적인 유도작전이 아닙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에게 속한 사람들 가운데 어느 누구라도 해친다면 그분이 우리를 대항하여 전쟁을 하신다는 사실을 하찮은 경고로 받아들이지 말기를 바랍니다.
4. 본문 3절 하반은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입니다.
누가 이 말씀을 제한적인 의미로 이해하는 것을 택하여 마치 속담 형식으로 말하여 그들의 자녀들이나 친구들을 축복하는 자들은 아브람의 이름대로 그들도 일컬음을 받게 될 것이라는 의미로 받아들인다면 그대로 은혜를 받기를 바랍니다.
히브리어 구절은 아브람이 행복에 대한 신호를 알리는 본보기로 불려질 것이라는 해석을 지닐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의미를 보다 더 연장시키고 싶습니다. 이곳에서도 똑같은 약속이 언급되고 있다고 추측하고 있기 때문이며 단지 하나님이 이후에 다시 더 분명하게 되풀이 하여 언급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22:18). 그리고 바울의 유전적인 해석이 이 점에 대하여 주의를 환기시키고 있으니 그는 아브라함의 씨에게 내려진 약속, 말하자면 그리스도에게 내려진 이 약속은 율법이 주어지기 430년 전에 주어진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갈3:17).
그러나 그 연대를 계산해 보면 그 복이 아브람이 가나안 땅에 들어올 때에 그리스도 안에서 그에게 약속된 것이라는 점을 이해시키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모든 민족이 그분의 종 아브람 안에서 복을 받을 것이라고 선언하고 계시니 그 이유는 그리스도께서 아브람의 자손들 가운데 포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방법으로는 아브람이 하나의 예표가 될 뿐만 아니라 복의 근원이 되어 아담과 그리스도와의 사이에 이해되고 있는 하나의 대조를 이루게 했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최초의 인간이 하나님과 결별되는 그 순간부터 우리는 모두가 저주 가운데 출생되었기 때문에 여기서 새로운 치료책이 우리에게 제공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 표현이 분명히 그리스도에 관련되어 있으니만큼 그 복을 아브람과 그 자신 안에서만 찾아서는 절대로 안 된다고 주장하는 것에서 이것과 상치되는 것이 전혀 없는 것입니다. 여기서 유대인들은 변덕스럽게 반대하면서 성경에서 많은 증거들을 수두룩하게 쌓아 놓고 있으니 그 성경의 증거에서는 어느 한사람에게 축복하거나 저주하는 것은 단지 다른 사람에게 잘되고 못되는 것을 원하는 것 뿐이지 절대로 그 이상이 될 수가 없다고 하는 의미를 표현하고 있는 듯합니다. 그것은 아브람에게 주어진 양식(樣式)에 의해서 그 성경의 증가들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무가치한 트집들은 전혀 문제없이 손쉽게 쓸어버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들이 말하는 것이 때로는 사실이지만 그러나 언제나 사실이며 진리는 아니라는 것을 인정합니다. 레위 지파가 신명기 10장 8절과 이사야 65장 16절과 그와 유사한 구절에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축복을 할 것이라고 언급되어 있는데 그렇게 언급된 것은 이스라엘이 다른 곳에서 선한 것의 일부라도 추구하지 않게 하시려고 하나님이 모든 선한 것들의 근원이시라고 선포되고 있는 것을 충분히 입증해 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언어가 블명확한 것을 감안하여 그들로 하여금 이것이나 또는 다른 의미를 택해야 된다는 것을 인정하게 해야 하며 그 내용과 상황에 가장 적절한 것이 되는 것을 취하게 해야 됩니다. 이제 바울은 모든 경건한 자들 가운데서 받아들여지고 있으며 마땅히 인정하고 받아들여져야 하고 공리로 여기고 있는 것을 지니고 있으니 그것은 모든 인간은 저주를 받아야 하며 그러므로 거룩한 사람들은 오직 중재자의 은혜를 통하여 복을 받을 수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결론을 내리기를 하나님이 아브람과 맺으신 구원의 언약은 그리스도 안에서 되어지는 것을 떠나서는 전혀 인정될 수가 없으며 견고하게 될 수가 없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현재의 문장을 이렇게 해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분의 종 아브람에게 이후에 모든 사람들에게 넘쳐 내려갈 복을 약속하신 것이라는 의미라는 점입니다. 그러나 이 제목이 다른 곳에서 더 충분히 설명될 것이기 때문에 지금은 그것을 약간 만지고 지나가는 것에 그치고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