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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판으로 인하여 꺾일 교만
겔 7:14-22
14 그들이 나팔을 불어 온갖 것을 준비하였을지라도 전쟁에 나갈 사람이 없나니 이는 내 진노가 그 모든 무리에게 이르렀음이라
15 밖에는 칼이 있고 안에는 전염병과 기근이 있어서 밭에 있는 자는 칼에 죽을 것이요 성읍에 있는 자는 기근과 전염병에 망할 것이며
16 도망하는 자는 산 위로 피하여 다 각기 자기 죄악 때문에 골짜기의 비둘기들처럼 슬피 울 것이며
17 모든 손은 피곤하고 모든 무릎은 물과 같이 약할 것이라
18 그들이 굵은 베로 허리를 묶을 것이요 두려움이 그들을 덮을 것이요 모든 얼굴에는 수치가 있고 모든 머리는 대머리가 될 것이며
19 그들이 그 은을 거리에 던지며 그 금을 오물 같이 여기리니 이는 여호와 내가 진노를 내리는 날에 그들의 은과 금이 능히 그들을 건지지 못하며 능히 그 심령을 족하게 하거나 그 창자를 채우지 못하고 오직 죄악의 걸림돌이 됨이로다
20 그들이 그 화려한 장식으로 말미암아 교만을 품었고 또 그것으로 가증한 우상과 미운 물건을 만들었은즉 내가 그것을 그들에게 오물이 되게 하여
21 타국인의 손에 넘겨 노략하게 하며 세상 악인에게 넘겨 그들이 약탈하여 더럽히게 하고
22 내가 또 내 얼굴을 그들에게서 돌이키리니 그들이 내 은밀한 처소를 더럽히고 포악한 자도 거기 들어와서 더럽히리라
겔 7:14-22 / 그들이 비상 나팔을 불고 군사력을 동원하며 모든 무기를 예비할지라도 전쟁에 나갈 사람이 아무도 없을 것이다. 내 분노가 그토록 신속하게 그들 모두를 내려칠 것이기 때문이다. 15) [이스라엘이 받을 형벌] 성밖으로 나가면 적군의 칼에 찔려 죽고 성안에 머물러 있으면 전염병과 굶주림이 그들을 삼켜 버릴 것이다. 16) 그들 가운데 몇 사람이 죽음을 모면하고 이 산 저 산으로 흩어져서 피난을 가더라도, 그들은 슬피 우는 비둘기처럼 외롭게 산속에서 지낼 것이다. 그러다가 그들마저도 자기들이 지은 죄를 슬퍼하며 울다가 죽을 것이다. 17) 모두 다 놀라서 온 몸이 마비되고 두 팔은 풀려 축 늘어지며 겁에 질린 사람들은 바지에 오줌을 쌀 것이다. 18) 그들은 모두 삼베옷을 입고 공포와 수치에 휩싸이며 얼굴은 슬픔에 가득 차고 뉘우침으로 머리털을 밀어 모두 대머리가 될 것이다. 19) 그들은 금과 은을 길거리에 쓰레기처럼 내던지고 오물처럼 여길 것이다. 나 여호와의 불타는 분노 앞에서 이 세상의 재물이 어찌 그들을 살려 줄 수가 있겠는가? 그것은 이제 무가치하다. 주님의 형벌을 세상의 재물이 감당할 수가 없다. 그들은 세상의 재물 때문에 나를 버리고 폭력과 권력의 숭배자가 되었으니 마땅히 벌을 받게 될 것이다. 20) 그들이 돈을 벌었다고 교만해져서 바로 그 금과 은을 가지고 내가 미워하는 우상들을 만들어 놓았으니, 이제는 그들이 그것을 미워하면서 내던지게 만들겠다. 21) 내가 그들의 보화를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 넘겨 주어 약탈해 가게 하고, 바로 그들의 원수들에게 넘겨 주어 전리품으로 빼앗아 가게 하며 금과 은으로 만들어 놓은 신상들을 더럽히게 만들겠다. 22) 그리고 나도 이제는 내 백성을 버리고 떠나겠다. 예루살렘에 있는 나의 성전마저도 원수들에게 내주어 더럽히게 만들겠다. 그러면 외적들이 강도 떼처럼 성전으로 몰려 들어가 약탈하고
남 유다를 전혀 불쌍히 여기지 않는 하나님의 혹독한 심판이 정해졌습니다. 본 단락에서는 남 유다가 당할 참혹한 현실이 삼중으로 이야기됩니다. 그러나 심판의 원인은 하나님의 성품이나 특정 목적 때문이 아닙니다. 유다 백성의 행위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무런 희망도 남아있지 않습니다.
온갖 것을 준비하였을지라도(14-19) 오늘의 우리와 같이 자기 잘난 맛에 살아가던 남 유다도 다가오는 위협에 맞서 나름의 준비를 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 어떤 인간적인 준비와 대비도 쓸모가 없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준비한 심판은 그 무엇으로도 막을 수 없습니다. 결국은 맞설 자 하나 없는 무기력한 상태가 될 것입니다. 정치역학에나 군사력에 따라 판가름 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은 하나님의 정하신 뜻에서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확정된 심판으로 인해 밖에는 칼이요 안에는 전염병이라는 진퇴양난의 현실 속에서 남 유다는 이도저도 할 수 없고 어디에도 안전한 곳이 없는 암담한 상황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실제로 예루살렘 성은 1년 6개월 동안 고사작전에 엄청난 고통을 받습니다(왕하 25:1-2). 그리고 성내에서도 각종 전염병이 돌았습니다(왕하 25:3). 에스겔은 모든 동사를 과거형으로 사용하여 일어날 심판이 확실히 정해져 시행될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남 유다가 할 수 있는 것은 비둘기처럼 슬피 우는 것뿐이고 두려움과 수치를 감당해내는 것뿐입니다. 삭도로 머리를 밀어서 극도의 슬픔을 나타내는 것뿐입니다.
타국인의 손에 넘겨(20-22) 이스라엘 자손의 사악함의 본질은 역사 내내 이어졌던 우상 숭배에서 목격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기본적으로 하나님을 섬기며 사랑하는 것을 싫어했습니다. 기회가 닿는 대로 우상을 따라갔습니다. 환난의 날에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던 모든 물건들은 심판의 날 전에는 남 유다를 교만하게 만들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업신여기던 남 유다의 백성들은 전 국토를 우상숭배로 물들였고, 거룩한 성전 안에 아세라 목상과 바알신상, 그리고 일월성신을 위한 우상을 만들어 성전을 더럽혔습니다. 이것들에게 자신들을 위해 기도하고 이것들을 통해 자신들의 욕망을 채웠습니다. 이것들이 모든 것을 해줄 수 있을 것으로 믿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심판의 날에는 이 모든 것이 더러운 쓰레기들이 될 뿐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스스로의 재산과 시간을 써가며 정성스레 만들었지만 이방인들의 소유물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를 향해 서있지 않는 모든 것들은 결국 아무런 의미도 가치도 보장받지 못합니다. 허망과 허무로 들어갈 뿐입니다.
적용: 당신을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하고, 하나님에 대한 열정을 식게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1642년 영국 동부지역 울즈소프에서 아버지는 돌아가시고 어머니는 자신을 버리고 떠난 우울한 환경 속에 한 아이이었습니다. 학교 친구에게 성적으로 업신여김을 당한 것이 분해서 공부를 하였고, 대학에 들어갔습니다. 흑사병이 창궐하여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사과나무 아래 주저앉아 푸념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사과 한 개가 '툭' 떨어졌습니다. '왜 사과는 옆으로 안 떨어지고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는 걸까?' 아이작 뉴턴의 '만유인력의 법칙'을 탄생시킨 의문이었습니다. 사후 300년, 지금까지 칭송을 받는 뉴턴이지만 그의 인간으로서의 삶은 불행했다고 합니다. 만유인력이 탄생한 사과나무 아래는 뉴턴에게 있어 최악의 낙담의 현장이었습니다. 하지만 바로 그곳에서 역사에 남을 과학지식이 탄생할 수 있었습니다. 상실은 새로운 기회입니다.
< 설 교 >
여호와의 날
피영민 목사
서론
“여호와의 날”(day of the Lord)은 구약 성서의 큰 주제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스라엘은 솔로몬의 사후에 두 나라로 나누어 졌습니다. 북 왕국을 이스라엘, 남 왕국을 유다라 하였습니다. 아모스 5장 18절을 보면 아모스 선지자는 북 왕국 이스라엘에 여호와의 날이 올 것임을 예언했습니다. 여호와의 날은 어두운 날이고 심판의 날이라는 것입니다. 드고아 목자인 아모스가 예언을 했는데 결국 B.C 721년에 앗수르에 의해서 북 왕국은 멸망을 당했습니다. 여호와의 날이 드디어 왔습니다. 남 왕국 유다가 포도원의 망대같이 남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많은 선지자들이 남 왕국 유다에도 여호와의 날이 온다는 것을 예언했습니다. 이사야 13장 6절, 스바냐 1장 4절, 요엘 2장 11절에 그 예언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유다 백성들은 여호와의 날에 대해서 그릇된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날이 되면 행복과승리가 올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선지자들은 이구동성으로 그날은 심판의 날이 되고, 멸망의 날이 될 것임을 예언했습니다.
에스겔 선지자는 B.C 598년 느부갓네살 왕의 2차 침공을 할 때에 여호야긴 왕과 함께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왔습니다. 일만 명이 끌려 왔는데 그 가운데 한 사람이었습니다. 5년 뒤인 B.C 593년에 그발 강가에서 하나님의 이상을 보고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예언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B.C 593년도에 예루살렘은 완전히 멸망하지 않았습니다. B.C 587년 느부갓네살 왕이 3차 침공으로 인해 완전히 멸망했습니다. 593년에 예언을 했고, 587년에 멸망했으니 에스겔 7장에서 예언하고 있는 그 시대로부터 약 7년 정도의 생존 기간이 남아 있었던 것입니다. 여호와의 날, 심판의 날이 7년 밖에 남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에스겔의 예언은 대단히 급박했습니다. 이 나라가 7년 후에 망할 것이며, 여호와의 날이 올 것임을 급박한 심정으로 예언했던 것입니다. 물론 에스겔 7장에는 여호와의 날이라는 표현은 등장하고 있지 않습니다. 끝이 왔다고만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에스겔 13장 5절에 여호와의 날이라는 표현이 정확히 나오고 있습니다. 즉 에스겔 선지자는 여호와의 날이 임박했음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Ⅰ. 에스겔이 예언한 여호와의 날의 특징
1. 그날은 어떤 방식으로 오는가?
첫째, 여호와의 날은 심히 임박(Imminent)했습니다. 에스겔 7장 5절에 보면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재앙이로다 비상한 재앙이로다 볼찌어다 임박하도다”라고 기록되었습니다.
둘째, 그날은 확실히(Certain) 온다는 것입니다. 에스겔 7장 7절에 보면 “이 땅 거민아 정한 재앙이 네게 임하도다 때가 이르렀고 날이 가까왔으니 요란한 날이요 산에서 즐거이 부르는 날이 아니로다”라고 기록되었습니다. 그날은 등산가서 노는 날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요란한 날이 되고 정한 재앙이 오는 날입니다. 그날의 재앙이 온다는 것은 정해졌습니다.
셋째, 여호와의 날은 아무도 피할 수 없습니다(Inescapable). 에스겔 7장 2절에 보면 “너 인자야 주 여호와 내가 이스라엘 땅에 대하여 말하노라 끝났도다 이 땅 사방의 일이 끝났도다”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땅 동서남북의 어디든지 아무도 피할 수 없는 날이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넷째, 여호와의 날은 돌이 킬 수 없는 최후의 날(Final)이 될 것입니다. 끝이라는 말씀이 2, 3, 6절에 반복되고 있습니다. 즉 여호와의 날은 임박했고, 확실히 올 것이고, 아무도 피할 수 없으며, 돌이킬 수 없게 오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에스겔의 예언대로 그날이 왔습니다. 에스겔 33장 21절에 보면 “우리가 사로잡힌지 십 이년 시월 오일에 예루살렘에서부터 도망하여 온 자가 내게 나아와 말하기를 그 성이 함락되었다 하였는데”라고 기록되었습니다. 포로로 잡혀 온지 15년 만에 예루살렘 성은 함락되었습니다. B.C 587년에 드디어 여호와의 날이 임하고 예루살렘은 멸망했습니다.
2. 그날은 어떤 성격의 날인가?
그날은 유다 백성들이 기대했던 것처럼 축복의 날, 번영의 날, 형통의 날이 아니었습니다. 그날은 심판의 날이요 가증한 죄악에 대해서 보응한 날이요 재앙의 날이요 요란한 날이요 환란의 날이요 사망의 날이요 패망의 날이었습니다. 그날은 여호와 하나님이 아껴보지 아니하시는 날이었습니다. 자기 백성을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는 날입니다. 극히 악한 이방인인 바벨론 사람을 불러다가 몽둥이를 삼아 때리는 날이라는 것입니다.(여호와 마케, Jehovah Makkeh) 에스겔 7장 9절 말씀에 “내가 너를 아껴 보지 아니하며 긍휼히 여기지도 아니하고 네 행위대로 너를 벌하여 너의 가증한 일이 너희 중에 나타나게 하리니 나 여호와가 치는 줄을 네가 알리라”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을 여호와 이레, 여호와 라파, 여호와 닛시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호와 마케라는 이름은 아무도 노래를 부르지 않고 알지도 못합니다. 그런데 에스겔 7장에는 여호와 마케(여호와 하나님은 치시는 하나님)라는 이름이 나와 있습니다. 유명한 조나단 에드워즈 목사님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강물과 같고 하나님의 자비는 댐과 같다. 하나님의 자비의 댐이 무너지면 하나님의 진노의 강물이 된다” 유다 백성들의 죄악이 390년 쌓이니 하나님의 자비의 댐은 무너지고 진노의 강물이 넘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Ⅱ. 여호와의 날에 무익한 것들
여호와의 날에 도움이 안되는 것들이 있습니다. 에스겔 7장의 내용을 자세히 살펴보면, 여호와의 날에 유익이 없는 것들을 열거하고 있습니다.
첫째, 이스라엘의 군인, 용사, 전사들이 아무 쓸모가 없다고 했습니다. 본문 14절입니다. “그들이 나팔을 불어 온갖 것을 예비하였을찌라도 전쟁에 나갈 사람이 없나니 이는 내 진노가 그 모든 무리에게 미쳤음이라” 이스라엘은 전쟁이 일어나면 나팔을 붑니다. 나팔을 부는 것은 영장을 발부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 나팔 소리를 듣고 집합하고 전쟁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팔을 불어도 전쟁에 나갈 사람이 없습니다. 나라가 망했다는 증거입니다. 영장이 가장 무서운 것인데 영장이 나와도 갈 사람이 없습니다.
둘째, 땅이 아무리 많아도 소용이 없습니다. 본문 12절과 13절은 땅을 사고 파는 이야기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땅을 기업으로 받았습니다. 가족의 기업입니다(Family Inheritance). 그런데 가족이 너무 가난해지면 땅을 팔 수 있습니다. 땅을 판 돈으로 생계를 유지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땅을 산 사람은 땅을 판 사람이 나중에 돈을 벌어 돈을 주면서 땅을 돌려달라고 하면 반드시 돌려주어야 합니다. 땅이라고 하는 것은 그 가족의 기업이기 때문입니다. 너무나 가난해서 땅을 도저히 다시 받을 수 없다면 50년이 되는 해에 다시 돌려받을 수 있습니다. 50년을 가리켜 희년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에스겔의 예언은 사는 자도 쓸데없고, 파는 자도 쓸데없다는 것입니다. 희년뿐만 아니라 기업 무르기 제도도 모두 소용없다는 것입니다. 유다가 망해버리면 포로 생활은 50년을 훨씬 넘고 70년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셋째, 산속의 피난처를 만들어 놓았다고 할지라도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본문 16절입니다. “도망하는 자는 산 위로 피하여 다 각기 자기 죄악 까닭에 골짜기 비둘기처럼 슬피 울 것이며” 비둘기가 왜 골짜기에 있습니까? 비둘기는 산 능선을 타고 날아 다닙니다. 이 비둘기가 산 골짜기로 내려간다는 것은 매에게 쫓기거나 사냥꾼에게 쫓긴다는 것입니다. 골짜기로 내려가서 슬피 웁니다. “꾸 꾸루 꾸꾸” 극단적인 슬픔을 의미합니다. 슬피우는 비둘기는 세상 사람들에게도 슬픔의 상징입니다. 노래도 많이 있습니다. 1950년대 뉴옥 할렘가에 태어난 해리 벨라폰테(Harry Belafonte)는 이런 노래를 불렀습니다. “Cu-cu-ru-cu-cu paloma Cu-cu-ru-cu-cu no llores” <꾸꾸 루 꾸꾸 팔로마>는 멕시코 어느 마을의 이야기와 관련이 있습니다. 사랑하던 연인을 두고 저세상으로 가버린 주인공이 죽어서도 차마 잊지 못하고 비둘기가 되어 연인의 창가로 날아와 꾸꾸 루 꾸꾸하고 슬피 운다는 애절한 사랑 노래입니다. 또 네덜란드 출신의 혼성 6인조 팝그룹 조지 베이커 셀렉션(George Baker Selection)이 “Paloma blanca”라는 노래를 불렀습니다. 이 노래는 유명한 권투 선수였던 홍수환의 부인 옥희가 번안해서 불렀습니다. “비에 젖은 비둘기가 서러웁게 우네요 자기 짝을 어디두고 저리 슬피 울까요” 제가 이 노래를 부르면 우리 전도사님들은 복음성가 몇 장이냐고 물어봅니다. 이 비둘기가 골짜기에서 운다는 것은 극한적인 슬픔을 의미합니다. 산 속에 피난처가 있어도 도움이 안된다는 것입니다.
넷째, 은과 금이 많으니 하나님의 도우심이 필요없다고 말하는 사람은 본문 19절을 읽어 보아야 합니다. “그들이 그 은을 거리에 던지며 그 금을 오예물 같이 여기리니 이는 여호와 내가 진노를 베푸는 날에 그 은과 금이 능히 그들을 건지지 못하며 능히 그 심령을 족하게 하거나 그 창자를 채우지 못하고 오직 죄악에 빠치는 것이 됨이로다” 여호와의 진노의 날에 은을 가진 사람들이 길거리에 버린다는 것입니다. 금을 가진 사람은 오예물처럼 여긴다는 것입니다. 지저분하고 더러운 물건을 의미합니다. 즉 은과 금이 도대체 나에게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 던져 버린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은과 금을 주셨더니 그것을 가지고 우상을 만들고, 사치하고, 교만했는데 그날에는 은과 금은 아무 소용이 없더라는 것입니다. 즉 은과 금으로 장식을 하고 예쁘게 꾸밀지라도 그날에는 모든 얼굴에 수치가 올 것이고, 은과 금으로 액세서리를 만들어 머리에 달았는데 그날에는 머리가 대머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날에는 예쁜 얼굴이 무슨 소용이 있으며 아름다운 머릿결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하는 것입니다. 은과 금도 소용이 없습니다.
다섯째, 거짓된 종교인들도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본문 26절을 보니 “환난에 환난이 더하고 소문에 소문이 더할 때에 그들이 선지자에게 묵시를 구하나 헛될 것이며 제사장에게는 율법이 없어질 것이요 장로에게는 모략이 없어질 것이며”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예언자들이 거짓된 예언을 했고, 제사장 헛된 제사를 드렸고, 장로들 조차 성전 안에서 동방태양을 경배했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거짓된 종교가 아무런 유익을 얻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많은 종교가 있어도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의 날에는 이 세상 종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종교인들이 탁월한 사상을 내 걸었을지라도, 종교인들이 봉사 활동을 열심히 했을지라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여섯째, 국가라고 하는 제도도 그날에는 소용이 없습니다. 본문 27절입니다. “왕은 애통하고 방백은 놀람을 옷 입듯하며 거민의 손은 떨리리라 내가 그 행위대로 그들에게 갚고 그 죄악대로 그들을 국문한즉 그들이 나를 여호와인줄 알리라” 하나님의 심판은 행위대로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구원은 은혜대로 합니다. 결국 B.C 587년 유다의 마지막 왕 시드기야는 눈 뜨고 있는 상태에서 자신의 아들들이 모두 죽는 것을 봐야 했습니다. 그리고 느부갓네살 왕이 시드기야 두 눈도 뽑아 버렸습니다. 시드기야는 눈 뜨고 자식 죽는 것을 보고, 두 눈을 뽑히고 포로로 바벨론에 끌려 갔습니다.
이 심판의 날에 은과 금도 소용없고, 왕과 방백도 소용없고, 군대도 소용없고, 산의 피난처도 소용없고, 종교도 소용없고, 아무것도 소용이 없습니다.
Ⅲ. 현대인에게 다가오는 여호와의 날
유다가 망한 이유를 왜 우리에게 말하고 있습니까? 이렇게 묻는 분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에스겔은 바벨론에 포로된 사람들에게 이 예언의 말씀을 증거했습니다. 그러나 이 예언의 말씀은 인류 역사 최후에 다가올 심판에 대한 예표에 불과한 것입니다. 여호와의 날은 앞으로 올 것이다라는 것입니다. 21세기를 사는 우리에게 여호와의 날이 다가오기 때문에 이 말씀이 중요한 것입니다. 노아 시대에 홍수 심판,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 북 왕국과 남 왕국의 멸망, 아이티와 칠레의 지진, 동남아시아의 쓰나미 등은 하나님의 최후 심판이 있다는 경고에 불과한 것입니다. 맛보기 경고만 보아도 괴로운 것이 여호와의 날이라는 것입니다. 북 왕국 이스라엘은 아모스가 여호와의 날이 올 것임을 예언했고, 남 왕국에는 에스겔이 여호와의 날이 온다고 예언했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여호와의 날이 온다고 예언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바로 사도 베드로입니다. 베드로후서 3장 10절에 보면 “그러나 주의 날이 도적 같이 오리니(the day of the Lord)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 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라고 기록되었습니다. 베드로후서 3장 6절로 7절에는 “이로 말미암아 그때 세상은 물의 넘침으로 멸망하였으되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간수하신바 되어 경건치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라고 기록되었습니다. 노아 시대에는 하나님이 물로 심판하셨습니다. 그런데 물 보다 더 무서운게 남아 있습니다. 바로 불입니다. 21세기를 사는 우리는 하나님이 불 심판을 하신다는 예언의 말씀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인류는 불 심판으로 망한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노아가 480세에 예언을 받고 500에세 장가들고 600세에 홍수가 왔습니다. 즉 노아는 120년 동안 방주를 만들었습니다. 산 속에 방주를 만들고 있으니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노아는 정신 나간 사람이라고 놀림을 당했습니다. 그런데 물로 심판을 당하자 방주 안에 있는 노아 가족만 살고 나머지는 모두 물에 빠져 죽었습니다. 지금 우리가 압구정동에 가서 사람들 붙들고 얘기 해 보시기 바랍니다. “당신은 아십니까? 이 세상이 불로 망한다는 걸 아십니까?” 사람들은 조롱하고 우습게 여길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변함이 없습니다. 이 세상은 하늘과 땅도 불로 절단 날 것이고,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 가고, 땅도 불로 풀어질 것입니다. 그때에는 권력, 돈, 국가, 산 속의 피난처도 필요 없습니다. 아무것도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불 심판의 날은 우리에게 임박해 오고 있습니다. 아모스가 예언 할 때에도 북 왕국 이스라엘은 물질적으로 번영하던 시대였습니다. 물질적으로만 잘 살고 있던 사람들을 향해서 여호와의 날이 온다는 예언은 이루어졌습니다. 우리가 물질적으로 잘 산다고 해서 여호와의 날이 안오는게 아닙니다. 반드시 올 것입니다. 임박해 왔습니다. 아무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날은 최후 심판의 날이 되는 것입니다.
결 론
하나님이 지금 선지자, 사도를 통해서 여호와의 날이 온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은 그날 심판을 받으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즉 하나님의 진노는 무서운 것이니 진노를 당하지 말라고, 심판을 피하라는 의도로 이 말씀을 기록해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가 불 심판이 온다고 2000년이 지났는데 현재 멀쩡하지 않습니까?” 베드로후서 3장 8절로 9절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은 이 한가지를 잊지 말라 주의 약속은 어떤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우리에게만 천년이지 하나님께는 하루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이 왜 여호와의 날을 빨리 안보내시고 오랫동안 참고 기다리십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사랑하는 사람들이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제가 아무리 얘기해도 하나님의 택함 받지 못한 백성은 회개하지 않습니다.
죄는 자기 자신의 기준으로 죄가 있다 없다를 판단 할 수 없습니다. 이런 기준이라면 김정일도 의인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우리 기준으로 우리는 죄인이 아닐지라도 하나님의 기준으로 보면 우리는 모두 죄인입니다. 인간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도록 창조된 피조물이 하나님을 인정치도, 따르지도, 믿지도 아니하고, 우상 숭배하는 것이 죄가 아니라는 것입니까? 불 심판을 피하는 유일한 방법은 죄인됨을 회개하고 복음을 믿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회개한 사람인 줄로 믿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회개하지 않은 사람이 있다면 하나님이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마가복음 1장 15절에 “가라사대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예수께서 우리 죗값을 치르시고 십자가에서 피 흘리심으로 죗값을 값으셨다는 것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인간이 가진 모든 방법은 불 심판의 날에 아무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오직 회개와 믿음만이 불 심판을 준비하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회개하고 예수를 믿는 사람만이 구원받은 사람입니다. 그 사람만이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사람입니다.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닙니다. 다 예수 믿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택한 사람이 예수 믿고 회개하는 것입니다. 은혜로 믿고, 은혜로 회개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구원받은 사람에게는 여호와의 날은 심판의 날이 아닙니다. 여호와의 날은 구원의 날, 기쁨의 날이 되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날은 죄악이 가득찬 이 세상이 불로 정화되고, 불로 모두 타버리고 새 하늘과 새 땅이 오는 날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최후 심판의 날에 예수님이 재림하셔서 심판하시는 그날에 죽은 사람은 모두 부활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에 살아있는 사람들은 죽지 않는 몸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죽지 않는 몸으로 변화되어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영생하는 몸을 입고 영원히 살게될 것입니다. 이것이 진리이고, 복음입니다. 베드로후서 3장 12절로 13절에서 말합니다.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의 거하는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새 하늘과 새 땅에는 살인자도 없습니다. 사기꾼도 없습니다. 그 땅에는 의가 거합니다. 어떤 사람은 지상 천년왕국이 온다고 했는데 저는 지상 천년왕국을 성경에서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베드로처럼 의에 거하는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볼 뿐입니다. 지금 이 세상에 땅을 아무리 많이 등기하고 있어도 별 볼일 없습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이 올 때에 차지하시기 바랍니다. 지금 많이 차지한 것을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바꾸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고 살면서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합니까?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사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날을 바라보는 사람, 간절히 사모하는 사람은 죄 짓지 마시고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과 매일 동행하며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