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경애-축구전(蹴球戰)
-분야: 어문 > 소설 > 중·단편소설
-저작자: 강경애
-원문 제공: 한국저작권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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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렴풋이 잠들었던 승호는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나며,이젠 시간이 되지 않았나? 하고 문을 열고 내다보았다.
그리 번화하던 이 거리도 어느덧 고요하고, 전등불만이 가로수 사이로 두어 줄의 긴 빛을 던지고 있었다. 그는 눈을 두어 번 부비고 나서 밖으로 뛰어 나왔다.
한참이나 나오던 그는 싸늘한 볼을 어루만지며 자기 머리에 모자가 없음을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그래서 곧 돌아와서 모자를 눌러 쓰고 총총이 걸었다.
그가 목적지인 S공원까지 왔을 때, 하늘을 찌를 듯이 올라간 백양나무 숲을 바라보면서, 희숙이가 와서 기다린 지가 오래지나 않았나 하는 불안과 어떤 감격으로 발길이 허둥허둥해졌다. 그러나 그가 S공원 안으로 들어와서 정자까지 왔을때, 희숙이가 아직 안 와있으므로 다행하면서도 섭섭하였다.
그는 정자 난간에 비껴 앉아 어디로부터 희숙이가 나타날지 몰라 두리번두리번 살펴보았다. 그리고 누가 이 공원에 놀러 나오지 않았나 하는 불안도 일어났다.
마침 싸늘한 바람이 소르르 정자 안으로 밀려 들어오며 나무잎을 데구르르 굴린다. 그는 왠일인지 소름이 오싹끼치며 무시무시한 생각까지 든다.
벌써 이곳은 완전한 가을이었다. 내지 같으면 아직도 홑옷을 입을 터인데 두툼한 고꾸라 양복을 입었는데도 이렇게 온몸이 싸늘하게 얼어 들어온다. 그는 팔짱을 끼며, 아직 시간이 멀었는가 어째 안 와 하고 무심히 손목을 굽어볼 때,일 년 전에 전당포에 들어간 시계 생각이 문득 났다.
일 년 전 바로 이때,학교에 검거가 일어났을 때 다수한 그의 동무들이 영사관으로 잡혀 들어가게 되었다. 그런데 날은 추워오고,그들이 홑옷을 입고 들어갔으니 어떻게서라도 솜옷을 만들려고 두루 애쓰다가,마침내 동무들에게서 약간 얻은 돈과 시계를 잡히어 솜옷을 지어 차입해 주었던 것이다.
그는 이러한 생각을 하며 지금까지도 나오지 못한 동무들을 생각하였다. 그 어두운 감옥에서,지금쯤은 잠을 자고 있을까? 혹은 우리들을 생각하며 그나마 잠도 이루지 못하고 있을 것인가? 하는 생각과 함께 무어라고 형용 못할 불길이 가슴이 벅차도록 올라온다.
그는 한숨을 푹 쉬며 무심히 정자 아래를 굽어보았다. 정자 아래로 깔린 연못에는 달빛이 떨어져 유리알같이 빛났다. 그는 나오는 줄 모르게「달밤이구나 !」하며 머리를 들었다.
어두컴컴한 수림 속으로 약간씩 보이는 저 전등불은 마치 그의 문우들이 이 Y시에 섞여 있는 듯이 그렇게 드물었다. 그러나 저 불이 마침내 이 공원을 정복할 때가 멀지 않은 것 같았다. 어째 안올까 하고 그는 가만히 일어나 정자 안을 거닐었다.
멀리 이십오세(마차 이름)가 지나는 말굽소리가 툭탁툭탁 들리며 지르릉지르릉 울리는 종소리가 끊어진 후에,자박자박 신발소리가 나므로 승호는 얼핏 몸을 숨기며 바라보았다. 저편 수림 속으로 아장아장 걸어오는 사람은 확실히 희숙인 듯하였다. 그는 맘을 놓고 앞으로 나갔다.
희숙이는 멈칫 섰다가 승호의 기침소리를 듣고야 이편으로 걸어왔다.
『기다리셨지요.』
『네.』
곁으로 오는 희숙의 가는 숨결소리를 들으며 승호는 맘이 푹 놓였다. 그들은 가즈런히 난간에 걸터앉았다.
『동무를 나오라고 한 것은…….』
희숙이는 머리를 번쩍 들며 승호를 똑똑히 바라본다.
『이번 ××회 주최로 열리는 축구대회에 우리 학교도 참가하는 것이 좋을듯한데 동무의 의견은 어떠합니까.』
희숙이는 잠잠히 무엇을 생각하는 듯하더니
『동무! 표면만이 ××회 주최이지 그 실은 이 Y시 안의 온갖 ×들이 주최하는 것입니다.』
승호는 말끝을 얼른 받았다.
『네 잘 압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그들 틈에 섞여서 뛰는다더라도 과오만 범치않으면 됩니다. 그런데 특히 이번에 나가야 할 필요를 말하겠읍니다. …… 우리 학교가 작년 검거 사건 이래 너무나 죽은 듯한 감이 있었읍니다. 그래서 이번 출전하는 것은 하필 승리를 거두어 보겠다는 것보다도 우리들의 꺾이지 않은 존재를 대중에게 알리어 주고자 함이외다!』
승호는 기침을 칵 하였다. 그리고 계속하였다.
『지금과 같은 반동기에 있어서는 지배계급의 적극적 탄압에 대중이 낙망을 하고 비관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의 활동이 어느 면으로나 더욱 게으르지 않아야 합니다.』
희숙이는 작년 이때 검거가 일어났을 때 동무들을 숨겨 주노라 밤중에 돌아 다니던 기억이 얼핏 떠오르며 그때에 몹시도 얄밉던 저 달이 또 솟았구나! 하고 흘끔 쳐다보았다. 그리고 웬일인지 주위가 그날밤 같아 휘휘 돌아보았다.
『출전하려면 다소의 경비가 들 터인데 그것은 어떻게 할 예정입니까.』
『글쎄요…… 그것이 난처합니다. 뻔히 아는 바라, 학교에서 날 곳은 없고…… 아무래도 동무들이 힘써야지요…… 우선 우리들은 이렇게 생각해 보았읍니다. 우리 동무들 몇몇은 지금 길회선 철도공사 인부로 들어가서 몇 일 일하기루요!』
희숙이는 어떤 감격으로 조그만 가슴이 터질 듯하였다. 그리고 우리들이 돈 벌것은 없을까 하고 이리저리 생각하다가
『우리들도 좀 어떻게 했으면 좋겠는데요.』
『글쎄요. 저…… 이것 해 보시렵니까. 이번 축구 대회가 열리는 동시에 경마 대회까지 열린답니다. 축구장서 바라보이는 바로 정거장 앞벌입니다.』
『네.』
희숙이는 무슨 좋은 벌이자리가 나는가 하여 바짝 곁으로 온다.
『그런데 그곳서 임시 여급을 채용하겠다고 거리에다 광고를 붙쳤드구만요. 혹 동무도 보았는지요?』
희숙의 머리에는 경마장이 얼핏 떠오르며 부끄러운 생각이 눈가로 사르르 지나치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남동무들이 길회선 철도공사 인부로 나가겠다든 승호의 말을 다시금 생각하였을 때 오냐 무엇인들 못할 것이 뭐냐! 하고 맘을 푹 가라앉히며 승호를 쳐다보았다.
『똑똑히 보셨나요…… 참이라면 우리들은 그곳에 운동해 보겠읍니다! 대체 여급이란 뭘 어떻게 하는 것인지요? 호호』
이제 자기들이 그 사람 많은 곳에서 여급으로 행세할 것이 우습기도 하고 어찌 생각하면 눈물겨운 장면 같았다.
승호는 희숙의 손이라도 콱 붙들고 싶게 고맙고도 다정해 보였다. 그리고 그의 몸 전체에서 발산하는 냄새는 확실히 이성을 초월한 동지로서의 믿음직한 냄새였다.
『별 게 있겠읍니까. 그저 차물이나 부어놓고 혹은 그곳에 오는 손님들에게 길안내 같은 것을 하겠지요…… 그러면 내일 학우회에서 출전여하 문제는 정식으로 결정합시다.』
승호는 말을 마치며 가만히 일어났다. 양어깨가 딱벌어진 승호를 쳐다보는 희숙이는 새삼스럽게 그의 담력이 뚜렷이 보이는 듯했다.
『몇 시나 되었을까.』
이렇게 혼자하는 말처럼 중얼거리며 희숙이도 따라 일어났다.
『아마 퍽이나 오래 되었으리다.』
그들은 정자 안을 벗어나 나무 그늘로 들어갔다.
× × ×
몇 일 후 희숙이와 그의 동무들은 드디어 경마장의 임시 여급으로 채용이 되어 경마장 우편「바락크」속에서 경마권증을 팔며 혹은 사람들에게 차물을 날랐다.
용기를 내어 여기에 들어는 왔으나 차완을 들고 손님들 앞에 서게 될 때는 차마 얼굴을 들지 못하리만큼 두 볼이 화끈거렸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자기들에게만 집중된 듯하였다. 그러나 좀 안심되는 것은 이「바락크」가 사면이 꼭꼭 막혀서 경마장은 보이지 아니함이었다. 그러므로 이 안에 들어오는 손님들만 대할 뿐이다.
날씨가 이 북국에서는 얻기 어려운 따뜻한 날씨였다. 밖으로부터 약간의 말 똥내를 섞은 먼지가 사람들의 발길에 채어 후끈후끈 들어온다. 그리고 얼마나 사람들이 모였는지 여러 사람의 말소리가 한 뭉치가 되어 와와 하고 떠들었다. 그 틈으로 어린애 울음소리만은 버들피리 부는 것 같았다.
벨이 즈릉즈릉 운다. 경마권 파는 입구에는 사람들이 들이몰리어 제각기 표를 사려고 덤볐다.
희숙이와 그의 동무들은 차완을 들고 이리 가고 저리 가면서도 맘만은 축구장으로 쉴새없이 달아났다. 이젠 운동이 시작되었나? 우리 선수들이 어느 학교 팀과 시합이 되었나 혹은 되지 않았나 벌써 꼴을 먹지 않았나? 하는 불안과 초조로 발길이 허둥거렸다.
밖에서는 사람들이 뛰어가고 뛰어오는 소리가 요란스레 난다. 그때마다 그들은 저 소리가 선수들이 볼을 다 놓쳐 뛰어오는 신발소리 같다. 가슴이 선뜻해서 한참이나 멍하니「바락크」벽을 바라보곤 하였다.
그리고 낯선 손님이 들어오면 웬일인지 반가왔다. 막연하게나마 축구장을 거쳐오지 않았는가 그래서 그가 축구장에 대한 말을 하지 않는가 하여 한참이나 그들을 주시해 보곤 하였다. 그러나 그 많은 사람이 들어오고 나가고 하건만은 축구장의 이야기는 한 마디도 꺼내지 않았다.
경마권 파는 입구에는 벌써 지화가 들이몰리어 사무원이 미처 손놀리기가 바쁜 모양이다. 그들은 저 지화를 바라보며 이때까지 느껴 보지 못한 어떤 욕심을 부쩍 느꼈다. 저것을 가지면 선수들이 신고 싶어하는 축구화도 살 수 있고 쌀밥도 해서 배가 부르도록 먹일 터인데 그러면 이번에는 꼭 승리를 할 터이지 하며 아침에 조밥을 먹고 출전한 동무들의 그 모양이 애처롭게 떠오른다. 글쎄 조밥을 먹고야 어찌 이긴담 ! 그 해어진「지까다비」를 신고야 어찌 볼을 찬담 !
방금 동무들의 발끝에 채어 돌아가는 볼은 축구화를 신은 적에게 무참히도 빼앗기어 기가 말라 쫓아가는 동무들의 모양이 뚜렷이 보인다. 그들은 가슴이 송구해졌다. 그래서 다시 한번 돈뭉치를 들고 달아나고 싶었다. 그러나 그것은 쓸데없는 맘뿐임을 깨달으며 가볍게 한숨을 몰아쉬었다.
벨이 또다시 운다. 경기장에서는 말발굽소리와 함께 사람들의 환호소리가 우뢰같이 일어난다. 그들은 이 소리가 저편 축구장에서 오는 동무들의 힘찬 응원소리 같아서 기운이 버쩍 나는 것을 등허리에서 땀이 나도록 느꼈다.
『아이 어쩌면!』
동무 하나가 거의 울 듯이 중얼거린다. 그들은 일시에 시선을 마주치고 헤어졌다. 그들의 눈에는 어느덧 눈물이 글썽글썽했다.
이호다! 아호다! 외치는 소리를 따라 발자취 소리가 벼락치듯 난다. 그리고 이십 원! 이십 원 배당! 하고 목이 말라 고함치는 소리가 이「바락크」를 잡아 흔드는 것 같았다. 저편 배당구에서는 십 원짜리 지화가 훨훨 내달아 간다. 그들은 물끄러미 이 모양을 바라보며 증오의 불길이 확 일어남을 느꼈다.
오늘 저 축구장에는 세상이 다 죽은 것으로 알았던 자기들의 동무가 씩씩한 웅자로 나타나서 맘껏 볼을 차는데, 그 볼은 이 Y시 하늘 위에 까맣게 높이 떴을 터인데 그 축구장을 지나쳐 저들! 그 볼을 무심히 바라본 저들 ! 아아 저들은 과연 자기들과는 딴 인종 같았다. 아니 딴 인종이다!
이렇게 가슴을 조리며 하루의 사무를 지루하게 마친 그들은 축구장으로 달렸다.
마침 어떤 부인이 마주 오는 것을 보자, 그들은 그 새가 바빠서
『D학교가 어떻게 되었읍니까 ?』
부인은 그들을 한참이나 돌아보다가
『졌소꼬마! 볼을 잘 차드구만도 왜 퍽퍽 꺼꾸러지기를 잘 해. 아마 먹지를 잘 못했는지? 아이 그거야 애처러워서 어디 보겠드라구…… 저편 선수들은 무엇을 잘 먹이는 모양이두먼. 그냥 운동장에서까지 뭘 자꾸 먹이두먼 그래. 그런데 이편은 냉수만 들이키어 아이 볼 수 없어. 다리를 채어 피가 흐르고 한 학생은 골이 터져서……』
부인은 눈알을 찌푸리며 머리를 설든다. 그리고 눈에는 눈물이 그득 고인다.
그들은 졌다는 말에 그만 온전신이 하사 분해서 다시 두말도 못하고 멍하니 서 있었다.
『학교에 아마 친척이 다니나 보우……나는 친척도 아무것도 다니는 것 없으나……』
말끝을 흐리며 머리를 돌리는 부인의 눈에는 선수들의 피나는 다리와 골머리가 확실히 보이는 모양이다.
『어서 가 보우. 그리고 위로나 잘 해 주우』
그들은 울음이 북받쳐 어쩔 줄을 모르다가 부인이 앞을 떠나감을 알았을 때 휘끈 돌아보니 아주 남루한 옷을 입은 부인임을 새삼스럽게 발견하였다.
그들은 순간에 어떤 힘을 불쑥 느끼며 축구장으로 달려왔다. 벌써 동무들은 행렬을 지어 한끝은 시가로 향하였다. 행진곡이 쾅쾅 울린다. 얼핏 바라보니 승호가 깃발을 쥐고 앞장섰다. 행진! 그 뒤로는 군중이 물밀듯 따라섰다. 마저 넘어가는 햇볕에 D학교의 깃발은 피같이 붉었다.
<재편집: 오솔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