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솔직히 나도 젊었을 때는 욕 좀 하고 살았다. 같잖은 상황에 맞부딪칠 때마다 논리적·이성적 판단에 앞서 욕부터 튀어나왔다. 그때는 내 주변 친구들도 거의 나만큼 욕을 잘했다. 우리가 특히 성정이 포악해서 그랬던 것은 아닐 것이다. 수양이 좀 부족했을 수는 있지만 그보다는 젊은 객기에서 “거친 것이 사내답다”는 착각이 작용했을 것이다.
물론 지금은 거의 욕을 하지 않는다. 주변에서 ‘점잖은 사람’이라는 평을 받을 정도다. 내가 한때 욕 잘했었다는 것을 잘 아는 친구들·동료들도 지금은 그 사실을 거의 잊어 먹었다. 자기들도 지금은 욕을 하지 않는다.
결국 세월이 해결해 준 것이 아닌가 싶다. 나이를 먹는 동안 음으로 양으로 수양이 쌓이기도 했을 것이고, 욕으로는 상황을 악화시킬 뿐이지 아무것도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여러 번 경험으로 눈치챘기 때문일 것이다. 늙어서도 함부로 욕을 내뱉는 사람들이 있다면 더 이상 사내답기는커녕, 세상에 못난 찌질이 영감으로 보일 뿐이다.
청춘이니까 용서되는 것, 노인이니까 눈살 찌푸려지는 것
#2.
나는 나이 70이 넘으면 내 피선거권을 두고 더 이상 고민하지 않을 것이며 75세가 되면 선거권도 행사하지 않겠다는 나만의 결심을 아주 오래전에 했다. 잘해야 10년, 더 잘하면 20년을 살 나의 결정보다는 40년, 50년을 더 살 청년들의 미래의 선택에 가중치를 줘야 한다는 깨달음에서다.
나이가 들면 내 판단이 흐려질 수도 있다는 두려움 때문이기도 하다.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우리나라 65세 이상 노인 중 치매환자가 8.4%로 42만 명에 이르고 치매 위험이 높은 경도인지장애는 4명 중에 1명 꼴이다. 치매와 증상이 비슷한 알츠하이머의 경우 90세 노인의 20%가 중증환자라는 미국의 한 연구보고서도 있다.
나도 내 의지와 상관없이 언젠가는 군복차림에 가스통을 들고 서울광장에 나설 확률이 꽤 높다는 얘기다. 이런 불안감은 최근 영포대군, 방통대군 등이 자초한 망신살로 인해 엄청난 두려움으로 굳혀졌다.
이번 총선에 민주통합당 후보로 출마한 김용민이 젊었을 때 막말을 좀 했다 해서 논란을 빚고 있다. 하나는 부시와 라이스, 럼스펠트 등 전쟁광들을 좀 어떻게 해 보자는 이야기 중에, 또 하나는 서울광장에 출몰하는 노인들을 좀 어떻게 해 보자는 이야기 끝에 나온 장광설인데 내 생각으로도 좀 심한 비유를 구사하기는 했다. 하지만 이를 두고 그가 자진사퇴해야 한다느니, 민주당이 사퇴시켜야 한다느니, 민주진보진영까지 나서서 아우성치는 건 좀 정상을 벗어난 것이 아닌가 싶다.
늘 반복되는 패턴…진보진영의 한 술 더 뜨기
도대체 과거의 막말 때문에 지금의 김용민이 국정을 맡을 자격이 없다는 논리가 어떻게 성립될 수 있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그때 김용민의 나이 20대 후반 혹은 30대 초반이었다. 그렇다고 부시는 물론 클린턴까지도 아직 철이 덜 들었을 때 마약을 했었다는 에피소드를 들먹이거나, “젊었을 때 막말 한번 해 보지 않은 자, 김용민에게 돌을 던지라”는 김형오식 논법으로 그를 변호하려는 것이 아니다.
‘말’뿐 아니라 ‘행동’으로 온갖 여성비하를 자행해 온 수많은 새누리당 의원들과 후보들을 일일이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물타기’를 시도할 의도도 전혀 없다. 다만, 강조하고 싶은 것은 우리는 누구나, 그것이 진보가 됐든 퇴보가 됐든, 변화하는 인간이라는 것이다.
8년 전 그때 김용민은 누구나 인정하는 실력과 진보에의 열정에도 불구하고 보잘것없는 학벌 때문에 어떤 주류방송으로부터도 외면당한 채 고작 인터넷 성인방송에 게스트로 출연하고 있었다. 차츰 실력을 인정받아 주류방송에서도 시사프로그램 진행을 맡을 정도로 성장했으나 그가 결정적으로 주목을 받게 된 것은 <나는 꼼수다>를 통해서였다.
그는 <나꼼수>에서도 ‘씨바’, ‘조까지 마’ 등등의 용어를 거리낌 없이 구사하고 있다. 솔직히 나는 <나꼼수>에서 ‘씨바’며 ‘조까지 마’ 등의 소리를 들을 때마다 불쾌하다기보다는 머리칼이 쭈뼛 설 정도로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편이다. 내가 그런 소리들을 욕설이 아닌 일종의 ‘추임새’로 받아들이는 것이, 별 악의없이 욕을 입에 달고 살았던 내 젊은 날의 추억 때문인지, 지금도 가끔씩 후련하게 욕 좀 하고 싶은 잠재의식의 발로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김용민이 주류방송에서도 막말을 했거나 ‘조까지 마’를 남발했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 방송의 제작방식과 전달형식, 목표로 삼는 청취자의 성향이 다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다시 한 번 더 솔직해지자면, 내가 만일 그때 그 인터넷방송을 들었더라면 그때도 역시 카타르시스를 느끼며 킬킬 웃었을 것이 분명하다. 김용민에게 상황을 살피고 자리를 가리는 능력이 있다면 내게도 주류방송을 들을 때의 자세, 인터넷방송을 들을 때의 자세를 달리 할 만한 능력이 있는 것이다.
진화하는 김용민의 균형감각, 과거에서 미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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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월 6일자 경향신문 6면 |
그럼에도 지금 ‘김용민 사퇴’ 운운이 들끓고 있는 것은 또다시 ‘조중동 프레임’이 작동했기 때문이다. 국기를 뒤흔들만한 불법사찰사건에는 이리 빼고 저리 빼던 <조중동>이 “옳지 잘 걸렸다”며 사태를 확산시키자 진보진영의 도덕성 콤플렉스가 뒤늦게 작동한 것이다. 그리고는 김용민을 변호하는 쪽을 ‘진영논리’에 함몰된 것이라고 비판한다. 하지만 정작 ‘진영논리’에 빠진 것은 경향 한겨레, 진보진영의 일부 도덕군자들인 듯하다. 그들의 논지에는 선거국면에서 전체 야당진영에 불리하니 사퇴하라는 안타까움이 절절히 배어 나온다.
참으로 유권자 의식 수준을 우습게 보는 것이다. 겉으로는 아니라고 손사래 치면서도 속으로는 아직도 <조중동>의 위세에 두려움을 느끼고 있다는 증거다. “부시와 라이스를 죽이기 위해 연쇄살인범을 파견하자”거나 “시청역에 엘리베이터를 없애고 4층 계단을 만들자”는 등 8년 전 인터넷 성인방송에서의 진한 농담을 ‘여성모독’ ‘노인폄훼’를 뜻하는 진담으로 받아들이자고 부르짖는 부류가 <조중동>과 그 일당 말고 또 누가 있을까.
“그러자”고 맞장구치는 이들은 오래전에 이명박을 찍었고 이번에도 새누리당을 찍겠다고 이미 작정한 사람들이라는 것이 내 확신이다. 설사 그렇지 않더라도 이번 사안을 놓고 선거에서의 유불리를 따지는 쪽으로 논의가 흘러가는 건 옳지 않다. 이 정도 사안을 놓고 사퇴를 강요하는 것이 옳은가, 그른가로 가야 하며 그 결론은 사퇴는 안 된다는 것이어야 마땅하다.
젊었을 때의 표현의 미숙함은 사과와 자숙으로 족하다. 사실 김용민은 지금 사퇴를 할 것이 아니라 차라리 처음부터 출마를 하지 말았어야 한다. 그 선거구에는 웬만한 인물 누가 나가도 이길 수 있으니, 김용민은 애초 <나꼼수>를 잘 만드는 것이 국회의원 하는 것보다 훨씬 중요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선거에서 이기는 것이 훨씬 중요한 일이 되어 버렸다.
“쫄지마! 김용민, 씨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