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물관에 갈 불체포특권 누가 살렸나
진보진영 “역사가 심판할 것” 법정투쟁
野, 개인비리 의혹 방탄막은 시대착오적
권위주의 정권 시절 민주화 인사들이 공유하던 법정 투쟁기가 있었다. 1957년 쿠바의 바티스타 독재정권을 타도하기 위해 몬카다 병영을 습격했다가 실패한 피델 카스트로의 최후 변론이다. 징역 15년형을 선고받은 카스트로는 최후 변론에서 “나를 비난해라. 그것은 중요한 게 아니다. 역사가 나를 무죄로 하리라”라고 외쳤다. 하지만 2년 뒤 카스트로는 쿠바 공산혁명에 성공, 정권을 장악했다.
이처럼 법정 투쟁은 민주화를 위한 정치 투쟁의 연장선으로 간주됐다. 법정은 한가롭게 법리 다툼을 벌이는 곳이 아니라 거악(巨惡) 정권의 비리를 폭로하는 또 다른 전장이었다. 민주화 세력이 정권과 맞설수록 선명한 선악(善惡) 대결구도가 부각됐다. 과거 민주화운동 인사들은 법정에서 “당신들은 우리를 심판할 자격이 없다”고 거침없이 외쳤다.
법정에서 발신되는 메시지는 흔들리고 동요하는 지지자들을 묶어세우는 든든한 버팀목이나 다름없었다. 지금은 힘들어도 버티면 끝내 승리한다는 믿음이 절실했다. 특히 민주진보 진영에서 사법적 결정과 정치적 메시지가 엇박자가 자주 나는 이유다.
친노 진영의 대모(代母)인 한명숙 전 국무총리가 2015년 8월 대법원에서 불법 정치자금 수수 혐의로 유죄 확정 판결을 받은 지 7년이 지났다. 징역 2년 만기 출소를 한 뒤로도 결백을 주장하면서 7억 원 넘는 추징금 납부를 거부해왔다. 한 전 총리는 자서전 ‘한명숙의 진실’을 출간해 자신의 결백을 굽히지 않고 있다. 최근 사면을 받은 김경수 전 경남지사도 드루킹 댓글조작 사건으로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 민주당이 수사 의뢰를 한 사건이고, 문재인 전 대통령이 임명한 특검이 기소한 사건이었다. 그런데도 친문 적자인 김 전 지사가 출소하는 날 ‘김경수는 무죄다’라는 손팻말이 곳곳에 등장했다.
개인적으로 억울할지 몰라도 두 사람은 최종심에서 모두 유죄 확정을 받았다. 특히 한 전 총리의 경우 대법관 13명이 만장일치로 유죄 선고를 했다. 새로운 물증을 제시해 재심을 하지 않는 한 이 결정을 뒤집긴 어려운 상황이다. 결국 지지자들을 향해 사법적 결정을 믿지 말고 나를 믿으라는 정치적 메시지를 띄운 것이다.
그러나 시대는 이미 바뀌었다. 민주화가 된 지 벌써 30년이 지났고, 그동안 보수-진보 세력의 정권교체도 이뤄졌다. 극소수 강경파는 몰라도 대다수 국민들은 사법 절차를 지키려 한다. 그런데도 사법적 결정을 나 몰라라 하거나 의도적으로 폄훼한다면 시대 흐름을 한참이나 역행하는 것이다. 민주화운동 이력이 정치적 보호막이 될 수 있다는 착각이 아닐 수 없다.
28일 더불어민주당 노웅래 의원의 체포동의안이 민주당 의원들의 반대로 부결됐다. 21대 국회에서 상정된 3건의 체포동의안은 모두 가결됐는데 이 흐름을 뒤집은 것이다. 국회의원의 회기 중 불체포특권은 민주화 이후 개인비리 수사를 막는 방탄막으로 남용돼온 것이 사실이었다. 여야 모두 따가운 민심을 의식할 수밖에 없었다. 헌법에 명시된 불체포특권이 사실상 사문화(死文化)의 길로 가고 있는데 노웅래 사태가 발목을 잡아버린 것이다.
검찰의 지나친 신상 털기라고 주장하지만 노 의원의 개인비리 혐의가 짙은 정황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이재명 대표의 검찰 소환이 초읽기에 들어간 상황에서 국민들은 이번 사건을 냉철히 판단할 것이다. 행여 해묵은 민주진보 진영의 옛 법정 투쟁을 떠올릴 생각은 말라. 그런 시대는 이미 지났다.
정연욱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