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다시) 오즈를 만나셔야 합니다
<오차즈케의 맛>
불세출의 작가를 만나는 데 가장 큰 장벽은 그에 대한 전문가의 연구가 너무 많고, 잘 알려져 있다는 것이다. 거의 대부분의 사람이 오즈 야스지로의 영화보다 그의 작품에 대한 평가를 먼저 접하게 된다. 요컨대 오즈 야스지로는 교과서에서 먼저 만나는 인물이다. 전후 일본의 풍속, 노년의 고독과 세대의 단절, 내러티브와 형식의 충돌과 교합, 그리고 다다미숏(일본 가옥의 다다미에 앉아 있을 때 사람의 눈높이에 카메라를 두는, 오즈 야스지로 특유의 촬영 기법)과 필로숏(시퀀스의 끝이나 시작에 사물이나 풍경을 담은 인서트 장면을 삽입하는 기법)….
심지어 오즈 야스지로와 그의 촬영은 영화학도가 아닌 이에게도 교양의 범주에 들어가서, 취업 준비생들이 암기하는 시사상식 책에는 그의 이름과 ‘다다미숏’에 대한 서술이 실려 있다. 때문에 모두가 오즈 야스지로를 알지만 그의 영화를 보는 일은 무겁고 어려운 숙제처럼 받아들이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주변 사람들에게 “영화를 많이 좋아한다”는 말을 듣는 이들은 물론 심지어 영화 전공자 중에서도 70년대 이전 고전영화, 특히 흑백영화나 무성영화를 보는 일에 부담을 느끼는 것은 이런 세태와 무관하지 않다.
영향과 영감은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이미 오즈를 만난 적이 있는 관객에게도 그의 영화는 이따금 당혹스러울 수 있다. 일반 대중에게 영화에 대한 이해가 중심 스토리를 파악하는 것을 의미한다면, 오즈 야스지로의 작품들은 전혀 어렵지 않다. 전통적인 일본 가옥을 무대로 삼아 결혼, 취직, 학교에 대해 고민하는 이야기가 조금씩 변주될 뿐이다. 어떤 드라마틱한 요소도 없는 내러티브가 품은 거창한 시대적 함의를 고민할 즈음 스크린 속 배우들은 입력값대로 출력하는 로봇처럼 대화한다. 게다가 비혼·비출산을 고민하는 시대에 젊은 여자가 초로의 아버지를 홀로 두고 결혼할 수 없다고 갈등하고(<만춘>), 중년 남자들이 술집에 모여 딸과 과부 엄마의 남편감을 물색하는 풍경(<가을 햇살>)을 봐야 한다는 게 미심쩍다. 분명 영화사에 남을 시네아스트의 작품인데? 인터넷에서 오즈 야스지로에 대해 다시 검색한다. “다다미숏과 필로숏….”
오즈 야스지로와의 조우는 다시 시작되어야 한다. 공부의 대상으로만 박제된 오즈는 실제보다 진입장벽을 높이고 각자의 오즈를 그릴 수 없게 만든다. 주체적인 해석을 가리고 단순 플롯 너머에 있는 영화의 구조에 감응하기 어렵게 만든다. 어떤 클래식보다 오즈의 영화는 형식에 관한 관객의 능동적인 사고와 감상을 견인하기 좋은 영화다. 동양의 가족 문화는 우리에게 상대적으로 가깝고, 난해한 내러티브로 보는 이의 관람 의지를 꺾는 일도 거의 없으며, 반복의 유머와 건강한 휴머니즘은 심적 거리를 마법처럼 무너뜨린다. 고도로 양식화되어 있기에 그만의 특성을 직관적으로 구획화할 수 있고, 법칙으로부터 탈주하는 순간은 쉽게 감지된다.
우리네 일상을 재료 삼은 예술이야말로 마틴 스코시즈가 발화하고 봉준호 감독에게 가르침이 된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의적인 것”의 현현 아닌가. 어떤 영화적 상징과도 무관해 보이는 안부 인사를 공들여 반복하며 형식을 고민하는 게 오즈의 영화다. 더군다나 오즈 야스지로는 지금, 현재의 영화와 그에 영감을 준 70~80년대 영화를 관통하는 원전이다.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은 20여년 전 미국영화구소(AFI)와 했던 인터뷰에서 고전영화를 보아야 하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했다. “70년대 영화광 세대의 영화만 공부하면 그건 얄팍한 복제품을 통해 배우는 것밖에 안된다. 왜냐하면 우리 영화광 세대는 40년대, 50년대, 30년대의 거장들에게서 배웠다. 그리고 40, 50년대 분들은 분명히 또 그전의 무성영화 시기의 거장들에게서 배웠을 것이다. 그렇게 영향과 영감은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전해져오는 것이다.”
<안녕하세요>
넷플릭스, 왓챠, 웨이브에서는 오즈 야스지로의 영화를 볼 수 없다. 코로나19 이후 극장이 아닌 OTT가 영화 관람의 표준이 되는 날이 올 수 있지 않겠느냐는 분석이 새삼스럽지 않은 시대, 유튜브 요약본을 보고 영화를 봤다고 생각하거나 1.5배속 재생을 주저하지 않는 세대도 등장했다. 때문에 직접 보기까지 일정 수준 결심이 필요하고 사소한 일상이 시적 초월성으로 승화되는 순간을 느긋하게 기다리게 되는 오즈의 영화는 예술이 주는 잊혀져가는 유희다. 영화가 단지 내러티브를 실어 옮기는 매체가 아니라는 것을, 시네마틱한 순간의 의미를 오즈보다 쉽게 알려주는 고전은 없다.
영화평론가 도널드 리치는 “카메라를 다다미 높이에 위치시키는 이유는 깊이감을 없애고 2차원적 공간을 창출해내기 위해서”라고 했다. 그게 전부일까? 180도 법칙을 깨는 촬영 방식이나 카메라를 정면으로 보지만 시선은 미세하게 어긋나 있는 배우들의 눈은 어떤 영화적 효과를 만드는가? <안녕하세요>의 어린이들은 어떻게 관객을 웃음 짓게 만드는가? 지금 세대의 감독과 연결 고리를 만드는 통시적 해석, 가령 <꽁치의 맛>에서 노년의 아버지로부터 분리돼 2층에 마련된 딸의 공간을 한국영화 <남매의 여름밤>과 연결 지을 수 있을까? <만춘>의 부녀가 리메이크작 <가을 햇살>에서 모녀가 된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교과서에서 말하는 작가론을 의식하지 않거나 혹은 일부러 먼저 읽지 않은 상태로 작품을 감상하며 자신만의 답을 만들다보면 앞으로 다른 영화를 만날 때도 낯선 감각이 발동하기 시작할 것이다.
더불어 비슷한 내러티브와 형식을 변주하면서 자신만의 고집스런 스타일을 구축한 형식주의자의 궤적은 스크린 밖에서도 ‘뚝심의 기적’을 예찬하게 한다. 심지어 스톱워치까지 동원해 촬영시간을 엄수했던 감독이라고 하니 이는 근면의 예술이기도 하다. 이번 ‘오즈 야스지로 감독전: 오늘도, 안녕하세요’에서 상영되는 오즈 야스지로의 대표작(<만춘> <오차즈케의 맛> <동경 이야기> <안녕하세요> <가을 햇살> <꽁치의 맛>)을 지나 다른 작품을 하나씩 발견하다 보면, 특히 그 이전작들을 만날 때 오즈가 한때 품었던 역동성에 깜짝 놀라게 된다. 여자들의 혼기에 감놔라 배놔라 품평하는 아저씨들을 한껏 비웃는 가벼운 감상이라도, 뭐 어떤가. “오즈 감독은 배우의 살아 있는 역동성을 모두 박탈해버린다”고 비판하며 오즈의 조감독을 그만둔 왕년의 이마무라 쇼헤이처럼 세기의 클래식에 반기를 드는 그림도 지금보다 많아져야 한다. 성역화보다는 자유로운 발화가 대중의 고전 읽기에 활력을 불어넣는다.
누구나 그를 통해 새로운 것을 발견한다
공교롭게도 20세기 후반에 걸쳐 오즈 야스지로에 대한 평단의 반응은 역동적으로 변모해왔다. 오즈는 서구에서 구로사와 아키라와 미조구치 겐지보다 늦게 주목한 감독이다. 1956년 로스앤젤레스영화제에서 <동경 이야기>가 상영되고 도널드 리치가 그의 작가성을 주목한 이후 70년대 들어서야 <만춘>과 <동경 이야기>가 일반 관객에게 소개됐고 폴 슈레이더는 <성스러운 영화–오즈, 브레송, 드레이어>를 출간했다. 1983년 하스미 시게히코의 <감독 오즈 야스지로>는 그 이전까지 정형화된 ‘오즈다운 것’에 파열을 냈다. 그는 도널드 리치가 그의 작가적 특징을 ‘결여’(불변의 카메라앵글, 이동하지 않는 카메라, 영화적 구두법의 한정된 사용)로 본 것이나 폴 슈레이더의 부단의 자기 억제에 의해 스타일을 확보했다는 식의 도식적 분석은 그의 초기작을 건너뛰거나 미완성의 과정으로 치부할 수 있다고 꼬집었다.
이처럼 고전에 대한 감상은 자유롭게 확장되고 전이되고 진화해야 하고, 그것은 전문가의 위상을 빌리지 않은 관객에게도 유효해야 한다. 그렇게 근사한 예술 작품을 흡수하고 더 나아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야까지 전환되는 기분 좋은 경험이 시작된다. 오즈의 영화가 시대를 초월하는 클래식인 진짜 이유다. 글 임수연 2021-03-19
자료출처: 씨네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