洞庭湖
동정호(호남성의 岳陽과 益陽에 소재---동정호의 남서쪽 일대에 걸쳐 있는 이곳을 옛날에는 巴丘라 하였다. 즉 현재 호남성 岳陽 남쪽의 湘水 오른쪽 沿岸이 巴丘이다.)는 그 북쪽이 巫峽으로 통하고 남쪽은 瀟水와 湘水(瀟水---호남성에서 발원하여 湘江으로 흘러드는 강. 湘江---廣西省 興安縣에서 洞庭湖에 흘러드는 강. 瀟湘八景과 瀟湘斑竹 또는 瀟湘班竹으로 有名)까지 이르는 광활한 湖水로 삼국시대 오나라에서 水軍基地를 만들어 魏와 蜀에 對抗하였다고 한다.
악양에서 북동쪽으로 버스길 110킬로 되는 지점에 黃蓋(苦肉計를 쓰자고 周瑜에게 건의하고 시행한 東吳의 將帥)湖가 있는데 면적은 70평방킬로이고 鴨棚口라고 하는 작은 강으로 長江과 이어져 있다. 이 황개호에서 赤壁의 옛 싸움터까지는 水路로 겨우 7킬로이다.
岳陽樓는 巴丘에 있는데 武昌의 黃鶴樓, 南昌의 滕王閣과 나란히 중국 江南의 3대 有名 樓閣으로 손꼽히고 있다. 3층의 처마에 걸려 있는 岳陽樓라는 커다란 書體(1층에 걸려 있는 악양루라는 현판은 複製한 것이라 한다.)는 郭沫若의 글씨이다. 1층 정면에 걸려 있는 나무판에 새겨진 岳陽樓記 372字는 宋의 詩人 范仲淹의 名文이다. 내용 중에는 “先天下之憂而憂 後天下之樂而樂(천하의 슬픔은 앞장서서 슬퍼하고, 천하의 즐거움은 맨 나중에 즐긴다)”이라는 멋진 文句가 있으며, 이층에도 岳陽樓記가 걸려 있는데, 이것은 紫檀木板 12장에 새겨져 있으며 청나라 시대 서도의 대가인 張照의 힘찬 필치로서 그 새긴 솜씨도 훌륭하다. 삼층으로 된 누각 아래쪽에는 오나라 장군 魯肅(172∼217, 46세에 病死)이 水軍을 閱兵했다는 ‘點將臺’가 있다. 악양루 동쪽에 노숙의 廟院이 있는데, 정면에는 “威恩大行”이라는 네 글자가, 양쪽의 기둥에는 <扶帝蜀曹奸所見在筍彧上 侍吳親漢魏此心與武侯同---노숙은 손권을 보좌하여, 조조의 간계를 간파하고, 형세를 잘 꿰뚫어 보고, 적과 친구와 자신 등 세 사람의 관계를 솜씨 좋게 처리하여 그 견해는 순욱을 능가하고, 손권에게는 한나라 황실의 자손인 유비와의 친선을 권하여, 오 촉 동맹에 의해 위의 조조에게 대항하였으니 노숙의 정성스러운 그 마음은 武侯 諸葛孔明과 같다.>이라는 對聯이 노숙의 업적을 칭송하고 있다.
三大江 五大湖---長江, 黃河, 黑龍江. 鄱陽湖, 洞庭湖, 太湖, 洪澤湖, 靑海湖
삼국시대 오나라 周瑜가 수군을 調練한 곳은 鄱陽湖(一名 彭蠡澤)이다. 얼마 전까지 洞庭湖는 중국 최대의 淡水湖였고 파양호는 둘째였으나, 오늘날 동정호는 土砂의 流入되는 속도가 파양호(포양호)보다 빨라 순위가 바뀌었다.
王勃은 滕王閣序(이 冊 1605장 參照)에서 파양호를 描寫하기를 "落霞與孤鶩齊飛 秋水共長天一色(저녁놀은 짝 잃은 따오기와 나란히 떠있고, 가을 물은 높은 하늘과 한 색이다.)"이라 하고 있다.
單歌行[橫槊賦詩---曹操 作]
對酒當歌 술 대하여 노래하세
人生幾何 인생이 그 얼마냐
譬如朝露 비유하면 아침 이슬
去日苦多 지난날이 괴로워라
慨當以慷 슬프고 처량하다
憂思難忘 시름하여 못 잊겠네.
何以解憂 무엇으로 시름 푸나
唯有杜康 다만 이것 술이로다.
靑靑子衿 청청한 자네 옷깃
悠悠我心 유유한 내 마음
但爲君故 오직 그대 생각에
沈吟至今 침음하여 지금에 이르렀다
呦呦鹿鳴 애애하며 우는 사슴(呦-사슴 우는 소리 유)
食野之苹 들풀을 뜯는구나.
我有嘉賓 내게 오는 반가운 손님
鼓瑟吹笙 풍악으로 맞이한다.
皎皎如月 교교한 밝은 달은
何時可徹 어느 땐들 안 비추나
憂從中來 마음속에 오는 시름
不可斷絶 끊으려야 아니 되네
越陌度阡 천만리 떨어져도
枉用相存 마음만은 서로 있다
契闊談讌 오래 만에 잔치하여
心念舊恩 옛 정을 생각 한다
月明星稀 달 밝아 별 드문데
烏鵲南飛 까막까치 남으로 나네.
遶樹三匝 세 번 나무를 돌아보나
無枝可依 의지할 가지 없다
山不厭高 청산은(높으면 높을수록) 높은 것을 싫어않고
水不厭深 녹수는(깊으면 깊을수록) 깊은 것을 싫어않네
周公吐哺 주공은 吐哺하여
天下歸心 천하 인심 얻었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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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呦呦鹿鳴 食野之苹 我有嘉賓 鼓瑟吹笙"은 詩經 小雅 鹿鳴之什 中 '鹿鳴' 題下에 있는 詩句에서 引用한 것임.
吐哺---먹던 밥을 토함(즉 周公의 吐握之事를 말함)
吐握之事(吐哺握髮之事)---(吐哺)→周公은 當時 天下의 良賢이 찾아오면, 밥을 먹고 있을 때에는 그 밥알을 토하고, (握髮)→머리를 감고 있을 때에는 물 묻은 머리카락을 손으로 거머쥔 채 맞이하였다.(즉 자기를 찾아온 손을 기다리게 하지 않고 반갑게 바로 맞이하였음)는 데서 由來한 故事
曹操(155∼220)
三國時代 魏의 武帝, 걸출한 政治家이자 軍事 戰略家, 三國演義에서는 奸雄의 典型으로 描寫되었으나, 正史에서 조조는 중국 오천년 역사에서 한 사람으로서 나라에 貢獻한 前無後無의 영웅으로 대접받는다.
東漢末의 大臣 橋玄(109∼184)은 조조를 보고, "天下將亂 非命世之才不能濟 能安之者 其在君乎(천하가 장차 어지러워지니 일세에 뛰어난 재주가 아니면 능히 구제할 수 없다. 능히 그것을 평정할 자는 그대가 아니겠는가?)"라고 하였고, 南陽의 何顒(漢末의 大臣)은 조조가 젊었을 때 칭찬을 많이 하여 말하기를 "漢室將亡 安天下者 必此人也(한실이 장차 망하면 천하를 안정시킬 자는 반드시 이 사람이다.)"라고 하였으며, 觀相家인 汝南의 許韶(劭, 150∼195)는 조조가 찾아 와 "我何如人(나는 어떤 사람인가?)"하고 물으니 "子 治世之能臣 亂世之奸雄(그대는 치세의 능신이요 난세의 간웅이다.)"라고 하였는데 조조 자신도 이 評을 듣고 만족하게 여겼다고 전하며, 천년 이래 오늘날까지 조조에 대한 定評으로 여겨지고 있다. 蘇東坡도 赤壁賦에서 조조를 영웅으로 묘사하고 있다.
鄴中歌
杜甫
鄴則鄴城水漳水 업군 업 땅 물 이름은 漳水 (則은 郡임)
定有異人從此起 그 땅에 맞추어 異人이 일어났네.
雄謀韻事與文心 웅대한 지모 운치 있는 처사 큰마음 갖추어
君臣兄弟而父子 군신이며 형제요 부자 사이였다네
英雄未有俗胸中 영웅의 가슴 속 俗人과는 달라
出沒豈隨人眼底 출몰이 어찌 보통 사람의 눈에 보이랴?!
功首罪魁非兩人 공도 으뜸 죄도 괴수, 두 사람 아니고
遺臭遺芳本一身 遺臭遺芳(惡行과 善行)도 본래 한 몸이었다.
文章有神覇有氣 문장에도 능하고 패기도 있었으니
豈能苟爾化爲群 어찌 진실로 그대 여느 무리를 닮으리오.
橫流築臺距太行 흐르는 물 막고 臺 쌓아 태행산과 겨루고
氣與理勢相低昻 氣와 理 세력 따라 숙이기도 높이기도 했다
安有斯人不作逆 어찌 이사람 역적질을 않았으랴?!
小不爲覇大不王 작으면 패자요 크면 왕 아니겠소?
覇王降作兒女鳴 패왕노릇 하려니 아녀자도 울렸구나.
無可奈何中不平 마음 속 불평은 어쩔 수가 없네.
向帳明知非有益 도사 불러 목숨 빎이 이익 안 됨 잘 알았고
分香未可謂無情 시첩들에게 향 나눠주니 무정타 말 못하리
嗚呼 아 아
古人作事無鉅細 옛 사람 하는 일 크고 작음 가림 없이
寂寞豪華皆有意 적막호화 간에 다 뜻있거늘
書生輕議塚中人 서생들아 가볍게 무덤 속사람 평하지 말라
塚中笑爾書生氣 무덤 속에선 너희 서생 기질 웃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