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춘한의원(世春韓醫院)
경인(庚寅)년 여름에 발발한 전쟁은 민족 모두에게 씻을 수 없는 깊은 상처를 남겼다. 헤
일 수조차 없이 수많은 목숨들이 전장(戰場)의 포연 속에 사라져갔고 광복의 기쁨 속에 도
약을 꿈꾸던 대한민국의 강토는 폐허화되고 말았다.
6월 25일 전쟁이 개시된 직후 한국군은 불의에 기습을 받은 데다 병력과 장비의 열세로
인해 부득이 낙동강을 저항선으로 하는 지점까지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2∼3개월 간에 경
남북 일원을 제외한 거의 전지역이 북한 공산군의 점령 하에 들어갔으나 미국 영국 프랑스
등 10여 개국 군대로 짜여진 유엔군의 참전으로 전세(戰勢)는 역전되었다.
맥아더 유엔군 사령관의 지휘로 감행된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함에 따라 1950년 9월 28일
서울이 탈환되고 같은 달 30일 38선이 돌파되었다. 한국군은 유엔군과의 합동작전으로 북진
을 계속, 동해안으로는 청진, 중부에서는 초산 및 혜산진의 압록강, 서부에서는 선천까지 도
달하였으나 중공군의 개입으로 또다시 전세가 역전돼 한때 한강선 이남까지 후퇴하였다가
지금의 휴전선 부근으로 밀고 올라갔다.
한동안 양측 군대가 밀고 밀리는 교착상태에 빠졌다가 1953년 7월 27일 마침내 유엔군 측
과 공산군측 사이에 휴전이 성립되어 비극적 전쟁은 불씨를 남긴 채 일단 끝났다.
양측 모두 수많은 인명(人命)과 막대한 재산적 손실을 입었고 얻은 것이라고는 전쟁이 더
없이 무모하고 우매한 짓이라는 인식과 그로 인해 얼마나 비참한 결과를 초래하였는지에 대
해 두고두고 되새겨 보게 하는 뼈아픈 교훈뿐이었다.
6.25는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비참한 전쟁 중의 하나로 국민 모두의 뇌리 속에 남아 있을
것이다. 실제로는 이 전쟁 중 전투에 의한 사망자 15만, 행방불명 자 20만, 부상자 25만, 공
산군에 의해 납치된 수가 10만 여에 달했으며 전재민(戰災民)의 수는 수백만에 이르는 것으
로 추산된다 이밖에 공업시설 42%, 발전시설 41%, 탄광시설 50%, 주택 3분의 1 이상이 파
괴된 것으로 집계되었다. 이 수치는 아군측의 피해이고 공산군측의 피해 또한 이보다 훨씬
클 것으로 추정되는 만큼 양측의 피해 상황은 실로 처참하기 이를 데 없었다.
전쟁의 상처는 물적(物的) 손실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통일에의 희망이 허무하게 좌절되었
을 뿐 아니라 분단으로 인한 비극이 더욱 고착화되는 정신적 고통까지 안겨주었던 것이다.
운룡은 전쟁이 남북한 국민 모두에게 상상하기조차 끔찍할 정도의 극심한 피해를 가져올
것이라는 짐작을 오래 전부터 해온 터였으나 결국 아무런 도움도 줄 수 없었다.
잠시 내무부 장관을 지낸 백성욱(白性旭) 박사 이외에는 아무도 자신이 말에 귀기울여주
지 않았고 몇몇 선배와 동지, 친지들에게 지나가는 말투로 전쟁의 위험을 귀띰 하기도 했었
으나 공연히 비웃음만 사고 말았던 일이 결코 잊혀지지 않는다.
평양에 살고 있는 이름난 부자 오(吳) 모 씨는 운룡의 아버지 경삼(慶參)과 절친한 사이
였다. 운룡은 광복 직후 지나가는 길에 오씨의 집을 방문, 38이북의 공산화 전망을 피력한
뒤 추후 남북한 간 왕래가 끊기고 전쟁이 발발할 경우 신변에 위험이 닥치게 될 것이라는
설명을 들려준 적이 있었다.
"이곳은 일정(日政)때부터 좌익(左翼)이 씨를 뿌린 곳이라 오 선생님처럼 재산을 넉넉히
소유한 인사는 배척을 받게 될 것 같습니다. 더구나 양측 모두 따로 정부를 세우고 난 뒤
에는 머지않아 전쟁이 발발할 위험이 있으므로 재산의 절반쯤을 부산으로 옮겨 위험한 시
기를 슬기롭게 넘기는 게 좋을 듯 싶습니다."
운룡이 충정 어린 진언에 오씨는 깊이 생각함이 없이 즉석에서 되려 버릇없다는 투로 질
책조의 대답을 던지는 거였다.
"이 사람, 자네는 묘향산인가 무슨 산인가 들어가 오랫동안 살더니만 정신이 좀 어떻게
된 것 같으이. 제 돈 제가 벌어서 잘 사는 걸 좌익이면 어떻게 하고 우익이면 어찌할 건
가. 그리고 2차 대전에서 천하에 위력을 떨친 미국이 38이남에 있고 소련이 38이북에 버
티고 있는 판에 어떻게 이곳에서 전쟁이 일어날 수 있겠나. 자네는 늘 일본 경찰에게 쫓
겨 숨어 지낸 나머지 아직도 불안심리를 떨쳐버리지 못했기 때문에 그런 생각을 하는 것
같아."
운룡은 대부분이 사람들이 자기본위로, 편한 족으로 생각하는 경향을 짐작하는 터였지만
오씨의 험난한 미래가 불 보듯 훤히 내다보였기 때문에 다시 한번 간곡하게 말했다.
"콩 심은 데 콩이 나고 팥 심은 데 팥이 나듯 씨는 뿌리는 대로 결실을 거두는 법입니다.
38이북은 일정 때부터 뿌려온 좌익의 씨앗이 소련의 노선을 좇아서 결실을 거두게 되고
이남은 역시 일정 때부터 뿌리내린 우익의 씨앗이 미국의 노선을 좇아서 결실을 보게 될
것입니다. 좌익은 특성상 결코 자본계급의 부(富)를 용인하지 않는 법입니다."
"그래, 자네 말이 일리는 있네만 자네처럼 세상을 무서워하면서 살아서야 어디 쓰겠나?
우리나라는 역사적으로 볼 때 외세의 침략을 자주 받아온 나머지 자네처럼 전쟁에 대한
막연한 불안심리를 갖고 사는 사람이 적지 않아. 그 생각을 떨쳐버리지 못하면 '십승지지
(十勝之地)다', '피난처다' 찾아다니며 아무 일도 못해. 내 판단으로는 절대로 우리나라에서
전쟁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 보네."
운룡은 오씨가 자신의 생각한 바를 계속 고집하는 것이 안타까웠지만 더 이상 설득한다고
했댔자 별다른 효과가 없을 것이라는 결론을 나름대로 내렸다.
"오 선생님, 아무튼 제게 속는 셈치시고 재산의 일부라도 부산으로 옮겨 보시지요. 늦어도
경인년 봄까지는 그렇게 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 사람아! 내 일은 내가 어련히 알아서 하겠나? 자네 앞길이나 걱정하게."
오씨의 고생을 다소나마 덜어줄 요량으로 오씨를 찾아갔던 운룡은 전혀 뜻밖의 반론에 부
딪쳐 머쓱해지고 말았다.
운룡은 마치 거울에 사물이 비치듯 자신이 마음 속에 시공(時空)을 초월하여 조림하는 온
갖 사상(事象)들을 보면서 언짢은 미래사(未來事)에 대한 걱정으로 해서 항시 심기가 불편
하였다.
기축년(己丑年·1949) 가을에도 평소 친하게 지내는 친지에게 내년 봄쯤 자신과 부산으로
이사가는 게 어떻겠느냐고 했다가 "별 해괴한 소리를 다한다"는 핀잔조의 이야기만을 들었
을 뿐이었다.
세계 최강의 군사력을 갖고 있는 미국이 후원하고 있는 한 김일성의 전쟁도발은 절대로
있을 수 없다는 논리였다. 설혹 김일성이 쳐내려온다 해도 그것은 미국의 강력한 군사력에
의해 쉽고 간단하게 분쇄될 것이라는 이야기였다.
운룡으로부터 경인년 재난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 중에는 백성욱 박사를 비롯, 극
소수의 사람들만이 그 말을 염두에 두는 정도였다.
지자(知者)의 양심으로 나라와 백성을 커다란 재난으로부터 구제하려는 노력은 내무부장
관 백성욱 박사의 '경인년 통일 방안'에 관한 진언이 묵살되면서 한낱 물거품이 되고 말았
다. 조심스럽게 백 박사를 통해 시도한 정치적 노력과 개인적 노력 모두가 물거품처럼 허망
하게 끝나버리자 운룡은 국운(國運)의 소치로 돌릴 수밖에 없었다.
아쉬움과 안타까운 마음을 지닌 채 부산에 도착한 운룡은 부산역에서 그리 먹지 않은 동
광동 5가에 6∼7평 규모의 조금만 방 한 칸을 월세로 빌어 한의원을 개설하였다.
이름하여 세춘(世春)한의원. 세(世)는 인간을 의미하고 춘(春)은 생기(生氣)를 뜻하는 말로
서 여기에는 병든 사람들에게 생기를 불어넣어 건강을 되찾도록 하겠다는 운룡의 의지가 잘
나타나 있다.
자연의 섭리에 순응하기보다는 인간적 욕망을 따르기 쉽고 향상의 대도(大道)로 나아가기
보다는 타락의 길로 들어서기 쉬운 것이 대부분 세상 사람들의 삶의 노선이고 보면 인간의
몸에 질병이 따르는 것이란 필연적이라고 하겠다. 인간 스스로 부른 질병이기에 약으로 일
시적 치료는 가능하지만 근본적 치료는 삶의 방식을 개선하지 않는 한 불가능한 것이다.
운룡은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을 파괴하는 숙살(肅殺)의 기(氣), 즉 살기(殺氣)를 등
지고 향상의 대도를 갈 수 있도록 힘을 북돋아주는 생기(生氣)를 받아들이게 하고 싶었다.
생기를 받아 삶마다 건강하고 그 건강을 밑천 삼아 향상의 길을 가도록 일러주고 싶은 것이
었다.
같은 민족끼리 죽이고 죽였던 동족상잔의 비극, 피비린내 진동하는 전쟁의 와중에서도 세
춘 한의원은 글자 그대로 언제나 봄(春)이었다. 삼천리 금수강산이 피로 물 드는 속에서도
인술(仁術)이 꽃을 피우는 곳, 바로 동광동(東光洞)의 세춘 한의원이었다. 동방의 빛(東光)은
곧 세상의 봄(世春)이 아닐까?
'눈이 오자 서리 내린다(雪上加霜)는 격으로 춥고 배고픈 사람들에게 질병은 더욱 기승을
부리는 법이다. 가장 어리석은 인간들에 의해 저질러진 인재(人災)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많
은 사람들이 계속 부산으로 몰려들었다.
인구의 유입 량이 늘고 전쟁이 장기화됨에 따라 한의원을 찾는 환자들은 계속 늘어났으나
수입은 반대로 감소추세였다. 헐벗고 굶주린 사람들에게 약값이 있을 리 만무였고 약값이
없다고 해서 병고로 신음하는 사람들에게 약 첩을 지어주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
이다.
약값을 지불하는 사람은 열 명에 두 세명 꼴이고 나머지는 외상으로 가져갔지만 운룡은
개의치 않고 임진년(壬辰·52년) 여름까지 어려운 대로 한의원을 꾸려나갔다. 중공군의 개입
을 기화로 공산군측 총반격이 시작됨에 따라 경인년 겨울, 수많은 북한 주민들이 남쪽으로,
남쪽으로 밀려들었다. 이때 정든 삶의 터전을 버리고 새로운 삶의 터전을 찾아 남하한 동포
는 50만 명에 달하였다.
경인년 8월에 부산으로 옮겼다가 9.28 서울수복에 따라 서울로 옮겨갔던 정부는 1951년 1
월 3일 다시 부산으로 옮겨졌다가 3.14 성루 재 수복을 따라 또다시 서울로 옮겨가는 과정
에서 부산은 전국 각지에서 몰려든 피난민들로 몸살을 앓았다. 부산이 몸살을 앓고 있는 동
안 부산에 수용된 피난민들 역시 많은 사람들이 병고에 시달렸다.
운룡은 세춘한의원을 찾는 환자들에게 한약재는 물론 주변에서 손쉽게 구할 수 있는 집오
리 명태 쑥 등 온갖 것들의 약성을 이용, 병마를 퇴치하고 생기를 되찾게 해주었다.
세춘한의원은 비록 일곱 평 남짓 되는 조그만 공간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곳을 거쳐간 많
은 사람들에게는 잃어버린 생기를 되찾게 해준 뜻깊은 마음의 고향으로 길이 기억될 것 같
다.
사람들은 한의원에서 병도 고치고, 밥도 술도 얻어먹고, 또 때로는 운룡과 한시(漢詩)를
짓기도 하면서 전쟁이 안겨준 정신적 육체적 상처를 치유해 나갔다.
세춘한의원은 가난하고 병든 민초들에게는 희망의 등대였고 오갈 데 없는 피난민들에게는
먹고 잘 수 있는 따뜻한 보금자리였다. 한의원의 재정은 그리 넉넉지 못하였으나 그곳에 기
거하는 모든 사람들이 항시 배를 곯지 않을 정도로는 유지되었다.
운룡은 경인년 가을 9.28 서울 수복 이후 자주 아버지와 아내가 있는 공주 마곡사 부근
마을을 다녀오면서 과거에 머물던 계룡산 백암동·불암리 등지를 들러 친지들과 만나 서로
소식을 묻고 술도 나누곤 하였다.
삼가 여백(一生大悟)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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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 상담실
신의 이야기 (18) 세춘(世春)한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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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03.20 2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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