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론부터 말하자면,
포은 정몽주는 관향(조상이 대대로 살아온 성씨의 고향)이 포항 오천이고
태어나서 자란 곳(生長地)은 영천시 임고면 우항리이다.
5~6년 전부터 포항 사람들이
정몽주가 포항 오천에서 태어나 자랐다거나
외가인 영천에서 태어나 본가인 오천에서 자랐다거나
외가인 영천에서 태어나 본가인 오천에서 자라다가 다시 외가인 영천에서 성장하여
관직에 나아갔다는 등의 말을 하고 있다.
정몽주의 할아버지 정유가 어린 아버지 정운관을 데리고
오천 청림동에서
영천 우항리로 이사하였다.
우항리에서 맏아들 정몽주를 비롯한 자식들을 정운관이 낳았다.
이것은 영천 양항리에 있는 정몽주 부모 묘비에 나오는 사실이다.
정몽주의 어린 아버지가 태어난 오천 청림동의 옛집은 정몽주가 태종 때 복권이 되고 난 뒤에
사당으로 바뀌었다. 명현을 모시는 사당은 서원으로 변하였는데 곧 오천서원이다.
임진왜란 때 왜군에 의하여 불태워진 오천서원의 위패(정습명, 정몽주)는
정광계가 운제산 만장암의 굴속에 피난시켰다가
임진왜란이 끝나자 사당을 현재의 문충리에 임시로 지어 1601년부터 1612년까지 위패를 모셨다.
그래서 오천에 문충리, 문충곡이라는 지명이 생겨난 것이다.
오천서원은 현재의 원동으로 옮겨 중건했고
정습명, 정사도, 정몽주, 송강 정철(가사문학가로 유명)을 배향하고 있다.
정몽주의 아버지 정운관이 태어난 집터이고 사당이 있었고 임진왜란 전까지 오천서원이 있던 자리에는
18세기말과 19세기말에 세워진 유허비(옛터를 알리는 비)가 세워져 있다.
조선왕조실록 명종실록, 동국여지승람, 도암 이재가 지은 정몽주 묘지명, 영천군읍지 등의 1급 사료들에
모두 영천 우항리에서 포은이 태어났음을 기록하고 있다.
우항리 포은 생가는 외가인가? 아니다 친가이다.
포은의 생애를 1년 단위로 상세히 기록하고 있는 유성룡의 포은선생연보에는
어디에도 외가에서 태어나서 오천 생가에서 자라났다는 기록은 없다.
포은은 19세에 부친의 상에 당시의 일반적인 상례이던 불교식이 아니라
원나라에서 새로 들어온 성리학 유교식의 상제례를 주자가례를 따라서 치렀다.
29세에 다시 모친상을 당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부모상에 모두 3년 여묘살이를 하여 국가로부터 효자 정려문을 받았다.
포은의 생가 대문에 효자 정려문이 세워졌던 것이다.
외가라면 효자 정려문을 세울 수가 없는 것이다.
1389년 포은이 익양군이라는 공신으로 책봉되자
영천군수 정유가 포은이 태어나 자라며 살던 우항리 마을 입구에다
'효자리'라는 큰 글자를 새긴 정몽주 효자비를 세웠다.
포은 생전에 세운 이 효자비는 우항리에 현전하고 있다.
조선 중기 4대 문장가의 한 사람이던 월사 이정귀는
정몽주의 묘소가 있는 용인 충렬서원 기문에서
정몽주의 생장지에 임고서원
정몽주의 개경 저택에 숭양서원
정몽주의 관향에 오천서원이 있지만
정몽주의 묘소가 있는 용인에만 서원이 없다고 하며
정몽주의 묘소 앞에 충렬서원을 세우게 된 연유를 밝히고 있다.
이외에도 정몽주 본인이나 후학이나 후손의 수많은 시문에도 모두
영천 우항리가 포은 정몽주의 생장지임을 밝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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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준, <포은 정몽주의 생장지 문제 검토> <<동대해문화연구(제13집)>>, 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