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말씀: 마태복음 1:1-23
이 세상에는 수많은 이름들이 있습니다. 성경에도 보면 얼마나 많은 이름이 등장합니까? 그런데 인류역사상 ‘예수’라는 이름처럼 많이 불리워지고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과 찬양과 경배를 받은 이름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과연 어떤 분이십니까? “예수”라는 이름이 가진 뜻이 무엇입니까? 마태복음 1:21절을 말씀을 함께 보면.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 이심이라 하니라.” 예수라는 이름의 뜻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 즉 구원자라는 뜻입니다.
신천지에서는 시대별로 구원자가 있다고 하지만 구원자는 예수님 한분밖에는 이 세상에 없습니다. 사도행전 4:12절에서 베드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예수님만이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실 수 있는 유일한 구원자십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어떤 점에서 우리인생들을 죄로부터 구원하실 수 있는 유일한 구원자이십니까?
첫째로, 예수님은 성령으로 잉태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에 의하여 잉태되신 것이 아니라 성령에 의하여 잉태가 되셨습니다.
마태복음 1장의 족보를 자세히 보면 모든 사람들은 낳은 아버지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삭의 아버지는 아브라함이고, 다윗의 아버지는 이새고, 히스기야의 아버지는 아하스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16절에 와서 예수님은 누가 나았더라는 내용이 없습니다.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누가 낳았더라” 하고 아버지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지 않고,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 “마리아에게서” 즉 어머니는 기록되어 있지만 아버지는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아버지는 누구입니까? 예수님의 아버지는 하나님이십니다.
18절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 모친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예수님은 보통 인간과 같이 사람과 사람이 만나서 결혼을 하여 태어난 사람의 아들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삼위일체 하나님이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되어 탄생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우리 인간들을 능히 죄로부터 구원하실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때로 “왜 나는 죄를 자꾸 짓는가?” “왜 우리인간 세상에는 끊임없이 죄가 반복될 수밖에 없을까?” 요즘도 얼마나 많은 범죄가 발생합니까? 살인, 강도, 방화, 성폭행 등 법을 어기는 죄도 많지만 마음으로 짓는 죄까지 합한다면 얼마나 많겠습니까? 한마디로 걸음마다 자욱마다 다 죄뿐인 것입니다. 우리는 과연 죄 안짓고는 살 수는 없습니까? 죄의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운 그런 거룩하고 성결하고 고결한 삶을 살 수는 없습니까?
인류역사상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문제로 고민하고 괴로워했습니까? 그래서 석가모니는 왕궁을 뛰쳐나가 머리 깎고 중이 되었습니다. 마르틴 루터는 이 고민 때문에 교황청 계단을 무릎으로 기어오르면서 피가 철철 흐르기까지 고행을 하였습니다. 인도의 수도승들은 지금도 더러운 세상에 발을 딛지 않기 위해서 높은 나무 위에 집을 지어놓고 그곳에서 명상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지금으로부터 3000여년전 다윗은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시편 51:5절에서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어머니가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이 말은 왜 인간이 죄인일 수밖에 없고,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가 그 이유를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우리인간은 죄 중에서 잉태되었고, 죄 가운데서 출생하였기 때문에 죄인일 수밖에 없고, 죄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낳으신 부모님이 다 죄인이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 죄악 되기 때문에 어쩔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와 달랐습니다. 예수님은 죄중에서 잉태된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 잉태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같이 죄의 속성을 타고난 죄인이 아니라, 죄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러므로 이 예수님은 우리를 얽어매고 있는 죄의 사슬을 능히 끊을 수가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선악간에 고민하다가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바울은 자신의 고통을 사망의 몸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죄의 고통, 사망의 고통으로부터 자신을 구원해 주신 분이 있었습니다. 그분이 누구입니까? 로마서 8:1,2절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아 생명을 주시는 성령이 죄와 사망에서 나를 해방하였다”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법으로 보다 엄하게 처벌하고 교도소를 지어서 인간의 죄 문제를 해결하고자 합니다. 교육으로 인간을 변화시켜 보고자 합니다. 그러나 잘 되지 않습니다. 아무리 범죄자들의 신상과 얼굴을 공개하고 전자발찌를 채워도 범죄는 줄어들지 않습니다. 수없이 교육법안을 바꿔 보아도 청소년들의 범죄는 더 심각해져만 갑니다.
과거에 비하면 얼마나 오늘날 사람들의 교육수준이 높아졌습니까? 그러나 인간의 죄악상은 조금도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과거에 칼과 창으로 사람을 죽이던 데서 이제는 총과 미사일로 사람을 죽입니다. 과거에는 다니면서 죄를 지었지만, 지금은 컴퓨터 앞에 앉아서 혹은 손안에 있는 폰을 통하여 전 세계를 드나들며 죄를 짓습니다. 갈수록 죄문제가 더 심각해 집니다. 이처럼 죄 가운데서 태어난 우리인생들은 절대로 죄를 안짓고 살 수 없고 죄문제는 더더욱 해결할 수가 없습니다.
오직 성령으로 잉태되신 거룩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만이 죄로 고통 하는 우리 인생들을 능히 구원해 내실 수가 있습니다.
둘째로, 예수님은 우리 죄인들과 함께 하시므로 우리의 죄문제를 해결해 주십니다. 23절 말씀을 보시면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예수님은 한없이 거룩하시고 능력이 많으신 분이시지만 하나님나라에만 계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추하고 더러운 세상에 오셨습니다.
죄 많고 문제 많은 인간의 역사 속으로 들어 오셨습니다. 마태복음 1장 전반부에 보면 예수님의 족보가 나옵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이 야곱을 낳고 --- 전 족보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족보는 결코 훌륭한 족보가 아닙니다. 거기에는 아브라함이나, 이삭이나 다윗이나, 히스기야처럼 훌륭한 사람도 있지만, 므낫세나 아몬처럼 악한 사람도 있습니다. 룻이나 라합과 같이 이방여인들도 있고, 유다나 다윗과 같이 부정한 방법으로 자녀를 출산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족보에 등장하는 사람들을 한 사람 한 사람 들쳐 보면 얼마나 죄가 많고 문제가 많습니까? 아브라함이나 다윗부터 허물과 실수와 죄가 많았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영어로 holy bible 이라고 하지만 실제로 성경을 자세히 읽어보면 성경은 전혀 holy 즉 거룩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지저분한 부분이 참 많습니다. 인간역사는 한마디로 죄로 점철된 역사입니다. 성경의 역사도 창세기 1,2장만 아름답지 3장부터는 거짓말하고 욕심부리고, 시기하고 형제를 돌로 때려죽이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먹고 마시고. 얼마나 죄가 많습니까?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보실 때 얼마나 더럽고 악하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악하고 지저분한 세상을 심판하시지 않고 오히려 이 세상가운데 함께 하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본래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계시는 하나님이신데 제한된 시간 속에, 제한된 공간 속으로 내려오신 것입니다. 그것도 고결한 천사의 모습으로가 아니라 죄된 육신의 모양으로 오셨습니다(롬8:3). 위엄이 넘치는 왕의 모습으로가 아니라 작고 보잘 것 없는 한 아기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사9:6). 크고 화려한 왕궁에서가 아니라 낮고 천한 마굿간 말구유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단지 잠깐 동안 이 세상에 방문하러 오신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 우리와 함께 살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우리 인간들이 입는 옷을 똑같이 입으시고, 우리가 먹는 음식을 똑같이 잡수시고, 우리가 겪는 고통을 똑같이 겪으시고, 우리가 사는 집에서 똑같이 사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우리가 아프리카나 인도같은 곳에 가서 그들과 똑같은 모습으로 살라면 이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겠습니까?
16세기에 벨기에 신부 다미안은 태평양 한 가운데 버려진 섬 몰로카이로 갔습니다. 그곳에 수용된 문둥병자를 돕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아무리 헌신적으로 병자들을 수발들고 섬겨도 사람들이 마음의 문을 열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자신들은 문둥병자요, 다미안은 건강한 사람이라는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다미안은 그렇게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주여 저도 저들과 똑같은 처지가 되어서 저들의 진정한 친구가 되게 하소서” 이렇게 하고는 문둥병자들과 함께 살을 부딪히며 이전보다 더 적극적으로 그들과 함께 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난로에 손을 쬐는데 감각이 없습니다. 불 속에 손을 넣어도 뜨거운 줄을 모릅니다. 그도 마침내 문둥병자가 된 것입니다. 이때 다미안은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드립니다. “주여 감사합니다. 제가 비로소 저들의 친구가 될 수 있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그때에야 비로소 그곳에 문둥병자들이 다미안신부에게 마음의 문을 열고 그의 섬김과 사랑을 진실로 영접했다는 것입니다. 다미안신부 그 한 사람의 함께 하는 사랑 때문에 지옥의 섬 몰로카이가 천국과 같은 곳으로 변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처럼 어떤 사람과 같이 된다. 그들과 함께 한다는 것은 정말로 어려운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죄 있는 육신의 모양>을 입으셨다는 것은 마치 이처럼 건강한 다미안 신부가 문둥병이 걸린 자가 되어서 병자들과 함께 하는 것처럼 힘든 일이었습니다. 아니 이보다 훨씬 더 힘든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처럼 죄인들이 수용되어 있는 인간 세상에 오셔서 병든 자들, 귀신들려 고통하는 자들, 죄로 말미암아 소외되고 멸시받는 자들을 친히 찾아가시고 그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고독한 여자 사마리아여인과 함께 대화하시며, 그녀의 목마름의 문제를 해결해 주셨습니다. 허무함을 느끼던 당대의 지성인 니고데모와도 함께 하사 늦은 밤을 지새우며 거듭남의 비밀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돈은 많았지만 따돌림받았던 삭개오에게도 친히 찾아 가셔서 그의 이름을 불러 주시고 그의 집에 함께 유해 주셨습니다. 나사로가 병들어 죽었을 때는 슬피우는 마르다 마리아 자매와 함께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오천명의 무리가 배고파 굶주릴 때는 그들이 돌아가다가 길에서 기진할까 봐서 친히 오병이어로 오천명을 먹이는 기적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한 손 마른 자가 그 인격까지 장애가 와서 회당 구석에 고개를 숙이고 쭈그리고 앉아있을 때에 바리새인들의 공격을 예상하면서도 그와 함께 하시며 “네 손을 내밀라”하심으로서, 그의 마른 손을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어리고 부족한 제자들과 3년 동안 동고동락하시며 그들의 친구요, 그의 스승이요, 그들의 목자요, 아버지가 되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죄인들과 항상 함께 계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와 같이 죄인들과 함께 하셨고, 그의 변함없는 사랑을 친히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만약 하늘보좌에 가만히 계셔서 영광만 받으시고 우리죄인들과 함께 하시는 것이 없었다면 우리는 온전한 구원을 체험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의 병든 영혼은 여전히 고독과 절망과 슬픔 속에서 고통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우리 죄인들과 같이 되셨고, 우리의 삶 속에 들어오셔서 우리와 함께 하셨습니다. 그리고 내 대신 십자가의 고통을 다 겪으셨으며, 아픔와 수치를 다 담당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함께 해주신 예수님에게서 진정한 사랑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참된 위로와 힘을 덧입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영혼이 치료되는 감격을 체험할 수가 있습니다. 이 예수님은 우리의 진정한 친구가 되십니다.
임마누엘! 우리와 함께 하시는 예수님! 이 예수님은 우리의 친구요, 우리의 목자요, 우리의 아버지가 되기를 기뻐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이라.” 임마누엘! 이 이름은 바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입니다. 임마누엘! 그 이름은 우리 죄인들을 향한 은혜의 이름입니다. 임마누엘! 그 이름은 우리를 향한 위로의 이름이요, 소망의 이름입니다. 그래서 송명희 시인은 <그 이름>이라는 복음성가에서 예수님의 이름을 “내 마음에 새겨진 아름다운 보석”이라고 하였습니다. “내 마음에 숨겨진 기쁨이요, 귀한 비밀이라”고 하였습니다. 오직 우리 죄인들을 위해 이 땅에 낮아져 오시고, 죄인들의 친구가 되시며, 세상 끝날 까지 우리와 함께 하실 것을 약속하신 예수님의 임마누엘의 사랑을 감사 찬송 드립니다. 이번 성탄에 이 예수님의 임마누엘의 사랑이 우리 심령에 충만히 임하시기를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