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이 시를 보좌 신부로 사제직의 첫발을 내딛고 맞은 첫 번째 성령 강림 대축일의 「서울주보」에서 처음 만날 수 있었습니다. 세월이 많이 흘렀으나 그때 받은 깊은 감동은 지금도 그대로 떠올릴 수 있습니다. 스페인에서 활약한 위대한 종교화가 엘 그레코의 그림 ‘성령 강림’과 함께 감상할 수 있어서 더욱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시와 그림이 실린 주보의 앞면을 제 책꽂이에 한참 붙여 놓았습니다. 세월이 흐르고 이사를 거듭하면서 아쉽게도 잃어버렸지만 그 기억은 아직도 생생합니다.
『매일미사』의 묵상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성령 강림 대축일이 되면 이 시를 교우님들과 함께 나누리라 마음먹었습니다. ‘다른 하늘’을 품고 사는 행복에 대하여 깊이 감사하는 대축일이 되기를 바랍니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가정에 소홀한 남편이 있습니다. 중요한 기념일이나 가족 대소사를 놓치는 것을 처음에는 미안해 하다가 이제는 당연한 것처럼 생각합니다. 자기는 가장으로 돈을 많이 벌어야 하기에 바쁘고 그래서 가정에 소홀히 할 수밖에 없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이번 한 건만 잘 되면 우리 가족 모두 화목하게 잘 살 수 있다’고 자주 말합니다. 그런데 이 한 건이 잘 되고 나면 어떨까요? 더 큰 건이 자기 앞을 기다리게 되고, 결국 가족에는 늘 소홀할 수밖에 없습니다.
요즘 프로야구가 한창인데, 사람들은 어떤 선수를 좋아할 것 같습니까? 당연히 자기 팀이 이기는데 커다란 영향을 끼치는 선수를 좋아합니다. 팀의 승리를 위해서 때로는 번트도 대고, 때로는 기다릴 줄도 아는 선수, 그리고 자신이 부상을 당할 수도 있음에도 불구하고 몸을 던져서 아웃 카운트를 잡아내는 열정을 가진 선수를 원합니다.
만약 홈런 한 방만 치겠다고 무조건 큰 스윙만 하는 선수는 어떨까요? 또한 자기 몸을 끔찍이 챙겨서 슬라이딩이나 허슬 플레이를 전혀 하지 않는 선수는 어떻습니까? 제가 감독이라도 그런 선수는 절대로 쓰지 않을 것입니다. 어쩌다 한 번은 이길 수도 있겠지만, 이 선수를 기용함으로 인해 패배를 더 많이 안게 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지요.
직장에 충실한 사람은 가정에 소홀할 수밖에 없을까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사람은 매사에 충실하기에 직장이나 가정에나 똑같이 충실합니다. 문제는 무조건 큰 것만을 얻으려는 욕심과 이기심이 그 어디에서도 소홀하게 만든다는 것이지요. 작은 것도 소홀히 하지 않고 충실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어떠한 상황에서도 충실하게 자신의 일들을 해나갈 것입니다.
오늘은 성령 강림 대축일입니다. 성령이 사도들에게 내린 날을 기념하는 날이지요. 성령을 받은 제자들은 예수님의 죽음 이후 숨어 지냈던 다락방을 벗어나 용기 있게 세상에 기쁜 소식을 전파하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단지 성령을 받음으로 인해서 용기를 가지고 세상에 복음을 전파할 수 있게 된 것일까요? 예수님과 함께 했었던 그 모든 과정들이 있었기 때문에, 성령을 통해서 비로소 그 결실을 맺을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어느 날 갑자기 주님께서 특별한 은총과 사랑을 주셨으면 하는 마음을 갖습니다. 즉, 큰 것 한 방 주셨으면 합니다. 이것으로 세상 안에서는 부귀영화를 누리고, 그래야 주님을 위한 일도 조금 할 수 있다는 식으로 말합니다. 그러나 주님과 함께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그리고 주님의 뜻대로 살고자 하는 마음이 없다면 이미 우리에게 다가온 주님의 은총과 사랑을 깨닫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이미 세례를 통해서 받은 성령께서 우리에게 항상 말씀하시는 것은 ‘주님’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주님을 모른다고 말하는 사람은 또 주님의 뜻대로 살지 않겠다고 하는 사람은 은총과 사랑으로 다가오는 성령의 활동을 거부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큰 것 한 방이라는 요행을 바라는 착각 속에서 벗어나, 매 순간 주님께 충실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래야 이천년 전의 제자들처럼 주님 안에서 주님의 일을 용기 있게 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