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랑캐 꽃
이용악
-긴 세월을 오랑캐와의 싸움에 살았다는 우리는 머언 조상들이 너를 불러 ‘오랑캐꽃’
이라 했으니 어찌 보면 너의 뒷모양이 머리채를 드리운 오랑캐의 뒷머리와도 같은
까닭이라 전한다.-
아낙도 우두머리도 돌볼 새 없이 갔단다.
도래샘도 띠집도 버리고 강 건너로 쫓겨갔단다.
고려 장군님 무지무지 쳐들어와
오랑캐는 가랑잎처럼 굴러갔단다.
구름이 모여 골짝 골짝을 구름이 흘러
백 년이 몇 백 년이 뒤를 이어 흘러갔나.
너는 오랑캐의 피 한 방울 받지 않았건만
오랑캐꽃
너는 돌가마도 털메투리도 모르는 오랑캐꽃
두 팔로 햇빛을 막아 줄게
울어 보렴 목 놓아 울어나 보렴 오랑캐꽃
[어휘풀이]
-오랑캐꽃 : 제비꽃을 다른 말로 일컫는 말
-도래샘 : 빙 돌아서 흐르는 샘물, ‘도래’는 도랑의 함경도 방언
-띠집 : 지붕을 띠로 얹어 만든 집. 모옥(茅屋)
-돌가마 : 백탄(白炭)가마
-털메투리 : 털로 만든 미투리. 미투리는 삼 껍질로 짚신처럼 삼은 신.
[작품해설]
일제의 수탈로 말미암아 소위 오랑캐 땅으로 쫓겨난 유이민들의 비극적 삶을
고도의 상징적 수법으로 그려낸 이 작품은 서정주로부터 “망국민의 절망과 비애를
잘도 표했다.” 는 절찬을 받은 바 있다. 이 시는 ‘오랑캐꽃’이라는 자연물을 통해
민족이 처한 비통한 현실에 대한 연민과 비애를 노래한 작품이다. 복잡한 비유 구조를
지니고 있어서 그 의미를 쉬사리 파악하기는 어렵지만, 일반적으로 연약하고 가냘픈
오랑캐꽃의 이미지와 그에 대한 연민을 통해 이민족의 지배 하에서 노예적인 삶을
살아가는 민족의 삶과 운명을 그린 작품이라 할 수 있다. 결국 이 시는 오랑캐꽃의
이미지와 고통 받는 민족의 현실을 등치(等値)시킴으로써 개인적인 서정을 그 시대의
보편적인 서정의 차원으로 끌어올리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즉 오랑캐의 피 한 방울 받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꽃의 형태가 오랑캐의 머리 모양을
닮았다는 외형적인 유사성 때문에 오랑캐꽃이라 불리는 것이나, 일제의 가혹한 탄압으로
인해 그 옛날의 오랑캐나 다를 바 없는 비참한 신세로 전락해 버린 민족의 처지가
동일하다는 현실 인식이 이 시의 주요 모티프를 이루고 있으며, 그에 기초하여
오랑캐꽃이라는 구체적인 사물에 대한 연민의 정을 민족이 처한 객간적 현실에로 확대
시키고 있는 것이 이 시의 기본적 구조가 된다.
이 시는 첫머리에서 ‘오랑캐꽃’의 명명(命名)에 대한 유래를 밝히고 있다. 그것은
오랑캐와의 싸움에 시달렸던 우리 조상들이 ‘오랑캐’의 뒷모습과 ‘오랑캐꽃’의 뒷모습이
서로 닮아 그 꽃을 ‘오랑캐꽃’이라 했다는 설명이다. 즉 그 명명은 과거의 전쟁 체험 및
모습의 유사성과 관련이 있다. 이러한 ‘오랑캐꽃’의 명명에 대한 객관적 인식을 앞머리에
제시해 놓고 전개되는 작품 내용은 이와는 다른 모습을 보인다. 먼저 1연은 오랑캐와
고려와의 싸움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객관적으로 서술하며, 이어 2연에서는 그러한 역사적
사실이 상당 기간 지났음을 묘사적 표현으로 제시한다. 3연은 화자의 주관적 인식과 그로
부터 촉발되는 화자의 감정을 표출한다.
화자는 ‘오랑캐의 피 한 방울 받지 않았’고 또 ‘(추운 지방에서의 생활상인) 돌가마도
털메투리도 모르는’ 오랑캐꽃에 대해 극도의 비애감을 느끼고 있다. 즉 오랑캐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으면서도 ‘오랑캐꽃’이라 불리게 된 데 대해 화자는 극도의 슬픔을 느끼고 있다.
그러한 화자의 감정은 마침내 ‘울어 보렴 목 놓아 울어나 보렴’이라는 마지막 구절에
이르러 폭발되고 만다. ‘오랑캐꽃’이라는 잘못된 명명이 일종의 억울함이라면 화자의
슬픔은 이러한 억울함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것은 바로 일제에 의해 오랑캐
라고 천대받던 유이민들이자, 더 나아가 전 조선 민중의 억울함과 비통함을 암시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작가소개]
이용악(李庸岳)
1914년 함경북도 경성 출생
1936년 『신인문학』 3월호에 시 「패배자의 소원」을 발표하여 등단
1939년 일본 상지대학 신문학과 졸업
김종한과 함께 동인지 『이인(二人)』발간
1939년 귀국하여 『인문평론』 기자로 근무
1946년 조선문락가동맹에 가담
1950년 6.25때 월북
1971년 사망
시집 : 『분수령』(1937), 『낡은 집』(1938), 『오랑캐꽃』(1947),
『이용악』(현대시인전집)(1937), 『이용악시전집』(1988),
『북쪽은 고향』(1989), 『두만강 너 우리의 강아』(19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