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능 세계 이론
민주주의는 투표가 당락의 차이를 만들어 내고 그 차이가 가능 세계의 하나를 현실화하는 절차
타인과의 만남속에서 절실히 체험… 애인을 만나 구원 받을수도, 데이트 폭력 지옥 떨어질수도
예전에 ‘인생극장’이라는 코미디 프로가 있었다. 좋을 수도 있고 나쁠 수도 있는 여러 가지 인생이, 즉 여러 가지 ‘가능 세계’가 존재한다. ‘인생극장’은 주인공의 단 한 번의 선택에 따라 좋을 수도, 나쁠 수도 있는 가능 세계 가운데 어느 것이 현실이 되는지 보여주는 프로였다. 선택에서 한 번의 사소한 잘못된 판단이 좋은 세계 대신 나쁜 세계를 만들어 낸다면? 모든 이가 이렇게 걱정하는 바의 시뮬레이션을 제공했기에 이 프로는 인기를 끌었던 것 같다.
작은 ‘차이’가 전혀 다른 세계들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이런 생각은 이미 여러 가지 방식으로 고전 문학 속에서 표현되기도 했다. 예컨대 로버트 프로스트의 유명한 시 ‘가지 않은 길’은 ‘둘 다 가볼 수 없는’ 숲속의 두 갈래 길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 둘 다 존재하며 가능하지만, 어느 길로 가느냐에 따라 하나의 세계만이 현실화할 수 있다. 화자는 이렇게 시를 끝맺는다. “오랜 세월이 흐른 다음/나는 한숨지으며 이야기하겠지요/‘두 갈래 길이 숲속으로 나 있었다. 그래서 나는/사람이 덜 밟은 길을 택했고/그것이 내 운명을 바꾸어 놓았다’고”(정현종 역). 숲속의 두 갈래 길 가운데 무엇을 쫓느냐에 따라 하나는 현실화한 세계가 되고, 다른 하나는 가능 세계로 남는다.
‘가능 세계’는 흥미로운 아이디어를 많이 가지고 있던 17세기 철학자 라이프니츠의 매우 유명한 개념 가운데 하나다. 무수히 많은 가능 세계가 있는데, 신은 이 가운데 다양성과 통일성 면에서 ‘최선’의 세계가 현실화되게 했다. 그것이 지금 우리가 사는 세계라는 것이다. 다양성을 지닌 세계가 좋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보르헤스도 인용하고 있는 바지만, 라이프니츠는 이렇게 생각해보길 권한다. 두 개의 도서관이 있다고 해보자. 하나의 도서관에는 완벽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는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만 1000권이 있고, 다른 도서관에는 수준과 중요성이 천차만별인 다양한 책 1000권이 있으며 ‘아이네이스’는 그 1000권 가운데 하나다. 어느 도서관이 더 좋은 도서관인가? 물론 후자다. ‘아이네이스’ 1000권이 쌓인 곳은 도서관이라기보다 그냥 물류창고 아닌가? 이런 식으로 라이프니츠는 다양성을 갖춘 것이 최선의 세계라고 주장한다. 놀라운 것은 ‘악(惡)’ 역시 이 최선의 세계의 다양성을 풍부하게 해주는 뺄 수 없는 요소로 고려되며, 그렇게 현실 속의 악이 용인된다. 우리는 라이프니츠의 의도를 잘 알 수 있다. 그는 ‘선한 신이 어떻게 이렇게 많은 악이 존재하는 세계를 창조하였는가’라는 신에 대한 비난으로부터 신을 변호하는 ‘변신론(辯神論)’을 수행하는 것이다. 이 세계는 모든 가능 세계들 가운데 최선의 세계가 현실화한 것이고, 최선의 세계의 다양성에는 필연적으로 악도 포함된다고.
세상 안의 온갖 악을 최선의 세계의 구성품으로 용인하는 라이프니츠의 이런 ‘낙관주의’는 당연히 조롱거리가 된다. 볼테르는 소설 ‘캉디드’에서 라이프니츠를 대변하는 인물 팡글로스를 내세우고 그 사상을 비웃는다. 팡글로스는 말한다. “인간의 타락과 저주는 최선의 세계에 필연적으로 들어 있는 것이라고 봅니다”(이봉지 역). 그러나 소설의 주인공은 리스본의 4분의 3을 파괴한 당시의 비극적 지진을 겪고 나서 이렇게 묻는다. 리스본의 지진도 최선의 세계의 일부인가? “이것이 가능한 최선의 세계라면 다른 세계는 도대체 어떤 곳이란 말인가?” 볼테르가 라이프니츠의 이론을 제쳐놓으며 내리는 결론은 다음과 같다. “헛된 공리공론은 집어치우고 일이나 합시다. 그것이 삶을 견뎌내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흥미롭게도 라이프니츠와 정반대로 이 세계의 악을 신의 무능함으로 돌리는 사상도 있다. 카발라(중세유대 신비주의)가 그러하다. 보르헤스에 따르면 카발라에서 여호와는 신성이 거의 소진된 마지막 신으로 묘사된다. “우리가 마지막 발산에 이르면, 거기에서 신성한 부분은 거의 0으로 축소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여호와라고 불리는 이 세상을 창조한 신을 만나게 됩니다. 그런데 그는 왜 이토록 실수로 가득하고 참사로 가득하며, 죄로 가득하고, 육체적 고통으로 가득하며, 죄책감으로 가득하고, 범죄로 가득한 세상을 만든 것일까요? 그것은 신성이 축소돼 실수로 가득한 이 세상을 창조한 여호와에 이르기 때문입니다”(송병선 역).
모든 가능 세계 가운데 최선의 세계가 우리의 세계라는 라이프니츠의 사상보다 우리 세계 자체를 무능한 신의 실패로 여기는 저 구절이, 늘 쓰디쓴 세상사에 시달리는 우리를 수긍하게 할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라이프니츠의 가능 세계 이론은, 신을 변호하기 위해 현실의 이 세계를 최선의 세계라고 항변하는 점을 제외하면 매우 풍부한 통찰을 주고 있다. 하나의 가능한 세계와 또 다른 가능한 세계 사이의 ‘차이’는 무엇일까? 예컨대 이 차이는 앞서 인용했던 프로스트의 두 갈래 길 같은 차이다. 이것은 그야말로 숲속에 있는 수많은 길 가운데 한 갈래 길로 들어서면 생기는 ‘미세한 차이’다. 이 차이란 가령 A와 -A 사이의 전면적인 대립, 모순(contra-diction) 같은 것이 아니다. 들뢰즈 식으로 표현하자면, 아주 부차적으로(vice) 다르게 말할 수 있는 차이(vice-diction), 하나의 길을 선택한 나그네가 거대한 숲속에 만들어 내는 아주 미세한 차이다.
서로 다른 세계들 사이엔 전면적 대립이 아니라 이런 미세한 차이들이 있다. 보르헤스는 이 점을 잘 파악하고 있었다. 각각의 세계로 비유될 수 있는 도서관의 책들을 그는 ‘바벨의 도서관’에서 이렇게 표현한 적이 있다. “한 권의 책은 유일무이한 것으로서 대체가 불가능하지만 … 항상 그것에 대한 수십만 권의 복사본이 있다. 그것들은 단지 글자 하나, 또는 쉼표 하나가 다를 뿐이다”(황병하 역). 이 말을 그대로 받아서 말하자면 글자 하나, 쉼표 하나와 같은 부차적인 차이가 전혀 다른 세계를 현실로 만들어 낸다.
우리는 이 점을 특히 ‘타인과의 만남’ 속에서 절실히 체험한다. 우리의 무수한 가능 세계 가운데서 하나의 세계만을 현실화하는 자는 바로 우리와 인연이 맺어지는 한 타인이 아닌가? 은인이나 애인 등등. 애인을 만나 구원의 세계로 들어서거나 데이트 폭력을 통해 지옥의 세계로 빠지거나, 후원자의 축복을 받거나 또는 동업자에게 사기를 당하는 등등. 서로 다른 타인과의 모든 만남은 서로 차이 나는 세계들이 현실화할 수 있는 열쇠인 것이다. 요컨대 타인들은 서로 미세하게 변별적인 가능 세계들을 감추고 있는 차이들이며, 한 타인을 만난다는 것은 하나의 차별화된 세계를 현실 세계로 펼치는 일이다.
가령 들뢰즈는 마르셀 프루스트의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분석하며, 연애란 바로 사랑하는 타인 속에 들어 있는 가능 세계를 나의 현실 세계로 펼치는 일임을 잘 보여주고 있다. “사랑하는 존재는 우리가 모르는 어떤 가능 세계를 표현한다. 해독해야 할, 다시 말해 해석해야 할 한 세계는 사랑받는 사람 속에 함축돼 있고 감싸져 있으며 마치 수형자처럼 갇혀 있다. … 사랑, 그것은 사랑하는 사람 속에 감싸진 채로 있는 우리가 모르는 세계들을 ‘펼쳐 보이고 전개시키고자’하는 우리의 노력이다.” 숲속의 길 가운데 하나로 들어서듯, 한 사람을 만나거나 지나치거나 하는 작은 차이가 여러 가능 세계 가운데 하나를 우리 미래의 현실로 만든다.
가능 세계에 관한 이런 이야기는 당연히 라이프니츠의 형이상학이나 프루스트의 사랑 이야기에만 그치지 않는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생각해보면, 우리가 만나는 타인으로서의 정치가들 또한 가능 세계를 함축하고 있는 자들이다. 가령 투표란 후보자 속에 들어 있는 가능 세계를 현실 속으로 펼치는 일, 실망 또는 만족, 지옥 또는 천국을 현실에 불러오는 일이다. 민주주의란, 투표가 당락의 차이를 만들어 내고 그 차이가 가능 세계 가운데 하나를 현실화하는 절차인 것이다. 그리고 역사적 회고란 실현되지 않은 가능 세계를 애통해하는 부질없는 복기다.
아마도 메시아의 도래 역시 우리는 이렇게 ‘미세한 차이를 지닌 세계들’이라는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메시아에 관한 랍비의 논의를 철학자 아감벤은 이렇게 설명한다. “메시아적 세계는 또 다른 세계가 아니라 이 평범한 세계 자체를 조금 수정한 것 정도다. 그것은 평범한 세계와 사소한 차이밖에 없다. … 이 작은 차이야말로 모든 의미에서 결정적인 것이다.” 비유컨대, 환자의 병이 진행되는 중에 한순간 개입하는 ‘치료’ 같은 것이 메시아의 도래다. 치료하는 메시아가 개입하는 한순간은 환자의 병이 진행되는 시간과 동떨어진 시간이 아니다. 그것은 병의 진행 중에 속하는 한순간, 기존의 시간의 흐름에 생긴 작은 차이다. 이 작은 차이가 세속적 세계를 메시아의 세계로 만든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 이런 식으로 제안했다. 기쁨 있는 사람은 없는 사람처럼 지내고, 세상과 거래하는 사람은 거래하지 않은 사람처럼 지내고 등등. 이것은 이미 있는 기쁨 속에, 이미 있는 거래 속에, 이미 있는 세계 속에 미세한 차이를 만들어 새로운 가능 세계를 현실화하라는 뜻이다.
철학은 냉혹한 구조물처럼 그냥 필연적으로 서 있을 뿐이지만, 사람들이 그로부터 영감을 얻어내는 일을 막지는 못한다. 생각 속에 떠도는 가능한 모든 세계로부터 단 하나의 세계를 현존하게 하는 일은 미세한 차이, 작은 실천에서 가능하다는 영감 말이다.
서동욱 서강대 철학과 교수
■ 용어설명
라이프니츠와 ‘가능 세계’
근대 합리론을 대표하는 철학자 라이프니츠(1646∼1716)는 ‘가능 세계’ 같은 흥미로운 개념을 많이 만들었다. 그의 사상은 당대 바로크 정신과도 연관을 가진다. 오늘날엔 부정적인 뜻으로 사용되기도 하는 바로크의 ‘매너리즘’은 방식(mode)을 조금씩 바꿔서 사물 자체의 변화를 일으킨다는 뜻을 가진다. 바로크는 건축 양식에서 보듯 그 자체가 새롭다기보단, 동서양의 이런저런 잡다한 양식을 조합해 새로운 것을 이룬다. 라이프니츠의 가능 세계 이론에도 미세한 양식(양태)의 ‘차이’가 새로운 세계를 현실로 만든다는 바로크의 기풍이 스며 있다. 그것은 마치 같은 목도리라도 어떤 양식의 매듭으로 착용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패션이 창조되는 것과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