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 / 안병태
알고 보면 그것도 거짓말이다. ‘일심동체’라는 단어 말이다.
내 장가가던 날 우리 내외를 불러 앉히고 선친께서 훈계하여 가라사대,
“부부는 일심동체니라, 바늘 가는 데 실 가고……”
그렇게 신신당부하던 분이 정작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따라갈 생각은커녕 탈상하자마자 계모를 들였었다.
일심동체라니! 내가 밖에서 술을 마시면 집에 있는 그도 덩달아 취한단 말인가? 그가 목이 마른데 내가 물을 대신 마시면 그의 갈증이 해소된단 말인가? 어불성설이다.
동체는 물론이려니와 일심은 더더욱 아니다.
가령, 나는 치약을 돌돌 말아 올려가며 사용하고, 그는 치약의 허리를 불끈 쥐어 내가 애써 말아 올린 것마저 펴놓고 만다. 치약이 쭈그러들면 그는 서슴없이 새 치약을 꺼내 쓰지만, 나는 새 치약과 쭈그렁이를 양손에 부여잡고 갈등을 한다. 이게 일심인가?
나는 택시가 목적지에 도착하기 전에 요금을 잔돈까지 미리 챙기지만, 그는 택시가 멎고 나서야 이 주머니 저 주머니 꾸물꾸물 뒤적거린 다음 만 원짜리를 턱 내밀어 기사의 비위를 뒤집어놓는다.
내가 차를 타면 독서를 하거나 차창 밖의 풍경화를 감상하지만, 그는 엉덩이만 붙이면 잔다. 한번은 친정 가는 열차에서 남의 남편의 어깨에 기대어 평화롭게 자는 꼴을 본 적도 있다.
또 한 번은 고속버스에서 팔걸이를 베고 누워 자다가 기사로부터 꾸중을 들었다. 그렇거나 말거나 ‘너는 운전이나 잘해라. 나는 한잠 자련다.’들은 척도 아니하더니, 급브레이크를 밟는 바람에 굴러 떨어져 추풍령 내리막길에 버스를 세워놓고 기사와 다툰 적도 있다. 내가 보기에도 기사의 고의성이 엿보였지만, 악습 교정을 위해 언제고 한번은 겪어야할 경험이다 싶어 남의 일처럼 먼 산의 단풍을 바라보았다. 지금도 추풍령의 그 가을빛을 생각하면 속이 다 시원하고도 고소하다.
내가 무얼 사면 달라는 대로 값을 치루지만, 그는 해당 품목의 가게들을 모두 걸터듬어 비교 검토한 다음 가격은 자기가 결정한다. 흥정을 하다말고 출구 쪽으로 비슬비슬 뒷걸음질 치는 시늉을 하면, 상인은 십중팔구 뛰어나와 은근히 손목을 잡으며 밑지고 파노라 항복하기 마련이다.
저번 퇴근길, 노변에서 애호박 다섯 개를 보자기에 펴놓고 오가는 사람들을 쳐다보는 할머니가 보기 딱해 삼천 원에 몽땅 거두어 들어간 일이 있다. 얼마 줬느냐고 묻길래 늘 하던 대로 이천 원 줬다고 거짓말 했지만, 자기 같으면 해가 꼴깍 넘어가길 기다려 단돈 천원에 인사까지 들으며 빼앗아 왔을 거라고 그 애호박이 눈에 보일 때마다 물품구입요령을 강의한다.
나는 밤을 하얗게 새울 때가 많지만, 그는 아홉 시 뉴스를 보는 법이 없다. 나는 제발 코 좀 골지 말라 애원하고, 그는 전기요금도 못 건지는 잡문 그만 긁적거리고 제발 불 좀 끄라며 잠꼬대를 한다. 나는 느긋하게 아침잠을 즐기지만 그는 새벽같이 일어나 창문을 열어젖히고 과격하게 청소기를 운전하며 빨대로 내 이부자리 밑을 들쑤신다.
나는 내 수입 범위 내에서 적금 붓기를 건의하지만, 이집의 독재자는 남이 권하는 대로 계를 든다. 그러다 내 연봉만큼 떼먹힌 적도 있다. 그에겐 통한의 약점이지만 내겐 평생 우려먹을 유일한 공격카드다.
내가 도배를 하면 꽃잎 하나, 잠자리 꼬리 하나까지 꼼꼼히 그림을 맞추지만, 그는 잠자리 몸통에다 코스모스를 맞물리는 건 예사요, 아예 도배지를 거꾸로 붙여놓고도 그걸 모른다. 그러니 속도는 대단히 빨라, 내가 도배장이를 했더라면 꼬물대다가 식구들 다 굶겨 죽였을 거라고 악담을 한다.
나는 식탁에 격식을 갖춰 차려주지 않으면 수저를 들지 않지만, 그는 싱크대 앞에 서서 바가지 비빔밥 먹는 걸 즐긴다. 궁상스러워 보인다고 극구 말리지만 반찬 버무린 바가지 양념이 아깝다며 바가지 전을 혀로 핥기까지 한다. 그렇게 설거지 감 하나라도 절약하여 남긴 시간에는 낮잠을 즐긴다.
어쩌다 내가 밥을 지으면 거의 정량을 맞추지만, 그는 사만 번이나 밥을 지은 경력으로도 꼭 두어 그릇씩 남긴다. 맞선보던 날 내 장갑보다 더 큰 것을 끼고 있을 때 이미 알아보았지만, 식은 밥 처치도 하루 이틀 말이지 이젠 넌더리가 난다.
보름달이 형산강을 건너가고 있다. 나는 정원 바위에 걸터앉아 달 속에 어른거리다 사라지는 그리운 사람들의 얼굴과 그때 그 시절을 그려보건만, 그는 그렇게 달이 밝거든 옥상에 올라가 빨래나 걷어오란다.
장맛비가 연일 추적추적 내린다. 나는 창을 열고 처마 끝의 낙수를 바라보며, 아래로, 아래로 제 몸을 낮추고도 육․해․공을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그 불멸의 생명력을 생각하건만, 그는 거실에다 빨랫줄을 얽어매며 구시렁구시렁 혀를 찬다.
소슬바람에 석류꽃잎이 낙화분분 흩날린다. 낙화인들 꽃이 아니랴. 석류꽃은 낙화가 더 애잔하다. 나는 주홍빛 꽃잎 사이를 골라 디디며 화무십일홍을 중얼거리는 한편, 가을에 만날 석류의 속살을 생각하건만, 그는 질펀하게 널린 ‘웬수의 꽃잎’을 향해 눈을 흘기며 빗자루를 찾아 나선다.
성격차이를 이유로 혼인신고서 잉크도 마르기 전에 휑하니 친정으로 되돌아간 외재종질부가 있다. 가치관 차이를 빌미로 임명장 인주도 마르기 전에 쫓겨나는 장관도 더러 보았다. 그렇게 이별을 할라치면 우리는 천 번도 넘게 이별가를 합창했으련만 삼십 구년 세월, 일제강점기를 뛰어넘는 장구한 세월을 멀쩡하게 서로 버티고 있다. 친구 말마따나 기적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