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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 12: 1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1. 맨 먼저 아브람에게 가나안 땅을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과 아브람의 순종(1-9)
2. 그 다음에는 아브람이 애굽으로 가는 상황이 기록되고 있습니다(10-20).
본 장부터 신앙의 조상 아브람에게 임한 계시(啓示)가 시작됩니다. 아브람이 받은 계시에 대하여 우선 몇 가지 말해 보려고 합니다.
(1) 먼저 계시의 방법이 있습니다.
① 그 방법은 하나님이 친히 말씀하셨거나 혹은 “여호와의 사자”라는 이가(16:7, 22:15, 24:7, 31:11) 나타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호와의 사자”란 이는 누구였나? 그는 자기가 친히 하나님의 입장을 취하기도 하시고 하나님의 사자의 입장을 취하기도 하셨습니다. 그러면 그는 하나님과 동일하신 분이시면서도 하나님과 다른 분이십니다. 그가 형상을 취하신 점에서는 하나님과 다른 분이요, 그가 친히 하나님의 입장을 취하신 점에서는 하나님과 동일하신 분이십니다. 겔할더스 보스는 여기서 이중 의미를 발견하였습니다.
첫째, 상징적 의미 곧 하나님께서 보이는 형상을 취하여 사람의 감각 접촉을 가능케 한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의 영성(靈性) 표시의 의미, 곧 보이는 그분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 사람의 주의(注意)를 끌어 하나님을 제 삼자로 가리킨 점입니다.
이런 이중 의미는, 후대의 그리스도의 화육(化肉)을 예언한 것입니다.
② 계시(啓示)의 방법으로 꿈을 사용하신 것입니다(28:12, 31:11).
하나님께서 이런 계시 방법을 옛 사람들에게 대하여 사용하셨으나 성경이 완비된 후대에는 꿈을 계시적 권위(權威) 있는 것으로 사용치 않으십니다.
(2) 그 다음은 계시의 내용이 있습니다.
그 중요한 것은 12:3 에 있으니 그 골자는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고 한 말씀입니다. 그것은 메시야, 곧 아브라함의 자손(마1:1, 갈3:16)으로 말미암아 만민이 구원 축복 받을 일에 대한 예언입니다. 이 예언의 특색은 다음과 같습니다.
① 보편주의, 모든 나라들에 속한 사람들이 구원 축복을 받음
② 선택의 원리, 아브람이 갈대아 우르에서 불러내심이 됨
③ 초자연주의, 이것은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없는 것을 해 주려고 약속하심을 말함입니다. 곧 객관적 면에서는 엘 솨따이(창17:1, 28:3, 48:3, 출6:3)라는 하나님, 곧 무소불능자께서 그것을 가능하게 이루어 가실 것이고, 주관면 곧 인간 편에서는 하나님에게 아무런 힘을 기여함도 없이 신앙으로 거저 구원 축복을 받아 누리게 됨입니다. 그것은 초자연주의, 곧 기독교의 구원 체제입니다. 이것이야말로 믿음으로만 구원 얻는 사실을 보여주는 기본 계시(基本啓示)입니다.본문 1절은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입니다.
1. 1절 첫부분은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입니다.
이 장들의 애매한 분류가 신자들에게 문제를 일으키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신자들로 하여금 이 문장을 이 전장의 마지막 두 구절들과 연결짓게 해야 합니다. 모세는 전에도 데라와 아브람이 자기 고향 땅을 떠나서 가나안 땅에 거하려고 갔다는 사실을 언급했습니다. 그는 이제 설명하기를 경박하고 변덕스런 사람들이 곧잘 하는 것과 같이 경거망동한 마음으로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또한 까다로운 사람들이 흔히 하듯이 그들의 고향 땅에 대하여 지겨워서 다른 지방으로 떠나게 된 것도 아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범죄를 하며 이리저리 도망 다니는 도망자들도 아니라고 합니다.
또 어떤 어리석은 소망을 가지고 정처 없이 떠다니는 자들도 아니었다고 합니다. 또는 많은 사람들이 자기들의 욕구를 좇아서 이리저리 다니는 자들처럼 어떤 유혹에 이끌려 방황하는 자들도 아니었습니다. 오직 그들은 아브람이 앞으로 나아가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았으며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만 그 발걸음을 옮겨가는 자들이었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구절은 하나님이 아브람의 아버지 데라가 죽은 후에 그에게 말씀하신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설명하는 자들은 바로 모세가 하는 말로 인하여 쉽사리 반박되고 있습니다.
만약 아브람이 이미 거할 지방이 없이 어느 곳에서나 나그네로 우거하는 자들이었다면 하나님의 명령인 즉 ‘네 땅과 고향과 네 아버지의 집을 떠나라’고 하신 것은 불필요한 것이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점에 대하여 스데반은 확증으로 부가하며 말하고 있습니다. 확실히 이 구절에 대한 그의 적절한 해석은 인정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이제 스데반께서는 하란에 거하기 전에 메소포타미아에서 있을 때에 하나님이 그에게 나타나셨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서 스데반께서는 우리가 지금 설명하고 있는 이 말을 인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는 이 때만에 아브람이 갈대아에서 이사를 했다고 결론을 짓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후에 하나님이 친히 반복하신(15:7) “나는 너를 갈대아 우르에서 데리고 나온 여호와이다” 라는 말을 절대로 그냥 지나쳐서는 안될 것입니다. 거기서 우리는 갈대아에 거하고 있은 후에 처음에는 하나님의 손이 그에게 뻗쳐지지 않았으나 아직까지도 그는 갈대아에서 집을 삼고 남아있었던 사실을 추론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어리석게도 의심을 품고 있는 이 하나님의 명령은 정말로 대조적인 오류를 반증하는 우리가 충분히 제시해야 할 명령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그때까지 그분의 품안에 정착하고 있는 사람 외에는 그렇게 말씀하실 수가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요, 또한 그의 일을 버리지 않고 친척들 가운데서 그의 생활에 변화가 전혀 없이 조용하고 정숙하게 살고 있는 자가 아니면 그렇게 말씀하실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정을 붙이지 않고 모든 친척들과 불화하게 살고 있는 자에게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하셨다면 그의 대답은 아주 쉽사리 ‘예 저는 제 고향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저는 지금 저의 친척들로부터 멀리 떠나와 있습니다’ 하고 대답할 것입니다. 요약하면 모세가 이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하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이 기나긴 여행이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아브람과 그의 아버지 데라와 함께 착수되었던 사실을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또한 나타나고 있는 것은 데라가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이 결핍될 정도로 미신들로 현혹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건강 면에서 이미 파괴되고 떨어져 있는 옳은 사람이 자기의 고향 땅을 떠나간다는 것은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비록 질식되어 있긴 하지만 진정한 종교는 아직도 그의 마음에 남아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자기의 아들이 떠나라고 명령을 받은 곳이 저주를 받았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에 거기서 다른 사람과 함께 멸망하지 않게 되기를 바라는 것이 그의 소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여호와가 구해내시려고 하는 자와 관련된 자로서 자신을 그에게 참여시켰습니다.
우리가 담대하게 말하거니와 그가 마지막 날에 우리의 나태함을 정죄하기 위하여 참으로 명백한 증거로 입증해 줄 것입니다. 그가 주장하였으리라고 여기지는 변명은 쉽고 그럴 듯 하였습니다. 이를테면 그는 아무런 명령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집에서 조용하게 남아 있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불신의 어둠 가운데서는 비록 봉사였지만 그래도 그의 길을 전부 비추고 있는 빛의 광선을 눈을 똑바로 뜨고 주목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한편 우리가 하나님의 부르심이 직접 우리 귀에 울릴 때에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남아있는 동안에 그는 그 사실을 의식하고 깨달았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이 소명은 하나님의 은혜스런 긍휼의 신호가 되는 본보기가 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은 이전의 행위로 취득했던 장점들로 인하여 하나님과 함께 했던 사람인가? 아브라함이 그분에게 나아왔는가? 또는 그분의 호의를 사게 되었단 말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언제나 마음 속에 상기해야 될 것은 우리가 전에 여호수아서에 있는 구절에서 추론했던 대로 그는 우상의 더러움에 빠지기도 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지금은 하나님이 거저 그분의 손을 뻗쳐서 방황하는 자를 다시 데리고 오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신성한 입을 열어서 사단의 간교함으로 속았던 자에게 구원의 길을 보여주려고 계획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비참하고 잃어버림을 당한 사람이 그에게 주어진 그리고 하나님의 많은 경배자들에게 주어진 우선권을 갖는다는 것이 참으로 놀라운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가 그 안에서 부흥되게 하는 것과 그 자신이 모든 믿는 자들의 조상이 되었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입니다.
또한 생명의 언약을 그가 소유하게 되었다는 것은 더욱 더 놀라운 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현현이 그의 인격 안에서 더욱 더 나타나게 하려는 계획으로 의도적으로 되어진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우리 모두의 소명에 대한 본보기이기 때문입니다. 그 안에서 우리는 단순한 하나님의 긍휼로 존재하지 않는 것들이 무에서 일어났다는 것은 그것들이 특별한 것이 되게 하려는 것이라는 사실을 파악하게 됩니다.
2. 1절 중간에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말들의 이런 축적은 불필요한 듯이 보이고 있습니다.
그것에 부가시켜서 다른 곳에서는 아주 간결하게 묘사했던 모세가 여기서는 세 가지의 다른 형태의 구사법으로 평이하고 쉽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경우는 아주 달리하고 있으니 그것은 이거 지시(指示) 그 자체가 슬픈 일이며 그들의 고향 땅의 향기가 거의 모든 사람을 그곳에 고착시키며 붙들기 때문에 하나님은 끈질기게 명령을 하시어 아브람의 마음을 철저하게 침투하실 목적이셨습니다 만약 그분이 단 한마디 말로 네 고향 땅을 떠나라고 말씀하셨다면 이것은 정말로 그의 마음에 조금도 고통을 느끼게 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람은 자기가 친척들과 그의 아버지 집을 단념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말을 들었을 때에 그 어느 때보다도 그 마음은 아팠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종들이 그런 고통과 문제 가운데 있는 것을 보시매 잔인한 기쁨을 즐기신다고는 절대로 추측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분은 오직 그렇게 하여 그들의 모든 감정들을 시험해 보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마음 속에 아직도 발견되지 않고 잠적해 있는 곳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곳을 그대로 두지 않으시려는 의도로 그렇게 하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잠간 동안은 아주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을 많이 봅니다. 그러나 그 후에는 그것이 식어져 버리는 것입니다. 이런 현상이 어떻게 나올 수가 있는가? 오직 그들은 기초가 없이 무언가를 짓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결심하시기를 철저하게 아브람의 감정을 일깨워서 그가 무모하게 그리고 무작정 아무 생각 없이 무슨 일을 수행하지 않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회개하고 나서 곧 바람부는 대로 따라가다가 변심하여 다시 돌아가지 않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만약 우리가 줄기차게 하나님을 따르기를 원한다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모든 불편한 점들과 어려움과 모든 위험들을 주의 깊게 숙고해 보아야 됩니다. 성급한 열심은 시든 꽃들을 만들 뿐 입니다. 그렇지만 경건으로 깊고 견고하게 잘 박혀진 뿌리에서는 우리의 전 생애를 통하여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3. 1절 끝에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것은 아브람의 신앙을 증거하는 다른 시험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종이 정말로 그분의 말씀에 달라 붙어 있는가를 더 잘 시험하시기 위하여 그렇게 그를 염려 가운데 있게 하지 않고 직접 그 땅을 가리켜 주시지 않으십니다. 마치 그분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명령하니 너는 눈을 감고 나아가거라. 그리고 절대로 네 고향 땅을 버리기 전에는 너를 어디로 데리고 가는가를 묻지 말아라. 그리고 네가 자신을 모두 남김없이 내어 주기 전에는 절대로 그렇게 묻지 말아라’ 하고 말씀하신 것과 같은 표현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가 우리 자신의 눈으로 보기엔 지혜롭지 않고 오직 자신을 여호와께 전부 맡길 때에 우리는 순종하게 된다는 참된 증거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언제든지 그분이 우리에게서 요구하신다면 그 성공 여부에 대하여 지극히 소심하게 염려한 나머지 우리의 길을 버리는 것을 두려워하고 걱정하는 자세를 절대로 갖지 말아야 되는 것입니다. 눈을 감고 우리의 인도자이신 여호와를 그냥 따라가는 것이 우리의 예지를 의지하고 그것이 우리에게 고안해 주는 개미 체바퀴 돌 듯 그런 상태에서 방황하는 것보다 훨씬 좋기 때문입니다.
누가 이 말이 이전에 제시된 말과는 상이하다고 하면서 이전에는 모세가 데라와 아브람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 살기 위하여 자기들의 고향 땅을 떠났다고 선언하지 않았느냐고 반론을 제기한다면 그 해결책을 쉽사리 제시할 수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모세의 표현에서 예변법(豫辨法)을 인정한다면 그 문제의 해결을 아주 쉽습니다. 그것은 벧엘이라는 이름을 사용하여 바로 이 장에서 따르고 있는 표현이며 또한 성경에서 빈번하게 언급되고 있는 표현법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어디로 가야 할지를 전혀 알지 못하였습니다.
오직 그들은 하나님이 부르시는 곳이면 어디든지 갈 각오였기 때문에 모세는 그의 인격으로 말하면서 비록 지금까지는 그 두 사람들에게 전혀 알려져 있지 않았으나 그 후에 아브람 혼자에게만 알려졌던 땅을 언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나안 땅으로 갈 계획을 가지고 그들이 떠났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장차 그들에게 보여질 땅에 관한 약속을 받고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을 실제로 그들에게 주실 때까지 철저하게 그분의 통치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아브람의 헌신을 입증하시고 나서 그의 마음 속에서 모든 의심을 완전히 제거해 버리셨다는 것은 아마 사실일 것입니다. 분명히 이제 오직 한기간 동안 알려주지 않고 감추시는 것이 그분의 무슨 뜻이라는 것을 그에게 암시해 주셨을지는 우리로서는 모릅니다. 다만 아브람은 하나님의 섭리에 그의 모든 관심을 쏟고 그를 방해하는 모든 것을 그분의 품에 완전히 던져버리고 결국 그가 어디로 발걸음을 옮겨야 될지도 모르면서 자기의 고향 땅을 떠나는 것을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을 때 그는 하나님께 진정으로 자신을 순종시켰다는 것을 선포했던 것을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이런 방법으로 육체의 지혜는 명령에 굴복하게 되었으며 동시에 그의 모든 애착심들이 굴복을 당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한가지 질문이 있으니 왜 하나님은 그분의 종을 다른 거룩한 조상들과 함께 살 수 있는 동방나라로 보내지 않고 가나안 땅으로 보내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 변화가 더 악화된 것으로 보이지 않게 하려고 그들이 멜기세덱으로 여기는 그의 조상인 셈과 함께 거하게 할 목적으로 거기로 인도되었다고 설명할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그것이 하나님의 의도였다면 아브람이 다른 방향으로 발길을 돌렸다는 것이 이상하지 않은가?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가 소돔 평야에서 있었던 전투에서 돌아오기 전에는 그가 멜기세덱을 만났다는 기록을 읽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다음에 더 적절한 곳에서 멜기세덱이 셈이었다는 상상이 얼마나 성급하고 졸렬한 것인가를 생각해 보기로 합시다. 지금 우리가 추리하고 있는 제목에 관하여는 결국 다음에 따르는 결과에서 이렇게 추론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이 사람들이 추측하고 있는 것과는 아주 판이하였다는 점입니다.
지난날의 통한스런 죄악 때문에 그곳의 민족들은 완전히 멸망되어질 존재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종을 당분간 그들 가운데서 우거하게 하셔서 믿음으로 그가 그 땅의 상속자가 된 것을 깨닫게 하셨으며 그가 죽은 후에도 오랜 기간까지 그의 후손들에게 예약된 그 땅을 실제로 소유하게 된다는 사실을 믿음으로 깨닫게 하려고 그렇게 죄악 가운데서 살게 하신 것입니다.
이 순전한 이유 때문에 이곳을 향하여 건너가라고 명령을 받은 것이며 바로 그의 후손들에게 소유를 주실 목적 때문에 그곳의 모든 거주인들이 철거되어야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아브람과 이삭과 야곱이 그 땅에서 나그네가 되어 믿음으로 그곳을 다스리는 통치권을 지니게 될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것입니다. 그 통치권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약속하셨으니 그것은 그들의 후손들이 백배한 용기를 가지고 그것을 소유하는 것에 박차를 가하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