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4000
10월4일[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기념일/연중 제26주간 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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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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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I8GiuR4bhZs
[작은형제회 김종화 알로이시오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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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무소유의 삶 속에서 진정한 행복과 대자유의 삶을 찾은 프란치스코!>
가톨릭 성인(聖人)이면서도 타 종교 신자들뿐 아니라, 무신론자들로부터 존경과 사랑을 한 몸에 받는 성인이 있으니 오늘 축일을 맞이하시는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1182~1226)입니다.
프란치스코가 개척한 성화의 길은 참으로 위대합니다. 그는 복음서 안에 드러난 예수님의 여러 면모 가운데, 머리 두실 곳조차 없을 정도로 가난했던 예수님, 그래서 그 어느 곳에도 묶이지 않으셨던 대자유 그 자체이신 예수님을 단 한치의 오차도 없이 흠모하고 추구했습니다.
인간적 나약함과 유한성을 딛고, 그 위에 펼쳐진 자기 극복과 자기 해방과 자기 이탈을 위한 프란치스코의 하루 하루 여행길은 참으로 위대하고 빛나는 나날이었습니다.
그의 성화(聖化) 여정을 바라볼 때 마다 큰 감탄과 함께 큰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제 발밑을 내려다보며 큰 한숨을 내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 역시 그토록 오랜 세월 동안, 나 자신으로부터 한번 이탈해보겠노라고, 세상으로부터 자유로워져 보겠노라고, 갖은 속박으로부터 해방되어보겠노라고, 발버둥쳐 왔지만 아직도 제자리 걸음입니다.
초심자 시절 지니고 있었던 악습을 아직도 그대로 지니고 있습니다. 그때 당시 일상적으로 짓던 죄를 아직도 같은 방식으로 답습하고 있습니다.
이탈, 자유, 해방...말이 쉽지 정말 어려운 것입니다. 그래서 더더욱 프란치스코의 삶이 대단해 보이는 것입니다. 그는 한올 한올 얽히고 꼬인 실타래 풀듯이 인내롭게, 그리고 단호하게 자신의 문제나 약점들을 극복해나갔습니다. 생각하고 계획한 일들을 머릿속이나 마음속에만 간직하지 않고, 구체적으로 실행해나갔습니다.
한 가지 위안이 되는 측면이 있습니다. 이토록 위대한 대 성인 프란치스코에게도 젊은 시절의 흑역사(黑歷史)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의 이름이 왜 ‘아시시의 프란치스코’로 불리는 지 아십니까? 사실 그의 본래 이름은 죠반니 베르나도네(Giovanni Bernadone)였습니다. 그는 이탈리아 중부 도시 아시시에서 출생했습니다. 그의 부친은 자수성가한 포목상이었습니다. 그의 어린 시절은 부자 아버지 덕분에 호화판이었습니다.
당시 아시시 남자 청년들의 로망이 하나 있었습니다. 옆 나라 프랑스로부터 건너온 청년 문화 중에 하나였습니다. 멋진 기사(騎士)가 되고, 잘생긴 말을 타고 다니면서, 아름다운 여인을 찾는 것이었습니다. 그리던 여인을 찾게 되면, 미리 준비해둔 낭만 가득한 음유시를 한편 멋드러지게 읊는 것이었습니다.
청년 프란치스코 역시 프랑스 음유 시인들의 서정시를 열심히 읽고 외웠습니다. 화려하고 멋진 프랑스 패션으로 온몸을 치장했습니다. 그 때문에 친구들로부터 별명을 하나 얻게 되었는데, 바로 프란치스코였습니다. ‘어린 프랑스인’이라는 뜻입니다.
한때 영혼의 성장이나 구원, 이웃 사랑의 실천이나 청빈의 덕과는 철저하게도 담을 쌓고 살아왔던 프란치스코, 잔뜩 겉멋만 들어 유행의 최첨단을 걷고 있던 그가, 적당한 회개가 아니라 180도 완전 회개해서, 몇 백년이 지난 지금까지 세상 만인들로부터 존경과 각광을 받고 있다는 것, 정말 놀랍지 않습니까?
프란치스코의 신앙 여정, 회개 여정, 하느님을 찾아갔던 순례 여정은, 한없이 부족한 우리에게 큰 희망과 위로가 되어 주고 있습니다.
프란치스코의 가난이 우리의 가난과 다른 것은 어쩔 수 없이 맞이한 가난이 아니라 스스로 선택한 가난이었습니다. 그는 더없이 환하고 행복한 얼굴로 가난을 살았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소유의 삶 속에서 행복을 찾은 반면, 그는 무소유의 삶 속에 진정한 행복, 대자유의 삶을 찾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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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bkTeeRKF--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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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개: 병신 여우 짓은 그만두고 호랑이를 본받는 것>
삶의 궁핍함과 어려움에 지쳐 무작정 숲속을 거닐던 사나이가 다리 잃은 여우를 보았습니다. ‘저래서 어떻게 살아있을까?’ 이렇게 궁금해하고 있는데, 호랑이가 사냥한 먹이를 물고 들어와서는 실컷 먹고도 여우가 먹을 고기를 남겨 놓는 것이었습니다. 이튿날도 같은 방식으로 하느님은 여우를 먹이셨습니다. 사나이는 믿음이 있었기에 하느님의 크신 선의에 깊이 탄복하며 주님을 찬미했습니다.
‘하느님은 저런 여우도 살리시는 분이시구나. 하물며 당신을 믿는 나야 얼마나 잘 먹이시겠나. 지금까지 먹고 살 걱정만 하며 살아온 내가 부끄럽구나.
내일 걱정은 내일이 하게 해야 하는데.’ 이렇게 생각하고 사나이는 여러 날을 주님의 섭리에 맡기며 앉아있었습니다. 그러나 누구도 자신에게 음식을 가져다주는 이는 없었습니다. 그 사람은 굶주림에 지쳐 죽어가며 죽음의 문턱에 다다랐습니다. 그때 문득 한 소리가 들렸습니다. “오, 거짓의 길에 들어선 자야. 참을 향해 눈을 떠라! 병신 여우 흉내랑은 그만두고 호랑이를 본받아라.”
예수님은 하느님께서 파견하시어 그분이 주시는 구원을 가져다주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코라진과 벳사이다, 그리고 카파르나움은 그분의 기적들에도 불구하고 그분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무슨 말일까요? 은총만 바라고 예수님을 본받으려 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회개란 받기만 하는 존재라는 처지에서 나도 예수님처럼 내어줄 수 있는 존재라는 믿음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헨리 나우웬 성공적인 학자이자 신학자였지만 자신의 감정적, 영적 부담으로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는 특히 자신의 불안감과 내면의 혼란을 고려할 때 다른 사람들로부터 받은 사랑과 지원에 압도감을 느꼈습니다. 그는 자신이 속한 공동체가 그에게 보여준 사랑을 충분히 받을 자격이 없다고 느꼈고, 이에 따라
영적인 불균형이 생겼습니다.
나우웬의 심오한 마음의 변화는 렘브란트의 ‘탕자의 귀환’ 그림을 접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나우웬은 아버지와 함께 있지만, 만족하지 못하는 형에게서 자기 모습을 봅니다. 동생처럼 회개하고 아버지 품에 안기고 싶습니다. 양심은 받은 것에 보답할 때 자유로워집니다. 사실 지금까지 받기만 하였지, 보답하지는 못했던 것입니다.
그는 사랑을 수동적으로 받는 사람(결코 완전히 갚을 수 없다는 생각에 부담을 느끼며)에서 적극적으로 사랑을 주는 사람으로 바뀔 때만 자신의 영혼이 진정한 치유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하기 시작했습니다.
사랑과 수용에 대한 나우웬의 이해의 변화는 그가 자신의 권위 있는 학문적, 신학적 경력을 뒤로하고 지적 장애가 있는 사람들을 위한 공동체인 라르쉬(L'Arche)에서 살고 일하기로 결정한 데서 정점에 이르렀습니다. 이곳에서 나우웬은 어떤 세상적인 방법으로도 자신에게 갚을 수 없는 사람들을 돌보며 평안을 찾았습니다. 장애인을 섬기면서 그는 사랑은 거래가 아니라 사랑받을 가치가 있거나 사랑에 보답하는 것이 아니라 사심 없이 사랑을 주는 것임을 발견했습니다.
닉 부이치치도 여덟 살 이후로 손과 발이 없는 것에 좌절하여 자살을 세 번씩이나 시도하였습니다.
그러나 희망 전도사로 청년들에게 용기를 주는 강사로 살아가면서 이미 받은 것이 많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회개입니다. 부족하게 받았다고 여기는 사람에서 갚아나는 삶을 사는 삶으로의 변화입니다. 은총을 받으면서도 끝내 이런 회개가 이뤄지지 않으면 마지막 때에 오늘 멸망을 예고한 도시들과 다를 바가 없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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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오늘은 프란치스코 성인의 축일입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의 고향인 아시시에 가면 성인에 대한 이야기가 많습니다. 성인은 감각적인 언어를 사용했던 것 같습니다. 성인은 새와도 대화 할 수 있었고, 장미와도 대화 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성인이 기도하던 성당에는 비둘기 한 쌍이 있습니다. 이 비둘기는 몇 백 년을 이어가며 성인의 곁을 지키고 있습니다. 성인이 유혹을 견디기 위해서 장미 밭에서 굴렀을 때, 장미는 가시를 내지 않았다고 합니다. 지금도 성인이 기도하던 곳에는 가시가 없는 장미가 자라고 있습니다. 우리들 또한 마음과 마음이 통하는 대화를 하면 좋겠습니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는 삶을 살면 좋겠습니다.
오늘은 프란치스코 성인이 우리에게 남겨준 ‘영성’을 나누고 싶습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의 영성은 ‘겸손’에서 시작됩니다. 그는 자신을 모든 사람들 중에서 가장 작은 존재로 여겼고, 가난의 삶을 선택했습니다. 이것은 그가 세속적인 재화를 멸시해서가 아니라, 세상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난 마음에서 진정한 부유함을 발견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사셨던 것처럼 가난하고 겸손하게 살면서, 프란치스코는 참된 자유를 경험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모든 죄악 된 일을 해왔습니다. 하느님께서 나를 통해 일하실 수 있다면, 그분은 누구를 통해서라도 일하실 수 있습니다.” 이 겸손함 덕분에 프란치스코는 가난한 이들, 소외된 이들, 고통받는 이들 속에서 그리스도의 얼굴을 보았습니다. 그는 당시 사회에서 가장 소외된 이들인 나병환자들에게 다가가 그들을 안아주었는데, 그것은 동정심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진정한 사랑에서 나온 행동이었습니다. 자만과 자기 과시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성 프란치스코의 모범은 우리에게 겸손의 덕을 되찾으라고 이야기합니다. 우리도 프란치스코 성인처럼 겸손한 마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의 영성은 ‘생명’ 존중입니다. 이는 인간만이 아니라, 존재하는 모든 생명에 대한 존중입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태양을 "형님 태양," 달을 "누님 달"이라 부르며 모든 피조물들을 하느님의 가족으로 여겼습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에게 자연은 하느님의 아름다움과 사랑의 반영이었습니다. 모든 피조물이 하느님께서 주신 선물임을 우리에게 알려 줍니다. 창조물에 대한 사랑은 단순히 시적 표현에 그치지 않았고, 매우 깊은 영성이었습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창조물을 돌보는 것이 창조주를 존경하는 방법임을 깨달았습니다. 오늘날 환경 위기의 시대에, 우리는 성 프란치스코의 모범을 따라야 합니다. 우리는 지구를 돌보는 것이 단순한 사회적 책임이 아니라, 신앙의 문제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모든 나무, 강, 생명체는 하느님의 창조적인 손길을 반영합니다. 우리는 지구의 아름다움을 존중하고, 후손들이 그 열매를 누릴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의 영성은 ‘그리스도께 대한 지극한 사랑’입니다. 성 프란치스코의 삶을 가장 잘 표현하는 것은 그리스도와 이웃을 향한 그의 급진적인 사랑일 것입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하느님의 사랑에 대해 말로만 전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것을 행동으로 몸소 보여주었습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의 삶은 우리에게 그리스도인의 여정은 크고 특별한 일이 아니라, 매일매일의 단순한 사랑 안에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가난한 이들들, 병자들, 소외된 이들 속에서 그리스도를 발견했고, 그들을 조건 없이, 그리스도께서 그를 사랑하신 것처럼 사랑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삶도, 천사도, 권세도, 현재의 것도, 미래의 것도, 권능도, 저 높은 곳도, 저 깊은 곳도, 그 밖의 어떠한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바오로 사도가 말한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을 온 몸으로 실천하였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도 사랑해야 합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겸손, 단순함, 창조물에 대한 사랑, 그리고 그리스도께 대한 깊은 헌신의 메시지로 세상에 영감을 주고 있습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의 삶은 우리에게 거룩함으로 가는 길이 부나 권력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겸손과 사랑, 그리고 신실함 안에 있다는 것을 일깨워줍니다. 우리도 그의 발자취를 따라 가난한 자들을 안아주고, 창조물을 돌보고, 모든 마음을 다해 그리스도를 사랑하며 살아갈 수 있기를 청하면 좋겠습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의 영성을 묵상하면서 프란치스코 성인의 ‘평화를 구하는 기도’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주님!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의혹이 있는 곳에 신앙을,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주소서. 위로 받기보다는 위로하고, 이해 받기보다는 이해하며, 사랑 받기보다는 사랑하게 하소서. 우리는 줌으로써 받고, 자기를 버리고 죽음으로써 영생을 얻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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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10,13-16: 띠로와 시돈에게 기적을 보였더라면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큰 기적과 놀라운 일을 통하여 하느님의 말씀과 뜻을 전해주었는데도 믿지 않는 마을들을 엄하게 꾸짖으신다. 하느님의 백성이라고 하면서도 주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다. 기적을 베풀었다는 것은 하느님의 능력을 보여주었고 하느님의 은총을 베풀었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들은 받아들이지도, 응답도, 보답도, 회개도 하지 않았음을 한탄하신다. 예수님의 말씀은 이 마을을 저주하시는 말씀이 아니다. 그들이 모두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하느님 앞에 올바로 서 있기를 바라시며 걱정하시는 말씀이다. 이 순간에도 나에게 그렇게 말씀하고 계시다. 너에게 베푼 모든 은혜를 다른 사람에게 주었다면 그들은 어떻게 했겠느냐? 라고 나에게 말씀하실 수 있다. 나는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너희 말을 듣는 이는 내 말을 듣는 사람이고, 너희를 물리치는 자는 나를 물리치는 사람이며, 나를 물리치는 자는 나를 보내신 분을 물리치는 사람이다.”(16절) 주님께서는 사도들에게 큰 권한과 최고의 영예를 주셨다. 비록 인간들이지만 하느님 같은 영광을 입혀 주셨다. 그들을 물리치는 것은 그분을 물리치는 것이며, 당신을 보내신 하느님 아버지를 물리치는 죄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사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마태 10,20) 주님께서 그들 안에서 성령으로 말씀하시는 것이니, 어떻게 잘못된 것을 말할 수 있겠는가? 그들의 말은 성령 안에서 하는 선포이기 때문에 바로 하느님의 말씀이다. 주님께서는 그들의 말을 듣지 않는 것은 그리스도의 말을 듣지 않는 것이요, 그들을 물리치는 것은 그리스도를 물리치는 것이며 그분과 아버지 하느님을 물리치는 것이라고 단호하게 말씀하신다. 우리는 이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모든 은총과 사랑에 감사드리며, 항상 하느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고 그것을 실천하는 삶을 살아가도록 하여야 한다. 하느님의 말씀과 사도들이 전해준 신앙을 지키고 실천하면서 하느님과 교회를 위하여 봉사할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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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성 도미니코선교수녀회 안소근 실비아 수녀님]
“네가 이 모든 것을 알거든 말해 보아라.”(욥기 38,18) 이것이 문제입니다.
욥은 자신의 고통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욥기의 주인공 욥은 하느님께서도 인정하시는 의인입니다. 그가 고통을 당한 것은 그 자신의 죄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욥의 친구들은 하느님께서 의인에게 상을 주시고 악인들을 벌하신다고 주장하지만, 욥이 보는 세상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아니, 욥 자신에게서 이미 그러한 원칙이 적용되지 않는 사례를 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욥은 하느님께 질문하고 탄원하였습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오히려 물으십니다. 아침에게 명령하여 본 적이 있는지, 새벽에게 자리를 지시하여 본 적이 있는지, 많은 물음을 던지십니다. 욥은 이 물음들에 답을 할 수가 없습니다. 모르는 것이 많고, 자신이 다스릴 수 없는 것이 많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해서 하느님께서는 이 물음들로, 욥이 자신의 한계를 깨닫게 하십니다. 인간이 모든 것을 다 알지는 못합니다. 모든 것을 다 알아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심지어 그것이 나의 고통이거나, 적어도 나에게는 무엇보다 중대할 수 있는 문제라 하더라도, 인간이 그것을 다 알지는 못합니다. 그저 계절이 바뀌고 해가 뜨고 지듯이, 동물들이 살아가듯이 모든 것이 하느님의 섭리 안에 있음을 믿어야 할 따름입니다.
이것을 깨달은 욥은 입을 막고 더 이상 말하지 않습니다. 세상에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많지만, 내 삶 안에서도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많이 일어나지만, 그것을 다 아는 것은 하느님의 몫이고 인간의 몫이 아닙니다. 자신의 한계를 아는 것, 그것이 욥기가 말하는 지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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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회개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은 없습니다.>
“불행하여라, 너 코라진아! 불행하여라, 너 벳사이다야! 너희에게 일어난 기적들이 티로와 시돈에서 일어났더라면, 그들은 벌써 자루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쓰고 앉아 회개하였을 것이다. 그러니 심판 때에 티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 그리고 너 카파르나움아, 네가 하늘까지 오를 성싶으냐? 저승까지 떨어질 것이다. 너희 말을 듣는 이는 내 말을 듣는 사람이고, 너희를 물리치는 자는 나를 물리치는 사람이며, 나를 물리치는 자는 나를 보내신 분을 물리치는 사람이다."(루카 10,13-16)
1) 이 말씀을 겉으로만 보면, 이미 지은 죄에 대한 ‘선고’로 보이지만 그것은 아니고, 예수님이 ‘잃은 양’ 하나를 찾으려고 애쓰는 목자이신 분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이 말씀은, 회개하지 않으면 심판받을 것이라는 ‘경고’이고, 너무 늦기 전에 회개하라고 타이르시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코라진, 벳사이다, 카파르나움이라는 특정 도시들만 꾸짖으시는 말씀이 아니라, 하느님을 믿는다고 자처하는 이스라엘 전체를 꾸짖으시는 말씀입니다. <오늘날의 신앙인들을 꾸짖으시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불행하여라.”는 “불행하게 될 것이다.”, 즉 심판을 받고 멸망을 당하게 될 것이라는 경고입니다.
2) ‘티로’와 ‘시돈’은 하느님을 모르고 살던 사람들, 또는 복음을 들을 기회가 없었던 사람들을 뜻합니다. 하느님을 몰라서 안 믿었더라도, 또 복음을 들을 기회가 없어서 안 믿었더라도, 죄는 죄이고, 죄에 대한 심판을 피하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알면서도 안 믿은 사람들과 믿는다고 자처하면서도 믿는 사람답게 살지 않은 사람들과는 좀 다른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주인의 뜻을 알고도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았거나 주인의 뜻대로 하지 않은 그 종은 매를 많이 맞을 것이다. 그러나 주인의 뜻을 모르고서 매 맞을 짓을 한 종은 적게 맞을 것이다. 많이 주신 사람에게는 많이 요구하시고, 많이 맡기신 사람에게는 그만큼 더 청구하신다."(루카 12,47-48) 복음을 들을 기회가 없어서, 또는 복음을 전해 주는 사람이 없어서, 하느님도 모르고 예수님도 모르고 살았지만, 하느님 뜻에 합당하게 살고, 착하게 살았던 사람들은, 어떻게든 구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들을 기회가 없어서 전혀 몰랐던 경우와 듣고서도 거부한 경우는 분명히 다르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예를 들면, 지금 우리나라의 경우에 성탄절이 법정 공휴일로 지정되어 있고, 그날이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날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알 기회가 없어서 믿지 못했다는 변명은 인정받을 수가 없습니다. 북한 지역 사람들이나 이슬람 지역 사람들이라면 그런 변명이 통할 수도 있겠지만...
3) 13절의 예수님 말씀의 뜻은, “너희가 얼마나 큰 은총 속에서 살고 있는지를 깨닫고, 지금 회개하여라.”입니다. <“너희에게 일어난 기적들”은 “너희가 받은 은총들”입니다.>
“나는 받은 은총이 없다. 그러니 회개를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 아닌가?”라고 말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만일에 신앙인이라고 자처하면서도 그런 말을 한다면, 그런 말을 하는 것 자체가 큰 죄를 짓는 일이 됩니다. 누군가가 그 사람의 인생 전체를 짚어보면서 “이것도 은총이었고, 저것도 은총이었다.”라고 가르쳐 줄 수도 있겠지만, 당사자가 “그게 무슨 은총이냐?”라고 부정해 버리면 도와줄 방법이 없고, 본인이 스스로 자신의 어리석음을 깨닫고 뉘우치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서 ‘카파르나움’은 자만심에 빠져 있는 사람들과 교만한 위선자들을 가리킵니다. “나는 정말로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다. 그러니 나는 틀림없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간다.”라고 스스로 큰소리치는 사람들이 그런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자기들은 죄를 짓지 않았으니까 따로 회개할 것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입니다. 바로 그 교만과 위선부터가 죄입니다. 16절의 말씀은, 복음을 선포하려고 떠나는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인데, 제자들이 전하는 복음은 곧 ‘예수님의 말씀’이고, ‘구원의 진리’ 라는 것을 보증해 주신 말씀입니다. “너희를 물리치는 자는 나를 물리치는 사람”이라는 말씀은, “제자들(신앙인들)이 전하는 복음을 거부하는 사람은 곧 예수님을 거부하는 사람이며 구원받기를 거부하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나를 물리치는 자는 나를 보내신 분을 물리치는 사람이다.”라는 말씀은, “예수님을 믿기를 거부하고, 복음을 거부하고, 구원받기를 거부하는 사람은, 모든 사람의 구원을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을 거부하는 사람이다.”라는 뜻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자기들이 구원받기를 거부함으로써 구원받지 못합니다.
4) 우리는 ‘회개’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회개를 단순하게 죄를 뉘우치는 일로만 생각하는 이들이 있는데, 죄를 뉘우치는 것은 회개의 일부분일 뿐입니다. 회개는 인생과 삶 전체를, 그리고 자기 자신을 전부 다, 하느님 뜻에 합당하게 완전히 새롭게 변화시키는 일입니다.
변화시킨 다음에는 그것을 유지하는 것도 회개입니다. 배반자 유다의 경우를 보면, 그는 자기 죄를 뉘우쳤지만 회개하지는 않았고, 그냥 자살해버렸습니다.(마태 27,3-5) 배반자 유다가 자살한 것은 죄책감 때문일 텐데, 용서받기를 거부한 일이기도 하고, 용서와 구원에 대한 희망을 버린 일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그는 영원한 멸망으로 갔습니다.(마태 2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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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강수원 베드로 신부님]
예수님께서 호되게 꾸짖으신 코라진과 벳사이다와 카파르나움은 갈릴래아 호수의 북쪽에 자리한 성읍들로, 그분께서 공생활 시작부터 집중적으로 복음을 전하시고 마귀 들린 이들과 수많은 병자를 기적으로 치유하신 곳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곳 주민들이 회개하고 믿음을 가지기를 바라셨지만, 그들은 무심하게 예수님을 배척합니다. 돌밭과 가시덤불에 떨어져 말라 버린 씨앗처럼 죄와 불신 속에 변화를 거부한 이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심판 때 받게 될 혹독한 징벌을 예고하십니다.
그 징벌이 사치와 교만과 우상 숭배로 타락하였던 이방 도시 티로와 시돈에 내려진 죽음과 멸망의 심판(이사 23장; 에제 26─28장 참조)보다 훨씬 무겁다고 하신 것은, 티로와 시돈은 예수님의 복음과 기적을 듣지도 보지도 못한 데 비하여 이 세 성읍의 주민들은 그것을 다 알면서도 제 의지로 거부하였기 때문입니다.
물론 좋은 것이라고 하여 다른 사람에게 무조건 강요할 수는 없는 법입니다. 그러나 신앙은 다릅니다. 신앙은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그 무엇도, 지킬지 버릴지 판단할 대상도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고 실천하여 하느님께 찬미와 영광을 드리는 일은 창조주 하느님께서 정하신 질서입니다. 신앙은 하느님 앞에서 아무 조건 없이 받아들여야 하는 존재론적 응답입니다.
마치 까닭 없는 극한의 고난 속에 하느님께 자신의 의로움을 강하게 주장하며 끈질기게 답변을 요구하던 욥이, 창조주이신 그분의 절대적 주권 앞에서 입을 가리고 침묵하며 승복함으로써 완성한 그 믿음처럼 말입니다.(제1독서 참조)
“너희 말을 듣는 이는 내 말을 듣는 사람이다.” 예수님께서는 복음을 전하는 이야말로 당신과 그리고 성부와 영원한 일치에 동참하는 가장 존엄하고 영광스러운 존재라고 단언하셨습니다. 복음을 의심 없이 받아들이고, 세상에 파견된 주님의 제자로서 그 진리를 주위에 증언하는 삶으로, 모든 순간 하느님 앞에 가장 존귀하고 영광스러운 이로 살아가는 우리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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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바오로회 故 유광수 야고보 신부님]
<불행하여라>
불행하여라. 너 코라진아! 불행하여라. 너 벳사이다야! 너희에게 일어난 기적들이 티로와 시돈에서 일어났더라면, 그들은 벌써 자루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쓰고 앉아 회개하였을 것이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이 마치 코라진과 벳사이다가 불행해지는 것을 바라시는 것 같이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말은 예수님이 코라진과 벳사이다가 불행해지는 것을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한탄하시는 말씀이다. 코라진과 벳사이다의 회개를 위해 엄청난 은혜를 베풀어 주셨는데도 전혀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모습은 마치 부모가 매일 술이나 마시고 도박과 마약에 빠져 방탕한 생활을 하고 있는 자식에게 "이제 제발 정신차려라. 너 지금 정신 차리지 않으면 불행해진다."라고 야단치시는 것과 같다.
그러나 부모님의 이 말은 야단이 아니라 부모의 말을 듣지 않는 자식에 대한 한탄이요, 안타까움이다. 부모의 말을 듣지 않음으로써 괴로워하고 속상해하고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은 자식이 아니라 부모이듯이 코라진과 벳사이다가 회개하지 않기 때문에 더 많은 고통을 겪고 괴로워하시는 분은 예수님이시다. 자식의 불행은 곧 부모의 불행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잘못한 것은 우리 자신에게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에게도 그 화를 끼친다. 사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은 당신의 죄 때문이 아니라 인간이 저지른 잘못 때문이다.
하느님이 아담에게 "이 동산에 있는 나무 열매는 무엇이든지 마음대로 따 먹어라. 그러나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만은 따 먹지 말아라. 그것을 따 먹는 날, 너는 반드시 죽는다."(창세 2, 16-17)라고 말씀했지만 아담과 하와는 그 말을 듣지 과일을 따 먹었다. 그 결과 에덴동산에서 쫓겨났고 고통을 겪고 죽어야 했다.
하느님은 이런 고통을 겪고 죽어야 하는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고 결국 십자가의 죽음이라는 희생을 치루시고 인간을 구원하셨다. 이런 희생을 치루시면서까지 인간을 구원하시고자 하는 것은 예수님이 인간을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아담과 하와가 하느님의 말을 들었더라면 불행하게 되지도 않았을 것이고 예수님이 십자가의 죽음을 당하지 않으셔도 되셨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오늘 내가 회개하지 않으면 나만 불행해지는 것이 아니라 나의 가족이 나의 부모가 더 나아가 하느님에게까지 불행해진다. 즉 고통을 겪게 된다.
한편 내가 회개하면 나만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라 나의 회개로 받는 축복이 나만 아니라 나의 가족이 내 주위에 있는 분들 더 나아가 하느님까지도 복을 받는다. 다음 글은 예전 서울 주보에 실린 신달자 시인의 글이다.
"나의 아버지"에 대해 글을 쓰게 하자 학생들은 당혹해 하는 빛이 역력했습니다. 적어도 대학생인데 주제가 너무 평이하다는 기색도 보였지만 아버지라는 말에 긴장의 표정이 비치는 것을 얼핏 보았습니다.
가까우면서 멀고 잘 아는 것 같지만 제대로 모르는 관계가 아버지일 것입니다. 시를 가르치는 저는 적어도 문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가족이 누구인가를 아는 일은 참으로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아들이 아버지를 알고 아버지가 아들을 속 깊이 알고 있다는 것은 부자간의 사랑을 의미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가족을 알아 가는 것은 문학의 출발입니다.
학생들의 마음을 열어 아버지에 대해 정직하게 말하게 하는 일이 제 역할이어서 좀 강한 어조로 말했습니다. 그것이 효험이 있었는지 대부분의 학생들이 진솔하면서도 눈물겹게 고백을 해 주었습니다.
학생들의 글 속에는 좌절한 아버지가 많았습니다. 눈물 많은 아버지, 병든 아버지, 꿈이라는 것이 있었지만 속 시원히 풀어 본 적이 없는 초라한 아버지, 직장에서 물러나 가족의 눈치만 살피는 비겁한 아버지, 그리고 50대에 기가 꺾여 열등감으로 불화를 만들어 내는 아버지도 있었습니다.
'우리 아버지를 일으켜 주세요.' 하나같이 학생들은 아버지를 부담스러워 하고 미워하면서도 깊은 애정으로 흐느끼며 호소하고 있었습니다.
서슬 퍼런 위엄을 지니고 아버지라는 이름 하나로 세상과 가족을 압도하던 사나이는 어디 있는지... 아닙니다. 어느 때고 이 땅의 남자와 아버지는 고독하고 슬펐습니다.
중학생 때 저의 아버지는 누가 봐도 아쉬울 것 없고 더 그리울 게 없는 당당한 남자 그 자체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우연히 아버지의 일기장을 보고 충격에 몸을 떨었습니다.
아버지의 일기장에서 행복한 남자는 아예 없었습니다. 무엇인가 허전하고 늘 아쉽게 기다리고 때때로 아픔을 안고 울고 있는 허약한 남자 하나가 있을 뿐이었습니다. 보이는 것과 실제의 인물이 다르다는 것은 어린 나에게 소름 돋는 충격이었지만 그것은 내 문학의 출발이 되기도 했습니다.
정신의 척추가 허물어진 이 땅의 아버지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가 일으켜 주시기를 학생들의 글을 읽으며 눈물 흘리며 기도했습니다.
오늘 복음은 어제 복음의 계속이다. 어제 복음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하고 말하여라 그 집에 평화를 받을 사람이 있으면 너희의 평화가 그 사람 위에 머무르고,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되돌아 올 것이다. 어떤 고을에 들어가든지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곳의 길 거리에 나가 말하여라.
'여러분의 고을에서 우리 발에 묻은 먼지까지 여러분에게 털어 버리고 갑니다. 그러나 이것만은 알아 두십시오.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4번이나 "나를 물리치는 사람"이라고 하셨다. 내가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음으로써 즉 물리침으로써 정말 내가 불행해지는지 그리고 그 불행이 나만 불행해지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도 불행하게 되는지 어디 한 번 4 번 말씀을 물리쳐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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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이정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우리 인간이 하느님 앞에 서서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면, “우리 얼굴에는 부끄러움이 있을 뿐입니다.” 인간들 사이에서는 자신의 잘못을 감추거나 합리화할 수 있지만, 내 양심의 거울을 비추고 계시는 하느님 앞에서는 그것이 불가능하고, 온전히 자신의 부족한 면이 그대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또한 자신의 허물을 그대로 고백하고 용서를 청할 수 있는 것이 하느님 백성이 가진 특권이고 기쁨입니다. 아무리 큰 죄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진심으로 뉘우치고, 새로운 회개의 삶을 살아간다면, 주님께서는 늘 아무 조건 없이 용서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눈앞에 금방 보이는 죄와 허물보다 더 큰 잘못은, 자신의 죄를 알아채지 못하거나, 알고서도 그것을 덮어 버리고 뉘우치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하느님을 기만하고 모욕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언급하신 코라진과 벳사이다, 그리고 카파르나움도 바로 이러한 교만, 곧 하느님에 대한 교만의 죄 때문에 예수님께 심한 질책을 받고 있습니다.
반대로 예루살렘이 칼데아인들에게 점령당하여 불탄 지 5년이 지난 뒤 쓰인 바룩의 참회서는, 이스라엘의 죄를 고백하고 있지만, 가난한 마음으로 하느님 앞에 온전히 자신을 고백하는 신앙인의 참아름다움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세상이 보여 주는 성공과 화려함은 세상의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보시는 진실함과 하늘 나라의 영광은, 비록 죄가 크고 허물이 많지만, 자신의 영혼을 솔직하게 들여다보고 겸손하게 자신의 죄를 뉘우치는 소박한 영혼에게 돌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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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고난수도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너희에게 일어난 기적들이 티로와 시돈에서 일어났더라면, 그들은 벌써 자루 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쓰고 앉아 회개하였을 것이다.”(10,13)
우리는 삶을 살아오면서 우리가 가장 사랑하고 싶은 이들이, 많은 경우 가장 사랑할 수 없는 사람들임을 깨닫게 됩니다. 이 때문에 우리는 가장 가까운 가족이나 사람들과 관계의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어떤 이유에서든 누구 때문이든지 그 관계가 잘못될 때 가슴에 상처로 남는다는 사실입니다. 예전 보았던 영화 「흐르는 강물처럼」에서 가슴에 와닿았던 아버지와 아들의 대화가 지금도 마음에 남아 흐르고 있습니다. 『 ‘동생의 죽음에 대해 정말 네가 아는 모든 것을 다 나에게 다 말했니?’ 아버지가 물으셨다. ‘다 말했어요.’, ‘별로 할 애기가 많지 않지, 그렇지?’, ‘네’라고 나는 대답했다. ‘하지만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해도 완전히 사랑할 수는 있어요.’, ‘나도 그것을 알고 그렇게 설교해 왔단다.’라고 아버지가 말씀하셨다.』 그렇습니다. 저와 저의 두 형들의 부족이 무엇인지를 일깨워주는 대목입니다. 아직도 저의 큰 형과 작은 형은 I.M.F 이후 맺힌 매듭을 풀지 못한 채 형제가 아니고 원수처럼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두 형들을 화해하도록 노력하고 기도하지만 아무런 화해의 몸짓을 엿볼 수 없습니다. 삶이란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해도 완전히 사랑할 수는 있다!, 고 말하지만, 저의 두 형들은 아직도 이 말을 온전히 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이해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사랑하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계속 사랑하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이 말은 오늘 복음의 코라진, 벳사이다와 카파르나움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 꼭 들어야 할 말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코라진, 벳사이다 그리고 카파르나움에서 주로 활동하시면서 많은 가르침과 기적을 행하였지만, 이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았고,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참으로 불행하고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 많은 기적을 이방인 지역인 띠로와 시돈에서 보였더라면, 그들은 벌써 베옷을 입고 재를 들쓰고 회개했을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10,13참조) 이런 배경에서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이 이들 도시가 불행해지는 것을 바라시는 것 같이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마치 부모가 방탕한 생활을 하는 자식에게 안타까운 심정에서 ‘애야, 이제 제발 정신 좀 차려라. 너 그렇게 살다가 불행해진다!’라고 야단치시는 것처럼 들립니다. 하지만 야단이 아니라 부모의 말을 듣지 않는 자식에 대한 안타까움의 표현입니다. 왜냐하면 자식의 불행은 곧 부모의 불행인 것처럼 코라진, 벳사이다와 카파르나움의 불행은 곧 예수님의 불행이며 고통이기 때문이기에 예수님께서는 안타까움에서 그렇게 표현한 것입니다. 세상에선 가장 어려운 것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그 스스로가 아니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랑이란 이름의 자유인 것입니다. 그가 이해하지 않으면 변화시킬 수 없는 사랑의 무력함에 예수님은 안타까운 심정을 토로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결코 닫힌 인간의 영혼을 열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그 닫힌 문을 열고 나오시도록 다만 문을 두드리실 뿐입니다. 변화되기를 바라시고 변화할 수 있도록 은총과 사랑을 베푸실 뿐 스스로 문을 열고 나오기를 기다리시고 참아주실 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 말을 듣는 사람은 나의 말을 듣는 사람이고, 너희를 물리치는 자는 나를 물리치는 사람이며, 나를 물리치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물리치는 사람이다.”(10,16)하고 말씀하신 것도 사실 제자들에게 격려하기 위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도 코라진, 벳사이다와 카파르나움의 경우처럼 온몸과 마음으로 사랑을 쏟아부었지만, 배척과 거부를 받았음을 환기시킵니다. 제자들에게 너희가 어디서든지 어떤 일(=배척과 거부 등)을 겪게 되던지 결코 실망하거나 의기소침하지 말고 꿋꿋이 ‘하늘나라를 선포하고 병자들을 치유하는데’ 모든 힘과 열정을 집중하도록 격려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가 좋은 결실맺을 수 없다고 하더라도, 자책하거나 낙담하지 말 것을 당부하신 말씀이라고 느껴집니다. 이는 단지 일흔두 제자만이 아니라 세상에서 하느님의 심부름꾼으로 복음을 선포하는 모든 이에게 대한 지지와 격려입니다. 아버지와 당신 그리고 우리를 한 운명공동체로 묶어 주시고 우리의 사명 의식을 고취하시려는 당신의 깊은 배려와 지지를 표명하신 것으로 알아듣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가진 가장 좋은 것을 가장 가까운 가족이나 이웃과 함께 나누기를 원하지만, 때론 그들의 닫힌 마음을 열지 못할 수도 있겠지만, 그로 인해 자책하거나 실망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선한 의도를 받아들이지 않고 거부하고 배척하는 그들에 대해 마음의 문을 닫아버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흐르는 강물처럼’에서 작가가 우리에게 전한 메시지를 통해서 우리의 마음이 변화되었다면, 그들을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해도 완전히 사랑하려고 부단히 노력하는 것이 진정 하느님의 용서와 사랑을 귀하게 여기고 체험한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아닌가 싶습니다.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해도 사랑하려는 그 모습이 진정 예수님께 큰 기쁨이 아닐까, 싶습니다. “주님, 당신의 헤아릴 수 없는 은혜와 은총을 받았지만, 그 사랑에 상응한 삶을 살지 못한 채 남남 아닌 남으로, 원수처럼 살아가는 저와 제 형제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시어 맺히고 닫힌 마음을 열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아멘.”
오늘 성 프란치스코 성인의 축일입니다. 축일을 맞는 모든 분에게 축하와 함께 기도드립니다. 성인처럼 평화의 사도가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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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기도가 사람의 건강에 영향을 미칠까요? 미국의 심장병 전문의 벤슨 박사는 노인 73명을 선발해서 절반은 홀로 기도하는 시간을 꼭 갖도록 하고, 나머지는 평소대로 살게 했습니다. 3년간의 관찰 결과, 아침저녁으로 기도한 이들은 혈압이 낮아지고 병에 대한 면역력이 높아진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이를 통해 수도원에 사는 사람들이 장수하는 이유가 규칙적인 기도, 식사와 깊은 연관성이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일본에서는 이 원리를 이용해서 ‘정숙 치료법’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우울증이나 불안이 심한 사람을 열흘간 명상하게 하여 치료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피정 후 정신적 건강을 얻었다고 느끼는 등 의학적 효과를 보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기도하는 곳에는 영적인 기운이 있어서 그 곁에만 있어도 치유가 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우리 공동체가 이런 곳이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기도가 가득해서, 그냥 그 곁에만 있어도 건강해질 수 있다면 정말로 멋질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얻은 건강을 통해 이 사회에서 더 힘차게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사회에도 건강을 전달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점점 교회에서 멀어지는 사람이 늘어만 갑니다. 세상 것에 대한 우선적인 선택을 포기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요즘만 그럴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세 개의 도시, 코라진, 벳사이다, 카파르나움은 갈릴래아에 위치하고 있는 당시의 상업 도시로 많은 이가 모여드는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도시를 향해 단호하고 무거운 경고의 메시지를 주십니다. 영적, 육적 건강으로 이끌어 주는 공동체가 아닌, 오히려 하느님께 멀어지면서 공동체의 구성원들까지 망하게 만들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나’부터가 중요함을 깨닫습니다. 주님과 함께하는 ‘나’가 늘어날수록 우리 공동체는 더욱 건강한 공동체가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이 세상에 건강을 전달할 수 있게 됩니다.
우리 공동체를 떠올려 보았으면 합니다. 가정 안에, 교회 공동체 안에, 마지막으로 세상 안에서 자기가 속해 있는 공동체에 과연 주님께서 함께하고 있나요? 그래서 힘을 얻을 수 있는 공동체, 건강한 공동체가 되고 있나요? 오히려 힘을 빼는 그래서 함께하고 싶지 않은 공동체의 모습이 되는 것이 아닐까요?
그 모든 시작은 ‘나’부터 이루어집니다. 지금 당장 기도하면서, 주님의 뜻인 사랑의 삶에 적극적인 ‘나’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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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말을 잘 듣는 사람>
목말라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우물이 있는 곳을 알려주었습니다. 그것은 목마른 사람에게는 아주 기쁜 소식입니다. 그 소식을 듣고 우물을 찾아가는 사람은 살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죽게 될 것입니다. 만약 살았다면 말을 잘 들은 사람이요, 죽었다면 말을 듣지 않은 사람입니다. 말을 듣지 않은 사람에게 주어진 죽음은 누가 그를 죽인 것이 아니라 스스로 죽음에 떨어진 것입니다.
오늘 언급된 코라진, 베싸이다, 지역은 가파르나움과 함께 갈릴래아 호수 북동 해안에 삼각대를 형성하고 있고 예수님의 주 활동 무대로써 하느님의 능력을 드러내신 예수님의 기적들이 특히 두드러진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동네들은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고 생활하는데 더뎠습니다. 많은 은총을 입은 만큼 새 삶을 살아야 했지만 그렇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이제 예수님께서 경고합니다. “심판 때에 띠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 네가 하늘에 오를 것 같으냐? 지옥에 떨어질 것이다.”(루카 10,15)
사실 띠로와 시돈은 이방인 지역으로 유다인들은 이 동네 사람들을 세속적인 관심사에 빠져버린 곳으로 생각하였고, 그래서 유다인들은 자기네 동네와는 달리 하느님의 은총을 받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 동네보다도 못하다고 꾸중하신 것입니다.
그런 꾸중을 듣는 것이 속상하고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마음을 거두고 자신의 속을 본다면 얼마나 큰 은총인지요? 쓴 게 약이 된다는 말을 새삼 생각합니다.
오늘도 다르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자녀로 부름을 받아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은 사람이 세상의 자녀들보다도 못하다면 그만한 책임을 져야 합니다. 알고도 실천하지 않았다면 매를 맞아도 많이 맞아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주님께서 오시면 어둠 속에 감추어진 것을 밝혀내시고 사람의 마음속 생각을 드러내실 것입니다. 그 때에는 각 사람이 하느님으로부터 응분의 칭찬을 받게 될 것입니다.”(1코린 4,5) 하고 말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각자의 행실대로 갚아주실 것입니다.(에제18,30.로마2,6)
그러므로 말을 잘 듣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듣고 행하였을 때 잘 들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말씀에 순종한 이들을 봅니다. “노아는 모든 일을 하느님께서 분부하신 대로 했습니다.”(창세 6,22) “주님께서 당신의 종 모세에게 명령하신 것을 모세는 다시 여호수아에게 명령하였고, 여호수아는 또 그대로 실행하였다. 여호수아는 주님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것 가운데에서 하나도 빠뜨리지 않았다.”(여호 11,15) “욥은 이 모든 일을 당하고도 죄를 짓지 않고 하느님께 부당한 행동을 하지 않았다.”(욥기 1,22) 히즈키야는 “주님께 매달려 그분을 따르는 일에서 돌아서지 않고, 주님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계명들을 지켰다. 주님께서는 그와 함께 계시며, 그가 무슨 일을 하든지 성공하게 해 주셨다”(2열왕18,6). “예수님은 부모와 함께 나자렛으로 내려가, 그들에게 순종하며 지냈다. 그의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루카2,51). “여느 사람처럼 나타나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필리 2,8)
우리도 말 잘 듣는 사람, 즉 순종하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특별히 주님께서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3,35) 하셨으니, 사랑하는 삶의 기쁨을 누리시길 바랍니다. 목말라 죽어가는 사람에게 샘을 알려주어도 찾아가지 않으면 스스로 죽음에 떨어지는 것이듯 사랑의 계명을 지키지 않는 것 자체가 하느님을 떠나 죽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으로 주님의 품에 머물길 바랍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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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소망>
루카 10,13-16 (회개하지 않는 고을들)
그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불행하여라, 너 코라진아! 불행하여라, 너 벳사이다야! 너희에게 일어난 기적들이 티로와 시돈에서 일어났더라면, 그들은 벌써 자루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쓰고 앉아 회개하였을 것이다. 그러니 심판 때에 티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 그리고 너 카파르나움아, 네가 하늘까지 오를 성싶으냐? 저승까지 떨어질 것이다. 너희 말을 듣는 이는 내 말을 듣는 사람이고, 너희를 물리치는 자는 나를 물리치는 사람이며, 나를 물리치는 자는 나를 보내신 분을 물리치는 사람이다.”
<소망>
“너희 말을 듣는 이는 내 말을 듣는 사람이고, 너희를 물리치는 자는 나를 물리치는 사람이며, 나를 물리치는 자는 나를 보내신 분을 물리치는 사람이다.”(루카 10,16)
나의 얼굴이
나를 보내신 분의 얼굴이
될 수 있기를
나의 마음이
나를 보내신 분의 마음이
될 수 있기를
나의 말이
나를 보내신 분의 말씀이
될 수 있기를
나의 삶이
나를 보내신 분의 삶이
될 수 있기를
내가
나를 보내신 분이
될 수 있기를
그리하여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
될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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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가을이 익어갑니다. 우리 안에 사랑도 익어갔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복음>은 두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곧 ‘회개하지 않은 도시들에 대한 불행선언’(13-15절) 부분과 ‘파견 받은 제자들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파견한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과 같다’(16절)는 부분으로 되어 있습니다.
첫 부분에서 코라진, 벳사이다. 가파르나움이 심판을 받은 이유는 그들의 죄악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이요, 더 나아가서는 회개하지 않은 이유 때문만이 아니라 그들이 사랑을 많이 받고도 회개하지 안했기 때문임을 말해줍니다. 곧 그들은 말씀을 듣지 못했거나 기적을 보지 못했거나 사랑을 받지 못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다른 도시들보다도 더 많은 사랑을 받았음에도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는 주님의 사랑을 듬뿍 받고도 여전히 회개하는 일에는 더딘 저희에게도 해당되는 말씀이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예수님의 다음과 같은 말씀을 명심해야 할 일입니다.
“주인의 뜻을 알고도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았거나 주인의 뜻대로 하지 않은 종은 매를 많이 맞을 것이다. 그러나 주인의 뜻을 모르고서 매 맞을 짓을 한 종은 적게 맞을 것이다. 많이 주신 사람에게는 많이 요구하시고, 많이 맡기신 사람에게는 그만큼 더 청구하신다.”(루카 12,47-48)
오늘 <복음>의 둘째부분에서, 우리는 우리 주님의 애태우시는 음성을 듣습니다. 죄인의 멸망을 바라지 않으시고, 회개하여 살기를 바라시는 사랑의 음성입니다.
“너희 말을 듣는 이는 내 말을 듣는 사람이고, 너희를 물리치는 이는 나를 물리치는 사람이며, 나를 물리치는 이는 나를 보내신 분을 물리치는 사람이다.”(루카 10,16)
이는 말씀을 전하는 이가 얼마나 존귀한 사명을 수행하고 있고, 얼마나 고귀한 신분인지를 깨우쳐줍니다. 동시에 파견 받은 이는 파견 받은 분에게 메여 있어야 함을 말해줍니다. 파견 받은 자는 파견하신 분을 대신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오늘 <복음>의 핵심은 ‘회개’에 있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오늘 말씀은 말씀을 듣는 이들에게 하신 말씀이 아니라, 파견 받고 있는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시기 때문입니다. 곧 말씀을 듣는 이가 아니라 말씀을 전하는 이에게 하신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이는 말씀을 듣고도 그들이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고 회개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너희는 너희를 보낸 분께 매여 있으라는 말씀입니다. 곧 말씀을 듣는 이들의 반응이나 결과에 매달리지 말고, 보내신 분께 매달려 있어야 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러기에, 말씀을 전하는 이에게 중요한 것은 먼저 ‘말씀’을 품고 있어야 하고, ‘말씀의 영’을 따르는 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사도를 파견하실 때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마태 10,20)
그렇습니다. 파견 받은 우리는 ‘아버지의 영’을 품고 있음을 명심해야 할 일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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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 말을 듣는 이는 내 말을 듣는 사람이고~”(루카 10,16)
주님!
파견 받은 자의 사명이 얼마나 존귀한 것인지를 명심하게 하소서.
말씀을 듣고도 받아들이지도, 회개하지도 않는다 하여도,
언제나 저를 보내신 당신께 매여 있게 하소서.
언제나 어디서나 당신의 말씀을 품고, 당신의 영께 매여 있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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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세상을 구원할 성 프란치스코의 영성>
-회개, 가난, 겸손-
“주님, 당신은 저를 살펴보시고 잘 아시나이다.
주님, 영원한 길로 저를 인도하소서.”(시편139;1.24ㄴ)
가을 밤하늘 별들이 유난히 맑고 밝게 빛납니다.
저절로 떠오른 “땅의 행복”이란 옛 자작시에 기뻤습니다.
“땅의 행복은
밤마다 누워 하늘 바라보며
별들
가득 담아 두었다가
꽃들로 피어내는 것이다”
오늘은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기념일입니다. 흡사 10월을 대표하는 가난과 겸손의 성인처럼 느껴집니다. 성인 축일 때 마다 확인하는 생몰연대와 산 햇수입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만 44세를 살았지만 영향력은 영원합니다. 기후위기를 겪고 있는 작금의 시대에 가장 각광받는, 종파를 초월하여 개신교는 물론 불자들에게도 가장 사랑받는 프란치스코 성인이요, 오늘 축일을 지내는 교황님도 프란치스코입니다.
주님과 함께 영원히 사시는 가장 현대적인 성인 프란치스코입니다. 성인을 떠올릴 때마다 생각나는 “산과 강”이라는, 성 베네딕도회 영성을 상징하는 제 좌우명 자작시입니다.
“밖으로는 산, 천년만년 임을 기다리는 산, 안으로는 강, 천년만년 임향해 흐르는 강”
정주의 산, 흐르는 강이 기막힌 보완관계를 이룹니다. 이래야 정주는 안주가 되지 않고 늘 새로울 수 있습니다. “산”이 상징하는 바 성 베네딕도라면, “강”이 상징하는 바 성 프란치스코입니다. 두 분은 경쟁 관계가 아닌 보완관계의 성인이요 영성임을 깨닫습니다. 밖으로는 성 베네딕도를, 안으로는 성 프란치스코를 산다면 정말 “Ever old, Ever new”(늘 옛스럽고 늘 새로운)” 최고의 영성이겠습니다.
성인의 감동적인 일화는 한둘이 아닙니다. 삶전체가 영원한 회개의 표징, 희망의 표징, 구원의 표징이 되는 한권의 살아 있는 복음서 같습니다.
오늘 본기도가 참 아름답게 성인의 삶을 잘 요약합니다.
“하느님, 복된 프란치스코를 가난과 겸손의 삶으로 이끄시어, 살아 계신 그리스도의 모습을 저희에게 보여주셨으니, 저희도 성자를 따라 복음의 길을 걸으며, 사랑과 기쁨으로 가득 차 하느님과 하나되게 하소서.”
성 프란치스코가 성당의 정문 앞에서 바치던 기도입니다. “그리스도님, 저는 세상에 널리 퍼져 있는 당신의 모든 성당에서 당신을 경배하며 흠숭하나이다.”
예수님과 산상수훈의 “참행복”을 사랑했던 인도의 성자 마하트마 간디의 고백입니다. “백 년마다 한 번 성 프란치스코가 태어난다면 세상의 구원은 보장될 것이다.”
성프란치스코는 시편 141장을 읊은 후 선종했고 마지막 유언은 “내 형제 죽음이여, 어서 오라.”였습니다.
성 프란치스코의 영적지향과 동일하다 여겨지는 널리 회자되는 “평화의 기도”와 더불어, 성 프란치스코의 영성을 요약하는 “오, 감미로워라” 시작되는 성가 “태양의 찬가” 역시 너무나 유명하고 모두에게 사랑받는 고백의 기도이자 시요 노래입니다. 이에다 몸과 맘이 하나된 춤까지 곁들이면 정말 멋지다 싶습니다.
시간되면 “평화의 기도”도 읽어보시고 “태양의 찬가” 노래도 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제 장례미사때 입당성가는 “태양의 찬가”를, 퇴장성가는 “평화의 기도”를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성인은 1226년 선종하신 2년후 1228년 교황 그레고리오 9세에 의해 시성된후, 1939년 시에나의 카타리나와 함께 이탈리아의 공동수호성인으로 선포되었고, 1980년에는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에 의해 생태학자들의 수호성인으로 선포됩니다.
성인은 모든 동물들과 새들, 그리고 자연환경의 수호성인이기도 합니다.
오늘 루카 복음과 제1독서 욥기에서도 성 프란치스코 영성의 핵심 요소를 발견합니다. 바로 회개와 가난, 겸손입니다. 저는 감히 오늘 강론 제목대로 “세상을 구원하는 성 프란치스코의 영성, 회개-가난-겸손” 이라 주장하고 싶습니다.
오늘 복음은 숱한 기적에도 회개하지 않은 악한 세 도시를 향해 회개를 촉구하는 주님의 불행선언입니다.
“불행하여라, 너 코라진아! 너 벳사이다야! 너 카파르나움아! 너희에게 일어난 기적들이 티로와 시돈에서 일어났더라면 그들은 벌써 자루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 쓰고 앉아 회개하였을 것이다.”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한 것이 회개입니다. 기적의 궁극으로 목표하는 바도 회개요, 눈만 열리면 모두가 회개의 표징들이자 성인들의 삶은 더욱 그러합니다. 한두번의 회개가 아니라 끊임없는 회개의 여정을 살아갔던 성인들이요 성 프란치스코는 더욱 그러합니다. 성인은 결정적 회개에로 이끈 성서는 마태복음 10장9절 말씀이었고 성인은 문자 그대로 모든 것을 버리고 무소유의 삶을 살았습니다.
회개 은총의 열매가 바로 자발적 가난입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나는 가난이라는 여인과 결혼했다” 고백할 정도로 가난을 사랑했습니다. 정말 가난을 사랑한다면 그는 가난한 사람이 아니라 역설적으로 가난한 부자일 것입니다.
엊그제 주교들의 시노드 피정 개막 연설시 교황님의 한 대목도 깊은 울림을 주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 자비의 거지들’로서 여기 있습니다.”
(We are here as beggars of God’s mercy)
우리가 하느님 자비의 거지들이라면 예수님은 거지 대장쯤 되지 않겠나 불경한(?) 생각도 듭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욥의 회개가 참으로 아름답게 묘사됩니다. 하느님의 폭포수같이 쏟아지는 물음에 말문이 막힌 욥은 회개와 더불어 침묵중에 진짜 가난과 겸손을 깊이 체험했음을 다음 고백이 입증합니다.
“저는 보잘 것 없는 몸, 당신께 무어라 대답하겠습니까? 손을 제 입에 갖다 댈 뿐입니다. 한 번 말씀드렸으니 대답하지 않겠습니다. 두 번 말씀드렸으니 덧붙이지 않겠습니다.”
몰라서 의심에 무수한 의문들을 남발하지 정말 하느님의 신비를 조금이라도 깨닫는다면 침묵할 것입니다. 정말 주님앞에 가난하고 겸손한 주님 자비의 거지들로 행복할 것입니다. 참으로 회개와 더불어 주님을 만날 때 참된 가난과 겸손이요 이런 자기를 아는 가난과 겸손이 참 지혜임을 깨닫습니다.
그러니 미사전례중 주님의 성체를 모시기 위해 서있는 빈손의 대열은 얼마나 거룩한 아름다움의 복음적 장면인지요! 가톨릭 교회의 영성체가 아니곤 도대체 어느 종교에서 이런 체험이 가능하겠는지요? 회개한 하느님 자비의 거지들로서 가난과 순수, 겸손과 지혜의 절정의 아름다움을 체험하는 감동적 장면입니다.
날마다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주님을 닮은 또 하나의 거룩한 하느님의 거지가, 성 프란치스코가 되어 살게 합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 5,3)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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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하느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맛 볼 수 있다면>
“주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너희는 맛보고 깨달아라.”
“그러므로 우리는 충만한 선, 모든 선, 완전한 선, 참되시고 으뜸선이신 우리 창조주이시고 구원자이시며 홀로 진실하신 하느님 외에는 다른 아무것도, 우리는 원하지도 말고 바라지도 말며, 마음에 들어 하지도 즐거워하지도 맙시다. 그러므로 아무것도 우리를 방해하지 못하고, 아무것도 우리를 하느님과 떼어 놓지 못하고, 아무것도 우리를 가로막지 못하기를!”(미 인준 회칙 23장)
저는 오늘 이 두 말씀으로 프란치스코 대축일 강론을 하려고 합니다. 프란치스코야말로 주님이 얼마나 좋으신지를 잘 알고 찬미한 성인이라는 뜻입니다.
하느님이 선이라는 것은 우리도 다 알고 있습니다. 하느님이 선이 아니라면 그런 하느님은 악마지 무슨 하느님이냐고 우리는 어렵지 않게 생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는 선신이니 악신이니 하는 관념이 있고, 이런 관념 차원에서 하느님이 선이시라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또는 어떻게 좋으신지 이해하는 것은 체험하지 않고는 불가하고 좋으신 하느님을 내가 좋아하지 않으면 불가합니다.
이 말은 관념적인 선은 하느님이 계시지만 부산에 계시고 지금 내게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내게 소용이 없는 것이라는 말이고 아무리 좋으신 하느님이어도 내가 좋아해야지 내게 좋으신 분이라는 말입니다.
키다리 아저씨가 좋은 분이라고 아무리 떠들어도 내가 좋아하는 타입이 아니면 아무 소용없고, 스마트폰이 아무리 성능이 좋아도 내가 좋아하는 타입이 아니면 아무 소용없지요.
사실 많은 사람에게 하느님은 처음부터 내가 좋아하는 타입이 아닙니다. 우리 인간이 좋아하는 타입은 변화합니다.
어렸을 때 좋아하는 타입이 커서까지 좋아하는 타입이 아니기 십상이고, 그래서 어렸을 때 그것을 좋아했다는 것에 웃음이 나오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좋으신 하느님을 나도 좋아하려면 내 좋아하는 타입이 바뀌어야 합니다. 프란치스코로 말하면 이것이 바로 맛의 변화 곧 달콤했던 것은 입에 쓰게 되고 쓴 것은 달콤해지는 맛의 변화입니다.
프란치스코는 유언에서 이렇게 말하지요. “주님께서 나 프란치스코 형제에게 이렇게 회개를 시작하도록 해 주셨습니다. 죄 중에 있었기에 나에게는 나병 환자들을 보는 것이 쓰디쓴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 친히 나를 그들 가운데로 이끄셨고 나는 그들과 함께 지내면서 자비를 실행하였습니다. 그리고 나에게 쓴맛이었던 바로 그것이 도리어 몸과 마음의 단맛으로 변했습니다. 그리고 그 후 얼마 있다가 나는 세속을 떠났습니다.”
그러므로 관건은 어떻게 이런 입맛의 변화가 일어나느냐 그것입니다. 더욱이 영적인 것이 맛있어지는 맛의 변화가 어떻게 가능하냐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우리는 이렇게 얘기할 수도 있을 겁니다. 맛있어지는 것은 맛 들이기 나름이고, 맛 들이는 것 특히 싫어하는 것을 맛 들이는 것은 반복의 문제라고.
싫어서 입에 대지도 않던 고수를 계속 먹게 되면 차츰 맛 들이게 되지요. 그러므로 다시 여기서 관건은 쓴 것을 맛 들여야겠다고 마음먹는 것인데 쓴 것을 맛 들이기로 마음먹는 이 단계에서는 보통 하느님께서 개입하십니다. 싫어하는 맛을 들이는 것이나 싫어하는 사람을 들이는 것이 같기 때문입니다.
사람이건 맛이건 싫어하는 것을 들이는 것 곧 들어오도록 허용하는 것은 싫고, 그래서 처음에는 억지로 허용하기 마련인데 하느님께서 그리 만드시는 겁니다. 하느님께서 그 싫어하고 두려워하던 나병환자를 만나고 끌어안게 하시듯 말입니다.
그런데 나병환자를 포옹한 것은 단지 나병환자를 포옹한 것이 아니라 그 싫고 두려운 나병환자를 포옹하게 하신 하느님과 포옹한 것이고, 그 하느님을 좋으신 하느님으로 포용한 것입니다. 프란치스코에게는.
그래서 쓰고 쓴 것들이 달고 달콤해진 뒤에는 하느님도 달고 달콤해졌고, 맛보고 맛볼수록 하느님이 더 달고 달콤해졌습니다. 그에게는.
그래서 좋으신 하느님 외에는 다른 아무것도 원하지도 말고 바라지도 마음에 들어 하지도 즐거워하지도 말자고 한 다음 이렇게 권고합니다.
“감미로우신 분, 사랑할 만한 분, 좋아할 만한 분, 온전히 모든 것에 앞서 세세 영원히 바랄 만한 분”을 “사랑하고, 공경하고, 흠숭하고, 섬기고, 영광을 드리고, 드높이고, 찬송하고 감사드립시다.”라고 권고합니다.
프란치스코처럼 그럴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주님이 얼마나 좋은지 맛보고 깨달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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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나를 물리치는 나를 보내신 분을 물리치는 사람이다."(루카 10,16ㄷ)
<회개하는 사람>
오늘 복음(루카10,13-16)은 회개하지 않는 고을들을 꾸짖으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회개하지 않는 고을들인 코라진과 벳사이다와 가파르나움을 꾸짖으십니다. 예수님께서 그곳에서 많은 기적을 행하셨지만, 그들이 예수님을 배척했기 때문에 불행을 선언하십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가 구원받는 길은 회개이며, 회개하지 않으면 그것은 곧 멸망이요 죽음이라는 메시지를 전합니다.
오늘은 생태계의 주보 성인이시며, 이탈리아의 수호 성인이시고, 평화의 사도로 불리는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를 기억하는 날입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받고 있는 만인의 형제이며, 피조물의 찬가인 태양의 찬가를 통해 보듯이 피조물들까지도 형제자매로 사랑한 우주적 형제애를 나누신 분입니다.
왜, 사람들은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를 좋아하고 사랑할까? 프란치스코가 예수님을 많이 닮았기 때문이고, 예수님의 모습을 많이 간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프란치스코가 태어나고 자라고 죽은 평화의 마을인 아시시를 방문하고 있고, 그가 오상을 받은 라베르나를 방문합니다.
프란치스코의 형제요 제자인 첼라노 형제는 사부인 프란치스코에 대해 이렇게 기록해 놓았습니다.
"그는 늘 예수께 사로 잡혀 있었다. 마음에 예수를 품고 있었고, 입에도 예수, 귀에도 예수, 눈에도 예수, 손에도 예수, 나머지 지체들도 늘 예수를 모시고 다녔다."(1첼라115)
이것이 바로 프란치스코의 위대함이며, 그의 제자들인 프란치스칸들과 그를 좋아하는 이들이 닮아야 할 모습입니다. 그리고 그를 '또 하나의 그리스도(Ater Christus)' 라고 부른 이유입니다.
프란치스코는 나병 환자와의 만남을 통해 결정적으로 회개했습니다. 이후 끝까지 회개의 삶을 살았습니다.
우리도 회개하는 사람이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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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그들은 벌써 자루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쓰고 앉아 회개하였을 것이다."(루카 10, 13)
참된 인생의
가치는
보이지 않는
내면의 세계에
있음을 절실히
깨닫습니다.
청빈의 힘으로
피조물을
더 피조물이게
했던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기념일입니다.
이렇듯
청빈의 가치가
식어가면
교회를 향한
우리의 열정도
식어갑니다.
청빈의 삶은
하느님으로부터
온 것입니다.
청빈하셨기에
어떤 것에도
걸리지 않는
자유로움을
사셨던
예수님의
삶입니다.
예수님을
만난다는 것은
가난을 만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가난과 함께
사셨던
성 프란치스코의
삶입니다.
가난의 변화는
자유의 변화입니다.
하느님의 가난이
우리를 구원합니다.
조건 없는 사랑
조건 없는
믿음이듯
조건 없는
청빈으로
하느님을
드러냅니다.
그래서
빛의 길은
가난의
길입니다.
가난의 길로
묶여있던
모든 것들이
자신을 낮추고
낮추며 풀리기
시작하며
한 몸이 됩니다.
새로운
가난의 정신이
새로운
탄생입니다.
하느님의 가난이
우리를 자유롭게
합니다.
관념의 껍질을
벗어버리는
가난의 실천이
바로 복음이
말씀하시는
참된 사랑이며
참된 회개임을
깨닫습니다.
하느님을
만나는
참된 회개의
시간되시길
진심으로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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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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