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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타시아수(他是阿誰)
- 그는누구인가
스스로 주인공이 되어 부처와 당당히 맞절을 해야
절망에 빠진 민중에 대한 자비로 출발한 것이 선종
불립문자, 모든 권위 부정, 누구나 주인공 될 수 있어
미륵에게 소원 빌지 말고 스스로 부처 되는 게 불교
동산(東山)의 법연(法演) 스님이 말했다.
“석가(釋迦)도 미륵(彌勒)도 오히려 그의 노예일 뿐이다. 자! 말해보라. 그는 누구인가?”
무문관(無門關) 45칙 / 타시아수(他是阿誰)
* 스스로 주인공이 되는 사람, 당신
1. 부처 숭배는 일종의 방편
철학자의 눈에 불교만큼 아이러니한 것도 없습니다. 제도라는 측면에서 불교는 신을 숭배하는 다른 종교들과 마찬가지로 석가모니나 미륵 등 부처들이나 그들의 말에 절대적으로 숭배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동시에 불교는 일체의 초월적인 권위를 근본적으로 해체하여 인간에게 해방과 자유의 가능성을 부여했던 가장 혁명적인 사유 형식이기도 합니다. 이런 아이러니, 아니 모순을 확인해보려면 가까운 사찰에 한 번 들려보는 것으로 충분할 것 같습니다. 가족의 건강과 행복을 위해 공손하게 108배를 올리는 너무나도 평범한 이웃들을 쉽게 볼 수 있을 겁니다. 분명 이것은 초월자에게 자신의 절절한 소망을 바치는 행위입니다. 반면 이렇게 간절한 기도 행위를 마친 분들이 사찰을 떠나려고 할 때, 스님들은 합장하며 그들에게 이야기합니다. “보살님! 성불(成佛)하세요.” 정말 아이러니한 일 아닌가요.
부처를 마치 신이기라도 하듯 숭배한다는 것과 스스로 부처가 된다는 것, 이 두 가지는 질적으로 다른 것입니다. 물론 불교의 핵심은 치열한 노력으로 스스로 부처가 되는 데 있습니다. 만약 부처를 숭배하는 것이 불교의 핵심이라면 불교는 기독교와 구조적으로 구별될 수도 없을 겁니다. 그러니까 부처 숭배는 잘해야 일종의 방편(方便, upa- ya)에 지나지 않는 겁니다. 다시 말해 부처를 숭배함으로써 스스로 부처가 되기에 역량이 부족한 사람들은 그나마 선하게 살 수 있다는 것이지요. 근기(根機, indriya)라는 개념이 불교에서 중요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근기’는 무엇인가를 할 수 있는 역량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아마 ‘끈기가 없다’거나 ‘끈기가 있다’는 상투적인 표현을 들어본 적이 있으실 겁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끈기’라는 말은 바로 ‘근기’에서 유래된 것이지요.
보통 상근기(上根機)니 하근기(下根機)라는 말을 불교에서 자주 사용합니다. 상근기가 스스로 부처가 될 수 있는 자질을 갖춘 사람을 가리킨다면 하근기는 성불하기에 자질이 충분하지 않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지요. 그렇지만 여기서 심각한 문제가 벌어집니다. 하근기는 주어진 선천적인 한계 때문에 부처가 될 수 없다는 생각이 나올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일천제(一闡提, Icchantika)’와 관련된 해묵은 논쟁이 대승불교 전통에서 빈번히 발생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일천제’는 ‘성불할 수 있는 역량이 없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한 가지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현실적으로 상근기가 귀족이나 적어도 평민 계층의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이라면, 하근기는 일자무식의 천민 계층을 가리켰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러니까 일천제는 성불할 수 없다는 주장은 하근기인 일반 민중들에게는 절망스런 선언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2. 문자가 권력 발생의 기원
구조주의 인류학자 레비스트로스(Claude Lévi-Strauss, 1908~2009)는 1955년에 출간된 자신의 주저 ‘슬픈 열대(Tristes Tropiques)’에서 말했던 적이 있습니다. 문자야말로 계급과 권력이 발생하는 기원이라고 말입니다. 다시 말해 문자가 출현하면서 문자를 독해할 수 있는 계층과 그렇지 않는 계층으로 사람들이 분화된다는 것입니다. 정신노동과 육체노동 사이의 오래된 위계적 분업 체계가 발생한 것도 사실 문자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겁니다. 이것은 단지 과거에만 그런 것이 아니라 현재에도 적용되는 것 아닌가요. 그래서 우리의 부모들은 지금도 자신의 아이들을 더 많이 가르치려고 혈안이 되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많이 배운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 위에 군림한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지요. “아는 것이 힘이다”라고 베이컨(Francis Bacon, 1561~1626)이 역설했던 것도 다 이유가 있었던 셈입니다.
레비스트로스의 통찰은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줍니다. 문자를 강조하는 순간, 상근기와 하근기의 구분은 강화될 수밖에 없을 겁니다. 반면 문자의 중요성을 약화시키는 순간, 상근기와 하근기 사이의 간극은 좁아들게 됩니다. 사실 문자로 이루어진 이론을 강조하는 순간, 하근기, 즉 민중은 절망에 빠지게 될 겁니다. 이래서야 어떻게 불교가 자비라는 이념을 표방할 수 있겠습니까. 바로 여기서 우리는 선종(禪宗) 전통이 가진 사상사적 중요성을 확인하게 됩니다. 선종은 절망에 빠진 민중 계층에 대한 자비에서 출현한 것입니다. ‘불립문자(不立文字)’라는 선종의 슬로건이 중요한 것도 다 이유가 있었던 겁니다. 문자와 언어, 그러니까 지적 이론의 가치를 억누르지 않고, 어떻게 하근기, 즉 민중들에게 성불할 수 있다는 희망을 줄 수 있겠습니까. 바로 이것입니다. 불립문자라는 깃발 아래 선종은 하근기나 일천제도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고 주장했던 것입니다. 일자무식의 혜능(慧能, 638-713)이 선종의 여섯 번째 스승, 그러니까 육조(六祖)가 되었다는 전설은 이런 선종의 정신을 가장 상징적으로 나타낸 것이지요.
문자와 이론을 강조한 만큼, 교종은 귀족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반면 문자를 강조하지 않았고 심지어 문자에 대한 집착이 성불의 가장 큰 장애라고 기염을 토했던 만큼, 선종은 민중적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역사적으로 살펴보아도 교종의 대표적인 스님들은 대개가 왕족이나 귀족 출신이 많습니다. 우리나라의 경우만 보아도 신라시대의 의상(義相, 625~702) 스님이나 고려시대의 의천(義天, 1055~1101) 스님은 모두 왕족이었습니다. 어려서 좋은 환경 속에서 질 높은 교육을 받았기에 그들은 불교 경전을 읽고 이해하는 데 훨씬 더 탁월한 능력을 보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당연히 그들은 교종 내부에서 헤게모니를 쉽게 장악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이 하나 더 있습니다. 문자와 이론을 강조하는 순간, 교종 내부에서는 구조적인 위계질서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는 점입니다. ‘부처-경전-경전독해자’라는 위계질서입니다. 물론 여기서 경전독해자의 내부에서도 작은 위계질서, 그러니까 ‘경전에 능통한 사람’과 ‘경전에 무지한 사람’이란 위계질서가 생길 겁니다.
3. 선종은 성불의 새로운 패러다임
‘불립문자’를 외치는 순간, 선종은 성불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안합니다. 그것이 바로 ‘직지인심(直指人心), 견성성불(見性成佛)’이라는 수행 방법입니다. ‘문자’에서 ‘마음’으로 패러다임을 이동한 선종(禪宗)의 독특한 전통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런 근본적인 변화는 교종 내부에 잠복해 있던 위계질서, 그러니까 ‘부처-경전-경전해독자’라는 위계질서를 전복시킬 수밖에 없습니다. 기억나시나요. 운문(雲門, ?~949) 스님은 교종에 속한 스님들이 들었다면 경천동지할 사자후를 토했던 적이 있습니다. “마른 똥 막대기(乾屎橛)!” 부처의 말인 경전이 부정되려면, 부처를 가만히 두어야 되겠습니까. 쓰레기통에 후련하게 던져 넣어야지요. 그래야 살아있는 우리의 마음 하나하나가 활발발(活潑潑)하게 살아날 수 있을 테니까 말입니다. 이제 드디어 법연(法演, ?~1104) 스님이 주장자를 들고 굳건히 지키고 있는 ‘무문관(無門關)’의 45번째 관문을 뚫고 들어갈 수 있게 된 것 같습니다.
주장자를 위협적으로 휘두르며 법연 스님은 우리의 대답을 재촉합니다. “석가(釋迦)도 미륵(彌勒)도 오히려 그의 노예일 뿐이다. 자! 말해보라. 그는 누구인가?” 잘 알다시피 석가는 불교의 창시자 싯다르타(Gautama Siddha-rtha, BC563?~483?)를, 미륵은 싯다르타의 사유를 가장 잘 이해하고 있다는 불교 이론가 마이트레야(Maitreya, 270?~350?)를 가리킵니다. 불교에서는 싯다르타뿐만 아니라 미륵도 부처로 추앙되는 사람입니다. 아니 정확히 말해 미륵은 싯다르타보다 더 종교적으로 중요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언젠가 이 세상에 극락정토가 이루어지면, 인간세계에 다시 내려온다고 믿어졌던 부처였으니까요. 그래서일까요.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수많은 불교 신자들은 삶이 고단해지면 ‘미륵불’을 울부짖으며 불렀던 겁니다. 지상에 고통이 사라지고 행복이 찾아오기를 기원하면서 말입니다. 싯다르타와 미륵이 그만큼 중요하니, 그들의 남긴 경전과 논서는 또 얼마나 중요한 것이겠습니까. 그들의 글은 깨달은 마음으로 들어가는 열쇠로 생각되었을 테니까 말입니다.
깨달았다는 것, 그래서 마침내 부처가 되었다는 것은 스스로 자신의 삶을 주인공으로 살아낼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당연히 석가모니나 미륵, 혹은 그들이 남긴 글에 의존한다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우리가 깨닫지 못했다는 증거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제 법연 스님의 화두가 풀리시나요. “석가모니나 미륵의 노예가 될 것인가, 그들의 주인이 될 것인가?” “그들에게 소원을 기구하는 서글픈 하근기로 살 것인가? 누구에게도 원하는 것이 없는 당당한 상근기로 살 것인가?” 석가모니나 미륵이 우리의 노예가 되는 순간이 바로 우리도 그들과 마찬가지로 부처가 되는 찬란한 순간인 것입니다. 석가모니나 미륵이 우리에게 절을 하는 광경을 떠올려보십시오.
얼마나 멋지고 통쾌한 순간이겠습니까. 사찰에 올라가시면, 이제 석가모니불이나 미륵불에게 절을 하십시오. 물론 그 절은 일방적인 숭배의 절이 아닙니다. 그것은 멋진 맞절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지요. 쇳덩어리나 나무토막이라서 석가모니불이나 미륵불은 이미 당당한 주인이 되어버린 우리에게 절을 할 수 없을 테지만, 너무 무례하다고는 탓하지 마십시오. 자비의 마음을 품고서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