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5년 1월 5일, 사관학교 연병장에서 드레퓌스의 불명예 퇴역식이 열렸다. 드레퓌스는 그 자리에서
도 큰 소리로 자신은 무죄라고 외쳤지만, 유대인들을 모두 죽이라는 군중들의 함성에 묻히고 말았다.
상사가 드레퓌스의 견장을 찢고 참모본부 장교를 뜻하는 붉은 줄을 뜯어내고 칼을 두 동강으로 부러
뜨리는 공식적인 의식이 진행되었다. 드레퓌스는 얼굴 한 번 붉히지 않고 이 모욕적인 처사를 조용히
감수했다. 2월 26일, 드레퓌스는 남아메리카에 있는 프랑스령 기아나의 악명 높은 열대우림 지역인
‘악마섬’으로 유배되었다.
1896년 3월, 정보국장 조르주 피카르 중령은 독일 무관이 프랑스 보병대 소령 페르디낭 에스테라지
에게 보내는 정보요구서를 입수했다. 피카르는 드레퓌스의 재판을 지켜보면서 어딘가 석연치 않은
구석을 느끼고 있었다. 피카르는 에스테라지의 정보를 수집하던 중 그의 필적이 드레퓌스의 것이라
고 단정된 명세서의 필적과 동일하다는 사실도 발견했다. 그리고 에스테라지가 명세서가 발견된 189
4년 현재 참모본부를 드나들면서 명세서에 언급되어 있는 서류를 알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는 사실
도 확인했다. 게다가 당시 에스테라지는 도박과 낭비벽으로 돈에 쪼들려 기밀을 팔아서라도 빚을 갚
아야 할 절박한 처지였음도 밝혀냈다.
1896년 9월, 피카르 중령은 모든 내용을 정리하여 참모총장과 참모차장에게 제출하며 스파이 사건의
진실 규명을 요구했지만 거절당했다. 그들은 진실 따위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으며, 사실이 밝혀지면
유럽을 초토화할 전쟁이 일어날 수도 있다는 해괴한 이유로 피카르 중령에게 함구를 명했다. 피카르
중령은 모르고 있었지만, 사실인즉 참모본부의 고위 인사들도 스파이 첩보전에 연루되어 있었기 때
문에 드레퓌스의 단독범행으로 묻어두는 편이 안전했던 것이다. 11월, 피카르 중령은 정보국에서 쫓
겨나 북아프리카의 프랑스령 튀니지로 좌천되었다. 피카르는 명세서 사건의 진상을 자세히 적어 루
이 르블루아 변호사에게 전했다.
르블루아 변호사를 통해 문서를 전달받은 상원 부의장 케스트네르는 파리의 유력인사들에게 이 사실
을 널리 알려 드레퓌스 사건 재심운동을 시작했다. 어느 양심적인 신문은 명세서와 에스테라지 소령
의 필체를 나란히 게재하여 두 필체가 동일하다는 사실을 널리 보도하기도 했다. 여러 독자들이 에스
테라지로부터 받은 편지를 증거물로 보내기도 했다. 그때까지 모든 사실을 부인하던 에스테라지는
드레퓌스 친형의 고소로 결국 법정에 서게 되었다. 그러나 1898년 1월 11일에 열린 군사법정은 참모
본부의 압력으로 제대로 된 사실심리도 없이 에스테라지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대신 피카르 중령이
기밀누설죄를 뒤집어쓰고 구속되었다.
이때부터 프랑스는 진실을 밝히려는 쪽과 진실과 무관하게 드레퓌스를 반역자로 몰려는 쪽으로 나뉘
어 살벌한 공방전을 벌이기 시작했다. 양심적 지식인과 법률가, 공화주의자와 일부 진보적 정치인,
소수의 언론, 사회주의자와 노동자 등이 진실을 밝히려는 쪽에 가담했다. 이에 반해 군부와 군국주의
자들, 反유대주의자들, 과격한 가톨릭주의자들, 거대한 언론사들 등은 드레퓌스를 반역자로 몰려는
쪽에 섰다. 물론 다수인 이들의 힘이 훨씬 강력했다.
그러나 소설가 에밀 졸라가 1898년 1월 13일자 일간지 <로로르> 1면에 ‘나는 고발한다’는 제목의 글
을 실으면서 국면은 일대 전환기를 맞았다. 펠릭스 폰르 대통령에게 보내는 공개편지 형식이었다. 에
밀 졸라는 이 글에서 드레퓌스가 결백하고 에스테라지가 진범임을 밝히는 구체적인 사실과 증거들을
일목요연하게 제시했다. 또한 드레퓌스를 희생양으로 삼아 군부의 범죄사실을 숨기려는 이유도 조목
조목 밝히면서, 국방부장관과 군 수뇌부 인사들을 고발했다. 사실을 알면서도 고의로 오판을 한 재판
관들과 필적감정사도 고발했다. 파리가 발칵 뒤집히면서 단 하루 만에 3000여 명의 유력인사들이 드
레퓌스 재심운동 청원서에 서명하고 시위에 나섰다. 물론 반대여론도 만만찮았다. 모두가 울산시장
선거 개입을 호도하려는 문재인의 궤변 같은 이유였다. 드레퓌스 지지파와 반대파로 갈려 프랑스 전
역이 무질서와 혼란에 빠졌다. 에밀 졸라는 7월 18일에 열린 법정에서 징역 1년에 벌금 3000프랑의
유죄판결을 받고 복에 없는 영국 망명길에 올랐다. 프랑스는 상굿도 非이성적인 나라였다.
새로 부임한 국방부장관 카베냐크는 법원에 제출된 드레퓌스 사건 관련 증거서류를 재검토하라고 군
사법원에 명령했다. 재검토 결과 정보부 앙리 소령이 드레퓌스를 범인으로 몰아가기 위해 허위문서
를 작성했다는 사실이 밝혀져 구금되었다. 8월 30일에는 에밀 졸라에 의해 고발된 한 장군이 잘못을
뉘우치며 조작사실을 고백했고, 명세서의 진범인 에스테라지는 情婦와 함께 영국으로 도망쳤다. 그
는 영국에서 자신의 범죄사실을 낱낱이 밝히는 책을 출간했다. 인세로 계속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기
위한 사악한 의도에서였다. 정보국 뒤파티 소령은 공문서 위조혐의로 구속되었고, 에밀 졸라는 명예
를 회복하여 영국으로부터 귀국했다.
이후에도 숱한 우여곡절 끝에 드레퓌스는 기아나로부터 귀국하여 1906년 7월 12일 군사법원으로부
터 무죄판결을 받았다. 드레퓌스는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비롯하여 여러 종류의 사과성 훈장을 받는
등 사회적으로도 완전히 사면‧복권되었지만, 마카 다 부질없는 일이라 생략한다.
출처:문중13 남성원님 글
첫댓글 이런 세계사의 발췌야 말로 우선 자료를 많이 수집해 읽고 기록하여야 그 역사가 맥을 이어 갑니다. 작가의 다독과 정독이 선하게 그려 지기도 합니다. 동대문 헌책방의 방문도 작가 일상의 한 몫이니 식견이 넓혀지기 마련 입니다. 노후의 큰 행복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