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오직 무명만 키울 뿐
迷心修道(미심수도)
但助無明.(단조무명)
어리석게 도를 닦는 것은
오직 무명만 키울 뿐이다.
《註解》
悟若未徹(오약미철)이면
修豈稱眞哉(수기칭진재)이리오.
悟修之義(오수지의)는
如膏明相賴(여고명상뢰)이고
目足相資(목족상자)니라.
주해
철저히 깨치지 못했다면
수행이 어찌 참되다고 하겠는가?
부처님 세상을 알고 수행한다는 뜻은
기름과 불이 서로 의지해야 밝은 불빛이 있고
눈과 발이 서로 도와야 먼 길을 가는 것과 같다.
출처: 선가귀감, 서산대사 지음, 원순 역해, 도서출판 법공양
주> 如膏明相賴(여고명상뢰)
함허 득통 스님도 「원각경」 ‘보현보살장’을 해설한 대목에서 같은 내용을 이야기하고 있다. “기름과 불은 서로 의지하고 눈과 발은 서로 돕는다. 불이 기름을 얻지 못하면 밝은 불빛은 타오를 수 없고, 발이 눈의 도움을 받지 못한다면 몇 발자국밖에 걸을 수가 없다. 불은 기름을 얻어서 더욱 밝아져야 그 불빛이 사라지지 않고, 발은 눈이 있음으로 더 먼 길을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원각(圓覺, 깨달음, 부처님의 세상)을 알고 하는 수행은 불빛을 환하게 밝혀주는 기름과 같고, 수행을 하는 데 원각에 대한 이해는 먼 길을 가는 데 반드시 없어서는 안 될 눈의 역할과 같다. 원각을 알고서도 수행하지 않는다면 그 앎은 반드시 공허하고, 수행을 하면서도 원각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 수행은 반드시 몇 걸음 나아가지를 못한다. 이 때문에 수행을 하고자 하면 모름지기 먼저 원각을 알아야 하고, 이미 원각을 알았다면 모름지기 수행을 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문수 보살은 먼저 ‘맑고 깨끗한 원각’을 알게 하고, 보현 보살은 이 깨달음에 의지하여 수행을 하게 하였다.”
첫댓글 https://www.youtube.com/watch?v=7qHMGz3OX-c&list=PLuwggJo1CUnfeeG1yAXh61fdEJ13odrsJ&index=22
처음부터 2분 33초 까지 입니다. 짧은 영상이니 참고 하시면 더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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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자주 바르게 산다는 것이 참으로 중요하다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바른 깨달음을 얻어서 그 길로 꾸준히 나아가는 길!
바르지 않은 깨달음이라면 갈수록 멀어져가는 길을 바르게 가려면 얼마나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며 과연 바른 길로 돌아올 수는 있을까? 라는 생각을 합니다.
하루하루가 수행의 연속입니다. 고맙습니다. 마하반야바라밀_()()()_
제가 잘못 이해했는지는 몰라도 해석이 조금 이상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미심수도 단조무명...어리석게 도를 닦는다는 것은 무명을 키울 뿐이다
- 어리석게 도를 닦는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저는 어리석은 마음으로 도를 닦는다면...이라고 해석을 했는데 그 근거는 아래와 같습니다.
오약미철이면 수기칭진재...깨달음이 확철하지 못하다면 수행이 참되지 못하다?
- 이 부분은 앞뒤가 안맞지 않습니까? 깨달음을 얻기 위해 수행하는 것인데 깨달음이 철저하지 못하다면 수행이 진실되지 못하다니요? 이상합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씀하시는 깨달음이란 우리가 흔히 아는 깨달음이 아니라 일체가 모두 부처님이라는 정견을 일컫는 것이 아닐까 하는 의문을가지게 됩니다.
따라서 미심이란 정견을 갖지 못하고, 밖에서 구하려는 마음이나 깨달으려는 욕심같은 미혹한 마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닐까...합니다.
그런 견지에서 본다면 아래 오수지의...깨달음과 수행의 의미가 서로 상조한다는 표현이 적절하게 됩니다.
수행 후에 깨달음이 온다는 선후관계를 전제로 하면 이 말씀이 이상하게 해석될 수밖에 없어 보입니다.
여기서 말씀하시는 오, 깨달음이란 혹시 심불급중생 시삼무차별, 수행을 하든 안하든 아무 얻을 것 없다는 말씀에 대한 깊은 믿음을 전제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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