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녀 마리아 막달레나 축일 (아가3,1-4ㄴ) (요한 20,1-2.11-18)
제1독서
<내가 사랑하는 이를 찾았네.>
▥ 아가의 말씀입니다. 3,1-4ㄴ
신부가 이렇게 말한다.
1 “나는 잠자리에서 밤새도록 내가 사랑하는 이를 찾아다녔네. 그이를 찾으려 하였건만 찾아내지 못하였다네. 2 ‘나 일어나 성읍을 돌아다니리라. 거리와 광장마다 돌아다니며 내가 사랑하는 이를 찾으리라.’ 그이를 찾으려 하였건만 찾아내지 못하였다네.
3 성읍을 돌아다니는 야경꾼들이 나를 보았네. ‘내가 사랑하는 이를 보셨나요?’ 4 그들을 지나치자마자 나는 내가 사랑하는 이를 찾았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여인아,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0,1-2.11-18
1 주간 첫날 이른 아침, 아직도 어두울 때에 마리아 막달레나가 무덤에 가서 보니, 무덤을 막았던 돌이 치워져 있었다. 2 그래서 그 여자는 시몬 베드로와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말하였다. “누가 주님을 무덤에서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
11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었다. 그렇게 울면서 무덤 쪽으로 몸을 굽혀 12 들여다보니 하얀 옷을 입은 두 천사가 앉아 있었다. 한 천사는 예수님의 시신이 놓였던 자리 머리맡에, 다른 천사는 발치에 있었다.
13 그들이 마리아에게 “여인아, 왜 우느냐?” 하고 묻자, 마리아가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누가 저의 주님을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
14 이렇게 말하고 나서 뒤로 돌아선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서 계신 것을 보았다. 그러나 예수님이신 줄은 몰랐다.
15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여인아,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 하고 물으셨다. 마리아는 그분을 정원지기로 생각하고, “선생님, 선생님께서 그분을 옮겨 가셨으면 어디에 모셨는지 저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제가 모셔 가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16 예수님께서 “마리아야!” 하고 부르셨다. 마리아는 돌아서서 히브리 말로 “라뿌니!” 하고 불렀다. 이는 ‘스승님!’이라는 뜻이다.
17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아직 아버지께 올라가지 않았으니 나를 더 이상 붙들지 마라. 내 형제들에게 가서, ‘나는 내 아버지시며 너희의 아버지신 분, 내 하느님이시며 너희의 하느님이신 분께 올라간다.’ 하고 전하여라.”
18 마리아 막달레나는 제자들에게 가서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 하면서,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하신 이 말씀을 전하였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2023.07.22.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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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내가 사랑하는 이를 보셨나요? ” ♣
◈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세상에서 소중하고 고귀한 것을 내 놓으라면 남녀간의 사랑일 것입니다.
그래서 소설이나 드라마, 음악, 미술에 이르기까지 주 주제 중에 하나가 남녀간의
사랑인 것입니다.
가에따노 도니제띠(Caetano Eonizetti, 1797-1848)가 쓴 오페라 '사랑의 묘약'의 제 2막에서
주인공, 네모리노가 부르는 아리아, ‘남 모르게 흐르는 눈물: Una furtiva lacrima.’의 주제도
결국 한 시골의 순수한 남녀의 사랑이 모든 것을 아름답게 그리고 행복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한 때 교회 안팍으로 시끄럽게 만들었던 댄 브라운이 쓴 ‘다빈치 코드’도
마리아 막달레나와 예수님과의 관계를 남녀 간의 사랑으로 만들어 갑니다.
성경의 내용을 보더라도 마리아가 스승께 대한 감정을 그렇게도 해석할 수
있는 여운을 남기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소설의 특징이 허구의 세계를 그려나가며 세상 흥미를
돋군다는 것입니다.
비록 이 소설이 사실과는 다르다 하더라도 그 파장은 컸던 것은 사실입니다.
주님께서는 천국에서는 이 남녀 간의 사랑을 넘어선, 천사의 존재와 같이
하느님 사랑과 평화를 누리는 인간의 지위를 말하고 있습니다.
남녀 간의 사랑으로 펼쳐나가는 아가서의 표현을 보아도 이 성경이
정경논란의 토막위에 놓여 있었다는 사실을 실감있게 해줍니다.
한 여인은 자신의 연인을 찾아 나섭니다.
“나는 잠자리에서 밤새도록 내가 사랑하는 이를 찾아다녔네. 그이를 찾으려 하였건만
찾아내지 못하였다네.”(아가 3,1)
그리고 이 여인은 성읍의 거리와 광장을 사랑하는 이를 찾아 나서지만 만나지 못합니다.
그러나 아가서의 저자는 끝맺음을 이렇게 하고 있습니다.
“성읍을 돌아다니는 야경꾼들이 나를 보았네. ‘내가 사랑하는 이를 보셨나요?’
그들을 지나치자마자 나는 내가 사랑하는 이를 찾았네.”(3-4절)
유대인들의 이 사랑하는 연인을 이스라엘 백성과 하느님과의 사랑관계로 보려했고
그리스도교 해석은 교회와 그리스도의 관계로 보려 했지만 그 공통적인 표현은
자연스러운 남녀 간의 사랑 이야기인 것입니다.
마리아 막달레나에 대한 신원에 대해서 교회의 역사에 보면 논란의 흔적들이 있었습니다.
루카 복음사가는 한 죄 많은 여인에 대해서 소개하고 있습니다.
어느 날 바리사이의 집에 초대 받아서 식사를 하시는 예수님의 발을 마리아는 자신의
눈물로 적시고 머리카락으로 닦아드리고 나서 향유를 부어 바르는 것입니다.(루카 7,36-38)
요한복음에도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바리사이의 집이 아닌 베타니아의 마리아와 마르타의 집에서 다시 살아난
라자로를 위한 잔치가 있었는데 그 자리에서 마리아가 비싼 순 나르도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닦아드리는 것입니다.(요한 12,1-3)
마태오와 마르코는 라자로의 집이 아닌 베타니아의 나병환자 시몬의 집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마태 26,6; 마르 14,3).
마태오, 마르코, 루카와 요한이 전하는 이야기를 놓고 서로 다른 표현에 대해서 논란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해석하는 데에서 서로 다른 장소에서 각각 다른 이야기 라고 할 수 있든지, 아니면
마리아의 이야기가 서로 다르게 표현되었을 것이라고 추측하는 것입니다.
베타니아 마리아와 막달라 출신의 마리아가 ‘동일인물’인가 아니면 ‘동명이인’가도
확실하게 규정하기는 어려움을 안고 있습니다.
루카는 마리아 막다레나가를 ‘일곱 마귀가 떨어져 나간’ 여인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루카 8,2)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예수님의 무덤을 찾은 마리아에 대해서 마태오는
마리아 막달레나가 혼자로(마태 28,1), 그러나 마르코는 마리아 막달라레나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살로메가 함께(마르 16,1)라고 전하고 있습니다.
루카는 마리아 막달레나와 함께 요안나, 야고보 어머니 마리아가 함께(루카 24,10)
있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공관복음보다 후대 쓰여진 요한복음도 마리아 막달레나가 예수님의 무덤을 찾은 일을
전하고 있는는 다른 복음들과는 달리 더 상세하면서도 마리아와 예수님과 오고갔던
긴 대화도 적고 있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시는 금요일 오후, 안식일이 시작하는
시간 쫒기며 사람들이 서둘러 무덤에 모신 사실이 마음에 걸렸던 것입니다.
그래서 안식일 다음 날 새벽, 아직 날이 어두울 때에 스승님의 시신에 향료라도
발라 드리려고 이른 새벽에 무덤을 찾았던 것입니다.
여인의 연약한 힘으로는 무덤을 막았던 돌을 치울 것을 걱정하던 마리아에게 혼란스러운
일이 벌어 집니다.
무덤은 열려 있고 예수님의 시신도 없어진 것입니다. 기가 막힌 마리아는 그만 울고 맙니다.
그 때에 마리아의 뒤에 서 계시던 주님께서 마리아에게 ‘여인아, 왜 우느냐?
누구글 찾느냐?’하고 물으시지요.
마리아는 예수님을 그곳 정원지기로 알았기에 그분에게 “선생님, 선생님께서 그분을
옮겨 가셨으면 어디에 모셨는지 저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제가 모셔 가겠습니다.”
(요한 20,15)라는 말을 건넵니다.
그 때에 예수님께서 그녀에게 ‘마리아’라고 정답게 부르시고 마리아는 예수님을
알아보고 스승님이라는 뜻인 ‘라뿌니’라고 반갑고 놀라운 소리를 치고 맙니다.
그녀는 스승님의 지시대로 기쁨에 젖어 제자들에게 서둘러 달려가서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하면서, 스승님께서 자신에게 나타난 일과 하신
말씀을 전해주는 것입니다.
공관복음과 요한이 전하는 부활 후의 무덤을 찾았던 마리아 막달레나에 대한
이야기가 서로 다르지만 공통적인 것은 스승에 대한 마리아의 지극한 사랑과 정성이
묻어난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은 공관복음에서 전하는 최대의 존경의 표시인 그분 앞에 엎드려 발을 만지는
표현은 없지만 주님께서 “내가 아직 아버지께 올라가지 않았으니 나를 더 이상
붙들지 마라.”(17절)라는 주님의 표현을 미루어 보아 그녀도 예수님의 발을
만졌던 것입니다.
엎드려 발을 만지는 것은 그 당시 최대의 존경과 애정의 인사법이었던 것입니다.
마리아가 ‘라뿌니’라고 대답한 것으로 보아 세상 사람들이 오해하거나 구미에 당기는
이성간의 감정이 아닌 스승의 대한 애정과 존경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교회는 이 사실을 존중하고 마리아를 신앙인의 모델로 삼았던 것입니다.
마리아는 이 세상에서 시달리며 살아가는 우리에게 희망을 줍니다.
우리가 비록 부족하고 죄인이라 하더라도 마리아처럼 주님을 사랑할 수 있고
그분의 부활에 참여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간직할 수 있다는 사실이 우리를
용기 있게 또한 행복하게 해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