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 해(宋 海) 선배에게는 또 한가지 일화가 있다. 송 선배가 원래 술을 마시면 주사가 좀 있는 편이다. 어느날 술이 거나하게 취해 다짜고짜 파출소에 들어갔다. 새벽 4시쯤 됐을까.
자기를 알아본 경찰관에게 이렇게 말했다. “지금 이 시간에 불 켜놓고 일하는 곳 있으면 나와보라고 그래. 정말 수고 많으십니다.”
그리고는 맥주를 한 박스 사와서 경찰관들과 술을 먹기 시작했다. 여기까지는 좋았다. 그런데 갑자기 경비전화를 집어 내동댕이치면서 난리를 부리기 시작한 것이다.
“너네들, 누가 근무 중에 술 마시라고 그랬어? 경찰이 이래도 되는 거야?” 이날 소동은 결국 형수가 파출소에 와서 송 선배를 데리고 가는 것으로 해결됐다.
어쨌든 송 선배가 이렇게 술을 많이 마시고도 지금까지 건강하게 지내니 참 다행이다. 스스로 몸 관리를 잘 한 이유도 있지만 KBS ‘전국노래자랑’이라는 프로그램 덕이 큰 것 같다.
자신이 진행하는 고정 프로그램이 있으니까 일흔이 넘은 나이에도 전국을 돌아다닐 수 있는 것이다. 부디 건강하게 오래 사시길 기원한다.
술에 얽힌 일화로는 역시 조용필(趙容弼)과의 그 때 그 사건을 빼놓을 수 없다. 1980년대 초 부산에서 벌어진 일이다. 나와 조용필이 부산에서 따로따로 공연을 가진 어느날 내가 전화를 걸었다.
“용필아, 술 한 잔 하자.” 그리고는 당시 부산에서 가장 유명했던 술집 ‘기린살롱’에서 만나 양주를 몇 병 비웠다. 여기서 끝냈어야 했는데 내가 “낭만을 즐기자”라고 말한 게 화근이었다.
우리는 택시를 타고 해운대로 갔다. 이때가 새벽 2시였다. 포장마차에서 소주를 먹다가 또 그놈의 ‘낭만’ 때문에 백사장으로 향한 것이 결정적인 실수였다.
우리는 바닷가에 술 궤짝을 놓고 안주와 소주 20병을 준비했다. 촛불까지 켜놓고 그야말로 낭만을 즐겼다. 게다가 용필이가 ‘촛불’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부르기까지 하니 술 맛이 안 날 리가 없었다.
그러다 그 자리에 쓰러져 잠이 들었다. 우리가 반쯤 물에 잠긴 것도, 해가 뜬 것도 몰랐다. 완전히 변사체였다. 백사장에서 우리를 발견한 아주머니들의 웅성대는 소리만 들렸다.
“이 사람, 조용필이다.” “아이다. 톱 스타 조용필이 왜 여기 이러고 있노?” “맞다. 여기 이주일도 있다 아이가.” “아니라니까. 그런데 참 비슷하게 못 생겼대이.”
결국 그 술과 낭만이 문제다. 그 좋은 술집에서 좋은 술 먹고 왜 입가심으로 소주를 먹었는지 모르겠다. 그 동안 용필이와 내가 마신 술은 아마 화물열차 한 칸 정도는 넉넉히 채울 것이다.
“술에는 나를 따라올 사람이 없다”고 자신만만해 하던 내가 참으로 어리석다. 요즘은 용필이도 소주를 반 명만 마신다고 하니 그나마 다행이다.
술 이야기는 고 이기동(李起東) 선배 이야기로 마무리를 지어야겠다. 서영춘(徐永春) 선배와 누가 술 더 많이 마시나 내기까지 했던 이 선배도 결국 87년 간경화와 당뇨병으로 저 세상 사람이 됐다. 그만큼 말술이었고 실수도 많이 했다.
어느날 술이 취해 집에서 자고 있다가 새벽에 벌떡 일어났다. 그러더니 갑자기 장롱을 열고 소변을 보는 것이 아닌가. 장롱을 화장실로 착각한 모양이었다. 이를 말리는 형수에게 이 선배가 한 말이 걸작이다. “너, 100번이지? 오늘 나하고 안 자면 죽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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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 미주순회공연(上)
- 1982년부터 5년간 미주 순회공연, 무명의 설움 벗어나 인생의 전성기
한국일보 인터넷 홈페이지에는 ‘나의 이력서’를 읽은 네티즌들이 글을 쓰는 코너가 있다.
우선 쾌차를 기원해준 그분들에게 감사의 말씀을 드리고 싶다.
며칠 전 그분들의 글을 죽 읽어봤는데 유난히 눈에 띈 글이 하나 있었다. ‘미국 LA에 사는 동포인데 선생님의 LA 공연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꼭 나으셔서 다시 한번 이곳으로 와 주세요’라는 내용의 글이었다.
미주순회공연. 지금 생각해도 가슴 떨리는 말이다. 한국일보 미주지사 초청으로 1982년부터 내리 5년 동안 미국과 캐나다 순회공연을 떠난 그 때는 정말 내 인생의 전성기였다.
길고 긴 무명의 설움에서 벗어나 한 해 최고의 스타들과 30~40일 외국을 돌아다니며 공연을 갖는다는 것은 크나큰 영예였다. 미국을 가본 것도 그때가 처음이었다.
이 점은 다른 연예인들도 마찬가지였다.
당시만 해도 외국에 나가는 일이 지금처럼 쉽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때 한국일보가 과감하게 일을 벌였다.
82년 6월 조용필(趙容弼) 하춘화(河春花) 혜은이 등 인기 가수를 데리고 무려 한 달 동안 미국과 캐나다의 주요 도시 30여 곳에서 해외동포 위문공연을 연 것이었다. 사회자 겸 코미디언은 물론 나였다.
공연은 보통 가수들의 히트곡 열창, 나의 코미디 연기, 참가자 모두가 꾸미는 코믹 연극으로 구성됐다.
한 동포는 내 코미디에 대해 “이주일 쇼를 기다리는 재미로 한 해를 보낸다”고까지 말했다.
‘코미디의 황제’ ‘한국의 자니 카슨’이라는 말은 한국보다도 먼저 미국에서 들었다.
이후에도 공연은 탤런트 이덕화(李德華) 정혜리(鄭愛利), 가수 김세레나 이은하(李銀河) 이 용(李 龍) 김연자(金蓮子) 정수라(丁秀羅), 코미디언 이상해(李相海) 등 당시 최고의 스타로만 구성됐다. 특별한 출연료가 있는 것도 아니고 국내 인기관리에 큰 지장이 있는데도 이들은 기꺼이 공연에 참가했다. 오히려 크나큰 자랑거리로 여겼다.
그때는 스타들도 순수했기 때문에 ‘해외동포 위문공연’이라는 명분 하나로 한 달 이상씩 국내무대를 비울 수 있었던 것이다.
동포들의 반응도 엄청났다. 82년 첫해 첫 공연을 LA의 ‘슈라인 오라토리움’이라는 대형 공연장에서 가졌는데 4,000석을 가득 메우고도 못 들어온 사람이 1만 여 명이나 됐다.
공연장에 입장하지 못한 이들이 우리들이 탄 버스에 분풀이로 페인트 칠을 했을 정도로 열광적인 분위기였다.
그때만 해도 미국에서 고국 연예인을 직접 볼 수 있는 기회는 거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동포들의 뜨거운 열기를 더욱 진하게 느낀 것은 미국의 한 소도시에서 열린 공연이었다.
우리나라로 따지면 면 소재지 정도의 아주 작은 마을이었다. 주한미군과 결혼해 미국에 정착한 한국 여성들이 모여 사는 동네였다.
그들이 우리 숙소에 몰려와 “수십만 명이 모여 살아야만 동포냐? 우리 앞에서도 공연을 해달라”고 사정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선 무대였다.
결국 군부대 식당에서 공연을 가졌는데 관객은 고작 100명. 그러나 그들의 반응은 상상외였다.
그들은 우리가 노래를 시작하기만 하면 울었다. “안녕하십니까”라는 말 한마디만 해도 울음바다가 됐다.
공연 후 부대장이 “당신들이 우리 가족들을 즐겁게 해준다고 해서 공연을 허락했는데 슬프게 하면 어떻게 하냐? 헌병대에 고발하겠다”고 농담을 건넬 정도였다.
그 사람들이야말로 진정으로 고국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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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 미주순회공연(中)
- 15인분 햄버거를 주문하며 혀 너무 굴렸더니 50개 나와
1982년 6월 미국 샌프란시스코 공항에 내렸을 때의 일이다. 조용필(趙容弼) 하춘화(河春花) 혜은이 등 우리 일행 모두 낯선 풍경에 가슴이 설렜다.
미국 구경이 처음이었던 나와 내 매니저 최봉호(崔奉鎬) 회장은 어린애마냥 즐거워했다. 최 회장이 갑자기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손로원(孫露源) 작사, 박시춘(朴是春) 작곡의 ‘샌프란시스코’였다.
‘비너스 동상을 얼싸안고 소곤대는 별 그림자/ 금문교 푸른 물에 찰랑대며 춤춘다/ 불러라 샌프란시스코야 태평양 로맨스야/ 나는야 꿈을 꾸는 나는야 꿈을 파는 아메리칸 아가씨’.
이국 땅에서 부르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노래였다. 게다가 우리가 서 있는 곳이 바로 이 노래에 나오는 샌프란시스코가 아닌가.
그런데 노래를 끝낸 최 회장의 말 한마디에 우리 모두는 배꼽이 빠지는 줄 알았다. 아무 표정 변화 없이 내게 이렇게 말한 것이었다.
“주일아, 여기가 샌프란시스코인 것은 알겠는데 아메리카는 아직 멀었냐?” 최 회장이 농담으로 이런 말을 했는지, 진짜 모르고 그랬는지는 독자 여러분 판단에 맡기겠다.
어쨌든 미주순회공연에서는 이처럼 재미난 일이 많았다.
30~40일 안에 LA 샌프란시스코 시애틀 시카고 뉴욕 워싱턴 휴스턴 덴버 토론토 에드먼턴 등을 돌아다녀야 하는 강행군이었지만 공연단은 모두 낯선 이국 여행을 즐겼다.
더욱이 가는 곳마다 동포들의 뜨거운 갈채까지 받았으니 당시 연예인들에게 이 미주순회공연은 동경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영어소통이 안 돼 일어난 웃지 못할 해프닝도 많다. 나와 최 회장, 그리고 몇몇 연예인들을 포함해 무려 15명이 햄버거 가게에 들어간 적이 있었다.
어떻게 하다 내가 주문을 하게 됐다. 내 딴에는 ‘피프틴(fifteen)’이라고 또박또박 말하면 미국인 점원이 오히려 못 알아 들을 것 같아 혀를 굴렸는데 이것이 문제였다.
혀를 너무 굴렸던 것이다. “피프리, 플리즈.” 어쨌든 그날 우리는 쉬지 않고 나오는 햄버거 50개를 모두 먹느라 진땀을 흘려야 했다.
호텔 방에서는 이런 일도 있었다. 공연을 마치고 샤워를 하려고 하는데 뜨거운 물만 쏟아져 나왔다.
아무리 손잡이를 돌려도 찬물이 나오질 않았다. 할 수 없이 거실에 있던 최 회장에게 “전화로 사람 좀 불러달라”고 부탁했다.
영어에 자신이 없기는 최 회장도 마찬가지. 그는 한참을 망설이다가 결국 수화기를 들었고 딱 두 마디만 했다.
“갱(gang)! 으악!” 1분도 안 돼 호텔 직원 10여 명과 경찰까지 방으로 몰려왔다. 무슨 일이든 너무 어렵게 생각하면 안 되는 법이다.
그러나 미주순회공연에서 가장 재미를 본 사람은 가수 이 용(李 龍)일 것이다.
83년 공연 때의 일이다. 그는 가수 데뷔 2주년의 날을 미국 덴버에서 맞아 아주 신이 나 있었다.
더욱이 ‘바람이려오’ ‘잊혀진 계절’ 등 자신의 노래가 열광적인 반응을 얻자 공연 내내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러던 그가 어느날부터인가 버스에 늦게 타기 시작했다. 또 일행과 떨어져 호텔 방에서 보내는 시간도 많아졌다.
화가 난 조용필이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이게 어디서 개인 플레이야?” 가볍게 얻어맞기까지 했다.
결국 이 용이 고백을 했다. “실은 애인이 생겼어요. 미국 와서 첫 공연 때 만난 여성인데 계속 전화로 사귀고 있습니다. 조금 봐주세요.”
이 용은 한달 내내 그 여성과 전화로 사랑을 키웠고 결국 귀국 후 얼마 안 있다 결혼식까지 올렸다.
지금 그들은 경기 일산에 사는데 가끔씩 병문안을 와 당시 이야기를 즐겁게 들려주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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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 미주순회공연(下)
- 설공연, 상봉의 날 겹쳐 1만명 운집, "날 보러 왔구나" 착각 망신 당할뻔
동포들이 유난히 좋아했던 내 레퍼토리 하나를 소개하겠다.
일찍이 국내 밤무대에서 써먹은 것인데 소재가 미국과 관련한 것이라 미주순회공연 때도 들려줬다. 원래는 순 쌍소리와 야한 농담으로 구성된 이야기이다.
“오늘 LA를 하루종일 돌아다녔습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한인타운 간판이 한국 것보다 더 잘 돼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떡방아 집. 이 얼마나 정감 어린 말입니까. 이에 비해 지금 한국의 간판들은 외국 이름 일색입니다. 조지 팔마니. 더구나 간판은 왜 그리 큰지. 간판은 원래 건물에 맞게 적당해야 하는데 한국 남자들을 닮아 무조건 크게만 만들려고 합니다. 이 놈이 이만하면 저 놈은 저만 해야 하고…. 이러니 한국 여자들이 감당할 수가 있습니까?”
오랜만에 들어보는 걸쭉한 농담에 동포들은 정말 자지러졌다. 분위기가 살면 나는 좀더 강도를 높였다.
“정신과와 비뇨기과가 같이 있는 병원이 있었습니다. 몹시 추운 어느날 한 환자가 포경수술 후 빙판길을 나서다가 넘어졌습니다. 이 모습을 본 정신과 병동에서 난리가 났습니다. 환자들 사이에 설전이 벌어진 것입니다. ‘저 놈 엎어졌다.’ ‘아니다, 자빠진 것이다.’ ‘이 자식이, x까고 자빠졌네.’”
물론 내 인기에 취해 망신을 당한 적도 있었다. 1985년 2월 설 맞이 위문공연 때의 일이었다.
공연장인 LA의 한 체육관은 1만 여 명이 꽉 들어찼을 정도로 열기가 대단했다. 이 모습을 보고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과연 나 이주일은 대스타구나. 해외 동포들까지 그 바쁜 생활 속에서도 내가 왔다니까 만사 제쳐놓고 몰려오는구나. 미국의 고층빌딩도 내 인기에 비하면 하루아침 해장거리이다.’
그런데 그날 반응이 심상치 않았다. 내가 무대 위에서 무슨 말을 해도 아무도 들으려 하지 않았다. 관객들끼리 서로 악수하고 포옹하고 안부를 묻고….
알고 보니 그날은 뿔뿔이 흩어져 살던 동포들이 1년에 하루를 정해 대규모 상봉을 하는 날이었다. 조금만 그 어수선한 상황이 계속됐더라면 “저 좀 주목해주세요”라고 말할 뻔했다. 스타의 착각은 덩치도 큰 법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미주순회공연 때 가장 인기가 있었던 연예인은 가수 하춘화(河春花)와 조용필(趙容弼)이었던 것 같다.
특히 하춘화는 오랜 지방공연에서 몸에 밴 화려한 무대매너로 관객을 울리고 웃겼다. 노래는 물론이고 익살스러운 제스처까지 사회자가 필요 없을 정도였다.
84년 공연 때는 한 동포여성이 찾아와 “오늘 하춘화를 보지 않으면 절대 돌아가지 않겠다”고 우겼을 정도였다.
“교통사고로 3년 동안 병상에 누워있었는데 매일 밤 하춘화 노래를 듣지 않으면 잠을 들 수 없었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었다.
조용필은 그야말로 ‘작은 거인’으로 이름을 떨쳤다. 미국 관객들까지 그의 열창에 환호했다.
한 미국인은 조용필이 공연 시작 전 커다란 앰프와 음향기기를 만지는 것을 보고 “정말 이런 기계를 다룰 줄 아느냐?”고 비아냥거리듯 말했다.
그러던 그 미국인은 공연이 끝난 뒤 무대 뒤로 찾아와 “대형가수를 몰라봐 정말 죄송하다”고 말하며 백배사죄했다. 역시 가수는 무대에 섰을 때 가장 크게 보이는 법이다.
끝으로 독자가 전해온 사연을 하나 소개해야겠다.
2일자 ‘나의 이력서’에서 가수 하청일(河淸一)씨가 미국에서 허드렛일을 하며 어렵게 살고 있다고 전했는데, 하씨의 지인이라는 독자는 “하씨가 사업을 하다 망한 것은 사실이지만 지금은 신앙생활을 하며 순탄하게 살고 있다”고 지적해주셨다.
금세 잊혀지는 스타들의 비애를 안타까운 마음에 쓰다 보니 착오가 있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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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 외국 여행지에서 생긴 일(上)
- 유럽여행시 가이드 사라져.. 졸지에 미아신세
외국 여행을 하다 보면 별의별 일이 다 생기기 마련이다.
스타들을 상대로 사기치는 놈, 권총으로 협박하는 놈, 어린 자식이 담배 핀다고 뭐라 그러는 놈…. 노상방뇨를 하다 경찰에 붙잡힐 뻔한 일도 있었다. 하나하나 소개하겠다.
나와 조용필(趙容弼)이 1984년 영국 여행을 할 때의 일이다.
당시 우리는 프랑스 문화부 초청으로 파리에서 4일 동안의 공식 일정을 마친 뒤 느긋하게 유럽여행을 즐기고 있었다.
독일 스페인을 거쳐 런던공항에 도착했을 때 사건은 시작됐다. 호텔 예약부터 시내관광까지 런던 여행 일체를 책임진 한국인 가이드가 약속 시간인 오후9시가 되도록 나타나지 않는 것이었다.
게다가 우리는 여행경비 중 일부를 그 가이드에게 송금한 상태였다.
우리는 가이드 집에 전화를 걸었다. 그의 아내는 “제 시간에 나갔는데요. 곧 도착할 거예요”라고 말했다.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말은 안 통하지, 배는 고프지, 여행하면서 늘어난 짐은 잔뜩 쌓여있지…. 당시 한국 최고의 스타 2명이 졸지에 미아신세가 된 것을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마침내 밤12시가 다 돼 그 친구가 나타났다. 보기보다 멀쑥한 30대 초반의 남성이었다.
“오다가 교통사고를 당해 늦었습니다. 제가 선생님들 팬입니다. 존경하는 스타 분들을 기다리게 해서 정말 죄송합니다.”
이렇게 예의 바르게 나오니 뭐라 그럴 수가 있나. 오히려 교통사고 와중에도 우리를 잊지 않고 나온 게 반갑기만 했다.
여기까지는 좋았다. 그런데 가이드를 따라 도착한 숙소가 공항 근처 허름한 모텔이 아닌가.
공항에서 5분도 안 되는 거리였다. 우리는 분명히 런던 시내 고급 호텔로 예약을 했었다. “왜 이런 곳으로 데려왔느냐?”라고 물었다.
“선생님들이 잘 모르셔서 그러는데 런던에는 한국처럼 고급호텔이 없습니다. 사람들이 수수하거든요. 이 모텔이 그나마 가장 고급에 속합니다. 게다가 지금은 성수기라 시내에는 방도 없어요.”
순진한 우리는 그런가 싶었다. 검소한 나라 영국이 아닌가. 너무 피곤하기도 했다.
다음날 오후1시 모텔 로비에서 다시 만나기로 하고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날 아침7시. 우리는 간단히 모닝커피를 한잔씩 마신 뒤 시내 구경도 할 겸 택시를 타고 다운타운으로 향했다.
그런데 낯선 차창 밖 풍경 사이로 낯익은 호텔이 하나 보였다. “용필아, 저거 혹시 하얏트 호텔 아니냐?”
우리는 당장 택시에서 내려 호텔로 들어갔다. “방 있습니까?” “많습니다.” “여기가 런던이 아닌가 보죠?” “런던 한복판입니다.” 마지막으로 하나 더 물었다.
“그러면 한국사람이 묵기에는 뭔가 불편한가 보죠?” “호텔 바로 옆에 한국식당이 2개나 있습니다. 한국인 유학생이 가이드도 해드립니다.”
불길했다. 고급호텔 대신 싼 모텔을 잡아 그 이익을 챙기려고 한 게 분명했다.
“주일이형, 혹시 그 놈 사기꾼 아닐까?” “야, 아무리 그래도 우리에게 사기를 치겠냐?” 우리는 당장 모텔로 돌아갔다.
다행히 짐은 그대로 있었다. 우리는 가이드에게 전화를 걸어 뭐라 한마디 할까 생각했지만 동포끼리 망신만 당할 것 같아 그만 뒀다.
만약 그때 그 가이드 놈과 같이 여행을 했으면 또 어떤 일이 벌어졌을지 궁금하기만 하다.
80년대 최고 인기를 누리던 두 명의 스타를, 그것도 둘이 같이 있는데도 버젓이 농락했으니 지금은 오히려 그놈의 배짱이 놀라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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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 외국 여행지에서 생긴 일(下)
- 美 노부부, 작은체구 조용필보고 , "미성년자가 담배 피운다고 난리"
1985년 미주순회공연 당시 시카고에서 있었던 일이다. 공연을 마치고 숙소인 호텔로 돌아가 잠자리에 누웠는데 전화벨이 요란하게 울렸다.
당시 우리를 동행 취재하던 일간스포츠 신대남(申大男ㆍ현재 일간스포츠 상무이사) 기자의 죽어가는 목소리였다. “내 방에 급히 올라오세요. 빨리요.”
올라가보니 방문 앞에 한국인 건달 2명이 버티고 있었다. ‘뭔가 일이 터졌구나’ 싶었다.
눈을 부라리고 방문을 열었다. 신 기자는 완전히 얼굴이 백지장이 돼 있었고 옆에는 권총을 든 건달 한 명이 서 있었다.
침대에는 쓰다만 각서가 놓여있었다. ‘연예인들을 모두 데리고 새벽2시까지 당신 업소로 가겠다’.
알고 보니 권총을 든 건달은 공연 스폰서 중의 한 명이었던 나이트클럽 사장이었다.
스폰서를 하는 대신 공연 후 한국 연예인들을 상대로 술을 팔려고 했던 것이다. 나는 강하게 나갔다.
“못 가겠다. 쏴 봐라, 이 자식아. 그런 얘기는 들은 적도 없고 지금까지 그런 적도 없다. 그리고 이 사람은 우리를 안내하는 사람이지 책임자도 아니다. 이 개자식아.”
그리고는 치고 박고 싸웠다. 밖에 있던 놈들까지 합세해 1대3으로 싸워 완전히 쥐어 터졌다. 그 사이 신 기자는 경찰에 연락, 큰 사고 없이 사건은 마무리됐다.
그렇지만 이 일은 한국인이 동포를 상대로 어떻게 하든 돈을 벌어보려고 했던 일 같아 지금도 씁쓸한 추억으로 남아 있다.
그 해 미국 경찰에게 큰 망신을 당한 적도 있다. 미국 동부의 한 바닷가에서 있었던 일이다.
낮 공연이 없는 날, 우리 연예인 대부분은 쇼핑을 하거나 호텔에서 잠을 자곤 했다. 그러던 어느날 그곳 바닷가에 게가 잘 잡힌다는 소문을 들었다.
실제로 오징어를 꼬챙이에 감아 바닷가 돌 틈에 들이밀면 신기하게도 커다란 게가 무는 것이었다.
그런데 우리가 너무 많이 잡았다는 것이 문제였다. 몇 마리만 잡으면 될 것을 양동이 10개가 가득 찰 정도로 잡았다.
우리는 곧바로 현지 경찰에 걸렸고 겨우 사정한 끝에 풀려날 수 있었다. 이후 그곳에서는 법으로 관광객의 게 잡이가 금지됐다고 하니 지금도 얼굴이 붉어지는 사건이다.
82년 나와 조용필(趙容弼)이 LA공항에서 겪은 일도 잊혀지지 않는다. 우리는 공항 밖 흡연구역에서 담배를 피고 있었다.
그때 점잖은 미국인 노부부가 우리에게 다가와 뭐라고 말했다.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었던 우리는 그냥 담배만 피워댔다.
5분 정도 지났을까. 노부부가 벼락 같은 소리를 질렀고 이 소리에 사람들 수십 명이 몰려들었다.
마침 한국인 신부 한 명이 지나가다 이 광경을 보고 통역에 나섰다. 노부부는 우선 이렇게 말했다.
“도대체 너희 나라는 어떤 나라이냐? 어떻게 애와 어른이 맞담배를 필 수 있느냐?” 내가 대답했다.
“이 작은 사람은 미성년자가 아닙니다.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가수에요. 저는 유명한 코미디언이구요. 실제 나이 차이도 별로 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노부부는 막무가내였다. “당신이 코미디언인 것은 이해가 가는데 저 사람은 아무래도 아니야. 너무 어려. 여권 좀 보여 줘.” 결국 여권을 보여준 끝에 노부부는 “죄송하다”는 말을 여러 번 남기고 사라졌다.
당시에는 불쾌하기만 했던 이 사건이 지금은 오히려 우리가 배워야 할 교훈이 담겨 있다는 생각이 든다.
만약 인천공항에서 청소년들이 담배를 피고 있을 때 이를 말릴 어른이 몇 명이나 될까. 대개 그냥 못 본 체 할 것이다.
그때 그 노부부도 바쁜 사람들이었을 텐데 우리를 붙잡고 끝까지 나이를 확인하는 모습에서 미국의 또 다른 면을 발견할 수 있었다.
어쨌든 이 사건 후 조용필은 우리로부터 놀림을 받아야 했다. “어이, 미성년자. 나가서 피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