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군병장이 육군중장 님께 드리는 공개장(제11신)
천용택 장군님! 지난번 제1신(2006년2월17일자 61824번)에 이어 제2신(2006년2월18일자 61916번)과 제3신(2006년2월21일자 62104번), 제4신(2006년3월8일자 63107번), 제5신(2006년3월13일자 63492번), 제6신(2006년3월16일자 63703번), 제7신(2006년3월17일자 63784번), 제8신(2006년3월18일자 63846번), 제9신(2006년3월21일자 64022번), 제10신(2006년3월24일자 64273번) 까지 공개장을 드렸는데, 오늘은 제10신(2006년3월24일자 64273번)에서 말씀드렸던 위정자(爲政者)의 불특정 다수(만백성)에 대한 속임수《통치사기극(統治詐欺劇)》에 관해 말씀 올리겠습니다.
그러나 성격은 지난번 것(제10신)의 속편 격일지라도 이야기가 다르다는 것을 미리 말씀드립니다. 오늘날의 한국 좌파(左派)들이 벌이고 있는 속임수《통치사기극(統治詐欺劇)》와 매우 유사(類似)하지요. 천용택 장군님과 좌파(左派)들과 행태(行態)가 비슷하니까 더욱 흥미를 끌 것입니다.
통치사기극(統治詐欺劇)이나 역사왜곡(歷史歪曲)이 우리역사에서도 더러 나타나는데, 실소를 금할 수 없는 역사왜곡사실이 ꡔ조선왕조실록ꡕ에도 나타납니다. 바로 나선정벌(羅禪征伐)이라는 게 그것입니다. 나선(羅禪)이란 옛 러시아인데, 러시아는 1237(고려 고종 24)년에 몽골(칭기즈칸의 아들과 손자)의 침략을 당한 이래 250여 년 가까이 몽골민족이 세운 킵차크(Kipchak) 한국(欽察汗國)의 지배를 받다가 1480(조선 성종 11)년에 모스크바 대공(大公) 이반 3세가 몽골세력을 몰아냄으로써 완전독립을 쟁취한 나라였습니다.
유럽국가로 새롭게 태어난 러시아는 차근차근 세력을 키워 동방진출(東方進出)에 나서 16세기 후반에는 그때까지 무주공산(無主空山)이나 다름없던 시베리아 정복(征服)을 시작했는데, 17세기 중반에 이르러 흑룡강(黑龍江. 지금 중러 국경하천) 유역에서 청(淸)나라와 맞부딪치기에 이르렀습니다. 청나라는 흑룡강에서 남하는 러시아세력(군대)을 저지해보았으나 구식무기《창검(槍劍)》로 무장한 청나라 군대로는 감당하기 어려웠으므로 조선에게 조총(鳥銃)으로 무장한 총수대(銃手隊)의 파견을 요청해왔습니다.
그리하여 효종(孝宗) 5년(1654)에 함경북우후《咸鏡北虞侯, 우후의 품계(品階)는 종삼품(從三品)》 변급(邊岌)이 이끄는 함경도 총사《銃士, 소총수(小銃手)》 100여 명을 파견했고, 효종 9년(1658)에 다시 요청해왔으므로 제2차로 후임 함경북우후(咸鏡北虞侯) 신유(申瀏)가 이끄는 총사(銃士) 200명과 군속(軍屬) 60명을 파병하였습니다.
이들은 청나라 군사들과 합동작전을 벌여 대승을 거두었는데, 특히 제2차 파병 때에는 조총(鳥銃)으로 공략하고 마지막에는 화전(火箭, 불화살)을 쏘아 러시아 함선 10여 척을 불태웠을 뿐만 아니라 제정러시아의 극동원정대장 스테파노프를 비롯한 장병 270여 명을 전멸시키는 큰 전과(戰果)를 올렸습니다. 이것이 우리 역사에서 예로부터 크게 치켜올리고 있는 나선정벌(羅禪征伐)의 전모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과연 정벌이었을까요?
문제는 참전군(參戰軍)의 규모에 있는 게 아니라 참전의 동기(動機)와 독자적인 작전수행(作戰遂行)여부에 있지 않겠습니까? 당시는 인도(印度)를 비롯하여 중국남부에까지 포르투갈․스페인․네덜란드․영국․프랑스 등 유럽 여러 나라가 물불을 가리지 않고 앞다투어 진출하던 서세동점(西勢東漸)시대였으므로 러시아 세력이 그대로 팽창하게되면 간도(間島)일대와 함경도 북부 두만강 유역의 우리 땅이 위태로울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비록 청나라의 요청에 의한 참전이었으나 자위(自衛)를 위한 출병이었다는 변명이 통할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자위를 위한 참전이었을지라도 우방(友邦) 격인 청나라의 방어작전에 참전했을 뿐만 아니라 작전지휘권도 없이 첨병(尖兵) 역할만 했으므로 아무리 우겨댄들 결코 정벌(征伐)이라고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대부분 우리네 사학자(史學者)들은 예나 지금이나 이것을 나선(羅禪, 러시아)정벌이라고 대서특필하는데, 이상한 해석일 뿐만 아니라 그야말로 침소봉대(針小棒大)한 것이었습니다.
고구려가 중원(中原)으로 진격했던 사실과 남북조시대(南北朝時代)의 강자 북위(北魏)의 수도를 침략(점령)했던 사실은 물론 고려말에 이성계 장군이 고조선과 고구려의 옛 땅인 요동(遼東)에 진출했던 사실까지도 축소은폐하고 오늘날로 치면 1개 대대(大隊)병력도 안 되는 원군(援軍)을 파견한 사실은 대서특필했는데, 이것도 바로 사대모화사관《事大慕華史觀, 중화사관(中華史觀)》의 산물이었습니다. 사대(事大)의 대상이었던 중국을 치고 들어간 것은 불경(不敬)스러운(?) 일이었으니까 축소 은폐했지만 러시아는 그게 아니었으므로 뻥튀기(?)한 것이라면 잘못된 판단일까요?
역사의 은폐(隱蔽)도 과장(誇張)처럼 왜곡(歪曲)이기는 마찬가지이므로 둘 다 모두 바로잡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앞에서 말한 바 있는 효종의 북벌계획은 소위 나선정벌(羅禪征伐)에서 속임수《사기극詐欺劇)》였다는 사실이 결정적으로 드러납니다. 북벌계획이 불특정다수(만백성)를 상대로 한 속임수가 아니었다면 소위 나선정벌 때에 정예 금군《禁軍, 경군(京軍)》을 파견하여 실전경험을 쌓도록 했어야 했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효종(孝宗)은 함경도 병사들을 중심으로 편성한 토병《土兵, 지방군(地方軍)》을 파견하고 말았으니, 애당초 북벌계획이란 것은 요즈음 식으로 말하자면 반체제(反體制)인사들을 억누르기 위한 국내용(공갈용)일 뿐이었다는 사실이 자명해집니다. 더구나 북벌계획이 처음부터 선동적(煽動的)인 구호뿐이었다는 사실은 구체적인 실행계획이 전혀 나타나지 않는 것으로 보아 더욱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북벌계획을 예로부터 “북벌의 웅지(雄志)” 운운하며 호들갑을 떨면서 미화시켰지만 그것은 국내에서만 들끓었던 찻잔 속의 태풍에 불과했습니다. 10년 동안 재위(在位)한 효종(孝宗)의 치적을 보면 북벌계획이란 그럴듯하게 모양만 낸 국내용 허장성세虛張聲勢일 뿐이었습니다.
조선의 내정(內政)을 철저히 감시했던 청나라가 겨우 힐문《詰問, 효종 즉위 후에 영의정에서 물러난 김자점(金自點)이 역관(譯官)을 시켜 북벌에 관해 청나라에 고발하자, 청나라가 사신을 보내 문책한 일》 사절을 파견한 정도로 끝낸 것만으로도 백성들의 눈을 속여 정통성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속임수였음이 입증되지 않습니까?
일부 군제(軍制)를 개편하고 이완(李浣)을 훈련대장으로 기용하여 군사훈련을 실시하는 등 모양새는 갖추었지만 대내적(對內的)인 과시용이었을 뿐이지 대외적으로는 침공(侵攻)과 진군(進軍)을 비롯한 구체적인 작전계획(作戰計劃)이 전혀 없었습니다.
가령 군대(병력)를 몇 만 또는 몇 십만 명 동원하여 청(淸)나라의 요람이었던 봉천《奉天, 지금 심양(沈陽)》을 점령한다? 더 나아가 요하(遼河)를 경계로 만주(滿洲)지역을 몽땅 차지한다? 좀더 뜻을 넓혀 요하(遼河)를 건너 중국대륙의 관문인 산해관(山海關)을 점령한 다음 최소한 산해관 이동(以東)의 만주 땅을 모두 차지하여 고조선과 고구려의 옛 땅을 모두 회복하겠다고 하였습니다.
《고토회복(古土回復)》라든가? 산해관을 점령한 다음 여세를 몰아 만리장성을 넘어 그대로 진격하여 경사 순천부(京師順天府, 당시 북경의 공식명칭)를 점령하고 장차 청(淸)나라를 대신하여 중국을 통째로 지배한다? “효종의 북벌계획(북벌계획)”은 역사상 대서특필되는 아주 큰 사건(?)이지만 말뿐이었으므로 그로부터 300년이 훨씬 지난 지금까지도 구체적인 계획은 고사하고 대강이라도 밑그림이 전혀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미화(美化)시키더라도 북벌계획이라는 건 변명의 여지가 전혀 없는 구두선(口頭禪)이었고 통치사기극(統治詐欺劇)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점으로 미루어 볼 때에 거듭되는 말이지만 의뭉한 인조의 아들《효종(孝宗)》이 역시 의뭉한 꾀를 짜낸 것이 “효종의 북벌계획”이었고, 순박한 조선백성들은 그야말로 꿈에 부풀어 부화뇌동(附和雷同)하다 말았던 것입니다. 지금까지도 많이 남아 있는 북벌계획과 관련된 야사(野史)와 야담(野談)들에서 당시 조선백성(지금 사람들도 마찬가지이지만)들이 얼마나 북벌의 꿈에 부풀었던지 어느 정도는 짐작할 수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정통성(正統性)에 약점(弱點)을 안고 있던 임금의 사기극(詐欺劇)에 벼슬아치들과 백성들은 들러리를 서며 놀아난 것이었다. 민족의 자존심을 자극함으로써 형《소현세자(昭顯世子)》과 조카(소현세자의 아들 3형제)들을 대신하여 왕위에 올랐으므로 원천적으로 정통성 때문에 시달려야 했던 효종이 왕위보전(王位保全)에 이용한 것이 바로 북벌계획이었던 것이었습니다.
불과 열 다섯 살 어린 나이에 66살이나 먹은 노망난(?) 늙은이 영조(英祖)의 계비(繼妃)로 들어가 영조가 승하(昇遐)하고 사도세자의 아들인 정조(正祖)가 즉위한 후에 대왕대비(大王大妃. 할머니 자격으로)로서 정조의 개혁정치(改革政治)에 사사건건 발목을 걸어댄 김 대비《金大妃. 정순왕후(貞純王后), 정순대비(貞純大妃)》의 친정아버지 김한구(金漢耈)의 조상에 학주(鶴洲) 김홍욱(金弘郁, 1602~1654)이란 이가 있었습니다.
그는 효종 5(1654)년에 황해도 관찰사(觀察使) 신분으로 소현세자 빈《昭顯世子嬪, 강빈(姜嬪)》을 죽인 강빈옥사(姜嬪獄事)와 어린 아들들을 귀양보낸 신생(辛生)의 옥(獄)이 억울한 일이었다고 상소(上訴)했다가 고문당해 죽은《장사(杖死)》 사실도 있었는데, 그것은 효종의 정통성문제를 건드린 때문이었습니다.
소현세자의 죽음과 강빈옥사(姜嬪獄事)와 신생(辛生)의 옥(獄) 등 일련의 사건에 대한 발론(發論)은 인조(仁祖) 때에도 금기사항이었지만 효종도 역시 즉위 초부터 일절 금지시켰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효종이 정통성의 중대한 결함을 자인한 것이었고, 북벌계획도 역시 자신의 결함을 호도하고 조야(朝野)의 관심을 분산시키기 위한 사기극(詐欺劇)이라는 사실까지 간접적으로 시인한 것이었습니다.
효종이 즉위 초부터 비밀리에 북벌계획을 추진했다지만 앞서 말한 바와 같이 김자점(金自點)이 청나라에 고발한 것을 보면 정통성에 치명적인 약점을 안고 있던 그가 은밀(隱密)을 가장하고 거의 공개적으로 추진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속임수《사기(詐欺)》가 아니었다면 소위 나선정벌(羅禪征伐)에는 정규군을 파견하고 염탐꾼(첩보요원)도 함께 보내 청나라 국경수비군대의 전투능력을 면밀히 정탐(偵探)했을 것입니다.
효종이 8년 넘도록 북벌(北伐)을 빙자하여 군대를 양성하고 위기의식(危機意識)을 조성해왔으므로 저절로 굴러 들어온 절호의 기회《효종 9년의 제2차 나선정벌(羅禪征伐)》에 첩보요원(諜報要員)을 파견하여 남하(南下)하는 러시아세력과 동맹(同盟) 또는 협동작전(協同作戰)도 모색했어야 했지 않았겠습니까? 오랫동안 북벌계획을 추진해오던 차에 정벌할 대상국(對象國)에서 원병(援兵)을 요청해 왔으니 얼마나 좋은 기회였습니까? 그렇지 않아도 첩보요원을 잠입시켜 정보를 수집해야 할 판이었는데, 그쪽에서 자진해서 원군(援軍)을 보내달라고 했으므로 그야말로 물실호기(勿失好機)가 아니었습니까?
북벌계획이 속임수가 아니었다면 나선정벌(羅禪征伐)에 나서는 원정대(遠征隊)에 당연히 첩보요원 몇 10명을 투입해야 했어야 옳았으나 효종이 그 때에 한 일이라곤 제1차 원정대장 변급《邊岌, 함경북우후(咸鏡北虞侯)》이 귀국한 후에 겨우 몇 가지 물어본 것이 고작이었습니다. 이것만으로도 북벌계획이 불특정다수를 상대로 한 사기(詐欺)였다는 게 자명하지 않습니까? 효종이 진정으로 북벌계획을 추진했다면 적어도 이 무렵에 제3국《러시아든 청나라에 청나라와 적대적(敵對的)인 몽골의 어느 부족(部族)이든》과 협조를 모색한 외교적인 어떤 흔적이라도 남아 있어야지 않습니까?
당시 중국대륙의 남쪽(강남지방)에는 반청(反淸)세력의 상징으로 멸망한 명나라 잔존세력의 집결체인 남명《南明, 명나라의 망명정권(亡命政權). 조선 인조 22년(1644)~조선 현종(顯宗) 2년(1661)》이 있었고, 대만(臺灣)에는 남명의 연호인 영력(永曆)을 사용하던 정성공(鄭成功. 1624~1662)이 독립국이나 다름없이 군사력을 키우고 있었습니다. 더구나 정성공은 효종 9년(1658)에 총병력 17만 5천명으로 북벌군(北伐軍)을 일으켰습니다.
정성공의 북벌(北伐)은 작전미숙(作戰未熟) 등으로 말미암아 실패하고 말았으나 만일 효종의 북벌계획이 속임수(사기극)가 아니었다면 정성공의 북벌군과 연합작전을 모색하여 그들의 북벌군은 남쪽에서, 조선의 북벌군은 북쪽에서 치고 들어가려는 시늉이라도 함으로써 흔적 정도는 남겼어야 하지 않았습니까? 효종의 북벌계획이라는 것이 역사상 진실성(眞實性)을 인정받고 자주성(自主性)의 상징으로 계속 남으려면 그것을 주장하는 사람(학자)들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무엇인가 구체적인 흔적을 찾아내지 않으면 안될 것입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효종 4년(1653) 8월에 하멜《Hendrik Hamel. ?~1692. 14년 동안 조선에서 억류당했다가 탈출하여 귀국한 후에 ꡔ하멜 표류기ꡕ를 지은 사람》을 비롯한 네덜란드인 38명이 제주도에 표착(漂着)했을 때에도 그들에게서 최신 해외정보(海外情報)를 수집한 흔적은 없고, 그들을 활용하여 무기(소총)를 만들었다는 기록이 겨우 한 건 나타날 뿐입니다.
ꡔ효종실록ꡕ 7년 7월 18일조 “새로운 체제의 조총(鳥銃)을 만들었다. 이보다 먼저 만인(蠻人)이 표류하여 와 그들에게서 조총을 얻었는데 그 체제가 매우 정교하므로 훈련도감(訓練都監)에 명하여 모방해서 만들도록 한 것이다.”라는 게 고작이었습니다. 그들에게서 북벌에 필요한 최신 해외정보를 수집했다는 흔적이 전혀 없습니다. 이처럼 절호의 기회를 번번이 흘려보낸 것만을 보아도 효종의 북벌계획(北伐計劃)은 어디까지나 국내용《반대세력에 대한 협박공갈용. 통치사기용(統治詐欺用)》에 불과했음이 자명해집니다.
오랫동안 많은 사가(史家)들이 거창하게 평가해온 효종의 북벌론(북벌계획)이라는 게 사실은 소현세자(昭顯世子)를 추모하는 이들의 정통성시비를 예방하고 억제하려던 지극히 교활한 사기극(詐欺劇)이었습니다. 효종이 적장자승계원칙(嫡長子承繼原則)을 무시하고 자신에게 왕위를 물려준 부왕(父王) 인조(仁祖)를 지극 정성으로 받들고 효도(孝道)한 효자(孝子)였기 때문에 효종(孝宗)이란 묘호(廟號)를 받았지만 통치사기행위(統治詐欺行爲)를 벌였던 것만은 분명하지 않습니까?
효종의 가증스러운 속임수(북벌론)가 「민족의 자주적 기상」으로 미화된 게 나쁜 일은 아니지만 진실은 밝혀져야 합니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점은 효종의 속임수가 자주국방의 의지로 미화되어 후세에 엄청나게 큰 플라시보효과《placebo effect. 무해무득(無害無得)인 가짜 약을 환자에게 특효약(特效藥)으로 확신시킨 후에 투약함으로써 나타나는 약효》를 거두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위정자(爲政者)가 국민(백성)을 기만하는 행위는 결과가 아무리 좋다고 하더라도 응징(膺懲)해야할 일이지 결코 장려할 일은 아닙니다. 이제 세월이 많이 흘렀지만 지금이라도 역사의 진실을 파악함으로써 효종의 북벌계획과 같은 통치사기행위가 다시는 나타나지 않도록 경계해야 하기 때문에 이 자리를 빌어 말씀드리는 겁니다.
효종의 통치사기행위(統治詐欺行爲)를 왜 이렇게 장황하게 늘어놓았는가 하면 천용택 장군께서 몸담았던 좌파(左派)정권의 행태(行態)가 아주 닮았기 때문입니다. 전군(全軍)에게 내린 발포금지명령《정확하게는 적(敵)이 발포하기 전에 먼저 발포하지 말라는 명령》이야말로 통치사기행위의 극치가 아니었습니까? 군인에게 먼저 적군(敵軍)의 총알받이가 된 다음 발포하라니, 그것은 효종의 위기조성용 북벌정책과 비교도 안 되는 극악무도한 통치사기행위라고 생각하는데, 천용택 장군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2002년 6월 19일에 발생한 서해교전《서해대전(西海大戰)이라고도 하더군요》에서 우리 장병(將兵)들이 많이 희생당했잖아요? 효종의 통치사기행위는 국민에게 크게 피해를 주지 않았으나 김대중 정부의 유사한 행위는 국민들에게 가증(可憎)스럽고도 처절(凄絶)한 피해를 주었으므로 결과론(結果論)적으로 볼 때에 너무 큰 죄악을 범한 것이 아니었습니까?
선발포금지명령(先發砲禁止命令)은 천용택 장군께서 국방부장관(1998~1999)과 국가정보원 원장(2000년~2003)으로 재직하실 적에 발령한 것이지요. 이 말도 안 되는 작명(作命)을 내린 원흉(元凶)은 과연 누구입니까? 북한을 포용하겠다는 햇볕정책과 같은 뭉치로 포장된 정책이었으므로 책임이 없다고 하시겠죠?
그러나 천용택 장군님의 이력서에 나타나는 바와 같이 “국민의 정부(김대중 정부)”(1998. 2.~2003. 2.) 내내 국방정책책임자였으므로 기안(起案)과 시행(施行)책임자로서 어떤 형태로든 책임을 면할 수 없지 않습니까? 한 말씀 더 드리자면 좌파(左派)들이 정권을 잡고 했다는 짓이 겨우 이 정도입니까? 한심하군요.
천용택 장군님! 제9신(2006년3월21일자 64022번)과 같은 결론이지만 거듭 촉구하건대 “호국영령(護國英靈)과 모든 대한민국 국민들 앞에 석고대죄(席藁待罪)하십시오. 그리고 만고(萬古)에 없는 엄청나게 큰 과오(過誤)를 범(犯)한 데에 대해 용서를 구하십시오.” 내내 건강하시길 기원(祈願)합니다.
2006년 3월 27일 도이칠란트 본에서 대한민국 예비역 육군병장 金學培 드림 E-mail∶hong-sek@hanmail.ne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