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서기를 논하면서 대표적으로 “多 智麽那”가 무엇인지만 살표보면 충분하다고 본다. 지금부터 이 말을 해부하고자 한다.
일본학자들이 “多 智麽那”가 귤이라는 뜻이 되도록 만던 과정을 볼 필요가 있다.
橘 多 智麽那
귤 다 지마나
규 다찜나?
끼우(면) 다 찝나⤑ 다찌바나
일본학자들도 ‘찝나’를 소리 나는대로 적으면 ‘찜나’가 되나, 원형은 ‘찝다’인 것을 알고, 처음 일본서기에 기록된 것은 ‘다찌마나’이었으나, 후에 ‘다 찌바나’로 고치게 되었다.
이 말을 일어 사전 식으로 고치면
たちばな [橘] 귤의 옛 이름
위 과정을 거치면서 위와같은 단어가 출생하게 되었다.
이런 단어가 한 지면에 모여, 한 개의 일본어 단어가 만들어졌지만,
倭는 (고) 조선 글자로 백제말을 배우기 시작했다가, 나중에 고구려, 백제가 멸망한 후, 자기들도 독립해야한다는 목표가 생기면서 뜻 글자를 배우게 되고, 그러자니 수백년은 걸려서야, 위와같은 단어가 탄생하게 되었다. 마치 (고) 조선, 백제, 고구려가 강성할 때는, 소리글자로 사용되다가, 그들이 쇠약해지자, (고) 조선 글자에 뜻이 생겼으므로, 그 간에는 수천년의 세월이 흐른 뒤였다.
왜가 일본서기를 만든 것은 한 시간에 만든 것이 아니고, 수백년의 기간을 두고 만들어, 수정되고 추가되고, 하면서 만들어졌다.
거듭 밝히지만 왜는 처음에는 백제말 (소리글자)를 배웠다.
간단히 예를 들면
‘또 오나 (했)지’ 이 말을 (고) 조선 글자로 쓰보면
同 於野 兒 가 된다.
사실 於자를 ‘오’로 일게 되기까지도 많은 시간이 걸렸다.
우리나라에서도 ‘오나?’ 대신에 ‘오노?’라고 했으므로 倭에서도 ‘오노지(於野兒)’라고 하다가 나중에 ‘おなじ’로 바뀌었다.
위 글을 倭 식으로 바꾸면
同 おなじ 이 글을 일어 사전식으로 고치면
おなじ [同じ] ‘같음, 동일’이 뜻.
이때 同자는 비로소 ‘한 가지 동’이라는 뜻 글자로 등장하게 된다.
이 단어가 한 지면에 나란히 쓰이어 있지만, 이런 단어가 나오기 까지 수백년이 걸렸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여기에는 倭가 망해버린, 모국 백제를 버리고, 새 나라를 세워야겠다는 모진 의지가 작동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결과적으로 ‘於野兒’ 3 글자가 ‘同’이라는 한 개의 글자로 바뀌면서 완전히 다른 말로 대체되는 효과가 발생하게 되었다.
이것이 일본이 만들어 낸 요술이다.
たちばな라는 말의 출처는 일본서기(성은구 역주) 233p 하단에 아래와 같이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해를 돕기위하여
(고) 조선 글자
우리말
일본말
일본글자’
와 같은 방법으로 배열시켜 놓았다.
다만 (乃歌之曰)는 일본서기의 본문장의 일부이고, 그 다음부터가 “多智麽那”가 나오는 노래?이다.
(乃歌之曰) 伊奘阿藝 怒珥比蘆莬湄珥 比蘆莬瀰 珥
(내가지와) 이 자아예 노이비여문미이 비여문미 이
이자아기 노니히루쓰미니 히루쓰미 니
いざ吾君 野に蒜摘みに 蒜摘みに
和餓喩區瀰智珥 伽遇破志 波那多智麽那 辭豆曳羅波
빠아유 구미지이 가우빠지 파나다지마나 싸두 예라빠
와가유꾸미찌니 가구와시 하나다찌바나 시쯔에라와
我が行く道に 香ぐはし 花 橘 下枝らは
(이하 생략)
앞에서 밝힌 것처럼 단계별로 변화할 때까지, 적어도 수백년에 걸친 연구와 변화와 수정이 있었다. 일본서기는 단 기간에 훌쩍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우선 우리말부터 풀이해 보면
이(어) 자아 예
넣이비(어)
이어 무며
이(어) 비이어 무며
이(어) 빠아유
구으며 쥐어가뻐지
파나, 다 찌마나
싸두어라뻐
* (乃歌之曰)도 우리말로 고치면 [내 가지(고) 와] 라는 말이다. 단편적이나마 아래 말과도 문맥이 통하며, 완벽한 우리말이다. 삼국유사 전부가 우리말임을 증명하고 있다.
*일본글 제작 과정 및 해석
伊奘(이자) ⤑ いざ; 자(일을 시작할 때 쓰는 말)
阿; 논리를 떠나 강제로 ‘吾(아)’라고 읽게 함.
藝; 논리를 떠나 강제로 ‘君(기)’라고 읽게 함.
지금은 君자를 ‘きみ’라고 읽으나, 처음에는 그냥 ‘き’라고 읽었다.
怒; 논리를 떠나 강제로 ‘野(노)’라고 읽게 함. 마치 옛날부터 그렇게 해온 것처럼.
珥; 논리를 떠나 に 라고 읽었다.
比蘆莬湄珥; 蒜摘みに
ひる[蒜] 마늘의 딴 이름
-つみ [摘み] 따기, 뜯기듣기
(화초 따위를 나타내는 말에 붙어)…따기, …뜯기보시는 것처럼 다른 한자가 등장하면서 완전히 다른 뜻의 글이 굴러 나온다.
和餓; 我が わが [我が·吾が] 나의, 우리의
喩區; 行く ゆく [行く·往く] 가다
‘이우 해구’에서 나온 말.
瀰智珥; 道に
みち[道·路·途·径] 길
이 단어의 원래 우리말은 ‘도로, 또 껴’ 다시 말하면
‘다시 (또는 거꾸로) 또 끼워’ 그래서 ‘미치’ㄴ다는
말에서 유래 되었다.
‘도로’라는 우리말을 모르는 사람이 많다. 이것을 ‘道·路’라고 표기했으니, 일본 학자들의 연구도 기가 맥힌다.
伽遇破志 かぐわし-い 이 단어는
(너도) 香芳(햐바⤑ 해봐) 伽遇破志(가구파지かぐわし)
이 말들을 갈라서
かぐわし-い [香しい·芳しい·馨しい] 향기롭다, 아름답다.
波那 はな [花·華] 꽃
辭豆曳 しずえ [下枝]
羅; -ら[等] 복수를 나타내는 말.
波; は 주격조사
조작이든 뭐든, 일본학자들이 나름대로 피나는 연구를 했다고 본다. 일본학자들도 위 문장을 소리나는대로 읽고, 새로운 말을 만들었다. 결코 뜻으로 읽지 않았다.
듣기JL위의 예에서 보듯이, 명치시대에 들어서, 古今 和歌集이든, 만엽집이든, 일본서기에 등장하는 노래? 글들을, 조작하여 일본말이라는 것들을 만들어 낼 수있었을 것이다. 다해봤자, 그 수가 얼마되지 않으니까.
그러나 일본서기만 해도, 두께가 4cm에 달하는데, 거기에 있는 수많은 (고) 조선 글자들을 전부, 조작하는 것은 불가능하니, 부득이, 한문장으로 보고 해석해버리고 말게 된 것이다.(한국말로 해석하는 것은,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마음으로는 책 전부를 일본말로 이루어진 책이라고 하고 싶어도 어쩔수가 없었다. 그러나 歌자가 들어간 부분만이라도 그 부분만은 일본말로 구성된 글로 만들고 싶었다.
아이러니 하게도, 삼국유사도 일본처럼 歌자가 들어 간 부분은 우리말로 구성되어 있다고 보고싶어 우리말로 해석을 하였는데, 방향은 틀렸지만, 사실이라는 것이, 한비의 해석방법에 의해 입증되었다. 한비는 일본처럼, 같은 방법으로 해석하였다. 앞으로 삼국유사 본문도 우리말로 해석해서, 이책이 우리말을 (고) 조선 글자로 기록한 책이라는 것을 입증해 보이려고 한다. 삼국유사는 역사 책이 아니었다. 간단히 예를 들면, 新羅는 ‘시라’ 즉 ‘돌린다’는 말이고, 고구려는 ‘고우구려’라는 말에 지나지 않는다. 일본서기도 마찬가지였다. ‘이뽀서 끼’라는 말에 지나지 않는다. NIPPON은 ‘니뻔⤑ 이쁜’이라는 말인 것을 왜 모르는가?
그러함에도 네이브에 의하면
“仮名序(가나서)에 의하면 60대 醍醐(だいご, 다이고)天皇의 칙명에 의해 万葉集(만엽집)에 선택되지 않았던 고대의 노래에서부터 편찬자들의 시대까지 和歌(와카)를 선택해서 편찬했으며, 延喜5年(905年)4月18日에 진상되었다.”
이런 거짓말을 버젓이 하고 있다. 무슨 글이든 모두 한국말로 쓰이어진 것을 명치시대에 들어, 상당량의 일본말이라는 것을 만들어 놓고는, 있지도 않았던 다이고 천황을 들먹이는 꼴은, 가소롭기까지 하다. 이 모든 일본어 연구및 제작방법이 가능했던 것은, 德川 막부 때, 다녀간 통신사들에게서 우리말을 체계있게 잘 배워둔 덕분이었다.
시기적으로도 명치시대에 들어와서야 古今和歌集이나, 만엽집, 일본서기 등이, 부분적니나마 일본 글로 쓰이었다고 주장할만큼, 정신적 여유를 갖게 되었고, 한국말 실력도 늘었으니, 일본말 제작에 부족함이 없었다.
아것을 우리말로 해석한 것이 아래와 같다.
“자 우리 君이여, 들에 마늘 쫑(마늘의 花莖)을 뽑으러 가자. 마능 쫑을 뽑으러 가는 나의 길에는 좋은 향기의 花橘(귤의 꽃)이 피어 있다. 그 하지의 꽃은
(사람이 다 따가고, 상지의 꽃은 새가 와서 떨어뜨려버렸으나, 三栗의 (中에 걸리는 枕詞) 中枝의 꽃은 이제부터 피는 아름다운, 붉움을 품은꽃과 같은 고운 낭자가 있다. 자, 꽃이 피면 좋을 진저”)
일본은 이 글이 옛 일본말을 한자의 소리를 빌려 썼다고 보고, 이 말을 현대의 일본글자, 히라가나로 바꾸어 썼다고 주장하고 있다.
보시는 바와 같이, 일본서기에서는, 우리나라처럼, 앞 부분은 뜻으로 읽고, 뒷부분은 음으로 읽는다는 비효율적이고 가성비 낮은 해석은 보이지 않는다. 우리나라도 이렇게 해석해야 한다고 본다.
倭는 그리스를 비롯한 5대문명 발상지처럼 우리가 가르쳐 주어서 배운 사람들이다. (고) 조선이 온 세계에 문명을 전파한 이후, 부여, 고구려, 백제로 이어질 때, 중국과 관계되는 나라는 존재한 적이 없었다. 그만큼 강력한 국가이었으므로, 중국은 잊어버려야 한다. 그들은 자기들끼리 하는 말로, 대단한 문명을 가졌다고 으시되고 있었으나, (고) 조선 처럼, 대외적으로 알려진 문명이 전혀 없었다. 제대로, 중국말이 알려진 것도 없었다. 왜 그런 사실을 모르고, 좁은 한반도에 갇혀 헤어나지를 못하는가? 넓은 중국 땅에는 수많은 우리 사투리들이 산재해 있다. 그것을 모르면 남아있는 어떤 글도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점 하나만 찍어놔도 그 범위를 벗어나지 못하는 경계를 모두 지워야 한다. ‘아야’라고 하면, ‘저아야’라는 말도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모르니, 향가를 모르게 된다. 그냥 우리말을 한자가 아닌 (고) 조선 글자로 기록한 것들이라고 보면, 글의 눈이 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