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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희지의 power culture interview ⑭
부끄럽지 않게 살기 위하여 역할에 충실 한다.
- 배우 권해효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따뜻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나하고 가까운 사람에게만 따뜻한 사람이 아니라
넓은 우리에게 따뜻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따뜻한 사람은 분노가 있는 사람이지요.
- 2007년 7월 참여정부 평가포럼에서 고 노무현대통령
그는 따뜻하다. 그래서 세상에 불거져 나오는 문제들에 대해 모른 척 하지 못한다. 얼마 전 그는 대학생들의 턱없는 등록금을 내려달라고 거리에 나섰다. 광화문 네거리, 그가 든 피켓에는 이런 문구가 적혀 있었다.
- 반값 등록금 학생들의 권리입니다. 무상교육으로 갑시다!-
모처럼 대학생들을 위하여 그들의 입장으로 돌아가 거리에 나섰다. 그는 2008년 이후 대학가를 가지 않았다고 한다.
"그전에는 강의도 하고 사회도 봐줬는데 어느 날 보니까 나 혼자 떠들고 있더라고요. 그래서 안 갔지요. 근데 이책 저책을 들여다보다 알게 되었죠. 그 친구들의 반응이 없었던 게 아니라 제가 그 친구들과 소통하는 법을 몰랐던 거에요. 내가 뭘 얘기하러 간 게 잘못이지요. 그 친구들한테는 자기들 말을 들어줄 사람이 필요했던 거더라고요."
권해효는 들어준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지에 대해 강조한다.
그의 여성관도 마찬가지이다.
"남자하고 여자는 근본부터 다른 거 같아요. 제가 결혼생활이 17년째인데 연애까지 하면 20여년이 되거든요. 그런데 여전히 같은 걸로 혼나고 같은 걸로 당해요.(웃음) 우리 흔히 부부간에는 대화가 필요하다고 하잖아요. 아니에요. 남자에게는 들어주는 귀가 있으면 돼요."
결혼 이십년 차, 같은 배우인 아내 조윤희를 통해 그는 여성을 이해한다. 남자인 그가 돕는 여성들의 권익은 듣는 귀가 해결한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호주제 폐지에 앞장서고 매년 세계 여성인 대회의 사회를 맡아주는 일들이 그가 할 수 있는 여성의 존중이다.
그에게 세상의 문제들은 따로 떨어져 있지 않다. 늘 궁금해 하고 묻고 따지는 것이 그가 세상과 소통하는 방법이라면 호주제 폐지 문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둘째가 딸인데요. 그 애가 태어나고 출생 신고를 하러 갔어요. 첫애는 아버지가 해주셔서 잘 몰랐는데 아이 출생신고서에 엄마아빠 본적을 쓰라고 되어있더라고요. 그래서 아내에게 전화를 해서 물은 후 썼죠. 그랬더니 동사무소 직원이 다시 쓰래요. 틀리지 않았는데 왜 그럴까 했더니 아내 본적을 잘 못 썼데요. 결혼하면 제 본적을 따르는 거라고. 그래서 생각했지요. 본적이라는 것은 자신의 태생에 대한 근본이고 정체성인데 결혼을 하면 바로 남편, 그것도 시아버지의 근본을 따르는구나. 이건 말이 안 된다, 했지요. 그리고 그 생각을 실천에 옮겼어요."
권해효는 세상의 부조리한 것들에 대해서 분노할 줄 아는 사람이다.
배우로 살면서 세상에 대해 자기 목소리를 낸다는 것이 한국사회에서는 쉽지 않다. 배우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매스미디어에서 보이는 영향력을 근거로 들어 어느 편에 서는 것을 불편해한다. 하지만 인간은 먹고 배설하는 것조차도 정치적인 동물이다. 그런데 배우에게만 유독 자신의 정치성을 말하지 말라고 하는 것은 억지다.
그는 드라마에 나오는 자신의 역할을 소화하듯 자신이 이 세상에서 해야 하는 역할에도 충실하려고 한다.
그는 한양대학교 연극영화과를 나왔다. 86학번세대, 운동의 중심지가 한양대로 옮겨오던 그 폭풍의 시절, 학생이었다. 그러나 그는 학교 때는 데모를 하지 못했다. 친구 따라 원서를 넣고 입학한 연극영화과였지만 그는 바로 연극에 매료가 되었다.
그 당시 지도교수는 최형인선생이었다. 뉴욕대학교 예술대학원 연기학과를 끝내고 돌아온 선생님의 열정은 가히 폭발적이어서 누구도 받아보지 못한 수업을 받았다. 사십 여 명이 넘는 친구들 앞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고백하고 인간본연에 대하여 난도질당하면서 자신의 본성을 스스로 탐구해 가는 매우 실험적인 수업을 받았다. 그는 사회과학에 대한 관심보다 자신을 탐구하고 표현하는 연극영화과 수업에 더 빠져 들었다.
그런 그가 사회에 나오고 세상의 부조리에 눈을 뜨면서 약한 자들 끼리 갖는 연대감은 매우 특별한 또 하나의 경험이 돼 주었다.
"부끄럽다, 라는 말 있잖아요. 알고도 모른 척 하는 부끄러움을 견딜 수 없었어요."
1992년 전교조해직교사들과 그분들의 제자였던 대학생들이 여름청소년캠프를 열었다. 아는 친구로부터 그 캠프에서 사물놀이나 연극반을 운영하는데 연극을 가르쳐줄 선생이 없다는 말에 '그래, 그러면 내가 도와줄게' 하고 가서 만난 것이 그가 처음 운동권이라고 하는 사람들을 만난 첫 계기였다. 그때 그는 순수한 학생들과 그 순수함을 정의로 지켜주고 싶어 하는 선생님들에게 동감이 가서 매년 학생들의 여름캠프에 참여한다. 그 무렵 학생 때 놓고 있던 사회의식에 대해서도 눈을 뜨게 된다.
"불편하지만 이 불편한 진실을 알아가고 알아가게 하는 것, 그리고 부끄러움을 알게 하는 것, 또 부끄럽지 않기 위해서 하는 행동하는 것이 이 세상에서의 제 역할이라는 생각을 했어요."
배우는 철저한 개인사업자라고 한다. 함께 모여 작업을 하지만 자본으로는 독립적이다. 사회속에서 누군가와 함께 연대한다는 것이 그에게는 생소했다. 그는 조직사회가 어색했다. 여름캠프 때 학생들을 만나면 수줍고 부끄럽기까지 했다. 하지만 사회적인 문제를 고민하는 학생들을 보면서 연대감이 주는 행복이 느껴졌다. 아무리 약하고 소외되더라도 우리는 혼자가 아니다. 그 말에 그는 힘을 얻는다.
큰아이가 태어날 때 보통의 아빠들처럼 먹고 사는 문제의 규모를 걱정하기보다 이 불합리한 세상에서 아이를 어떻게 키우나 고민했다고 한다. 그는 아이아빠가 된 후 더 적극적으로 사회의 모순에 대항한다.
2004년 노무현 탄핵이 결정되던 날, MBC일일드라마를 찍고 집으로 돌아가다가 그는 운전대를 돌려 국회 앞으로 갔다. 광화문에서 첫 번째 탄핵 반대 집회의 사회를 맡고 배우 최광기와 무대에 올랐던 날은 정신이 없었지만 열심히 사람들과 외쳤다. '탄핵반대 민주수호' 그는 상식이 통하는 사회에 살고 싶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꿈처럼 그에게는 회환으로 남아있다 인사동의 어느 밥집, 소탈하던 한사람, 노무현과 마주 앉아 밥을 먹었던 지난 시간이 떠올라 인사동을 지날 때면 코끝이 시큰거린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자신의 역할을 잊지 않고 때로 거리에 때로 공연장에 사람들 사이를 이으며 걸어가고 있다.
요즘 그는 가수 안치환, 이지상과 함께 이번 쓰나미에 피해를 입은 재일 조선학교를 돕는 단체를 만들었다. 우리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어느 순간 서로 말하지 않는 '민족'이라는 단어, 그 민족을 지키기 위하여 분단된 조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남아있는 난민인 그들, 그들이 서로의 정체성을 잊지 않기 위하여 만든 재일 조선학교가 지난 쓰나미에 무너져 내렸다.
'대지는 흔들어도 웃으며 가자'는 그들의 구호처럼 '어머니 모국이여 당신의 역사 속에 우리가 없을지라도 우리는 여전히 지키고 있어요. 자랑스런 조선학교를...' 그렇게 되뇌이며 묵묵히 차별을 견디고 사는 사람들을 위해 세 사람은 몽당연필이라는 단체를 만들었다.
"몽당연필은 무슨 대단한 단체가 아니고요. 우리끼리 조근조근 할 수 있는 것을 하자는 취지로 만들었어요."
조선재일학교의 사정을 알리기 위하여 공연도 한다. 매월 세 번째 수요일 동국대 건너편 웹콤시어터에는 내가 찾아간 그날도 가수 이지상의 사회로 옥상달빛, 신영복교수, 재일영화감독 박영이가 와서 이야기를 하고 노래를 들려주고 있었다.
태어나서 대표 직함을 처음 가진 그는 조직이라는 말이 낯설다. 그가 원하는 조직은 열리고 느슨한 사람들이 만나서 하는 모임 같은 것이다. 모금만이 목표이면 명망 있는 몇 분의 어른을 내세우면 그만이다. 우리는 딴따라이니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을 하자고 모여 만들었기에 후배들도 모두 자원봉사를 해주고 있다.
지금 남과 북은 서로 소통하지 못한다. 이제는 통일을 원하지도 않는다. 점점 더 문화적으로 정서적으로 이질감만 늘어가고 있다. 권해효는 그런 우리의 가교 역할을 재일조선인들이 해줄 수 있다고 믿는다.
"그들은 이념을 내세우지 않아요. 전쟁이 끝나고 돌아오지 못해 그곳에 있는 거에요. 어디로 가야할지 모르게 우리가 분단이 되어버렸잖아요. 우리는 그들을 잊고 살았어요. 2008년 금강산에서 하는 남북교류청년모임을 따라갔어요. 며칠 같이 지내고 헤어지는데 남측 학생들도 북측학생들도 서로 서운한 기색 없이 잘 헤어져요. 그런데 한쪽에 있는 재일 조선학생들이 발을 구르며 우는 거에요. 사방을 둘러봐도 다 조선 언니, 오빠이고 말이 다 통하는 곳은 여기밖에 없는데 돌아가야 한다는 게 너무 서글펐던 거지요."
그는 무관심에 대하여 반성한다.
"제가 잘하는 건 없는데 뭐든지 오래해요."
운동의 최대 미덕은 지속성이다. 지속을 하려면 자기 긍정의 힘이 있어야 한다. 지치지 않기 위하여 재미있게 자기 안의 기운을 낸다.
오랜 시간 힘없고 약한 사람들 사이에서 지내온 그에게 이 사회에서 시민의 힘을 믿느냐고 물었다. 참 바보 같기도 하고 아프기도 한 질문이다.
"어떨 때는 하나도 안 믿어질 때도 있어요. 사람들이 착하기는 한 걸까? 회의가 많이 들 때도 있고. 이념 이런 거 다 필요 없고 행동으로 평가하고 말하는 게 맞는 거 같아요."
내 이름은 칸이라는 영화가 있다. 거기서 주인공의 엄마가 말한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 착한 행동을 하는 착한 사람과 나쁜 행동을 하는 나쁜 사람, 하는 행동이 다를 뿐 다른 차이는 없어-
"저는 세상에서 제일 싫은 게 강한 사람한테는 약하고 약한 사람한테는 강한 사람이에요."
한없이 사람 좋은 얼굴을 한 그가 손사래를 친다.
늘 자기 목소리를 가지고 사는 권해효이기에 진보적인 일이 우선 일거라는 나의 예측과 달리 그는 배우로서 자기 일에도 충실 한다.
"저는 배우에요. 물론 배우로 사는 제 삶에 대해서 회의가 없는 건 아니에요. 정말 배우가 내게 맞는 걸까? 내가 그만큼의 열정이 있는 걸까? 누구는 모든 것을 다 때려치우고 배우를 하기 위해 치열하게 매달렸다고 하는데 나는 너무 쉽게 배우가 된 것은 아닐까? 스스로 묻지요.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전 배우라는 직업을 과시하지는 않았어요. 배우라는 건 사람들에게 무언가를 말 할 수 있는 좋은 자리입니다. 저는 제 일에도 충실하려고 해요. 촬영이 있고 집회가 있으면 촬영하러 갑니다. 그건 제가 배우로서 굳건히 있을 때 더 사람들에게 세상의 문제를 알릴 수 있기 때문이에요."
한번 연기로 재활용이 가능한 영화보다 생생한 현장음과 긴 대사를 외우는 연극을 더 좋아하는 그는 <사천의 착한여자>로 대학 3학년 때부터 무대에 올랐다. 그리고 브라운관에서도 조연이지만 요즘 애들 말로 미친 존재감을 드러내며 연기를 해왔다.
학교를 다니는 동안 하루 네 시간을 자 본적이 없을 만큼 연극에 빠져 있던 그는 하루에 드라마 세 편을 찍는 강행군을 하면서도 현장에 나가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지어준 이름 권해효(權海虓), 바다의 아홉 표범처럼 포효하는 그의 삶이 또한 이름만큼 흔하지 않지만 그는 오늘 하루도 세상에 나온 자신의 이유를 알고 그 역할에 충실하며 살아가고 있다.
자신의 역할이 필요 없는 세상이 왔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배우 권해효, 그 누구도 크레인에 올라갈 필요 없고 그 누구도 자기 마을에 해군 기지를 만들 필요가 없는 나라에서 사는 게 소원이라는 그의 말처럼 세상은 다소 불합리하지만 그와 같은 배우가 있어 우리는 세상에서 희망을 읽는다.
글 사진 신희지
객원사진기자 임서진
차와문화 2011년 9-11월호
* 내일은 권해효 형이 진주에 온다. 정태춘 박은옥 언니네도 온다.
몽당연필 공연이 있다.
내가 급 좋아하겐 된 바로 위 사진의 옥상달빛은 아쉽게 오지 못한다.
그녀들의 노래로 지난 여름, 위로를 많이 받았다.
음악방을 만들어 달라는 요청이 있는데 만들어 드리면
옥상 달빛의 노래가 많이 흘렀나왔으면 좋겠다.^^
내일 진주에 오시라...
정태춘 형님이 박남준 시인의 시를 인용해 지은 '섬진강 박시인', 그리고 이원규시인을 생각하며 지었다는 '강이 그리워'를 들을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재일조선인 학교의 학생들은 남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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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공연이 내일이였네요..
서울공연 가보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좋은 댓글 많이 달면 왕관쓴다는 말에 이렇게 달고 있는 것 아닙니다. ㅋ
그러신거 같은데요..ㅎㅎㅎㅎ
무척 힘든 때였을 것 같은데
희지 쌤 밝은 모습 보니
마음이 조금은 놓여요.
쌤 뵙지 못하고 와서 아쉬웠지만 강남 지나는 길에 잠시 사진 속의 쌤 모습 생각하며 왔어요.
뵌 적은 없지만 마치 늘 뵈어왔던 것처럼...
언제 지리산 한번 다녀가셔야지요...
오늘은 화개천변 팬션을 한 곳 가봤는데 테라스가 너무 좋았어요.
진주에서 의미있는 공연이 있군요......멀어서 전 못 가지만
근처 계신 분들 많이들 가셔서 함께 해주시면 좋겠네요
서울에서 해요. 매월... 세번제 수요일 동국대 앞 웹콤시어터 극장에서...
좋은 정보 감사하고 밝은 모습 예쁩니다.
항상 바쁘신것을 보면 한편으로는 부럽습니다. 건강하시고 내일공연잘되시길 바라겠습니다.
활짝 미소짓는 두 사람 너무나 아름다워요 그 웃음 속에 우리가 기대하는 희망이 보여요
희망이 ...모르는 척 하며 살아도 어느 곳 에서는 희망의 싹이 뾰옥~솟고 있었군요. 작은 희망들에게 응원을 보냅니다.
진주 공연은 몸 따로 마음 따로이니...ㅠㅠ 좋은 시간들 되시길 바랍니다.
서울은 잘 다녀오셨는지요

걱정하던 후배의 안부가 궁금한 아침입니다

권해효님의 웃음도 희지쌤의 웃음도..참 거짓없이 밝네요..
저런 웃음을 지을수 있는것도 어렵잖아요..ㅎㅎㅎ
저도 기회가 되면 몽땅연필 공연을 함 봐야겠어요..ㅎㅎ 내일은 그렇고..ㅎㅎ
즐거운 글 잘 보앗어요 !!
고RPM 이 만난 사람들 .. 이렇게 .... 방을 별도로 분리 했으면 합니다 ㅋㅋ
( 자유게시판에 섞이지 말구요 ... 별도방 으로요 )
고려하겠사와여~ ㅎㅎ 한번 올리고 말라하다 잡혔당!
잡지사에 지금 4년째 취재중이니 그전 자료도 좀 있음... 문화예술계에서 한명씩 컨텍, 자기 목소리 내는 사람들이 주인공... 어쩌다 보니 알만한 사람 이야기... 새로 개편하는 내년 잡지와 인터넷 연재는 주변 사람들 이야기로...
신희지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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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해효씨가 진지한 사람이라는 건 알겠지만 그의 생각와 행동에 전적으로 공감하는 것은 아니어서.....
권해효님 멋있어요
권해효님에 대해서 많이 알고 갑니다. 몽당연필 공연 정보 감사합니다.
신희지님, 카페지기님, 이제야 제 맘이 좋으네요.
시간이 지나면 이리되는 겁니다.
좋은 글 많이 부탁합니다.
웃는 모습이 보기 좋네요
늘 그렇듯 의식이 있는 예술가는 아름답습니다. ^^
역시 사람은 웃는 모습이 아름답습니다....
해효 오빠 저도 존경한답니다. 연기도 따뜻하시고, 개성도 있으시고...희지님 왕 부러워요^^
명문입니다
수고하셨어요
제 습작 봐주신단 말쌈 잊지 않으셨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