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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2022060911030189476
미군의 폭격에 피난민의 흰옷이 분수처럼 솟구쳤다
[살아남은 기억들] (3) 노근리, 70년의 역사전쟁
강변구 작가 / <그 섬이 들려준 평화 이야기> 저자
1950년 7월 26일. 충청북도 영동군 황간면 노근리 철길과 쌍굴에서 피난민들의 죽음이 시작됐다. 미군은 민간인에게 공중 폭격을 퍼붓고 기관총을 쏘았다.
한 소녀는 머리에 후폭풍을 맞아 안구가 튀어나왔다. 어린아이의 몸통에서 머리가 잘려 날아갔다. 3박 4일 60여 시간 동안 피난민들은 쌍굴에 갇혀 산발적인 기관총과 소총 사격을 받으며 조금씩 죽어갔다. 노근리 학살 사건이다.
22일, 7연대 2대대 포항 상륙
한국전쟁 개전 직후 1950년 6월 30일, 미국은 지상군 파병을 결정했다. 파견된 24사단은 7월 5일 오산에서부터 약 100킬로미터(㎞)에 달하는 공간을 후퇴하면서 버텼다. 7월 20일, 대전 방어선까지 무너지자 영동에 배치된 미 1사단 5·8연대가 경부국도축선 방어 임무를 맡았다. 22일이었다.
그날 저녁 1사단 7연대 2대대는 이제 막 포항에 상륙한 터였다. 일본을 출발해 폭풍우와 뱃멀미에 5일간 시달린 병사들이다. 아무런 전투 경험이 없는 햇병아리 신병들이 대부분이었다. 이들은 전투뿐만 아니라 한국에 대해서도 거의 아는 것이 없었다. 그저 몇 달 동안 후면 다시 일본으로 돌아가 점령군의 병사로서 편안한 생활을 누릴 수 있을 것이라 여겼다. 이들 중 누구도 자신들이 엄청난 민간인 학살극의 주역이 되리라 상상하지 못했다.
한편 같은 날, 1사단장 게이 소장은 "사단 작전 지역 내의 모든 한국인을 마을로부터 내보내고 (...) 그 후 발견되는 모든 한국인들은 첩자로 간주"한다는 방침을 세웠다.
23일, 주곡리 주민들에게 소개령
23일 정오. 미군과 한국경찰이 영동군 주곡리에 들어와 주민들을 소개(疏開)시켰다. 일하다 그늘에서 점심을 먹고 있는 농민들에게 주곡리에서 곧 전투가 벌어질 테니 즉시 마을을 떠나라고 했다. 주민들은 한창 벼가 자라고 있는 논을 버리고 떠날 수 없었다. 노인과 아이들 때문이라도 멀리 피난 갈 수 없었다. 그래서 2km 떨어진 산골마을 임계리로 피난했다. 그곳 마을과 뒷산에서 전쟁이 물러갈 때까지 기다릴 작정이었다.
다음 날, 미군은 영동읍에 있는 한국경찰까지 모두 철수시켰다. 미군은 전선 지역을 민간인 통제구역으로 설정하고, 거주민들은 모두 해당 지역을 떠나라는 명령을 내렸다.
24일, 1사단장의 발포 명령
24일 오전 10시 1사단장 게이 소장이 "주민들이 방어선을 넘지 않도록 한다. 방어선을 넘고자 하는 자 그 모두에게 발포하라. 여성과 어린이의 경우에는 신중을 기하라"는 명령을 최전방 부대에 보냈다. 예하 부대에게 전선을 넘으려는 자는 민간인 포함해서 모두 사살하라는 지시를 내린 것이다.
이날 7연대 2대대가 오후 2시경 황간역에 도착했다. 그들이 내리는 기차에 패퇴하는 24사단 병사들이 올라탔다. 한국 파병이 단순한 치안 활동쯤으로 알고 있던 병사들은 24사단 병사들의 몰골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2대대 H중대장 챈들러 대위는 중대원들에게 적군이 피난민으로 위장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병사들은 혼란스럽고 두려웠다. 그들의 머릿속에서는 민간인이 갑자기 돌변하여 총을 난사하는 장면 따위가 그려지고 있었다.
민간인을 '게릴라'로 인식하는 병사들과 방어선을 넘으려고 하는 모두에게 발포하라는 상부의 명령으로 이미 학살은 충분히 예견되었다. 그러나 여기에 사태를 더 악화시킨 것은 바로 무차별적인 소개령이었다.
전선에 다가오면 발포하겠다는 명령을 하달한 1사단은 동시에 전선에 인접한 주민들을 마을에서 떠나라고 했다. 주민들이 북한군 전선으로 들어가지 않는 이상 피난은 남쪽으로 향하게 되어 있었다. 전투상황에 따라 시시각각 변할 수밖에 없는 전선에 의해 피난민은 소개의 대상이 되기도 하고, 발포의 대상이 될 수도 있었다.
▲노근리 사건 현장 일자별 사건 상황도. ⓒ노근리국제평화공원
25일, 미군 후퇴와 2차 소개령
주곡리 주민들은 여전히 산골마을 임계리에 피난해 있었다. 일부는 더 깊은 산으로 들어가 옛 금광이었던 동굴에 숨었다. 낮에는 논에 나가 일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
25일이었다. 늦은 오후가 되자 마을에서 밥 짓는 연기가 피어올랐다. 그때 정찰기 한 대가 마을 위를 빙 돌고 지나갔다. 정찰기는 주민들이 헬멧을 쓴 조종사를 볼 수 있을 정도로 최대한 고도를 낮춰 날았고, 아이들은 비행기에 대고 손을 흔들었다.
그로부터 두 시간쯤 후 해거름에 트럭을 타고 무장한 미군 10여 명이 임계리에 들이닥쳤다. 이들은 주민들에게 남쪽으로 피난시켜 줄 테니 모두 짐을 싸서 나오라고 했다. 미군들은 주민들에게 총부리를 들이대고 군홧발로 집안을 마구 헤집으면서 피난을 안 가려는 사람들까지 다 찾아내 마을에서 몰아냈다.
피난민 500여 명이 임계리를 떠난 것은 밤 11시가 다 되어서였다. 주민들은 미군의 성화에 지어 놓은 저녁도 먹지 못한 채였다. 산길을 내려와 주곡리에 이르렀을 때 마을은 미군의 초토화 작전에 의해 불타고 있었다. 소달구지에다가 노인과 여성, 아이들이 포함된 행렬은 한없이 느렸다. 큰길로 나왔을 때 영동에서 후퇴하는 5·8연대 병력을 태운 차량이 남쪽으로 계속해서 지나갔다.
피난민 행렬은 약 2시간 반 동안 4.5km를 걸었다. 새벽 1시 30분경에 주곡리 옆 동네인 하가리에 도착했다. 갑자기 미군은 길 옆으로 흘러가는 하천변으로 행렬을 밀어 넣었다.
하천변 자갈밭에 올라앉은 피난민들에게 미군은 모두 엎드리라고 한 뒤 고개를 들면 총을 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시간이 얼마쯤 흘렀을 때 몇 발의 총성이 침묵을 깨뜨렸다. 소변을 보러 잠시 자리를 뜬 피난민 몇몇이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노근리학살의 첫 피해자가 발생한 순간이었다.
비슷한 시각에 하가리에서 동쪽 3km 남짓 떨어진 언덕에 7연대 2대대가 진지를 구축하고 있었다. 이들에게 사단본부로부터 즉각 후퇴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이들은 전선에 도착한 지 하루밖에 되지 않았다.
적 정규군의 모습을 한 번도 보지 못한 채 흰옷을 입은 '게릴라'에 대한 막연한 공포심만을 품고 있던 병사들은 그야말로 줄행랑을 치기 시작했다. 철모에다 탄띠, 총까지 버리고 달아나기도 했다. 병사들은 며칠 전까지만 해도 말쑥한 군복에 잘 닦은 군화를 신고 일본의 유흥가에서 맥주를 마시고 암시장에 담배를 팔던 잘나가는 점령군이었다. 이들은 애초에 전투를 위해 훈련받은 병력이 아니라, 점령지의 경비를 서기 위한 목적으로 선발된 10대의 나이 어린 병사들이었다.
어둠 속에서 공황상태에 빠진 병사들은 산비탈을 무작정 달려내려가며 눈에 보이는 모든 움직이는 물체에 총을 쏘아댔다. 그런 혼란 속에서 H중대장 챈들러 대위가 300명가량의 병력을 수습해 철로를 따라 인솔했다. 아침 8시경에 7연대는 노근리 쌍굴다리 양쪽에 진지를 구축했다.
▲70년 전 참상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노근리 쌍굴다리 ⓒ강변구
26일, 학살극의 막이 오르다
26일 아침, 하가리 자갈밭에서 밤을 샌 피난민들은 하나 둘 몸을 일으켰다. 미군은 사라지고 없었다.
행렬은 다시 남쪽으로 피난길을 재촉했다. 이날 미 8군사령부가 예하 부대에 "어느 때라도 피난민이 전선을 통과하는 것을 허용해서는 안 된다"는 명령이 하달되었다. "전선을 통과하려는 피난민들의 어떠한 움직임도 허용하지 말라"는 내용이 포함된 이 명령은 곧 전선에 접근하는 모든 피난민을 사살하라는 의미였다.
37~38도에 이르는 여름 한낮 더위 속에서 피난민들은 죽음의 전선으로 한 발씩 전진하고 있었다. 8군사령관은 극동사령관 맥아더에게 피난민 전선 통과 불허명령에 관해 보고했다. "남한 사람들이 교전지역에서 소개되었기 때문에 교전지역에 있는 모든 민간인은 적으로 간주되어야 하고 적절하게 행동을 취하라"는 것이었다. 마치 미군의 전선은 오로지 북상하기만 할 것으로 전제하고 있는 듯한 이 명령은 이미 소개된 민간인보다 전선이 더 빨리 남하할 경우 민간인이 갑자기 적으로 간주되는, 앞뒤가 맞지 않는 혼란스러운 방침이었다.
정오경 피난민 행렬이 서송원리에 다다랐을 때였다. 미군 차량 한 대가 길을 막더니 피난민들에게 도로에서 비켜 철길 쪽으로 올라서라고 했다. 영문을 몰랐지만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다.
철길을 따라 이동하던 행렬을 미군이 다시 막아섰다. 그러고 대열 앞 뒤에서부터 짐 검색을 시작했다. 미군이 대열 양쪽에서 삼엄한 경계를 하는 중에 짐 검색이 완료되었다. 짐 검색이 끝난 후에도 한동안 미군은 행렬의 이동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때 미군이 무전기로 어딘가와 통신을 했고 얼마 있다가 정찰기가 지나갔다.
피난민들 중 몇몇은 앉아서 졸거나 또 몇몇은 아이들에게 산에서 내려오는 개울물을 떠 오게 하여 미숫가루를 탔다. 피난민들은 어서 길을 재촉해 노근리 철길 위를 지나 황간역까지 가야 했다. 거기서 남쪽으로 가는 기차를 탈 수 있기를 바랐다.
▲주민들의 피난 당시 모습을 재현한 조형물. 노근리 국제평화공원에 위치해있다. ⓒ강변구
철길 위에 있던 피난민들에게 폭격과 기총소사를 한 기종은 흔히 '쌕쌕이'로 불린 F-80 기종의 미 공군기였다. 미군의 무전 요청에 따라 정찰기가 왔다 간 후 정확한 좌표를 정해 실시된 공중 공격 행위였다. 이 폭격에는 어떠한 오류도, 우연도 없었다. 공군은 육군의 지원 요청대로 피난민들을 기총소사한다는 방침을 세우고 있었다. 해군 조종사 역시 8명이 넘는 사람이 모여 있으면 공격했다.
폭탄이 터지는 일순간에 피난민들의 "흰옷이 분수처럼" 솟구쳤다. 한 소녀는 머리에 후폭풍을 맞아 안구가 튀어나왔다. 어린아이의 몸통에서 머리가 잘려 날아갔다. 엎드린 사람의 등 위에 떨어졌다. 철로 옆 비탈로 기어오르는 사람에게, 반대편 아카시아 숲으로 숨어드는 사람에게 미군들이 총격을 가했다. 산에서 내려오는 개울물이 철로 아래로 지나갈 수 있게 만든 배수구가 있었는데 그쪽으로 사람들이 총알을 피해 모여들었다. 미처 달아나지 못한 미군 병사 하나도 덩달아 몸을 숨겼다. 미군은 그 속에다가도 총격을 가했다.
입구 쪽에 있던 사람들이 죽나갔다. 철로 위의 공중 폭격과 지상 공격으로 피난민 가운데 100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 미군은 철로 아래 쌍굴다리로 남은 사람들을 몰아넣었다. 미리 그곳이 안전할 것 같아서 도망쳐 들어간 사람도 있었다. 미군은 철로 주변의 시신을 군홧발로 차면서 확인했고, 이동이 불가능한 부상자들을 사살했다.
7연대 2대대 병사들은 공중 폭격 이전부터 철길을 따라 내려오는 피난민들을 주시하고 있었다. H중대 중대장 챈들러 대위는 상부와 통신으로 상의한 뒤 쌍굴 입구를 향해 기관총을 설치하도록 한 후 발포명령을 내렸다.
그로부터 29일 오전까지 3박 4일 60여 시간 동안 피난민들은 쌍굴에 갇혀 산발적인 기관총과 소총 사격을 받으며 조금씩 죽어갔다. 쌍굴에서 달아나는 것은 물론이고 목이 말라 개울물을 마시려고 나오는 사람에게도 여지없이 총알이 날아왔다. 몸집이 작은 아이들은 시체 속을 파고들어 총알을 피했다. 젊은 남자들 가운데 몇몇은 웃통을 벗고 몸에 진흙을 발라 위장한 후 밤을 틈타 도망에 성공하기도 했다.
더운 열기 속에서 시체들이 부풀어 올랐다. 부상당한 사람들의 비명과 다른 모든 것을 압도하는 총격음이 굴속에서 무섭게 공명했다. 북한군이 29일 쌍굴에 왔을 때 그곳에 살아남은 사람은 채 20여 명에 불과했다.
▲민간인 학살이 이루어진 노근리에는 당시 총탄 자국이 그대로 남아있다. ⓒ강변구
▲벽에 선명히 총탄자국이 남아있다. 미군은 쌍굴 입구를 향해 기관총을 설치하도록 한 후 발포명령을 내렸다. ⓒ강변구
노근리학살이 진행되는 동안 미군들은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굴 밖에서는 영동 전투와 황간 전투가 있었고, 여기서 밀린 미군이 새로운 지휘본부를 구축하고 있었다. 노근리학살의 3박 4일은 미군이 새 진지를 구축하고 후퇴하기까지의 시간이었다.
전 세계에 알려진 노근리의 참상
노근리학살의 진상은 오랫동안 묻혀 있었다. 쌍굴 벽에는 처참할 정도로 총탄 자국이 선명하게 남았지만 경부선 기차는 어김없이 오르내렸고, 다시 여름이 오고 벼가 자랐다.
1960년에 미국정부가 한국전쟁 당시 미군에 피해를 입은 사람들에게 배상하기 위해 서울에 소청사무소를 개설했다. 주곡리 주민이자 두 아이를 잃은 유가족인 고 정은용 선생이 다른 유가족들과 함께 '노근리사건'애 대해 손해배상을 청구했다. "법정기한 경과 후 제출된 것이기 때문에 서울 소청 사무소에서 심의할 수 없다"는 회답이 왔다. 세월이 더 흘러야 했다.
1994년 정은용 선생이 당시 상황을 담은 실화소설 <그대, 우리의 아픔을 아는가>를 출간했다. 소설을 출간하기 위해 그의 아들(정구도 현 노근리국제평화공원 이사장)이 여러 출판사를 다니며 애를 썼다. 이때부터 정구도 이사장은 선친과 함께 노근리사건 진상규명에 평생을 헌신했다.
소설 속에 담긴 진실의 힘은 강했다. 노근리학살사건이 1999년 9월 29일 미국 AP통신 특종 보도로 이어졌다. 이어서 세계의 언론이 노근리사건을 통해 미군이 한국전쟁 당시 저지른 전쟁범죄를 폭로했다.
미군 정부는 진상조사를 약속했다. 2001년 1월 진상조사 결과 발표와 함께 클린턴 대통령이 노근리에서 민간인에 대한 학살이 있었다는 것을 인정하고 "깊은 유감(deeply regret)"을 표명했다. 한국전쟁 시기에 발생한 민간인 피해에 대해 미국 정부가 유감을 표명한 것은 매우 이례적이었다.
하지만 책임을 인정하고 배상을 약속하는 '사과(apology)'에 이르지는 못했다. 보고서의 핵심적인 내용도 진실과는 거리가 멀었다.
진상조사보고서에 담긴 미국 측의 논리는 이러했다. (1)노근리에서 미국에 의한 피난민 살상 사건은 인정할 수밖에 없다. (2)그러나 미국의 공식 명령지휘체계의 개입 없이 일어난 우발적인 사건이다. (3)불가피한 상황에서 발생한 우발적인 사건인 이상 참전 미군용사들에게 책임을 지워서도 안 된다.
정구도 이사장은 조사 결과를 분석하는 논문에서 "게이 사령관의 무차별적인 소개방침은 대전으로부터 밀려드는 피난민에 더하여 영동군 일대의 양민까지 강제로 소개시킴으로써 피난민의 숫자를 더욱더 늘려버렸다. 이처럼 피난민을 만들어 내고도 그들을 사지로 몰아넣고 직접 살육행위를 한 것은 바로 미군이다"라고 반박했다.
▲노근리국제평화공원에 위치한 기념탑 ⓒ강변구
이제 한국정부의 책임을 물을 때
미국 대통령의 유감 발표 직후에 노근리사건피해자대책위원회 정은용 위원장이 <한·미 공동 발표문에 대한 반론서>를 양국 정부에 제출했다. 더불어 한국과 미국 양국에 노근리사건 진상 재조사 및 손해배상을 요구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노근리는 이로부터 20여 년 동안 평화와 인권을 향한 또 한 번의 새로운 길을 걸었다. 2004년 2월 9일 '노근리사건 희생자 심사 및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되었다. 노근리학살사건은 그동안 학술논문을 비롯해 소설, 동화, 영화로도 제작되어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 사건이자 전쟁기 민간인의 인권 보호에 관한 상징으로 자리매김했다. 정구도 노근리국제평화공원이사장은 노근리사건의 의미를 과거사 접근의 시작점이라 평가한다.
▲정구도 노근리국제평화공원 이사장. 정 이사장은 선친인 고 정은용 선생 함께 노근리사건 진상규명에 평생을 헌신했다. ⓒ강변구
정 이사장은 이제 한국정부의 책임을 말하고 있다. 1950년 7월 25일 미8군사령부가 피난민통제지침을 세울 때 한국정부 관계자도 함께 있었다. 아무리 국가의 힘이 없었고, 전시 상황이었다 해도 자국민의 생명을 지키지 못한 책임을 미국에게만 물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지난해 12월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 일부 개정안이 여야 합의로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이제 국가가 4.3피해자들에 대해 배·보상을 통해 책임을 질 법적 근거가 마련된 것이다.
하지만 정구도 이사장은 노근리사건을 비롯해 거창사건 등 오랫동안 국가의 책임이 방기되어 있던 사건들에 대해 아직도 국가가 책임 있는 자세를 보이지 않고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살아남은 진실의 얼굴들
정구도 이사장은 지난 2003년 진실규명 활동을 정리한 책 <노근리는 살아있다>를 펴냈다. 이 책은 지난해 같은 제목의 증보판으로 나왔다. 책의 부제가 "50년간 미국과 당당히 맞선 이야기"에서 "한국과 미국, 70년 역사전쟁의 생생한 기록"으로 바뀌었다. 책의 분량도 두 배가 넘는다.
노근리는 살아있다. 과연 어떻게 살아있을까?
노근리 희생자들이 미군의 낡은 전쟁 기록 속에서, 미군 병사의 악몽 속에서, 부모와 자식을 잃은 유가족의 그리움 속에서, 기억 속에서, 역사 속에서, 세계 어딘가에서 벌어지고 있는 또 하나의 전쟁 속에서 진실의 얼굴을 하고 살아있다.
▲정구도 노근리국제평화공원 이사장은 "노근리사건은 현대사에서 과거사 문제를 접근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물줄기를 만들어 낸 사건"이라고 말했다. ⓒ강변구
참고자료
<그대, 우리의 아픔을 아는가>(정은용, 1994)
<노근리 사건의 진상과 교훈>(정구도 편저, 2002)
<노근리는 살아있다>(정구도, 2003)
<노근리 다리>(찰스 헨리·최상훈·마사 멘도자, 2001)
노근리 평화기념관 도록(노근리국제평화재단)
노근리 국제평화공원 정구도 이사장 인터뷰(2022. 5. 11)
자기 아이를 죽이는 부모…죽은 엄마의 젖을 문 아이
[노근리, 60년 전 오늘]<3> 쌍굴에서의 악몽, 7월 26일 ②
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60996
☞ <1> "비극의 시작, 7월 25일" 바로가기
☞ <2> "잔인한 폭격, 7월 26일 ①" 바로가기
시체더미가 쌓인 철로 위로 미군 병사들이 나타나 돌아다녔다. 그들은 시신을 군홧발로 툭툭 차면서 생사를 확인했다. 그리곤 아직 살아 있는 사람들을 모아 쌍굴 쪽으로 몰고 갔다.
작은 배수구에서도 피난민들이 줄줄이 걸어 나왔다. 잘못도 없는데, 이들은 투항하듯 양팔을 크게 들고 울먹이며 미군의 지시를 따랐다. 걷는 길엔 형제의, 부모의, 이웃의 시신이 나뒹굴었다. 모두의 새하얗던 저고리는 새빨갛게 젖어 있었고 얼굴은 탄약 그을음과 땀으로 끈적였다.
미군 병사들은 반사 상태로 뒹굴 대는 부상자들에 마지막 일격을 가했다. 탕! 소리에 이어 숨이 넘어가는 소리가 멀리까지 들렸다. 자식에게 먼저 도망치라 손짓했던 늙은 어머니, 부모와 헤어져 울던 아이들이 살려달란 말 한마디도 못 하고 벌레처럼 죽어갔다.
열 살 난 해찬도 다리 부상에 걷지 못하는 엄마, 어린 동생, 눈알이 빠진 누나를 인솔하며 쌍굴까지 걸어갔다. 해찬은 가족들이 걸음이 느려 미군이 총을 쏘면 어쩌나 연신 불안했다. 불붙은 덤불과 짐 더미를 피하고 동강난 이웃들의 시체를 넘다보니 쌍굴에 이르렀다. 하지만 안도도 잠시, 그들은 쌍굴 앞에서 형언할 수 없는 충격에 빠졌다.
콘크리트 쌍굴은 내부 둥근 천장의 높이가 10.5미터, 각각의 폭이 7미터, 길이는 24.5미터정도였다. 쌍굴 안으로 냇물이 흘렀으나 동쪽 굴로 지나갔고, 서쪽 굴로는 아주 조금만 흘렀다. 서쪽 굴은 큰길에서 300미터 정도 떨어진 노근리로 가는 샛길로 쓰였다. 그래서 피난민들은 주로 서쪽 굴에 몰려 있었지만, 동쪽 굴에도 100여 명의 피난민들이 있었다.
해질 무렵, 동쪽 굴 안으로 미군 위생병 둘이 들어왔다. 그들은 간단한 상비약과 붕대로 부상자들을 치료해주기 시작했다. 겨우 정신을 차린 피난민들은 한국말로 "우리를 보내달라"며 울부짖기 시작했다. 그들 중 영어를 할 줄 아는 대학생이 한 명 있어, "우리는 공산주의자가 아니다. 왜 우리를 죽이는 거냐"고 물었다.
바짓가랑이를 붙들고 울먹이는 이들을 제치면서, 그들은 그 대답만을 남기고 떠났다. 모두 절망으로 얼굴을 쥔 채 흐느꼈다.
굴 안엔 시신과 산 사람, 살았지만 죽어가는 사람이 뒤엉켜 있었다. 부상자들은 갈증을 참지 못해 헉헉 거렸다. 더운 날씨 탓에 시체엔 순식간에 파리떼가 꼬였다. 이 악몽같은 시간 속에서도 누구 하나 속 시원하게 신음소리를 내지 못했다. 또 총알이 날아올까 봐 숨을 죽였던 것이다.
그리고 다시 총격이 시작됐다. 굴 반대쪽에서도 총알이 날아왔다. 좁은 곳에서 수백 명이 비명을 지르며 우왕좌왕했다. 미군들이 굴 양쪽 입구에서 멀리 떨어진 고지 위에서 굴 입구를 조준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사람이 밖으로 나가기만 하면 총알이 쏟아졌고, 쌍굴 속 피난민들은 독안에 든 쥐처럼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더위를 먹었는지, 자포자기한 건지, 또 한 남자가 쌍굴 밖으로 나가겠다며 일어났다. 그는 쌍굴 그늘도 넘기 전에 총탄에 맞아 죽었다. 총격이 계속되면서, 사람들은 점점 움직이지 않게 되었다. 비통한 흐느낌만이 정적을 감돌았다.
이번엔 또 포탄 공격이었다. 생각이나 판단, 그런 것을 할 여유 따윈 없었다. 폭 7미터에 길이 24.5미터짜리 지옥에서 사람들은 살겠다고 안쪽 벽에 달라붙었다. 급기야 어떤 이들은 시신 두세 구를 방패삼아 쌓고 그 안으로 숨었다. 어떤 사람은 철길 위에 팽개쳐진 짐 꾸러미에서 먹을 것을 가져오겠다고 둑 위를 기어오르다 총에 맞아 굴러 떨어져 그대로 죽었다.
미군의 공격은 10~20분 간격으로 계속됐다. 총격이 멈춘 순간에도 쌍굴 속은 먹을 것도 바람 한 점도, 희망도 빛도 아무 것도 없는 지옥임에는 변함없었다. 그렇게 해가 져갔다.
사람들은 물을 떠다 놓고, 무릎을 꿇고, 성경 구절을 되뇌며 각자 신을 찾기 시작했지만 이미 마음은 절망과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
시간은 에누리 없이 흘렀고, 절망에 지친 사람들은 졸기 시작했다. 그런데 갑자기 기관총이 또 불을 뿜더니 쇳소리를 내며 콘크리트벽에 무수한 불똥이 튀었다. 바람을 쐬기 위해 입구께로 나갔던 사람과 안쪽에 있던 사람들이 또 총탄에 죽어 갔다.
피비린내가 무더운 바람에 실려 굴 입구로 들어오고, 굴 안은 전율과 비통으로 물들어 가고 있었다. 그 속에서 어떤 여인이 고통스럽게 신음했다. 악다문 이에서 끙끙 새어나오던 신음이 결국 듣는 사람마저 아프게 하는 끔찍한 것으로 변해갔다. 그녀는 산모였던 것이다.
바로 옆, 서쪽 굴에서도 끔찍한 살상극이 벌어졌다. 이 굴엔 시내가 흐르고 있었는데, 모두 시뻘겋게 물들어 있었다. 한 청년이 시체를 안아다가 벽 밑에 바리케이드를 쌓더니 이내 다른 청년들도 거들었다. 그러나 이 시체 방벽도 총알 앞에 속수무책이었다.
상황을 모르는 젖먹이들은 있는 힘을 다해 울어댔다. 다 같이 죽음 앞에 놓인 사람들 마음은 똑같았다. 울음소리에 다시 총격이 날아올까 봐 젖먹이의 입이라도 막으라며 윽박지르고 애원했다. 부모들은 끔찍한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너는 남자니께, 어떻게든 탈출해야 헌다…. 여기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사람들에게 알려야 혀! 꼭…"
밤이 깊어지자, 여자들은 자기 남편이나 아들에게 이런 말을 하기 시작했다. 치마 입고 애 업고 뛰지도 못할 바에야 당신들이나 빨리 도망쳐 세상에 이런 일이 있었다고 꼭 전해 달라고, 부디 대를 이어달라고. 잠시 후 여인들의 울먹이는 소리가 굴 안을 메웠다.
자정을 넘어설 무렵, 옷을 벗고 몸에 진흙을 바른 남자들이 탈출하기 시작했다. 남자들은 서너 명씩 짝을 지어 살금살금 굴을 빠져 나갔다. 쌍굴에 두고 온 가족들 생각에 몇 번이나 뒤를 돌아보고 싶었지만 이를 악물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남자들이 빠져나가자 굴 안엔 더 심한 공포와 외로움이 엄습해 왔다. 가만히 죽음을 기다리긴 싫다며 움직였던 이들에겐 총알이 날아왔다. 죽음, 또 죽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는지 헤아릴 수조차 없었다. 7월 26일이 끝났다. 하지만 비극은 이제 막 시작됐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