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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년 가해 4월25일 화요일 [(홍) 성 마르코 복음사가 축일]
[수도회] 세상 한 가운데서 모든 이와 함께 나누는 기쁨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 제1독서 1베드 5,5ㄴ-14
† 복음 마르 16,15-20
◈ 오늘의 묵상
마르코 복음사가는 베드로 사도와 동행하여 로마에 갔으며 사도의
가르침을 충실하게 기록하였습니다. 그는 로마인에게 곧 이방인 출신의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님의 신비를 선포하고자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을 가장 소박하고 진실하게 전하고자
애썼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소아시아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마르코
복음사가를 ‘나의 아들’이라고 부르면서 그에 대한 신뢰와 애정을
표현합니다.
마르코는 네 복음서 가운데 가장 먼저 ‘복음서’를 기록하여 베드로
사도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마르코의 유다 이름은
요한입니다(사도 12,12 참조). 초대 교회의 전승에 따르면 마르코는
베드로의 통역관으로 일하였습니다. 그는 알렉산드리아의 초대
주교이며 이집트와 베네치아의 수호성인입니다.
마르코 복음사가는 자신의 복음서 마지막 부분에 부활하신 예수님의
마지막 당부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그는 이 말씀대로 제자들이 온 세상에
가서 복음을 전한 사실도 밝히고 있습니다. 마르코는 주님께서 사도들과
함께 일하시며 여러 가지 표징 곧 기적을 보여 주셨다고 알려 줍니다.
복음 선포는 반드시 놀라운 열매를 맺습니다. 하느님의 전능하신 능력은
믿는 사람들을 통하여 지속됩니다. 우리는 미사에 참여하고 파견될
때마다 “가서 복음을 전합시다.” 하고 다짐합니다. 우리는 주님 부활의
증인으로 가족과 이웃에게 파견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마르코
복음사가처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부활의 기쁨을 전해야 하겠습니다.
(류한영 베드로 신부)
- 매일 미사 -
◈ [인천] 스스로 주님을 알려고 노력을
2017년 가해 4월25일 화요일 성 마르코 복음사가 축일
제1독서
<나의 아들 마르코가 여러분에게 인사합니다.>
○ 베드로 1서의 말씀입니다. 5,5ㄴ-14
복음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6,15-20
어떤 분께서 제게 물으십니다.
“신부님, 제 손주가 사제되는 것이 저의 바람입니다. 그래서 손주에게
신학교가라고 했더니만, 예수님을 만나야 신학교에 들어가겠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좋죠?”
그래서 저는 곧바로 이렇게 말씀드렸습니다.
“먼저 신학교에 들어가라고 하세요. 그러면 예수님을 만날 수
있다고....”
정말로 신학교에 들어가면 예수님을 만날 수 있을까요? 분명히 만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따라서
신학교에 들어가서 성서를 배우고 신학과 철학을 배워가면서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만나고 싶다면 먼저 신학교에
들어가야 하는 것이지요.
어떤 분들은 주님이 계시다는 체험을 한 뒤에 신앙생활을 하겠다고
하십니다. 그런 일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아무것도 모르는데 어떻게
자기 곁에 계신 주님을 알아볼 수 있겠습니까?
처음 군대에 가서 신병교육대에서 있었던 일이 생각납니다. 주일
아침이 되면 각자의 종교에 맞게 종교 활동을 떠납니다. 그런데 이상한
점 하나가 있었습니다. 분명히 전 주에는 가톨릭 종교행사에 참석하는
사병이 그리 많지 않았는데, 한 주가 지난 이번 주에는 그 숫자가 두
배로 늘은 것입니다. 왜 늘었을까요? 가톨릭에 대한 특별한 관심과
신심이 갑자기 생겨서일까요?
바로 미사 끝난 후에 주는 도넛과 커피 때문이었습니다. 다른 종파는
당시에 초코파이와 음료수를 주었는데, 다른 곳과 달리 가톨릭에서는
도넛과 커피를 준 것입니다. 이 소문을 듣고서 종교를 가지고 있지
않았던 사병들이 모두 가톨릭 종교행사에 참석한 것입니다.
물론 이들 대부분은 신병교육대를 떠나서 가톨릭 신앙생활을 더 이상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몇몇은 계속해서 미사에 나왔고, 세례를 받은
뒤에 열심히 신상생활을 하는 사람도 많았습니다. 도넛과 커피가 몇
명을 신앙인으로 만든 것입니다. 이처럼 어떤 이유이든 우선 성당에
나갔기 때문에 신앙인이 될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오늘 예수님께서는 “믿고 세례를 받는 이는 구원을 받고 믿지 않는
자는 단죄를 받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믿음만으로
갖가지 표징이 따를 것이라고 하지요. 그렇다면 이 믿음은 어떻게
생겨날까요? 어느 날 갑자기 저절로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우선은
스스로 주님을 알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즉, 성당에 먼저 가야하고,
기도와 성경 읽기 등을 통해서 주님을 알아갈 때에 굳건한 믿음도 얻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주님을 뜨겁게 체험해보고 싶다고 하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저절로 믿음이 생기지 않음을 기억하면서, 지금
해야 할 주님의 일들을 적극적으로 따르려는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당신이 그것을 꿈꿀 수 있다면, 당신은 그것을 할 수 있다(월트 디즈니).
성 마르코 복음사가입니다.
칭찬을 많이 하는 오늘이 되십시오.
어떤 자매님께서 집안일에 무심한 남편에 대해서 큰 불만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남편이 “당신 힘드니까, 오늘 설거지는 내가 할게.”
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까? 기분이 너무 좋았습니다. 집안일에
무심했던 남편이 전에 하지 않았던 행동을 하니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하지만 곧바로 화가 났습니다. 글쎄 남편의 설거지는
엉망진창이었거든요. 기름기도 그대로 있고, 고춧가루도 붙어 있는
그릇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에구, 이걸 설거지라고 했어? 내가 다시
해야겠네.”라고 말했습니다.
그 뒤로 어떻게 되었을까요? 남편은 계속해서 설거지를 했을까요?
아닙니다. 남편은 그 뒤로 절대로 설거지를 하지 않는 더욱 더 무심한
남편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아내의 불평불만도 계속 그대로
유지될 수밖에 없었지요.
부족한 설거지이지만 “도와줘서 고마워.”, “당신은 이것도 잘하네.”,
“약간 미숙한 점도 있지만, 다음번에는 더 잘할 것 같은데?”라고
칭찬하고 격려했다면 어떠했을까요?
가장 가까운 부부 사이에서 가장 부족한 것이 칭찬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서로에게 가장 목말라 하는 것이 ‘칭찬’이라고 하네요. 이러한
칭찬이 가득할 때, 남의 편이 아니라 진정한 내 편이 되지 않을까요?
이 칭찬을 아낌없이 행할 수 있는 오늘이 되십시오.
동창신부들과 그 부모님들.
- 인천교구 갑곶 성지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수도회] 세상 한 가운데서 모든 이와 함께 나누는 기쁨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2017년 가해 4월25일 화요일 성 마르코 복음사가 축일마르 16,15-20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마르 16,15)
세상 한 가운데서 모든 이와 함께 나누는 기쁨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기까지, 자신 전부를 바쳐 사회적
약자들과 함께 하시고 죄인들을 용서하시며, 병을 고쳐주심으로써
하느님 나라의 기쁨을 알려주셨습니다. 이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시기 전에,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16,15) 하고 명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말씀과 행적으로 선포하셨던 복음을, 나의 삶의 자리에서
살아내는 것이 바로 부활의 삶이요 우리의 소명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하고 살아내려면, 자신을 비우고 낮춰야 합니다. 하느님
앞에 철저히 가난해지고 겸손해질 때, 하느님께서 나를 도구삼아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선포하려면 자신을 비우고, 그 빈자리에 하느님의 선(善)과
자비와 정의를 채워야만 합니다. 내 안에 기쁨과 사랑이 없는데, 복음을
전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선포한다는 것은 기쁨이요 평화
자체이신 하느님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모두가 하느님의 자비 안에
머물도록 하는 것입니다.
부활을 산다는 것은, 세상과 무관하게 자신만의 신비스런 기쁨 안에
머무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을 품고 세상 깊숙이 들어가,
하느님의 의미와 진리와 기쁨을 선포하는 삶이 부활의 삶입니다.
어둠과 절망의 상황에서도, 예수님과 함께 자신과 세상의 십자가를
품고, 주님께서 주시는 빛과 희망이 있음을 믿고 증거하는 것이 부활을
사는 우리의 몫입니다.
부활을 산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주신 그 사랑을 실행하는
것입니다. 고통 중에 있는 이들에게 다가가 함께함으로써, 하느님이
살아계심을 절절히 체험하며, 그 사랑으로 고통을 견디어내는 삶이
부활의 삶입니다. 부당한 탄압과 차별을 당하는 경우에도, 하느님의
정의는 승리하고야 만다는 믿음을 잃지 않는 삶이 부활의 삶입니다.
우리는 그런 부활의 기쁨을 선포하도록 불린 사람들입니다.
그런 부활의 기쁨은 온 세상 모든 피조물과 나누어져야 합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 온갖 피조물은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존엄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존재하는 모든 것이 하느님을
반영하고 있음을 깨닫게 되면, 모든 피조물에 대하여 주님께 찬미를
드리고, 피조물과 함께 주님을 흠숭하려는 마음을 품게 될 것입니다.”
(프란치스코 교종, 찬미받으소서, 87)
우리 모두 하느님의 선과 자비와 정의를 품고, 모든 피조물과
나눔으로써 주님께 찬미 드려야겠습니다. 복음의 기쁨을 선물로 받은
사람답게 악한 생각과 경솔한 판단, 거짓되고 남을 헐뜯는 말, 하느님을
슬프게 하는 행동을 멈춰야겠지요. 세속적이고 육적인 삶을
합리화하거나 묵인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도 자신을 비우고 낮추어 사랑이신 주님을 품어, 온 세상에 기쁨과
희망과 정의이신 주님을 드러내는 복음선포자가 되도록
힘써야겠습니다. 말과 생각으로 포장한 복음선포가 아니라, 세상의
불의와 거짓, 차별과 불평등, 구조적인 악의 한복판으로 들어가, 주님이
살아계심을 선포하는, 행동하는 부활의 증인이 되었으면 합니다.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 형제회 프란치스코회)
강론채널 주소 : story.kakao.com/ch/francesco -
◈ [수원] 성 마르코 복음사가 축일 / 조욱현 토마스 신부|
오늘의 강론 묵상
2017년 가해 4월25일 화요일 성 마르코 복음사가 축일
오늘은 성 마르코 복음사가 축일이다. 마르코 복음서를 저술한
마르코(+ 74년경)는 바르나바의 사촌이며, 키프로스 태생의
레위인이다. 마르코는 바오로와 바르나바를 수행하여 제1차
전교여행을 함께 하였지만, 밤필리아에서 바오로를 떠나 예루살렘으로
돌아온다. 마르코는 사도 베드로가 “내가 아들로 여기는 마르코”라고
할 정도로 베드로의 사랑 받는 제자였다.
마르코는 60-70년에 복음서를 집필하였고, 그것은 주로 베드로의
가르침을 기초로 하여 쓰여졌다. 지금은 베니스의 수호자이며,
베니스의 마르코 대성당에 유해가 안장되어있다고 한다. 마르코
복음사가를 표시할 때 사자로 표현하는 것은 복음의 시작이 광야에서
외치는 요한이 나타나는데 그 소리가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가 사자후
같다고 하여 사자로 표시하고 있다.
복음: 마르 16,15-20: 모든 사람에게 이 복음을 선포하여라.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15절)
사도들은 예루살렘에서 세상으로 나아갔다. 그들은 무지렁이였고
말재주도 없었다. 그러나 하느님의 말씀을 만민에게 가르치도록
그리스도께서 자기들을 파견하셨다는 것을 하느님의 권능으로 온
인류에게 증언하였다. 사도들이 이렇게 파견된 것은 하느님의
뜻이었으며 세상의 모든 이들이 자기의 창조주를 알아 뵙게 하려는
것이었다. 이 복음 선포는 모든 나라와 도시에 있는 모든 인류를 위한
것이다. 그분의 섭리는 온 우주를 통틀어 펼쳐지고 있다. “너희는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사마리아, 그리고 땅 끝에 이르기까지 나의
증인이 될 것이다.”(사도 1,8)
“믿고 세례를 받는 이는 구원을 받고 믿지 않는 자는 단죄를 받을
것이다.”(16절) 신앙은 신경을 통하여 교육된다. 신경은 최대한 요약된
형태로 외우도록 되어 있다. 이것은 믿어야 할 바를 간략하게 규정해
놓은 것이다. 우리 신자들은 그에 대한 설명을 들음으로써 성숙해지고,
겸손과 사랑의 튼튼한 토대 위에서 이해해 나갈 것이다. 그리고
우리에게 베푸신 은총에 합당하게 감사드려야 한다.
“믿는 이들에게는 이러한 표징이 따를 것이다. 곧 내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고 새로운 언어들을 말하며, 손으로 뱀을 집어 들고 독을 마셔도
아무런 해도 입지 않으며, 또 병자들에게 손을 얹으면 병이 나을
것이다.”(17-18절) 당시 사도들을 통하여 행했던 일이 오늘에도 영적인
형태로 날마다 이루어지고 있다. 사제들은 구마은총으로 안수함으로써
악령이 머물지 못하게 하는데 이것이 바로 마귀를 쫓아내는 것이다.
그리고 신앙인은 자신의 삶으로 온 힘을 다하여 창조주의 영광과
권능을 선포하는데 이것이 새로운 언어를 말하는 것이다.
훌륭한 권고로 다른 사람 안에 있는 악의 불을 끈다면, 그것은 뱀을
없애는 일이며, 악하게 유혹하는 말을 듣고도 악에 끌려 다니지
않는다면, 독을 마시고도 해를 입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표징은
영적이고 우리를 생명으로 이끌어 주기에 더욱 큰 것이다. 이러한
은사들은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도록 사도들이 먼저 받았고,
그 다음에게는 믿는 이들에게 주어졌다. 이 은사들은 그것을 행하는
이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믿지 않는 이들에게 확신을 주기 위한 것이다.
이러한 표징으로 그들이 믿음을 가지게 될 것이라는 말씀이다.
“주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다음 승천하시어 하느님
오른쪽에 앉으셨다.”(19절) 부활절에는 주님의 부활이 우리 기쁨의
이유였지만, 이제는 그분의 승천 때문에 기뻐한다. 보잘것없는 우리
인성이 그리스도 안에서 높이 현양되었기 때문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이러한 복을 누릴 수 있도록 부활하신 후 당신
제자들이 바라보는 가운데 승천하셨다. 하느님께서 정해 놓으신 때가
완성되기까지 아버지 오른편에 계시기 위해 육체적 현존을 끝내셨다.
여기서 오른쪽은 장소적 개념이 아니다. 오른쪽이라는 것은 복됨의
의미이다. 인간의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이 복됨 속에는 오른쪽만
존재한다. 이제는 하느님의 오른편에 계시며 우리와 함께 계시는 참된
“임마누엘”이 되신다.
이제 제자들은 복음을 선포하기 위하여 떠났다. 그들은 복음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었다. 그들이 주님의 이름으로 행한 기적들도
그분의 가르침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결국 기적을 행하시는 분도 예수
그리스도이셨다. 그러므로 우리들도 복음을 전한다고 한다면, 내가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드러나는 복음 선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오늘 마르코 복음사가 축일을 지내면서 우리 자신이
복음을 전하는 참된 도구가 되어 내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더욱
확실히 드러나는 삶이 되어 복음을 전하는 우리가 되도록 기도하자.
- 수원 교구 상하 성모세 성당 조욱현 토마스 신부 -
◈ [청주] 주님의 방식을 선택하라 |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7년 가해 4월25일 성 마르코 복음 사가 축일(마르코 16,15-20)
주님의 방식을 선택하라.
얼굴을 보면 기쁨도 슬픔도 엿볼 수 있습니다. 아무리 밝은 모습을
보여주려고 해도 근심 걱정이 있으면 그늘진 모습을 감추지 못합니다.
그러나 시련과 고통 속에서도 평온을 잃지 않는 분도 있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육체적 정신적 아픔이 너무 크게 보이는데도 얼굴은 환한
미소를 담고 있는 분이 계셔서 ‘아주 편안해 보이십니다’하고 인사
드렸습니다. 그랬더니 그분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기쁨도 고통도 다
뜻이 있어 주시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느님께서 주신 생명을
하느님께 맡겨야지요. 나를 사랑하시는 분께 맡기고 나니까 그렇게
편할 수가 없어요!”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하셨습니다. 복음은 기쁜 소식이고 그것은 “주님을 믿는
사람은 구원을 받는다”는 소식입니다. 잘못과 죄, 허물에도 불구하고
자비로 용서해 주시고 생명을 주신다는 것이 기쁜 소식입니다. 그러나
이 소식을 그저 입으로 전하는 것으로는 부족합니다. 먼저 내 자신이
믿고, 믿는 바를 생활로써 드러내야 하는 것입니다. 시련과 고통
가운데에서도 나와 함께하시는 주님께 대한 믿음으로 평온을 잃지 않는
모습이야 말로 복음의 선포입니다. 사실 바오로 사도는 “기회가 좋든지
나쁘든지”(2티모4,2) 말씀을 선포하라고 권고합니다. 그리고 ‘인간의
말재주로 복음을 전한다면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그 뜻을 잃고 맙니다’
(1고린1,17).
우리는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결정적인 순간이 오면 흔들리는
모습을 보입니다. 하느님이 날 사랑하시는 데 왜 이런 고통과 아픔을
주느냐고 소리칩니다. 그러나 그때야 말로 십자가의 주님을 만날 수
있는 기회요, 간절히 기도할 때입니다. 그러므로 “걱정일랑 하느님께
떠맡기십시오. 당신은 그분의 것이고 그분은 당신을 잊지 않으십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 예수님께서도 “내가 세상 끝 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28,20). 고 약속 하셨습니다.
따라서 어떤 처지에서든지 내 자신이 복음이 되어 주님을
전해야겠습니다. 내가 복된 기쁨을 담고 있어야 그 기쁨을 전할 수 있는
만큼 먼저 큰 믿음의 소유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아울러 복음의
선포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주님께서는 나를
기대합니다. 그리고 우리는“나에게 능력을 주시는 분에게 힘입어 나는
무슨 일이든지 할 수 있습니다”(필리4,13). 주님께서 주신 사명을
충실히 수행함으로써 신앙이 더욱 확고해 지길 희망합니다.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세상의 방식이 아니라 예수님의 방식이 진정한 행복을
가져다줌을 사람들이 받아들이도록 가르치고 설득하라는 의미도 담겨
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오늘은 선교의 때이며 용기를
내야 할 때입니다. 비틀거리는 걸음도 다시 힘을 내는 용기이며, 복음에
타오를 열정을 다시 가지는 것이며, 그분과 함께하는 선교의 열정에
대한 신뢰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용기를 가져야 합니다. 용기를
가진다는 것은 언제나 성공이 보장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겨내기
위해서가 아니더라도 싸움을 계속할 수 있는 용기를 청하는 것입니다.
회심하지 않더라도 지속적인 선포를 해야 합니다." 먼저 주님의
가르침을 살고 기뻐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사랑합니다.
- 청주 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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